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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南原] - 문화와 전통이 어우러진 도시
동쪽으로 경남 함양군·하동군, 서쪽으로 임실군·순창군, 북쪽으로 장수군, 남쪽으로 전남 구례군·곡성군에 접한다. 광한루·교룡산성·남원성·만인의총·충렬사·황산대첩비·실상사 등의 역사유적과 지리산의 뱀사골계곡·달궁계곡·구룡계곡 등 이름난 경승지가 많아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다
남원 문화관광 http://tour.namwon.go.kr/main/main.action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광한루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광한루원(명승 제33호) http://www.gwanghallu.or.kr/
국립민속국악원 http://www.ntmc.go.kr/
남원 항공우주천문대 http://spica.namwon.go.kr/
실상사[實相寺] http://www.silsangsa.or.kr/
영상포엠 한국 100경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371111
춘향테마파크
http://www.namwontheme.or.kr/namwontheme/
혼불문학관 http://www.honbul.go.kr/
국악의 성지 운봉읍 화수리 산 1번지
광한루원(명승 제33호) http://www.gwanghallu.or.kr/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광한루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리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또한 누원 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등을 뜻하는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烏鵲橋)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광한루원 청허부(淸虛府) 광한루원의 정문으로 월궁의 출입문을 상징하는 청허부입니다. 이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세계로 발을 딛게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문이라고 합니다.
광한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
1877년(고종 14)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남원부사 이용준이 건물 보수로 고민하고 있을 때 남원 수지면에 살던 추대목이 북쪽 누각을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익루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본루 못지않게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전에는 오르내리던 사다리만 있었으나 이 현관을 만듦으로써 우리나라 누각에 설치한 최초의 현관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부터 18년 동안은 광한루가 수난의 시대를 맞게 되는데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누마루 위는 재판소로, 아래 부분은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재판소와 감옥을 만들기 위해 징발된 돌기둥과 나무 기둥은 문고리를 설치한 흔적으로 군데군데 패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복 이후 재판소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고 지역 유지들이 다시 징발된 재료들을 가져다가 수차례 크고 작은 보수를 하면서 누각을 관리하였다
광한루원 오작교 하늘에 사는 옥황상제의 딸 베짜는 직녀와 미천한 소몰이 견우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게으름으로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 동쪽과 서쪽으로 격리되어 1년에 한번 칠월칠석날 다리도 없는 은하수에서 만나도록 하였다. 둘의 만남이 너무 애달파 이 날에는 지상의 까치와 까마귀가 모두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만들어 둘을 만나게 했는데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다리를 밟고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눈물이 비를 만들었다. 칠월칠석날이 되면 비가 오고 까마귀와 까치를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까치의 머리가 "흰 것은" 오작교가 된 까치의 머리를 견우와 직녀가 밟아 벗겨졌기 때문이라 고한다. 이 같은 하늘나라 견우와 직녀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이도령, 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하다. 그래서 오작교는 까마귀오(烏), 까치작(鵲), 다리 교(橋) 자를 쓴다
광한루원 완월정 지상의 사람들이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나라를 즐기기 위해 지은 것으로 달이 뜨는 동쪽을 향해 있는 수중누각이다. 춘향제 행사의 주요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민족의 명산 지리산과 판소리의 본고장 남원에 자리한 국립민속국악원은 전통 음악 문화를 호흡하고 느끼며 새로운 음악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마련된 문화공간이다. 1992년 3월 개원한 이래 다양한 공연, 교사국악연수, 민속악 자료 발굴 및 학문적 정립을 위한 연구 활동을 통하여 전통음악문화의 보존, 전승, 발전을 위한 중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남원 허브밸리
남원 항공우주천문대 http://spica.namwon.go.kr/
동편제 탯자리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삼아 섬진강 동쪽에서 부른 것이 동편제이고,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삼아 섬진강 서쪽에서 부른 것이 서편제였다.
판소리 창자의 음악적 역량이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완성된 음(성음)을 얻었다는 뜻으로 득음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소리를 자연에 가깝게 묘사할 수 있다고 한다.
