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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내 유일의 생존한 화폐 영정 작가 이종상 화백“고산 윤선도 영정 그릴 땐 몸무게가 30kg이나 빠졌죠”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 미술학도 시절 4·19혁명 참여 총상… 대학생 때 국전 추천작가 선정
⊙ 30대 초반 국전 심사위원에 올라… 고구려 벽화 연구하며 ‘문화영토론’ 주창
⊙ 이당 김은호에게 영정 기법 사사… 최초의 이율곡·신사임당 모자 표준영정 그려
⊙ 세계 최초의 독도 화가… 남북 화가 함께하는 ‘독도전’ 서울에서 개최 희망
⊙ 신리 ‘가톨릭 순교자 미술관’에 1000호 크기의 순교기록화 13점 기증
사진=조준우
영하 15도까지 수은주가 내려간 1월의 마지막 날,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종상(李鍾祥·83)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팔순을 훌쩍 넘겼지만, 무술(유도)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가 도드라져 보이는, 180cm가 넘는 키의 풍채 좋은 노신사였다. 그는 “코로나19로 강의가 연기되는 바람에 그동안 미뤄오던 백내장 수술을 연말에 했다”며 “지금껏 누렇게 보이던 하늘이 다섯 살 때 보았던 파란 하늘로 보인다”고 했다.
가나아트센터는 ‘자문 밖 미술관 프로젝트’로 김구림, 김병기, 김봉태, 김창열, 박서보, 심문섭, 유영국, 윤명로, 이종상, 이항성, 최종태, 하종현 등 한국 화단 원로들의 작품을 2월 말까지 전시한다. 종로구 구기동, 부암동, 신영동, 평창동, 홍지동을 한데 아울러 자문 밖(자하문 밖)이라 부른다. 이종상 화백은 “서울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자문 밖 동네 특유의 매력에 시나브로 모여든 화가, 조각가, 소설가, 음악가 등이 이곳에 정착했다”고 했다.
초창기 이 화백은 이어령(李御寧)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자문밖문화포럼을 이끌었다. 그는 “자문밖문화포럼 구성원들은 평창동 일대의 자문 밖이 지닌 예술적 가치에 주목했다”며 “화가의 화실을 미술관으로 바꿔 이 일대를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같은 문화적 유산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자문 밖 미술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의 미술 재능 물려받아
이종상 화백의 호는 일랑(一浪)이다. 한학자 월당(月堂) 홍진표(洪震杓) 선생이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 지어준 그의 아호다. ‘첫 번째 파도’ 혹은 ‘높고 큰 물결’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38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그는 1961년 서울대 미대 3학년 재학 중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1982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명칭 변경)에서 3년 연속 특선했고, 국전 사상 최연소로 24세 나이에 추천작가로 입문했다.
1960년대 그는 최초로 ‘문화영토론’을 주창하며 고구려 벽화 논문 발표와 함께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을 전개했다. 또 1970년대에는 세계 최초의 독도 화가로서 독도문화심기운동 NGO 활동을 펼쳤다. 1977년 37세에 율곡 이이(李珥·1536~1584) 화폐 영정(5000원권), 2009년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화폐 영정(5만원권)을 그리면서 최연소이자 최초의 모자(母子) 영정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 천부적인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화려한 이력을 쌓을 수 있을까요.
“어릴 때 집 담장 안에 아홉 칸의 작은 동물원이 있었습니다. 그 동물원엔 금계와 칠면조, 거위 등 온갖 두발 달린 동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이간재 선생)는 이응로(李應魯) 선생과 함께 일본 그림 유학을 몰래 떠나려다 집안에 ‘환쟁이’는 안 된다는 할아버지에게 잡혀 와 고녀(高女)를 막 졸업한 어머니와 결혼했어요. 예산군청 연구기관에서 원예학자로 근무하시면서 아버지는 틈만 나면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동물들을 그리곤 하셨어요. 미대생들도 어려워하는 속사(速寫), 즉 크로키를 하신 거죠.”
보통 사람에게 잔재 영상은 16분의 1초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16초, 16분으로 늘리는 게 화가의 능력이고, 그 능력을 키우는 연습이 크로키라는 것이다. 이 화백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두발 달린 짐승들을 서너 살 때부터 아버지 옆에서 흉내 내 그리면서 자연스레 크로키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고 했다.
