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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順興安氏)
본관명 순흥(順興)
성씨명 안씨(安氏)
본관소재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
시조 안자미(安子美)
[상세내용]
본관 연혁
순흥(順興)은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에 속해 있는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가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태(胎)를 봉안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되었으며,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順興府)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바뀌었다가, 1457년(세조 3)에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풍기(豊基), 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시켰다.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순흥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로 이관하였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 편입시켜 영주시에 속한 순흥면으로 남아 있다.
1980년 영주시가 생기면서 영풍군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5년에 영풍군이 영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되었다.
따라서 시조 이전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그 후대로 순흥현(順興縣)에 세거했기 때문에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안자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를 기준으로 1,2,3파로 구분된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면 신음리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 중소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석천리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호산리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
황해도 황주군 수풍면 영풍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순흥안씨는 145,254가구 총 468,82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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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그 성씨의 지역별 퍼센트를 나타낸 그래프이며, 아래 그림은 그 지역의 인구로 보정하여 나타낸 (즉, 인구 10만명 당 몇 명이냐로 나타냈습니다), 상대적 지역 분포에 대한 그래프가 되겠습니다. 모든 자료는 2000년 기준입니다. 통계청 인구자료과 www.surname.info의 성씨별 자료를 참조하여 분석하였습니다.
21) 순흥 안씨(順興 安氏)
순흥 안씨는 안씨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본관으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을 그 본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고려 신종 때 보승별장을 지낸 안자미를 시조로 삼고 있지요. 시조의 세 아들, 첫째 아들 안영유를 1파, 둘째 아들 안영린을 2파, 셋째 아들 안영화를 3파로 나누고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합니다. 아이다님이 쓰신 http://cafe.daum.net/molanthro/I4rp/125에 안씨에 대한 자세한 연혁이 나와 있으니, 참조 부탁드립니다. 2000년 현재 인구수는 468,827명입니다. 대표적 인물로는 고려말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 독립운동가 안창호, 안중근 의사, 작곡가 안익태 등이 있습니다. 인구별 분포를 보면, 충북(10만명 당 1,583명), 강원(1,494명), 경북(1,181명), 경기(1,150명), 인천(1,134명) 등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역시 본관과 가까운 영주 순흥을 중심에서 가까운 지역에 많은 분포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 성씨에 따른 한국인집단의 Y 염색체 DNA 다형의 내용을 보면, 안씨는 O2b가 18.8%, O2b1이 37.5%는, 기타가 43.8%로 나왔습니다. 딱히 각 본관별로 나온 자료가 없으므로, 본관별로 어떻다..하는 말씀을 드리기는 곤란할 듯 보입니다. 순전히 제 추측이지만, 순흥 안씨 본류는 O2b1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광주안씨(廣州安氏)
[요약정보]
본관명 광주(廣州)
성씨명 안씨(安氏)
본관소재지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
본관이칭 -
시조 안방걸(安邦傑)
[상세내용]
본관 연혁
광주(廣州)는 서울 남부일대와 경기도 중부를 통칭하는 옛 지명으로 13년(백제 온조왕 13)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불리어졌으며, 371년(근초고왕 25)까지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하여 376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553년(성왕 31) 신라에게 땅을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년(신라 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주로 고치고, 983년(성종 2) 광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에 예속시켰다.
1012년(현종 3)에는 안무사(按撫使)로 고쳤으며 1018년 목사를 두었다. 1395년(태조 4) 광주목으로 경기좌도에 편입되었다.
1505년(연산군 15) 주를 폐하였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광주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광주군이 되었다.
1979년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 1989년 동부읍과 서부면이 하남시로 통합, 독립하는 등 규모는 축소되었다.
2001년 광주군이 광주시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고려 태조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이후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진 안방걸(安邦傑)이 광주안씨의 시조이다.
