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시 문과는 초시와 전시 두 단계를 거쳐 최종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그런데 중종 28년의 계사별시 문과에서는 그러한 규정을 무시하고, 마치 식년시나 증광시 문과 처럼 초시와 복시 그리고 전시를 모두 실시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물론 위 계사별시 문과의 복시는 식년시나 증광시 문과 복시 처럼 초장, 중장, 종장의 형태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한 번의 강경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가 나중에 제술을 한 번 치르 식으로 진행되었는데,(그래서 강경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가 나중에 제술 성적이 좋지 못하여 낙방하게 된 사람이 생긴다), 아무튼 별시 문과에서 복시를 실시하였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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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74권, 중종 28년 5월 3일 을사
#사간 송순이 전일 과거 출방의 일을 아뢰니 전교하다
$사간 송순(宋純)이 아뢰기를, "과거를 설치하여 사람을 뽑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한번 구차스런 단서가 생기게 되면 그 뒤 폐단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당초엔 도기(到記)에 기재된 유생(儒生)에게만 특별히 별시(別試)를 실시하게 했었는데, 이는 널리 인재를 뽑는다는 의의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별시에 복시(覆試)를 보인 일은 예부터 이런 전례가 없었고, 또 출방할 때에는 일이 매우 뒤바뀌어 혹 떨어진 자가 도로 합격되기도 했고 합격된 자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출방이 둘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고, 따라서 사람들이 불만스럽게 여겨 여론이 많았습니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서 과거를 신중히 여겼던 의의와는 실로 다른 처사입니다. 한때의 잘못이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후세의 비평이 있게 될 것이니, 속히 파방(罷榜)하여 공론을 통쾌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였다. "당초에는 도기에 기재된 유생들에게 정시(庭試)를 보이려 했었지만, 초록(抄錄)해 본 결과 유생들의 숫자가 2천여 명이나 되어 정시를 보이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많은 유생들이 모였을 때에는 옛날에도 특별히 별시를 보인 일이 있었거늘, 하물며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는 때에 있어서이겠는가! 사람을 뽑음에 있어 명분이 없지 않다. 내가 이런 뜻으로 대신(大臣)들과 의논하니, 대신들의 뜻도 모두 이와 같았기 때문에 별시를 보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례를 조사해 보니 을묘년에도 복시를 치른 예(例)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의거 복시를 보였다. 이런데 옛날에는 복시를 보인 예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식년(式年)에 보이는 복시는 규칙에 따라 뽑도록 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출방하는 날에 시관(試官)이 강경 시험(講經試驗) 점수와 제술 시험(製述試驗) 점수만 써서 아뢰었다. 대저 식년이 복시에는 1등으로 합격한 사람의 강경 시험 점수와 제술 시험 점수를 명지(名紙)에 적어 피봉(皮封)을 뜯지 않은 채 아뢰는 것이다. 【식년의 복시에는 미리 정해진 숫자가 있으므로 사관이 먼저 피봉을 뜯어보고 출방하는 것이 예(例)였다. 이 전교의 뜻은 이해할 수 없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아뢴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옛날 식년의 복시에는 1등으로 합격한 사람의 강경 점수와 제술 점수를 함께 써 올린 예를 생각하여 강경 점수와 제술 점수가 모두 합격선에 든 사람만을 뽑았던 것이다. 이는 특별한 변례(變例)가 아니었다. 곧이어 시관들이 과거(科擧)를 엄밀히 실시하지 못했다는 전교에 따라 대죄(待罪)할 때에 ‘식년의 복시의 예에 따라 뽑으라는 전교가 있었고, 식년의 복시에는 점수의 순서에 따라 뽑았으므로 그렇게 서계(書啓)했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즉시 깨달았음과 동시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간간이 특출한 사람을 뽑아서 괘방(掛榜)했던 것은, 이미 내려진 전교의 내용에도 어긋나고 복시의 전규(前規)에도 어긋나는 것이므로 뒤에 물의가 있을 것 같아 즉시 출방(出榜)을 정지시키고 이어 뽑지 않겠다고 명할 것으로 삼공과 의논했더니, 삼공은 모두들 복시의 전규에 따라 뽑아야 된다고 했다. 