박관수 선생
1958년 이종상이 대전고 2학년 때 미술교사 김철호 선생과 함께. 왼쪽의 박관수 교장 두상은 이종상이 조각한 것이다. 사진=이종상 |
선친은 한때 ‘삼천리전구’를 만들 정도로 사업가로도 수완을 발휘했으나, 해방 직후 북한의 수풍댐 단전(斷電)으로 파탄을 맞았다. 삼광초등학교 졸업 두 달을 앞두고 부친이 갑작스레 작고하자, 이종상은 6·25전쟁의 속에서 예산으로 내려가 편모슬하에서 컸다. 그의 자질을 아낀 모친은 광주리장사를 해가며 이종상을 대한불교 보문종 재단인 보문중을 거쳐 명문 대전고에 진학시켰다.
그림에 눈을 틔운 사람은 그의 부친이었지만, 미술학도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그의 대전고 은사 박관수(朴寬洙) 선생이었다. 도쿄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박관수 교장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은사이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과 한국큐레이터협회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박래경(朴來卿) 선생의 부친이다.
“가정 형편상 취업을 위해 서울공대 건축과로 진로를 정하고 3년을 이과반에서 내리 공부했지요. 박관수 선생님은 ‘20세기엔 미술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빛을 볼 것’이라며 서울대 미대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하셨어요. 서독 유학을 다녀온 당신의 따님도 만나게 해주셨고요. 미술교사 김철호 선생님도 초빙했죠. 김철호 선생님의 ‘나는 인품을 가르치러 너희에게 왔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후에 동양화를 공부하니 그림에 인품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런 분을 모셔온 박관수 교장선생님의 안목이 대단하신 거죠.”
4·19혁명 참가해 총상 입어
이종상 화백의 1963년 국전 출품 특선작 〈장비〉. 4·19혁명 이후 열린 국전에 제2의 혁명을 암시하는 민중의 역동성을 담았다. 사진=이종상 |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한 이종상은 장욱진(張旭鎭)과 권옥연(權玉淵), 손동진(孫東鎭)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맹목적인 서구 추종보다 우리의 것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이때부터 그는 월전(장우성), 산정(서세옥), 남정(박노수)에게 배우기 시작했고, 학교 밖으로는 청전(이상범), 이당(김은호) 선생을 찾아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 미술학도가 4·19혁명 유공자네요.
“대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어요. 그때 서울대 문리대생 시위대 맨 앞에 내가 섰어요. 나는 미대생이었지만 유도부라 시위대 전면에서 경찰을 메치면서 바리케이드를 허물었습니다. 경무대 담장 앞에서 오른쪽 종아리에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1cm만 안쪽으로 파고들었더라면 다리를 절단해야 했대요. 병원이 중상자로 넘쳐나 퉁퉁 부은 다리로 전전하다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끌려갔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해 지물포에 숨어 지냈는데, 며칠 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하야(下野)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다행히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학교도 다니게 됐지요.”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이종상의 실망은 컸다. 장면(張勉) 정부는 혁명 때 분출했던 민의(民意)를 담아낼 만한 역량이 부족했다. 이종상은 나름의 방법으로 혁명의 메시지를 담기로 했다.
“우리가 피 흘린 덕분에 민주당이 집권했는데, 사람만 바뀌었지 부정부패는 그대로고 무능한 정부였어요. 그러더니 난데없이 5·16으로 군사정권이 떡하니 들어선 거야. 너무 속상해서 무뎌진 칼날을 강인하게 벼리는 대장간처럼 민주화 혁명의 필요성을 작품에 담기로 했습니다. 국전(國展)이란 등용문을 이용해 다시 국민들에게 혁명의 기운을 샘솟게 하는 메시지를 보내자고 작정했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주관하는 국전에 작품을 보냈습니다.”
이종상은 ‘쿠데타 세력’이 주관하는 국전에 ‘장(匠)’ 등 여러 작품을 보냈다. 선철(銑鐵)을 틀에 붓고 용광로 주변에서 땀 흘리는 대장간 노동자들, 소의 발굽에 편자를 대고 징을 박는 노동자의 익숙한 손놀림…. 이종상의 국전 출품작들에는 혁명을 암시하는 ‘코드’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국전을 주관한 ‘쿠데타 세력’은 눈치채지 못하고 1962년 한 해에만 두 차례나 그에게 내각수반상(賞)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상을 수여했다.
