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고구려비
남한강가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돌기둥 하나가 서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돌을 대장간집 기둥으로 쓰기도 하고, 돌에다 백설기를 바치며 아들 낳기를 빌기도 하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마을 수호석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두텁게 앉은 이끼 사이로 글자 같은 것이 보여 낫끝으로 쪼아보기도 했다지만 마을사람들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 돌로 인해 마을은 오래전부터 입석마을로 불리고 있었지만, 정작 돌기둥의 정체가 알려진 것은 겨우 20여 년 전인 1979년의 일이다. 충주지역의 문화재 동호인 모임인 예성동호회 사람들이 학계에 알려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 비가 고구려비임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 비는 1972년의 대홍수 때 쓰러졌던 것을 마을사람들이 일으켜 동구의 작은 화단에 ‘칠전팔기의 마을’이라는 표어를 새긴 석주와 함께 세워놓은 상태였다. 지금은 길 건너 마을창고 앞으로 옮겨졌으며 1981년에 보호각도 지어졌다.
중원 고구려비각
대장간집 기둥으로 쓰이기도 하던 중원 고구려비는 1979년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후 길 건너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1981년 보호각도 지어졌다.
비는 높이 2.03m 너비 0.55m 가량 되는 두툼한 돌기둥 모양으로,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만주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비와 중원고구려비와 매우 닮았다. 네 면에 모두 예서풍의 글씨가 새겨졌는데 앞쪽에 23자씩 10행, 왼쪽 면에는 23자씩 7행, 오른쪽에는 6행, 뒷면은 몹시 마멸되었으나 너비로 보아 9행 정도의 흔적이 있어 모두 400자 가량 된다.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비문 전체의 내용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첫머리의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구절에서 바로 고구려의 비임을 알 수 있다. 또 뒤이은 명문에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사자(使者)와 같은 고구려의 관등명만 나온 점과 광개토왕비에 적힌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등장하는 점도 이 비가 고구려의 비임을 말해준다. 또한 ‘신라토내’(新羅土內)라는 명문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신라 이외의 나라가 신라를 일컬었던 것으로 고구려에서 신라땅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중원 고구려비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만주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비와 매우 닮았다. 마멸된 부분이 많아 비문 전체의 내용을 완벽하게 알 수 없으나 장수왕 때 한강 하류의 여러 성을 공략한 후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내용은, 앞부분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사이좋게 지내던 때의 일이 적혀 있고 뒷부분은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져서 백제 개로왕(455~475)과 신라가 힘을 합해 고구려에 대항한 내용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고구려가 한강 상류인 이 지역까지 세력을 넓힌 것은 장수왕(413~491) 때의 일이다. 고구려는 광개토왕(391~413) 때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뒤이어 장수왕 때 남하정책을 단행함으로써 평양성을 비롯하여 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미치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므로 이 비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한강 상류의 여러 성을 공략한 후 나라의 남방 경계이자 앞으로 남방 진출의 거점이 될 이곳에 기념비로 세운 것이라 추정된다. 따라서 비의 건립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보인다.
주변을 살펴보면 비가 서 있는 입석마을 일대는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교통에서나 충주에서 장호원을 거쳐 서울 방향으로 가는 육로교통에서나 모두 중요한 곳이다. 마을 주위의 골짜기에서 많은 고분이 발견되었으며 북쪽의 장미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장미산성이 있고 그 너머 봉황리에는 삼국시대의 마애불상이 무리지어 있다. 또 남한강 줄기를 따라 상류로 조금 거슬러 올라간 탑평리 칠층석탑 주변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왓장이 많이 나왔고 서쪽으로 이웃한 노은면에서는 ‘건흥 오년 세재병진’(建興 五年 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있는 고구려시대 금동광배가 출토되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의 금석은 손꼽을 정도로 적다. 그 가운데 중원 고구려비는 그 존재만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며 우리나라 안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서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중원 고구려비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초판 1998, 6쇄 2003, 돌베개)판 1998, 6쇄 2003, 돌베개))
탄금대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때의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法知)·계고(階古)·만덕(萬德)을 뽑아 보내 악(樂)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아 풍치를 즐기며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 칠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리), 청금리(지금의 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지금까지 전한다.
탄금대는 또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申砬)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
탄금대 건너편에 신라 중원 탑평리칠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한국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하여 신라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신라 석탑 중 가장 높은 탑이다. 중앙탑은 신라 원성왕 때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이곳에 먼저 임시로 탑을 세우고 건강한 사람을 국토의 남과 북의 끝에서 여러 차례 동시에 출발시켜 보았는데 그때마다 이 곳 탑평리에서 만나게 되어 이곳이 정중앙임을 확인하여 거대한 탑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정식명칭 보다는 '중앙탑(中央塔)'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