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물 위의 정원: <수련> 시리즈
모네의 대성당 회화가 1895년 미국의 보스턴과 시카고, 런던에서 소개되었으며, 파리의 오르세이 뮤지엄에서도 다섯 점이 소개되었습니다. 1876년에 2백 프랑이었던 그의 작품 가격이 1890년대 초에는 3천 프랑, 1895년에는 다섯 배로 뛰어 1만 5천 프랑이 되었고, 1921년에는 20만 프랑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모네의 경제사정은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삶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는 지베르니 집에 딸린 과수원을 다섯 명의 정원사를 고용해 연못으로 개조하여 수련을 심고 연못 중앙에는 일본식 둥근 다리를 놓아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련은 파리에서 예술품 중개상 일을 하는 일본인 다마다 하야시로부터 구한 것들입니다.
사진: 이론식 다리 옆에 있는 클로드 모네
사진: 다리
모네의 <지벨흐니의 모네 정원 Le Jardin de Monet a Giverny>, 1900, 유화, 81-92cm.
옥타브 미르보의 소개로 알게 된 정원사 페리쿠스 부류가 정원을 가꿨습니다. 모네는 이 정원에서 찾은 많은 모티프로 화려한 자연의 경관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부류를 신뢰했고, 수완이 좋은 부류는 정성껏 정원을 가꿨습니다. 자연과 물을 좋아한 모네는 정원을 산책하면서 모티프를 찾아냈습니다. 부류는 모네보다 장수했으며, 1949년 11월 아흔두 살 때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는 매년 거르지 않고 오랑제리 뮤지엄으로 가서 모네의 수련화를 감상했습니다. 그는 수련의 연못에 번식하기 쉬운 수초나 조류 그리고 때로는 수련을 건져냈고 낙엽 등의 침전물을 긁어내ai 연못을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그래서 아치형 다리는 거울과도 같은 연못에 말게 반영되었습니다.
사진: 모네와 귀스타브 제프루아
사진: 모네와 뒤랑-뤼엘의 가족, 1900년 9월
사진: 수련 연못
일본식 다리가 그의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99년부터였습니다. 그는 연못을 “물 위의 정원”이라고 불렀습니다. 1901년에는 근처에 있는 가로세로 4km나 되는 땅을 더 구입하여 정원을 늘리면서 연못도 더욱 확장해서 연못이 네 배로 커졌습니다. 정원에는 대나무와 일본 사과나무 그리고 체리나무도 있었습니다.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꽃이다. 항상, 항상 꽃이 내게는 필요하다.”
모네가 이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가 그린 많은 꽃 그림을 보아왔습니다. 그는 늙었고, 이제 밖으로 나갈 기력도 없어 갖가지 꽃으로 가꾼 정원에서 마지막 대작에 전념했습니다. 미르보가 지베르니로 그를 자주 방문해 수련이 있는 연못가를 함께 산책했습니다.
모네의 <수련 연못>, 1899, 유화, 81-100cm.
모네의 <수련 연못>, 1900, 유화, 89-100cm.
모네는 정원사들에게 온실을 만들도록 하고 꽃의 종류를 늘렸으며, 잡지와 백과사전을 통해 꽃에 대한 지식을 구했습니다. 그가 스케치한 꽃의 종류와 원예가들에게 주문한 목록만 보아도 꽃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모네는 원예잡지를 열렬히 애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요청으로 원예가의 주소를 알려 줄 정도였고, 장미의 이름들을 적어주며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진홍색 덩굴장미의 이름은 ‘바라고’라고 하는 등 꽃에 대한 박식함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파리에는 여러 나라로부터 수입한 각종 희귀한 꽃이 많았습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카메이도 텐진 신사 내부>
모네의 연못에 만든 다리는 일본 화가의 그림에 나타난 모습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모네는 일본 회화에 관심이 많아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우타마로와 히로시게의 판화를 수년 동안 구입했습니다.
1893년에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한 일본 컬러판화전을 보고
그는 감동받았습니다. 모네는 1899년부터 수련을 중점적으로
그리기 시작해서 1900년에 최소 20점 그렸으며,
2년 후부터는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캔버스의 사이즈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련과 꽃을 그렸습니다.
1900년 말 모네의 최근작 25점이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소개되었으며,
절반가량이 연못에 있는 수련화였습니다.
모네의 <수련과 일본식 다리 Le Bassin aux Nympheas>, 1899, 유화, 90.5-89.7cm.
님페아Nympheas는 모네가 연못에 키운 변종 백수련입니다.
모네의 <수련 연못 Le Bassin aux Nymoheas>, 1899, 유화, 93-90cm.
모네는 연못 가장자리에 이젤을 세우고 다섯 가지 색이 찬란한 연못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1899-1900년 그가 주로 그린 것들은 정원과 연못이었습니다.
그의 수련화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연못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지베르니로 와서 모네의 연못을 직접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연못사진이 사람들에게 소개된 건 1901년부터였습니다. 모네의 작품은 프랑스 밖에서도 널리 알려졌고, 브뤼셀, 런던, 베를린, 스톡홀름, 드레스덴, 베니스 그리고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해외 여러 전시장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지베르니에 프랑스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왔으며, 그들은 성지를 방문하듯 모네의 집과 뜰을 둘러보았습니다. 지베르니로 모네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 콜렉터, 러시아인 세르게이 슈추킨, 존 싱어 사전트, 시슬레, 피사로, 베르테, 말라르메, 로댕, 르누아르, 세잔, 제프루아, 미르보, 클레망소, 자크 에밀 블랑슈, 피에르 보나르 그리고 출판업자 폴 갈리마르, 콩쿠르 아카데미 회원 다수도 있었습니다.