안방걸은 고려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의 鄕吏로 광주지방의 안정에 공적이 있어 大將軍의 軍職을 가지고, 土姓分定에 의한 성씨를 安씨로 스스로 가지고 廣州를 생활 근거로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本貫으로 삼아 왔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울주군 일원
경상남도 김제군 진영읍 의전리
경상남도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
경상남도 김해군 진례면 청천리
경상남도 밀양군 상동면 금산리
경상남도 밀양군 상동면 초월면
경상남도 영천군 금호읍 도남동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가연리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경상북도 영천국 금호읍 도남동
경상북도 월성군 강동면 호명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지촌동
울산광역시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다곡리
전라북도 남원군 보절면 괴양리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하사창동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터골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충청남도 천안시 불당동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군량리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고대리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삼현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광주안씨는 13,517가구 총 43,60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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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1(竹山安氏)
[요약정보]
본관명 죽산(竹山)
성씨명 안씨1(安氏)
본관소재지 경기도(京畿道) 안성군(安城郡)
본관이칭 -
시조명 안방준(安邦俊)
[상세내용]
본관 연혁
죽산(竹山)은 경기도 용인시(龍仁市)과 안성시(安城市)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 때 광주(廣州)로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1543년(중종 38) 죽산도호부(竹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죽산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에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원일면(遠一面)과 근삼면(近三面) 일부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해지고, 나머지 지역은 안성군(安城郡)에 편입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안방준(安邦俊)은 당나라 종실(宗室) 사람이며 농서(隴西) 사람으로 종실(宗室)인 이원(李瑗)의 아들 중 장남이다.
《병진보(丙辰譜》에 따르면 864년(경문왕 4)의 외환(外患) 때 이지춘(李枝春), 이엽춘(李葉春), 이화춘(李花春) 3형제가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우자,
왕이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는 뜻에서 안씨(安氏) 성을 하사받았다.
시조의 본래 이름은 이지춘으로, 이 때에 안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안방준의 장남 안국보(安國輔)가 고려시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차남 안국필(安國弼)이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여 죽산안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주요 세거지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죽산안씨는 17,357가구 총 56,05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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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2(竹山安氏)
[요약정보]
본관명 죽산(竹山)
성씨명 안씨2(安氏)
본관소재지 경기도(京畿道) 안성군(安城郡)
본관이칭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
시조 안원형(安元衡)
[상세내용]
본관 연혁
죽산(竹山)은 경기도 용인시(龍仁市)과 안성시(安城市)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 때 광주(廣州)로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1543년(중종 38) 죽산도호부(竹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죽산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에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원일면(遠一面)과 근삼면(近三面) 일부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해지고, 나머지 지역은 안성군(安城郡)에 편입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안원형(安元衡)의 자(字)는 경보(敬甫), 호(號)는 일호(一湖)이다.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사(密直司使),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보국문하시중(輔國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후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올라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주요 세거지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황해도 연백군 도촌면 지산리
경기도 양주, 화성, 안성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
전라남도 보성, 장흥, 함평군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죽산안씨는 2,407가구 총 7,66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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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안씨(耽津安氏)
[요약정보]
본관명 탐진(耽津)
성씨명 안씨(安氏)
본관소재지 전라남도(全羅南道) 강진군(康津郡)
본관이칭 -
시조 안원린(安元璘)
[상세내용]
본관 연혁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靈巖)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장흥(長興)으로 이속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하여 강진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는데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돌아갔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탐진군으로 승격되어 나주부(羅州府)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백도면(白道面) 일부를 해남군에 이속하였고, 가우도(加牛島)를 합쳤고,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탐진안씨(耽津安氏)의 시조는 안원린(安元璘)으로, 본명은 원륜(元崙)이다.
안원린은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내고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다.
《병자보(丙子譜)》에 따르면, 안원린의 장남인 안우(安祐)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고 하는데 오성은 강진의 옛이름이다.
이런 연유로 후손들이 탐진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택리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정해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탐진안씨는 3,558가구 총 11,03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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