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다음 왕이 될 세자가 아버지 왕에 의해 죽은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 중에도 뒤주에 갇혀 죽은 경우는 사도세자가 유일하다.
조선 역사상 최장수를 기록한 영조는 재위기간 52년으로 83세에 승하하였다. 그의 둘째아들이 사도세자인데 그의 형 효장세자는 그가 태어나기 전 10살에 죽어 사도세자는 돌이 지나자 곧 세자로 책봉됐다.
그런 세자도 당쟁의 희생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으니 28세 때인 1762년이었으며 아드님인 정조는 세손으로 11살이었고 그해 초 가례를 올려 세손빈을 맞았다.
음력으로 윤5월 13일 찌는듯한 한여름, 폐세자되어 뒤주에 갇힌 세자는 8일만인 21일 굶어죽었다. 영조는 곧 후회를 하며 세자를 복위시키고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의미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현재 서울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에 묘를 조성하고 수은묘라 했다.
영조가 승하하여 조선 제 22대 왕이 된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영우원´이라 하고 ´장헌´이라는 시호를, 경모궁이라고 사당을 올렸다. 즉위한 지 13년이 되던 1789년, 정조는 금성위의 상소로 초라한 아버지의 묘를 천하 명당으로 알려진 이곳으로 천장하고 ´현륭원´이라 했다.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 붙이는 칭호이며,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왕의 사친으로 왕릉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엔 ´원´, 그리고 나머지 왕실가족의 무덤엔 ´묘´라고 하였기 때문에 사도장헌세자의 무덤은 ´현륭원´이라 했던 것이다. ´현륭´이라 함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은혜에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의미이다.
올 6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후 이곳 융건릉엔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세계유산을 보기 원하는 일본인들의 심리와 더불어 드라마 ´이산´의 영향으로 그들은 곧장 건릉으로 가서 보고 간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왕릉처럼 꾸며드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조선 왕릉은 재실부터 홍살문까지의 진입공간과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의 제향공간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능상공간으로 나뉜다.
융릉의 진입공간에는 진달래와 소나무, 참나무등이 숲을 이루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데 이곳의 주산이 화산(花山)이어서 정조께서 산의 이름에 걸맞게 늘푸른 나무뿐 아니라 계절을 느낄 수 있는 활엽수와 꽃을 심도록 하여, 봄이면 진달래가 아름답게 핀 모습인 ´화산두견´은 수원8경 중 4경에 해당한다.
왕릉에는 돌다리가 있어 금천교라 하는데 융릉 금천교는 원래 정조의 원행로 중 지금의 비행장 안에 있던 대황교를 이곳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1970년대 비행장 활주로 공사로 그곳의 주민들이 보상금을 받고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이 다리도 묻히게 되어 임금님이 딛고 가셨던 다리를 우리가 보존하자는 주민들의 마음으로 성금을 걷어 이곳 융릉 입구에 갖다 놓은 것이다. 원래 난간이 없던 것을 만들고 ´원대황교´라 새겨놓았다.
돌다리를 건너면 둥근 연못이 보이는데 다른 왕릉과 달리 이곳의 연못은 고유의 이름이 있으니 ´곤신지´이다. 융릉의 곤신방향에 있는 연못이라는 것으로 그 모습이 원형인 것 또한 특별한 점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어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네모나다´는 사상을 나타냈는데 융릉의 연못은 둥글게 만들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한 후 정조는 초장지에서 천장하여 현재의 건릉에 합장으로 모시는데 그 후 그려진 지도에서 우리는 4개의 인공산을 볼 수 있고 그 인공산에 구슬´珠´자를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곤신지와 더불어 여의주5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버지 사도세자가 왕이었으면 하는 정조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융릉 능상에 가보면 문인석의 머리에 이전까지의 복두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금관이 씌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마 부분에 봉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용과 봉황은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것도 정조의 특별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무인석은 원래 왕릉에만 세웠지만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에 무인석을 세웠다. 그리곤 문인석과 무인석 각각 말을 한 필씩 거느리는데 이곳 융릉은 한 마리만 세웠다.
조선 초기엔 왕릉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호석의 형태가 병풍석을 견고히 두르고 그 둘레에 난간석을 두르는 한 세트의 모습이었는데 세조의 유지로 광릉에서 처음으로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러나 그 후 왕릉에서 다시 병풍석과 난간석이 세워져 영조 재위 중 엄격히 정해지니 ´왕이 승하하면 난간석으로 한다´였다.
그래서 정조는 왕이 아니었던 아버지에게 난간석이 아닌 병풍석을 설치해 드렸다. 병풍석은 중간에 가운데 직사각형 부분을 면석이라 하고 12면의 귀퉁이 꺾어진 부분을 우석이라 하며 우석의 윗부분 밖으로 삐죽 나온 부분을 인석(引石)이라 한다.