만복사지
반야봉(般若峰)
뱀사골계곡/뱀사골 실비단폭포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새벽녘이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큰 뱀이 송림사에 왔다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이에 서산대사가 뱀을 따라 올라 가보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뱀소에 죽어 있어 뱀의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고 하였고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를 일러 반선(半仙)이라 부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반선(伴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설속에 등장한 송림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며 그 터에 전적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용이 승천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는 요룡대(搖龍臺)다. 요룡대를 굽어보는 와운교를 건너 곧장 도로를 따라 가면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와운마을. 워낙 산세가 험해 지나가던 구름도 아예 누워서 쉬고 간다는 말이 있다. 마을 뒤편 능선 끝자락에는 노송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24호인 지리산천년송이다. 요룡대에서 탁용소(濯龍沼)를 지나 금포교까지는 뱀사골에서 가장 수려한 계곡미를 자랑한다. 탁용소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다가 떨어져 파였다는 곳으로 이리저리 파인 암반 틈새로 푸른 계곡수가 대조를 이룬다.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의 뱀소, 바위 틈 물길이 병을 닮았다는 병소(甁沼), 병풍 같은 바위 사이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흐르는 병풍소(屛風沼), 소원 들어주던 고승의 영험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재승대(再承臺) 등 신록이 우거진 계곡을 오르다보면 푸른 숲과 푸른 물에 온몸이 푸르게 물든다. 해발 800m 지점에 자리한 간장소는 그 옛날 보부상들이 하동에서 소금짐을 짊어지고 화개재를 넘어오다 빠져 이름이 붙었다.
송흥록[宋興祿].박초월[朴初月] 명창 생가지
박초월[朴初月] 호 미산(眉山). 전남 순천 출생. 10세 때 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로 옮겨, 아영보통학교 4년을 수료한 뒤 김정문(金正文)에게 사사하고, 16세 때 한말의 5대 명창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들어갔다. 17세 때 전주에서 열린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부터 유창하면서도 무게 있는 소리로 이름을 떨쳤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실상사[實相寺] http://www.silsangsa.or.kr/
도의는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실상사는 ‘구산선문(신라 말과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아홉 파(派)) 최초 가람’으로서 한국 선풍(禪風)의 발상지입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를 타고 내려온 우리 힘찬 정기가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실상사를 세웠다.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실상사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다고 한다.
실상사 석장승[石長]
장승은 흔히 지역간의 경계로 세우거나 이정표 구실을 하고, 혹은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해탈교 건너기 전에 홀로 남아 있는 장승엔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莎逐鬼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다. 또 해탈교를 건너면 보이는 두 장승 중 왼쪽에 있는 장승이 대장군(사진:大將軍)은 1725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대장군보다 6년 뒤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실상사 백장암[百丈庵]
백장(百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백장대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청규를 만들고 실천한 승려이다.
백장골 변강쇠 타령 중 팔도의 장승이 모여 장승회의를 했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백장골은 예부터 부부의 금슬을 위해 기원을 하는 곳이며, 아기를 점지 받아가는 곳으로 계곡의 가늘고 길게 늘어져 흐르는 물줄기가 내려와 웅덩이를 만드는 지형은 남자의 힘이 쏘에 모여 기를 생성하는 형상이다
변강쇠 백장공원은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한 편인 「변강쇠 타령」을 상징화한 공원이다. 백장골이라는 명칭은 변강쇠가 백장골 곳곳에 있던 장승들을 뽑아 땔감으로 사용하자 크게 노한 대방장승이 팔도의 백장승 신(神)을 모아 변강쇠에게 벌을 내린 데서 유래한다.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百丈菴三層石塔) [국보 제10호]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여원치[女院峙]여원정 운봉읍과 이백면 사이에 있는 고개
여원치 고갯마루는 지리산의 시루봉을 비롯한 봉우리들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며, 고개 남쪽으로 국도 24번이 지나가는데 도로변에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원치마애불상(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62호)이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을 때 이성계의 꿈에 어느 노파가 나타나 적과 싸울 날짜와 전략을 알려주었는데 그로 인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한다. 이성계는 꿈속의 노파가 고갯마루에서 주막을 운영하다가 왜구의 괴롭힘으로 자결한 주모였다고 믿고 노파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여원(女院)'이라 불렀는데 그때부터 이 고개 이름이 여원치(여원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연재'라고도 부른다.
오리정[五里亭] 사매면 월평리 27
이곳은 고대소설 《춘향전》에서 남원 기생의 딸 성춘향과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백년가약을 맺고 행복하게 지내다가 남원부사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자 부친을 따라 남원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몽룡이 춘향과 애절하게 이별의 정을 나눈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운봉 동편제마을(비전마을)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이 인월과 이웃한 운봉읍 비전마을이다. 지명만 놓고 보면 언뜻 외래어처럼 들리지만 ‘비(碑)가 전해져 내려온 마을’ 혹은 ‘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해서 그러한 이름이 되었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와 휘하 장수들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친 역사적인 곳이자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마을이기도 하다
동편제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판소리의 중시조라 불리며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은 송흥록(1780년)이 태어난 곳이다. 송흥록은 철종 10년(1859년) 정3품 통정대부 벼슬에 제수된 명창으로 계면조와 진양조의 완성, 메나리조 도입 등 모든 가사를 집대성해 판소리를 민족음악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운봉 서어나무 군락지
서어나무는 우리나라 소나무처럼 흔한 나무이고, 재목으로서는 쓸모가 없는 나무라고 한다. 심지어 땔감으로도 쓸 수 없다고 한다.
