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연이의 인도 여행기
내가 16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무한한 가능성과 사회적인 제약과 급속한 성장과 다양한 문화 그리고 종교의 나라인 미지의 인도를 향해 떠난 것이 바로 일 년 전이었다. 기대를 한다거나 어떤 상황에 내가 처하게 될지 그리고 어떤 일에 부닥치게 될 지 전혀 예상치도 못하고 인도라는 알지 못하는 나라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내가 가져온 것이라고는 두 개의 커다란 여행가방과 호기심 그리고 로타리 클럽의 이전 교환학생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고작이었다. 교환학생으로 인도에 간다는 것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는 영적인 성장, 신앙에 대한 의혹, 끊임없는 성찰과 자아와의 씨름, 자존심에 대한 도전, 이해의 심화, 인내심 키우기, 그리고 자신에 관해 배우는 일 년 간에 걸친 도전이었다. 지금의 나는 일년 전의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다. 책을 읽거나 사실을 암기하고 사진을 보는 것과 이를 직접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인도가 그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나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제 내게 있어 인도는 내 존재의 일부인 또 하나의 모국이다.
학교 친구들과 같이 졸업하려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교환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전 일 년 동안 외국을 여행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사학년 때 로타리 청소년 국제 교환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고 경쟁이 치열한 인터뷰 과정을 거쳤다. 리포트도 여러 개 써야했고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에 참가해 일년 간 생소한 문화속에서 생활하는 준비도 했다. 이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인도에 가는 것으로 선정이 되어 나는 무척 흥분했다. 인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마하라스트라 주의 잘가온이라는 작은 도시에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쌍의 부모님, 네 명의 형제들과 나이어린 남자 하인 등 12명으로 이루어진 두 세대가 한 집에 사는 자이나교도인 대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내가 인도와 늘 연관을 맺어왔으면서도 이를 실제로 깨닫게 된 것이 한참 후에 가서였다. 재가법사이면서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기도 했던 아버지는 인도 여행과 부처님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늘 들려 주었다. 나는 다람살라에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해온 달라이 라마 성하를 흠모하고 따랐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인도에 가게 된 것은 인연이었다.
나의 인도여행은 2011년 7월 28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이 여행을 몇 달을 두고 준비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안내방송을 듣고 나서야 내가 지구의 절반을 가로질러 인도로 간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무척 흥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무척 걱정스럽고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인도는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생소한 나라였고 내가 처음으로 가족과 한달 이상을 떨어져 있게 되는 여행이었다. 뉴저지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슬픈 마음은 점차 사라지고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회적인 관습인 개인공간에 대해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인도인들이 잔뜩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갈아타야 할 비행기의 탑승구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한 줄로 서는 것 따위는 전혀 없었고, 살아남으려면 남들을 밀치고 먼저 앞으로 나서야 했다. 나는 비행기에 탈때까지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런 일들이 일년 내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었다.
인도에서의 첫날 밤은 문화충격의 연속이었다. 뭄바이 공항에서 비행기로부터 내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갔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변기였고, 조금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꼭지처럼 생긴 것을 틀어서 수세를 하게 되어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좌식 변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오래동안 생활을 하면서 좌식변기를 사치품으로 간주하는 나라도 있다는 것을 까막득이 잊고 있었다. 내 짐들을 다 챙기고는 공항의 배기지 클레임하는 곳에서호스트 패밀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승객들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내 짐들을 간신히 공항 밖으로 끌고 나와서 사진에서만 본 호스트 패밀리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호스트 아버지가 나를 금방 발견하고는 (호스트) 어머니와 두 명의 (호스트) 형제인 디피시와 발루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은 내 호스트 아버지와 디피시뿐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 흥정을 한 후에 이를 타고 모두 삼촌댁으로 갔다. 택시를 타고가는 여행은 그야말로 굉장한 충격이었다. 울퉁불퉁한 길에는 다채로운 색들로 장식을 한 트럭, 릭샤, 소, 보행인, 스쿠터, 오토바이, 차들로 가득했고 교통법이나 규칙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고, 내 짐들을 택시 지붕위에 밧줄 하나로 달랑 묶어 놓은 채 택시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고 수도 없이 급정거를 하곤 했다.
심하게 상처를 입은 거지 아이가 붕대를 감은 피투성이 손으로 택시 창문을 두드려서 나를 놀라게 했는데 이를 통해 나는 노상에 존재하는 빈곤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 거지아이가 마치 그 자리에 없기라도 하듯이 그냥 모른 척하라고 했다. 나는 인도에 머문 일 년동안 이런 냉담한 대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더러웠고 눈을 돌리는 데마다 쓰레기가 산재해 있었다. 바깥 세상이 쓰레기통이기라도 하듯이 빈 감자 칩 포장지를 창 밖으로 버리는 호스트 형제들을 보고 놀라서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인사법을 접하게 되었다. 내 호스트 패밀리는 무릎을 꿇고 어르신들의 발에 손을 대었고, 어르신들은 이를 받아들이고는 내 호스트 패밀리의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이는 “나마스카”라고 하는 가장 정중한 인사법이었다. 발을 손으로 접한다는 것은 자아를 낮추고 축복을 받기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내게 설명해 주었다. 식구 모두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서 나는 샤워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문화충격이었다. 뭄바이는 대규모의 인구로 인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도물과 전기공급이 끊긴다. 이 아파트에서는 밤 11시면 수도물이 끊어졌다. 내 호스트 삼촌이 친절하게도 내가 쓸 수 있도록 두 양동이의 물을 마련해 주었다. 문제는 한국에서 양동이 물로 목욕을 한 적은 있었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어떻게 목욕을 해야 하는 지 난감하기가 그지 없었다. 또 인도 사람들은 컨디셔너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자들 앞에서는 여성들의 정숙함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나는 옷차림에도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나는 집안 반대쪽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는데 화장실에 갈 때마다 집안의 남자들이 죽치고 있는 거실을 지나가야 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인도의 관습과 가치관에 대해 내가 겪은 “문화충격”과 함께 나는 곧장 미국에 관한 질문공세를 받았다. 미국인인 내가 왜 “중국인’처럼 생겼나?, 정치, 점성술, 데이트, 식습관 등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시차로 인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어둠이 가시고 아침에 동이 트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튿날 호스트 패밀리와 나는 장장 8시간에 걸친 기차를 타고 내가 살게 될 잘가온으로 떠났는데 이 도시는 금과 바나나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문화충격은 뭄바이를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잘가온 기차역에 도착하자 호스트 패밀리는 짐꾼을 하나 고용해서 끊없이 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잘가온 시내로 내 여행가방들을 머리에 이고 나르게 했다. 짐꾼 하나가 무거운 내 여행가방 두 개와 세 개나 되는 호스트 패밀리의 짐에다가 두 개의 큰 핸드백 그리고 기내 휴대용 가방을 머리에 이고 팔에다 걸치고는 혼자서 나르는 것이었다! 이런 무게로부터 그의 몸을 보호해주는 것이라고는 머리에 동여 맨 낡은 천 뿐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잘가온을 처음 본 나는 무척 놀랐다. 밤에도 불이 켜져있는 시장과 수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는 걸어다니는 사람들과 오토바이와 릭샤와 자전거들로 메워져 있었다. 내 호스트 패밀리는 나를 환영하는 종교의식인 “푸자”를 거행했는데 구슬 목걸이를 내게 선물로 주었고 내 이마에 붉은 색 가루를 칠해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첫댓글 생생한 인도 생활 체험기군요.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