이종상은 ‘혁명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3년 연속 특선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국전 사상 최연소 추천작가라는 영예를 안고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직후 그는 국전 추천작가가 됐다. 30대 초반엔 이미 국전 심사위원에 올라 선배들의 작품을 심사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한국 미술계의 역사를 새로 써나가기 시작했다.
고구려 벽화 연구
1999년 평양 덕흥리 고구려 벽화를 조사·연구 중인 이종상 화백. 사진=이종상 |
이 무렵, 이종상은 한국 회화의 자생성(自生性)과 우리 문화의 근원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고구려에 큰 관심을 갖게 되고, 고구려 벽화 연구에 몰두한다. 고구려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1972년 《한국민족문화논총》 ‘고대벽화의 사적고찰과 신벽화의 재료 및 기법에 관한 연구’란 논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 고구려 문화유산은 대부분 중국에 있고, 나머지는 북한에 있어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을 텐데요.
“그때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라고 부를 만큼 문고리가 단단히 잠겨 있었지요. 1992년 중국과 수교가 되자마자 고분벽화가 산재(散在)한 지린성 지안 지역의 고분군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는 일종의 금기어였어요. 북한을 찬양하는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죠. 나도 안기부에 불려가서 ‘간첩 아니냐’고 취조도 많이 당했어요. 우리나라 미술과 문화, 의상 등 모든 패턴을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벽화를 가진 민족은 원시시대부터 족보 있는 ‘문화 DNA’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장한 건 ‘문화영토론’이에요. 그래서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이란 NGO를 결성했습니다.”
― 북한의 고분벽화도 살펴보셨나요.
“중국에 들락거릴 때, 북한이 나를 주시한 듯해요. 1999년 8월 말 아태평화위원장이 나를 초청했어요.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강서대묘 등 북한 내 고구려 고분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서둘렀어요. 그 전에 일본 학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연구명목으로 유물만 가져가고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 같았어요. 국내에 돌아와 북한이 요청한 것들을 통일 대비, 민족문화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 당국에 간곡히 전했지만 끝내 묵살당한 점은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어쨌든 나는 이후 내 작품에서 ‘근원형상(Urfiguration)’ 시리즈로 우리 고유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외국 동굴벽화와 고구려 동굴벽화의 차이는요.
“둔황석굴을 비롯해 서구의 벽화는 건식(乾式)벽화의 경우 점도(粘度)가 높은 유성(油性) 용매제를 쓰는 유화(油畵) 기법으로 발전했습니다. 동양화에선 건식벽화 기법이 북종화풍의 농채화로, 습식벽화 기법 중에서 부온-기법은 남종문인화 기법의 수묵담채로 발전했어요.
고구려 벽화는 지역성에 따라 중국 벽화와 때로는 전혀 다른 질료(質料)와 기법(技法)을 구사하며 발전해왔습니다. 습한 동굴에서도 수천 년을 버텨낼 수 있는 질료와 석회암 수막코팅 기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고구려 벽화의 형상만 갖고 이야기하지, 교과서에 나오는 쌍영총 〈수렵도〉의 질료와 기법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수천 년 전 기법이 이어 내려왔으니 이걸 자생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동서양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어
2001년 임권택 감독이 영화 〈취화선〉 제작을 위해 배우 최민식과 함께 미술자문 역을 담당한 이종상 화백의 화실을 방문해 오원 장승업 진본을 보았다. (왼쪽부터) 임권택 감독, 이종상·성순득 부부, 최민식. 사진=이종상 |
이종상 화백은 고구려·발해·고려의 미술에 천착하면서, 1977년 광개토대왕의 ‘국가표준영정’을 맡아 그렸다. 그가 그린 광개토대왕은 면류관을 쓰고 용포(龍袍)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비늘갑옷에 투구를 쓰고 칼을 찬 장수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 그림에서 이 화백은 고구려 고분에서 찾아 연구한 벽화와 북방 유목민의 생김새, 그들의 생활상을 반영해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종상 화백은 준비된 표준영정 제작자였다. 그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배우면서 국가표준영정을 그리는 기초를 닦았다. 그는 원래 서양 그림을 배우려고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다가 대학 2학년 때 동양화로 돌아섰다. 그가 동서양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힘이 이때 생겼다. 그렇게 그는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화백의 서울대 마지막 제자가 됐다.