남원시 운봉읍 해발 500m 고원에 위치한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은 이런 기후와 지형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이다. 수령 2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6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20여 미터 높이로 가지런히 병풍을 치고 마을을 지키고 있다. 정확히 누가 언제 심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마을 북쪽 어귀에 조성된 숲은 행정마을 주민들에겐 찬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고, 질병과 나쁜 기운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액막이 숲이다.
운봉장승
남원에 산재한 장승은 모두 23기로, 동부 산간 지역에 세워져 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가 수많은 전투를 하였던 접경 지역인 만큼 마을의 생존권이 달린 존망의 기로에서 마을 공동체의 생명을 지켜 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운봉주조
<운봉주조>의 막걸리를 빚는 암반수. 지리산 둘레길의 지하 200m에서 뽑아내는 이물은 막걸리 빚기 외에 이곳에 오는 모든 분이 얼마든지 지리산의 좋은 물을 경험할 수 있게 끔,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운봉 황산대첩비지[南原 荒山大捷碑址]
이 비는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파손·도괴되었는데, 1957년 재건하였으나 비신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지고 비문 또한 거의 마열되었으므로, 오석(烏石)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비를 문화재로 지정하였던 것을 해제하고 대신 비지를 사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운봉흑돼지
고랭지 선선한 기후에서 키워낸 토종돼지의 육질은 고소하면서도 탄력 있는 옛 풍미를 간직하고 있다. 운봉읍 소재 황산토종 정육식당이 맛집으로 통한다
식당 바로 건너편이 지리산 둘레길 출발점이기도 해 널찍한 식당 안은 활짝 핀 철쭉꽃처럼 울긋불긋 나들이 차림의 손님들로 가득 하다
지리산 바래봉 남원시 운봉읍
바래봉 아래 주차장 옆으로는 허브식물원과 지리산 자생식물 전시실이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에 자생하는 1,450여 종의 식물 중 400여 점을 압화로 제작 전시 중인 지리산자생식물전시실은 생동감 넘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좋다
지리산 샛집
회덕마을 샛집 회덕마을은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가 피난하여 살게 된 것이 시초. 평야보다 임야가 많아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음. 수명은 40년이나 된다. 새집(샛집) 억새를 엮어 지붕을 이은 집.
지리산 정령치(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이도령이 한양으로 영전해 가는 부친을 따라 떠난 후 춘향은 후임 사또에 의해 온갖 고초를 겪게 되고, 죽기 직전에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에 의해 다시 행복을 찾게 된다.
춘향과 이도령의 아름다운 사랑과 정절, 잘못된 사회상에 항거하는 불굴의 정신 등을 널리 선양하고자 열리는 춘향제는 전국 최고의 향토 문화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춘향제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문화관광 축제로 선정될 만큼 전국최고의 전통 민속축제로 인정받으며 세계적인 사랑예술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춘향골 남원의 광한루를 중심으로 각종 행사가 펼쳐진다.
제 1회(1931년) 춘향제는 춘향사당을 짓고 단오(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남)에 처음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사진:1963년 남원 춘향제 기념식>
춘향테마파크 http://www.namwontheme.or.kr/namwontheme/
'만남의 장'에는 종합안내소와 전통문화체험관·분수대·춘향마당·종합상품관, '맹약의 장'에는 옥지환과 돌탑·맹약단·언약판 등의 조형물이 있다. '사랑과 이별의 장'에는 영화 《춘향뎐》의 촬영세트장과 부용당·월매집·공방, '시련의 장'에는 동헌·옥사 등이 조성되어 있다. '축제의 장'은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조성한 휴식광장이다.
사랑의 자물쇠 기원은 이탈리아 로마의 폰테밀리오 다리에서 사랑하는 연인끼리 사랑의 자물쇠를 걸면서 시작돼 전 세계적으로 확산했다. 두 사람이 사랑을 약속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버리면 그 사랑이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혼불문학관 http://www.honbul.go.kr/
1930년대 전라북도 남원의 몰락해 가는 양반가의 며느리 3대(代) 이야기를 다룬 최명희(崔明姬)의 대하소설.