모네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은 뤽상부르 뮤지엄이 모네의 작품 여러 점을 사들인 일입니다. 뮤지엄 측은 1896년 카이유보트가 수집한 모네의 그림 8점을 구입했고, 1906년에는 모로 넬라통이 수집한 작품을 추가로 구입했으며, 1907년에는 <루앙 대성당, 갈색의 조화>, 1921년에는 50년 전에 살롱에서 낙선작 <정원의 여인들>을 소장했습니다. <루앙 대성당, 갈색의 조화>와 <정원의 여인들>은 몇 년 후 프랑스 정부가 매입하여 루브르에 영원히 소장했습니다. 외국의 뮤지엄들도 다투어 모네의 작품을 소장했습니다.
모네의 <님페아 Les Nympheas>, 1903, 유화, 81-99cm.
모네의 <님페아 구름이 낀 날 Le Bassin aux Nympheas>, 1903, 유화, 74.3-106.7cm.
모네는 일기가 나쁜 날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자신이 원하는 날씨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데서 자연을 더욱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일기가 나쁜 날 더욱 자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네의 <수련>, 1904, 유화, 90-92cm.
모네의 <수련>, 1905, 유화, 90-100cm.
모네의 <수련>, 1905, 유화, 90-100cm.
모네의 <수련>, 1907, 유화, 92-73cm.
모네의 <수련>, 1907, 유화, 100-81cm.
이제 수련은 모네의 특허와도 같은 작품이 되어 어린 학생들도 수련 하면 모네를 말할 정도였습니다. 1904년 이후부터 그의 수련화에서 연못 밖의 배경이 점차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배경은 없고 수련들로만 캔버스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런 작품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수련이 화면에서 그토록 커다랗게 나타난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평론가는 그의 작품을 두고 ‘위아래가 뒤집힌 풍경화 Upside-Down Landscape’라고 했습니다. 1902년 파리에서 활약한 미국인 화가 메리 카삿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가 물에 반사된 것들을 시리즈로 그리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1903-4년 이후 모네는 제2의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연못의 수면을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고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련을 근접해서 바라보며 또 다른 공간에 떠 있는 모습들로 그렸습니다. 뒤랑-뤼엘은 수련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좋자 모네에게 다음 전시회를 위해 더 그리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모네가 전시회를 자꾸 연기한 까닭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나빠진 시력 때문입니다. 1909년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다시 수련화를 소개할 때는 모네가 직접 전시회 명칭을 ‘수련, 수상풍경 연작’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1903-08년에 그린 수련을 48점 소개했는데 1903년의 것이 1점, 1904년의 것들이 5점, 1905년의 것들이 7점, 1907년의 것들이 21점, 1908년에 그린 것들이 9점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제프루아를 포함하여 로맹 롤랑, 르미 드 구르몽, 루시앙 데스카브, 로제 마르크스 등 프랑스의 내노라하는 평론가들이 일제히 격찬했습니다.
뒤랑-뤼엘의 그랜드 살롱 가구
롬 가 35번지에 소재한 폴 뒤랑-뤼엘의 그랜드 살롱을 모네가 장식했습니다.
세잔처럼 모네도 말년에 정물화를 그렸는데, 정물화는 화가가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는 장르라서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 정원에서 수련을 그릴 수 없을 때 집안에서 그릴 수 있는 그림이기도 했습니다. 뒤랑-뤼엘이 자신의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한 패널 그림을 의뢰했을 때 모네는 모두 36점을 그리면서 29점은 꽃을 주제로, 나머지는 과일을 주제로 그렸다. 그는 뒤랑-뤼엘을 위해 20-30점을 더 그린 것 같은데, 그것들은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1908년 가을에 모네는 알리스와 함께 베니스를 여행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여행에서 피로를 느꼈고 68세의 모네는 시력이 아주 나빠졌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베니스에서 많은 스케치를 한 후 집으로 가져와 완성했습니다.
모네의 <상 조르조 마지오레, 베니스 San Giorigio Marggiore, Venice>, 1908, 유화
베니스에 대한 추억을 남기고 알리스는 1911년 5월 19일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리스가 죽자 모네는 한동안 작업을 하지 못하고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그는 알리스와의 여행을 추억으로 되새기면서 베니스에서 그린 그림 29점을 완성시켜 1912년 5월에 베른하임 주느 화랑에서 소개했습니다. 폴 시냐크는 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고 감성만을 표현했다고 평하면서 모네의 베니스 그림들에 대단히 감동했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모네는 베니스 풍경들을 완성시킨 후 다시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작업은 전과 같지 못했습니다. 1912년 7월 그는 오른쪽 눈이 실명되고 왼쪽 눈의 시력도 나빠지기 시작한 걸 알았습니다. 전문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수술을 거부했습니다. 얼마 후 오른쪽 눈의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