동양화로 전공을 옮겼지만 그는 남들처럼 사군자(四君子)나 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우리 문화의 원류를 찾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역사적 인물을 그리는 영정 작업이었다. 이 화백은 2021년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관장하는 정부표준영정 98점 가운데 신사임당 모자상을 비롯해 광개토대왕, 우륵, 원효, 김홍도, 장보고 등 7점을 그렸다.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전시회를 본 임권택(林權澤) 감독이 영화 〈취화선〉을 제작할 때 자문했고, 임 감독은 이 작품으로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임 감독은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크다’는 의미의 ‘한’을 식민사관적으로 ‘한(恨)’이라고 해석한 것에 기초해 〈서편제〉를 제작했다 낭패를 겪었으나, 〈취화선〉으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얼’이 담긴 ‘꼴’이 ‘얼굴’”
이당 김은호 화백. 1977년 37세의 이종상 화백이 이율곡 화폐 영정을 그리도록 추천하고 표준영정 제작을 지도했다. |
“서울대 미대는 영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순종 어진(御眞)을 그린 마지막 화원(畫員)인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1892~1979) 선생이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당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우리 집에 서울대생이 왔다’며 반겼죠. 이당이 만든 ‘후소회(後素會)’ 제자들이 월사금을 내고 배울 때였는데, 나에겐 월사금 내지 말고 잠깐잠깐 와서 배우라고 하셨어요. 《논어(論語)》에 ‘예술이 뭐냐’고 자하(子夏)가 물으니, 공자(孔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답니다. 인품이 된 연후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뜻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모임이었어요.”
운보 김기창은 월전 장우성, 산정 서세옥, 남정 박노수 등 이 화백의 서울대 동양화과 은사와 이화여대 미술대학장을 지낸 현초 이유태(玄草 李惟台)에게 스승이었다. 그런 운보를 가르친 스승이 이당이었으니, 이종상은 스승을 넘어 스승의 스승에게 사사(師事)한 셈이었다.
― 이당에게 무엇을 배웠습니까.
“대학에선 예용해부학(藝用解剖學)을 배웁니다. 예용해부학에선 인품을 담기 위해 점묘법(點描法)을 쓰죠. 그 점묘법까지 배웠는지라 이당이 내는 과제를 서양 점묘법으로 해갔더니 선생께서 ‘이런 것은 중국에도 있다’며 ‘인품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으셨어요. 마음속에서 나온다고 하니 ‘그림도 속에서 나온다. 천의 뒷면에 그려라’고 하셨어요. 어진은 피부를 벗겨내고 안윤근(眼輪筋)과 하악근(下顎筋), 미간근(眉間筋) 등을 강조해 인품을 드러내는데, 그러려면 그분의 평소 생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얼’이 담긴 ‘꼴’을 ‘얼굴’이라고 해요. 즉 사람의 얼굴은 인품과 혼을 담는 그릇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초상화와 달리 영정 제작은 접신 수준의 전신사조(傳神寫照·정신을 전하여 인물을 그린다)에 천상묘득(遷想妙得·생각을 옮겨서 오묘함을 얻는다)의 집중력을 필요로 합니다.”
첨배례
원효대사(왼쪽)와 해상왕 장보고의 표준영정. 이종상 화백은 원효가 머리를 기르고 파계했을 때의 모습, 머리를 깎고 수도할 때의 모습이 영정에 드러나도록 제작했다. 사진=이종상 |
― 한국 영정과 서양 초상화의 차이는 뭡니까.
“초상화는 이름이나 인품을 몰라도 사진처럼 똑같이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영정은 달라요. 영정은 그림자 영(影)자에 족자 정(幀)자를 써요. 그림자가 있는 건 실체고, 그림자가 없는 건 환상이에요. 귀신을 봤다, 그러면 그림자가 있었느냐고 묻잖아요? 그림자는 돌아가신 분이 남겨둔 인품과 업적과 혼을 말합니다. 그림자, 즉 그분의 혼을 액자 속에 모시는 게 바로 영정입니다. 영정을 그리기 위해선 그리려는 분의 혼과 접신(接神)을 해야 해요.”