때문에 즉시 점수의 순서에 따라 정식으로 출방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출방을 정지하라고 명한 뒤 시관들이 미처 금지시키기 전에 아랫사람들이 먼저 초방(草榜)을 전파했으니, 순서가 매우 전도되었다. 출방 단자(出榜單子)는 내가 아직 계하(啓下)하지 않았으므로 초방을 먼저 전파한 사정을 위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데 일시에 두 개의 출방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번 일은, 유생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으로 상하(上下)가 잘 살피지 못한 탓이었다. 강경과 제술에 다 합격되고도 떨어진 자가 2인이다. 이들을 아울러 뽑고 싶지만 합격과 불합격이 전도된 자가 22인이나 되어 일관성이 없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7분 이상의 점수를 받은 자만 뽑기로 결정한 것이다. 합격되었다가 떨어지고 떨어졌다가 합격된 것은 중간에 아랫사람들이 미리 전파한 탓이지 정식으로 출방을 계하한 것은 아니었다. 근래 있었던 일의 전말이 이러한데, 새로 임명된 사간(司諫)이 모를까봐서 상세히 이르는 것이다. 예부터 초시(初試)에는 파방(罷榜)한 적이 있지만 복시에는 파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미 의정부와 의논하여 아주 결정했으니, 이제 다시 변동시킬 수 없다. 초시의 강경(講經) 때에는 모두 착오가 없다가 복시의 출방 때 분요(紛擾)가 있었으므로, 내 의견은 강경에 합격된 사람 모두에게 다시 제술 시험을 보여 복시의 출방을 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통쾌해질 것으로 여겼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의정부와 되풀이 의논한 바 모두들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한 것 같지만 역시 파방이다. 유생에게 잘못이 없으면 예부터 파방시킨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시관이 명백히 못한 소치인데 파방시키면 뒷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했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 대저 우리 나라는 일을 함에 있어 반드시 전례를 원용(援用)하여 하고 있다. 그러다가 뒤에 조그마한 착오가 있으면 모두들 다투어 떠들어대면서 각기 요행을 바란다. 매양 파방시키려 하면 사람들이 불신하게 되고 국시(國試)가 안정되지 않아 뒷폐단이 막심하게 된다. 이 역시 큰일이기 때문에 파방시키지 않았다. 일이 당초에 잘못되었으면 열 번을 바꾸는 한이 있어도 옳게 만들어야 된다. 지금 이 정식 출방은 모두가 처음 복시의 전규(前規)에 따르도록 명한 데 의거하여 발표한 것이다. 중간에 미리 전파한 잘못으로 혼란을 빛은 것을 혐의하여 파방시킬 게 뭐 있겠는가.“
○乙巳/司諫宋純啓曰: "設科取人, 國之重事. 一開苟且之端, 則後來之弊無窮矣. 當初只以付到記儒生, 特設別試, 非但有違於廣取人才之意也. 別試、覆試之事, 古無其例, 而又至於出榜之際, 事甚顚倒. 或中者還落, 或落者還中, 兩榜之出, 人莫適從, 人情不快, 物論亦多, 此實有異於祖宗朝愼重科擧之意也. 不獨一時之失, 必有後世之議, 諸速罷榜, 以快公論." 傳曰: "初欲以付到記儒生, 爲庭試, 及其杪錄, 則儒生之數, 至于二千餘人, 難以庭試. 而如此儒生多集之時, 古有特設別擧之事. 況國有大慶, 陳賀頒赦之端, 取人不爲無名也. 予以此意, 議于大臣, 大臣之意皆如此, 故定爲別擧. 考其前例, 則乙卯年有覆試之例, 故據此而又爲覆試. 何謂古無其例哉? 依式年覆試規矩, 而取之, 成命已下, 而出榜之日, 試官只書講分、製分, 而啓之. 大抵式年覆試, 則一等入格人講分、製分, 俱錄于名紙, 不開皮封而啓之, 【式年覆試, 則有前定之數, 故試官先自開封, 而出榜例也. 此傳製之意, 未可知也.】 此則不然, 故予未知其所啓之意, 只慮古者式年覆試, 一等入格人, 講分、製分俱書之例, 而但取講、製俱入格之人, 此非各別變例也. 俄而試官因科擧不密之敎, 而待罪之際, 有言曰: ‘依式年覆試例, 而取之, 已有承傳. 式年覆試, 則從分數次第, 而用之, 故如此書啓.’ 云. 予聞此言, 卽悟而駭焉. 然則間間柚出人, 而掛榜, 有違於已下承傳之意, 亦有違於覆試前規. 恐有後議, 卽停出榜, 仍命不用之事, 而議之于三公, 則三公皆以爲: ‘當從覆試前規, 而用之.’ 云, 故卽從分數次第, 而出正榜耳. 命停出榜之後, 試官等不及禁止, 而下人先播草榜, 泛濫莫甚. 榜單子亦未啓下, 其先播草榜之意, 自上專莫之知也. 何謂兩榜倂出哉? 此則儒生無一所失, 而上下不能致察之故也. 講、製俱中, 而落者二人, 雖欲倂取, 然則至於二十人. 恐爲猥濫, 故定其七分以上而取之. 其或中、或落者, 中間下人之所先播也, 非啓下正榜也. 近者之事, 首尾如此. 予恐新司諫不知, 故詳言之耳. 自古初試有罷榜之時, 覆試無罷榜之時, 故已與議政府同議, 而大定, 今不可搖動也. 初試謹經之時, 皆無錯誤, 而只於覆試出榜之時紛擾, 故予意欲以講經入格者, 全數更製, 而出覆試榜, 則物情可快, 將此意, 與議政府, 反覆議論, 則皆曰: ‘此雖似當, 亦是罷榜也. 儒無所失, 則自古無罷榜之時. 此乃試官不明之所致也, 罷榜則恐有後弊.’ 云. 予意亦以爲然. 大抵我國之事, 必援例爲之, 後有小錯, 人皆爭喧, 冀望僥倖. 每欲罷榜, 則人情不信, 國試不定, 後弊莫甚. 此亦大事, 故不罷也. 事若有誤於初, 則雖十易之, 終歸於一可也. 今此正榜, 一依初命覆試前規, 而出之, 則又何嫌於中間先播之失, 而紛亂罷榜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