우선 면석은 조선 초기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었고 우석엔 불교의식에 쓰이는 영저, 영탁이 새겨져 있다가 국조오례의가 정립되면서 우석에 구름문양으로 바뀌었다가 영조 때(1731, 7년) 16대 인조의 장릉을 천장하면서 면석엔 모란, 우석엔 연꽃으로 문양이 바뀌었다.
정조는 장릉을 모방해 현륭원 면석엔 모란, 우석엔 연꽃을 새겨넣었으며 독특한 형태의 연잎에 연꽃이 반만 핀 아름다운 인석(半開蓮)을 최초로 설치했다.
현재 현륭원이 아닌 융릉으로 불린다는 것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는 직계조상 4대조와 태조를 황제로 추숭하는데 직계 4대조에 사도세자가 포함되는 것이다.
사도세자에겐 정조 외에 3명의 아들이 더 있었으니 은언군, 은신군과 은전군이다.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여 은언군의 손자(강화도령)가 왕이 되어 철종, 철종이 아들없이 승하하자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갔던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의 손자 명복이 조대비 즉 익종의 양자가 되어 왕이 되니 곧 고종이다.
익종은 효명세자로 정조의 손자로 할아버지 정조를 흠모하며 세자 수업을 열심히 하다가 22세에 죽었으며 부인인 신정왕후가 조선 후기 수렴청정을 하며 실권을 잡았다.
그래서 1899년 광무3년 고종은 자신의 직계조상인 사도세자를 우선 왕으로 추존 장종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현륭원은 ´륭´을 따서 융릉이라 하게 되었다. 또한 장조의 황제로 추숭되어 혜경궁도 헌경의황후로 추숭되었다.
이 내용은 비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은 왕릉의 문패에 해당하며 정자각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융건릉은 두 곳 모두 합장릉인데 세종대왕의 영릉은 합장릉임을 두 개의 혼유석으로 능에 가서도 알 수 있지만 이곳은 혼유석이 한 개이므로 비석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왕릉의 비석에서 우리는 그 당시 우리나라의 국호, 왕의 묘호, 왕비 세자의 시호를 능호와 함께 확인 할 수 있다.
현륭원 비 : 조선국(朝鮮國) 사도장헌세자현륭원(思悼莊獻世子顯隆園) 융릉비: 대한(大韓) 장조의황제융릉(莊祖懿皇帝隆陵)헌경의황후부좌(獻慶懿皇后祔左) 융릉비의 부좌는 왕의 왼쪽에 왕비가 모셔졌다는 것으로 왕이 남면하고 있으므로 동쪽에 왕비가, 서쪽에 왕이 모셔졌다는 의미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를 이곳에 옮겨 모시고 승하할 때까지 매년 참배를 왔다. 효종 승하시 수원부 관아가 있어 왕릉으로 쓰지 못했던 것을 시대에 맞게 현재의 수원이 위치한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고 왕의 고향으로 여겼으며 화성을 쌓았다.
현륭원 옆의 갈양사 터에 아버지를 위한 원찰을 중건한 후 용주사라 했는데 천장한 이듬해 기다리던 왕자가 태어났다.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지만 할아버지 영조와의 의리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정조는 왕자가 14세가 되기를 고대했다.
1804년, 그해는 왕자가 14세가 되는 해이자 혜경궁이 7순이 되는 해이다. 조선 역사상 14세가 되면 왕이 직접 정치를 하였다. 정조는 그 해가 되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과 함께 수원에 가서 지내려고 했었다.
아들 왕에게 할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도록 하면 정조는 꿈을 이루고 할아버지 영조와의 의리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1800년 그 때가 오기 전에 정조는 등의 종기가 악화되어 승하하고 그 꿈은 약 100년 후 고종 때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조는 살아서 다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 아버지 곁에 묻혀 하고 싶다고 하여 현륭원 동쪽 해좌에 모셨다가 21년 후 왕비가 승하하여 현재 위치에 천장하여 함께 모셨다.
정조에 의해 정성껏 조성된 융릉과 32년 후 조성된 건릉의 차이는 우선 봉분을 둘러싼 호석이 융릉은 병풍석이고 건릉은 난간석이라는 점과, 석수의 숫자의 차이이다. 석마, 석양, 석호는 융릉은 각 2마리씩이며 건릉은 그 두 배인 4마리씩이다.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 왕의 효심으로 최고로 조성되고,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염원에 의해 함께 조성된 융건릉에서 우리는 효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곳은 왕릉 참배와 동시에 효를 실천하는 교육의 현장이다.
글/이은례, 융건릉문화관광해설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