― 접신이라면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처럼 신내림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아내(동양화가 성순득)가 화실에 와서 식사하라고 부를 때 내가 물속에서 그 소리를 듣는 것 같고, 식사 때도 아내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어요. 옛날에는 어진을 그린 화가한테 나라에서 첨배례(瞻拜禮)를 성대하게 해줬어요. 임금의 혼이 화가에게서 무사히 빠져나오도록 해준 거죠. 그걸 안 하면 접신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목숨이 위태로워져요.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종상의 대표적 문인화인 〈초의선사도〉. 초의선사가 추사 김정희에게 소치 허련을 소개하는 모습.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에게 서예를 배운 이종상 화백은 그림의 제목(畫題)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사진=이종상 |
― 믿기지 않는데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 1671)의 영정을 그릴 때 이야깁니다. 고산의 후손 중엔 공제 윤두서(恭齊 尹斗緖)를 비롯해 화가가 여럿 있는데 이상하게 고산의 영정이 없었어요. 후손들이 찾아와서 영정을 그려달라고 했어요. 영정을 그릴 때면 신접하는 지경까지 가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습니다. 핑곗거리가 있어야지. 여덟 번째인가 찾아왔을 때 ‘파묘를 해서 부모의 골상(骨相)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문중에서 그러겠다고 하는 거예요. 고산의 부모와 친형 골상을 바탕으로 3D 컴퓨터를 돌려 고산의 얼굴 형상을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고인의 인품까지 반영하려고 갖은 애를 썼어요. 4년을 매달렸는데, 영정을 완성하고 나니 몸무게가 30kg이나 빠졌습니다.”
― 뒤이어 원효 대사의 표준영정도 그리셨죠.
“원효(元曉·617~686) 대사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공부를 위해 동국대대학원에 입학했죠. 인도철학과 원효사상 연구의 권위자 이기영(李箕永) 박사에게 기신사상에 대해 배웠습니다. 원효 대사의 혼을 온전히 담으려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원효의 기신론을 배우고 동양의 기철학 연구논문으로 10년 만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국내 화가 중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건 제가 처음이랍니다. 2002년 내가 방북(訪北)해 귀국했을 때 서울대 이기준(李基俊) 총장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미대 교수인 나를 서울대 사상 처음으로 서울대박물관장에 임명한 일도 있어요.”
신사임당 영정은 철저한 고증 거쳐 완성
그렇게 영정화의 전문가가 된 이종상 화백은 1977년, 5000원권 지폐의 도안이 바뀔 때 처음 화폐 영정 제작을 맡게 된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여섯 살 때다. 5000원권에 새겨진 정자관(程子冠)을 쓴 덕망 있고 후덕한 선비의 모습을 한 율곡 이이의 영정이 그의 작품이다.
― 쟁쟁한 동양화가들이 많은데, 서른여섯의 젊은 화가에게 왜 중책을 맡겼을까요.
“원래는 순종 어진과 강릉 오죽헌(烏竹軒)의 율곡과 사임당 초상을 그리신 이당 선생께서 그려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화폐는 위조 가능성 때문에 정면에서 그린 것은 안 돼요. 이당은 율곡과 사임당을 그렸지만, 모자(母子)를 함께 그리느라 정면으로 그렸어요. 이당 선생님은 병환 중이셨는데, 청년 작가인 저를 파격적으로 추천해주셨어요. 1000원권을 그린 현초 선생, 1만원권을 그린 운보 선생도 모두 이당 선생의 제자였거든요. 한국은행이 ‘너무 젊다’며 이당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교수를 선정했다가 완전한 서양인 모습으로 그려오자 화들짝 놀랐죠. 결국 내가 화가로 다시 선정됐어요. 와병 중인 이당을 극비리에 찾아다니며 자문을 받아 완성했습니다.”
― 더 큰 영예는 5만원권 화폐 영정을 그린 것이겠죠.
“율곡의 영정을 그린 지 꼭 31년 만에 모자의 만남이 성사된 거죠. 전 세계에서 화폐에 모자를 그린 건 유일하대요. 현행 화폐 영정 화가인 내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자 정통 영정의 육리배채(肉理北彩) 기법을 알고 있을뿐더러 복잡한 신원검증을 이미 끝마친 유일한 생존 작가였기 때문에 최고액권인 5만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제작을 자연스럽게 맡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종상 화백은 “강릉 오죽헌의 이당이 그린 신사임당 영정은 표준영정 제도가 생기기 이전이어서 이당이 자신의 어머니를 보면서 16세기의 여자로 그렸던 것”이라며 “이당은 오죽헌의 율곡 영정도 가난한 선비로 묘사했기 때문에 궁상스러워 화폐에는 부적합하다고 생전에 말했다”고 했다. 그는 “신사임당은 가족의 골상을 바탕으로 병색(病色)이 없었던 45세를 기준으로, 이당의 말대로 국가의 부(富)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악(턱)을 넉넉하게 그렸다”며 “또 의상고증학자를 통해 16세기 여성의 무덤 출토품을 기준으로 동정의 두께, 가체(加髢)의 모양 등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했다.
세계 첫 번째 독도 화가
이종상 화백은 세계 최초의 독도 화가다. 1977년 독도에 처음 들어가 그림을 그려 〈독도진경전〉을 열었다. 독도 정상에서 작품을 그리고 있는 이종상 화백. 사진=이종상 |
아무도 독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1977년, 이종상 화백은 처음으로 독도 땅을 밟고 최초로 〈독도진경전〉을 열었다. 전 세계인에게 ‘독도(Dokdo)’를 각인시켰다. 가수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나오기 5년 전부터 그림을 통해 독도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것이다. 지금까지 30여 차례 독도를 드나들며 남긴 작품만 600점이 넘는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체험관과 울릉도 독도박물관 등에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혹시 〈진경산수화〉를 그린 겸재 정선이 독도를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최순우(崔淳雨) 국립박물관장에게 문의하니 독도 그림을 그린 작가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일본 쪽도 뒤졌어요. 단순히 그림 하나 그리려는 게 아니라 지도의 어버이 격인 그림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사전조사를 마치고 치안본부에 독도 입도(入島)를 신청해 천신만고 끝에 들어갔어요. 그때 그린 독도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고요. 그 그림들이 울릉도 독도박물관에 있어요. 그때부터 전 세계에 독도를 알리고 다녔어요.”
― 왜 그렇게 독도에 애착을 갖게 됐나요.
“거기가 내 나라, 내 땅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리는 거죠. 화가니까 그림을 그려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예요. 독도는 풍수지리학적으로 한반도의 좌청룡(左靑龍)이에요. 우리 왼팔인 거죠. 독도는 일본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줬어요. 반대로 서쪽에는 강화도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요. 예술과 문화로 승화돼 표현되는 자생적인 문화행위가 독도에 대한 실효적(實效的) 영토 주권 수호일 것입니다.”
― 일본에서 독도 전시회를 기획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었죠.
“2008년 7월에 도쿄의 뉴오타니호텔에서 ‘아시아 톱 갤러리 호텔 아트페어’란 대형 전시회가 열렸어요. 독도를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만약에 일본인들이 작품을 찢거나 먹물을 뿌린다면 온통 신문에 날 것이고, 국제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독도 그림을 전시한다는 얘기가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독도 그림은 못 건다고 통보했어요. 그래서 내 방은 걸어 잠그라 하고 불참했어요. 그 뒤로는 내가 일본에 갈 때마다 혹시 독도 그림을 갖고 있지 않은지 일본 측에서 짐을 유심히 살피더군요.”
“北의 朝鮮畵, 宣傳性만 강해”
〈몽유취원도〉 필터화_38×28_후지에 수묵담채_1978. 이종상 화백이 자신을 험담하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 집에 있는 와이셔츠 상자에 그린 그림. 영화 〈취화선〉에 장승업이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나온다. |
― 북한의 국보급 화가들과 독도 전시회를 기획하셨는데요.
“북한의 국보급 화가인 선우영(2009년 작고) 화백도 독도 그림을 그렸어요. 그분과 일본에서 평화미술전을 함께 열기도 했지요. 선우영 화백, 정창모(2010년 작고) 화백과 서로 호형호제하면서 세 사람이 서울에서 독도 전시회를 기획했으나 두 분 다 돌아가시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2002년 서울대 1600명 교수 중에 1호로 평양에 초대받기도 했죠. 그분들의 작품을 확보하고 있고, 생시에 그분들의 뜻을 잘 알기에 적당한 시기에 전시회를 열 계획입니다.”
물론 북한에도 김주경, 김용준, 리쾌대, 정종여, 리순종, 표세종 등 일본 유학파 작가들도 있고, 이들에게 배운 선우영과 정창모 등 실력파 작가들이 상당수다. 그리고 이당의 제자로 월북화가인 이석호(1971년 작고)도 채색몰골화의 일인자로, 정창모를 지도했다고 한다.
― 북한 그림(조선화)과 우리의 동양화는 어떻게 다릅니까.
“남쪽의 동양화는 독창성을 갖고 발전하고 있는 데 반해, 북쪽의 조선화(朝鮮畵)는 체제 특성상 자생성이 없고 선전성(宣傳性)만 강해요. 게다가 초기에 일본에서 유학한 분들이 서양 그림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고구려 벽화에서 원류를 찾는 우리의 독창성과는 거리가 멀죠. 만수대창작사엘 가서 작업하는 것을 보았지만, 우리나라 독창적 기법으로 그리는 작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통일되면 북한 작가들을 우리 고유의 윤리와 철학으로 다시 가르치고 싶습니다.”
“미술과 사업은 본질이 같다”
이종상 화백은 삼성그룹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李秉喆) 회장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했다.
“스물일곱 살 때(1965년)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님께 우리 미술에 대해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어요. 이병철 회장께서 ‘혼자 듣기 아깝데이~’ 하시며 전경련 부회장인 구인회(具仁會) 금성사(현 LG) 사장과 대기업 회장 열두 분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로 불렀습니다. 이분들 앞에서 당시엔 생소했던 ‘경영’을 강의했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이었죠. 난 미술과 사업의 본질이 같다고 봐요. 화가는 화판에서 공간을 계산하고, 붓질을 최소화해요. 이걸 감필법(減筆法)이라고 합니다. 경영도 마찬가지예요. 경영이란 ‘최소력 행사의 법칙’이에요. 가장 적은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보는 거예요.”
이종상을 아낀 이병철 회장은 그에게 많은 작품을 맡겼고, 미술과 관련한 수많은 자문을 했다. 서울 중구 태평로 옛 삼성 본관 로비에 붙은 반구대 암각화를 본뜬 국내 최대 암각대벽화인 〈장생(長生)〉(5×52m, 1983)도 그의 작품이다.
“테이프 커팅식이 끝나고 이병철 회장, 친형인 이종규(李鍾圭) 제일제당 사장, 홍진기(洪璡基) 당시 중앙라디오 사장과 함께 회장실에서 국수를 먹었습니다. 회장님은 그만큼 소박하셨어요. 이 회장께서 ‘사람들은 날 보면 ‘돈병철’이라고 한다는데, 난 돈을 번 적은 한 번도 없네. 단지 좋은 인재들을 모았을 뿐이네’ 하셔요. 나를 화폐 영정 작가로 추천한 이당 선생도 ‘너는 화폐를 그렸으니 돈을 돌 보듯 하라’고 하셨는데, 두 분 생각이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통섭
5만원권 신사임당 지폐가 처음 발행됐을 때, 화폐 저작권을 가진 이종상 화백이 부인 성순득 여사와 함께 2009년 6월 15일 경산조폐공사를 방문해 최종 점검을 마친 뒤 조폐공사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이종상 |
이종상 화백은 “전공이란 건 세워놓은 꼬챙이의 정점이 아니라 넓은 바닥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피라미드의 정점이어야 하고, 이게 바로 원효의 기신론, 통섭(統攝)의 원리”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AI(인공지능)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전공 바보’들은 도태되고 창의적 사고들이 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 통섭을 제대로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 대학교육은 인문학적 기초가 부실한 채, 전공 주입식 교육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회화가 서양화·동양화로 나뉘고, 동양화가 다시 수묵화와 채색화로 나뉘어요. 나중에는 문인화·북종화·사군자로 나뉘더니 사군자에서도 난초파와 대나무파가 서로 잘났다고 싸워요. 통섭이란 ‘스미고, 번지는’ 겁니다. 문풍지가 통섭과 소통의 역할을 하는 원리를 보세요. 옛 선조들은 문풍지 우는 소리를 듣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알고,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됫바람을 구분했던 겁니다.”
1997년 파리 루브르박물관 카루젤 샤를르 5세홀에 설치된 초대형 벽화, 〈원형상-마리산〉 (6×72m)의 설치작업을 마치고 작품 앞에 선 이종상 화백. 사진=이종상 |
― 1997년 프랑스 문화부 초청으로 루브르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루브르박물관 카루젤 샤를르 5세홀에서 5개월간 설치벽화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세로 6m에 가로 71m짜리 〈마리산〉이란 대형 벽화예요.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왔던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 간의 용서와 화해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사상 유례없는 세 차례 앙코르 요청에 관람객이 무려 127만명이었어요. 루브르 측에서 작품을 거액으로 구입해 영구전시하겠다는 제안을 해왔어요. 나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프랑스가 정치적 이유로 난색을 표해 거래가 성사되진 못했어요. 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신리 순교자 미술관에 순교기록화 작업
충남 당진군 합덕의 신리마을에 있는 ‘신리성지 다를뤼 주교기념관’ 지하에 카타콤베 형식의 순교자 미술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종상 화백의 작품들. |
이종상 화백은 팔순에 접어들 무렵 큰 슬픔을 겪었다.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서울대 미대에 진학해 동양화를 전공하던 둘째 딸이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딸의 장례식날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한 이 화백은 이후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는 예수의 아버지, 목수 요셉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화백은 ‘필생의 작업이 뭐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순교자 미술관 벽화 작업”이라고 했다. 신리성지 다를뤼 주교기념관(도기념물 제176호)이 있는 충남 당진 합덕읍 신리마을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가톨릭 포교의 거점이었다. 1972년 합덕의 한 마을에서 과수원을 개발하기 위해 무덤 40여 기를 파묘했다. 묘에서 한 됫박이 넘는 묵주와 목이 없는 시신 32구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 작은 마을이 지금 신리성지다. 2017년 병인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이곳에 순교자미술관이 건립됐다. 건축가 김원(金洹)이 설계했고, 이종상 화백이 벽화를 맡았다.
“아내가 봉사활동을 하는 신리성지를 어느 날 가보고 깜짝 놀았어요. 그곳은 우리 고향이었어요! 가톨릭 신자던 어머니가 내가 어쭙잖은 짓을 할 때마다 손짓으로 ‘저 마을에서 401명이 순교를 하셨다’고 한 그곳이었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고택과도 가까웠고요. 묘한 인연이었어요.
파주작업실에서 마음을 다스려가며 3년 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렸어요. 직접 깎은 종려나무 목필(木筆)로 다를뤼 주교 등 다섯 분 성인의 영정을 그렸고, 다를뤼 주교의 생애를 중심으로 1000호 크기의 순교기록화 13점을 제작했습니다. 고구려 벽화는 물구덩이에서 1000년을 버텼습니다. 나도 이 순교화를 물구덩이 속에서 견딜 수 있게 재료기법을 총동원해 제작했습니다.”
“손주들 ‘바보’로 만드는 고약한 할아버지”
이종상 화백의 평창동 화실엔 두 개의 붓, 거대한 붓과 작은 붓이 함께 묶여 걸려 있다. 이 화백은 “가장 미시적인 것은 가장 거시적인 것과 결국 하나이며, 화가는 현미경과 망원경을 동시에 다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 “거시적으로는 내 키만큼 큰 붓으로 마리산 대형 벽화를 그렸고, 미시적으로는 세 가닥의 가늘고 섬세한 면상필로 화폐 영정을 그렸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면서 이종상 화백은 “난 손주들을 ‘바보’로 만드는 고약한 할아버지”라고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5만원권 지폐로 수업을 하는데, 손주가 ‘할아버지가 그린 것’이라고 하자, 선생님이 근엄한 표정으로 ‘어른을 속이면 안 된다’고 야단을 쳐 속상해 울고 왔더라고요. 허허. 화폐 영정을 그린 생존 작가가 유일하다 보니 40년 동안 별 이야기가 다 있어요. 길을 가다 어느 사람이 5만원권을 침을 뱉어가며 세기에, ‘영정에 침을 바르지 말라’고 했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웃기는 양반이네’ 해요.”
이종상 화백은 “강연 때 청중이 졸다가도 화폐 영정 이야기만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서로 기념사진을 찍자고 난리”라며 웃었다. 이 화백이 화폐 영정 화가로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 민족의 ‘문화 영토’를 확장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화가로 그를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평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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