혼불[방언] 영혼]을 비유하는 말.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크기는 종발만 하며 맑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한다
수명이 다하여 사람이 죽을려면 미리 혼불이 그집에서 공중으로 나가는데 이 불을 말한다. 남자는 대빛자루 모양의 길고 큰 불덩이가 나가고, 여자는 접시모양의 둥글고 작은 불덩이 가 나간다
흥부골자연휴양림
덕두산(德頭山, 1,150m)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휴양림에서 덕두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자락에 수령 약 55년의 잣나무 군락이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좋고, 경관 또한 뛰어나다. 덕두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약 30분 정도 등산하면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1,167m)에 닿을 수 있다.
흥부마을
형인 박첨지는 부자임에도 인색하였고, 동생인 춘보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다 부자가 되어 이웃에 많은 선덕을 베풀었다는 내용이다
인월면 성산리에는 ‘신털바위’, ‘주막거리’, 흥보가 큰 부자가 되어 제비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만든 다리라는 ‘연상교’, 놀부의 묘에 해당하는 ‘박첨지 묘’, 흥보가 볏단을 쌓아놓고 타작한 마당인 ‘박첨지 텃밭’, ‘서당터’, 홍보가 눈·비가 많이 와서 산제바우까지 못 갈 때에는 이곳에서 산에 절을 하였다는 ‘독배기’, 산제를 지냈던 제비봉 아래 골짜기인 ‘살제바우골’ 등이 남아 있다.
성산리가 흥부의 출생지라는 사실을 가장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이 마을에서 전래되고 있는 '박첨지 설화'이다.
'박첨지 설화'는 '흥보전'과 내용이 비슷하다. 박첨지는 부자였지만 아주 인색하여 재물만 탐하여 소작인들과 이웃을 혹독하게 괴롭혔다.
그는 또 하나밖에 없는 동생 흥부를 내쫓았고, 다시 찾아온 동생에게 매만 주고 내쫓았다는 것이다. 그 뒤 함양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가 죽임을 당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의 시체조차 거두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부자가 된 흥부는 형의 참변 소식을 듣고 찾아와 동네사람들에게 돈과 토지를 나눠주고 해마다 형의 제사를 지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산리 주민들은 지금까지 매년 삼월삼짇날 박첨지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리마을에는 박춘보(朴春甫)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복덕가(福德家) 춘보설화(春甫說話)가 전해져 오고 있다. 흥부가와 춘보설화는 가난 끝에 부자가 된 인생역정, 선덕의 베품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유사하다.
성리가 흥부 정착촌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 마을에 전해오는 '춘보(春甫) 설화'가 있다.
'춘보 설화'는 보은(報恩)의 이야기이다. 춘보는 가난하여 허기가 져서 마을길에 쓰러졌는데, 마을의 어떤 사람이 업어다 흰죽을 먹이고 구해 주었다. 그 뒤 부자가 된 춘보는 자기를 살려준 사람에게 논 9마지기를 사주어 보답했다.
지금 마을에 있는 '흰죽배미'라는 논이 바로 그 논이며, 춘보가 쓰러진 곳을 '허기재'라고 한다. 삯꾼이 곡식을 지고 복성이재를 넘어오다 넘어져 곡식을 쏟았다는 얘기를 들은 춘보는 품삯을 후히 주고 쌀 한 섬도 주었다는 것이다.
성리 마을 주민들은 춘보가 어느 때 사람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부자로서 마을의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고 덕을 많이 베풀었던 선덕가(善德家)로 알고 있다. 춘보의 존재는 설화로만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매년 정월보름날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춘보제(春甫祭)', '춘보망제(春甫望祭)'라 불리는 제사까지 지내오고 있다면 그가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흥부축제[興夫祭]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는 《흥부전》의 발상지로 알려졌는데, 오래전부터 두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박첨지 설화와 춘보 설화에 근거하여 《흥부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에 남원시가 '흥부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기획하여 시민 화합을 위한 민속문화 행사를 열고 있다.
전야제를 시작으로 축제의 막이 오르며, 흥부전 창극공연·길놀이·가족달리기·농악경연대회·시민위안잔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갖추어져 있다.
--------------------------------기 타 -------------------------------
거문고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붙여서 만든 울림통 위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6줄을 매고 술대로 쳐서 소리낸다. 기원은 《삼국사기》에, 중국 진(晉)나라에서 보내온 칠현금을 제이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본디 모양을 그대로 두고 그 제도를 많이 고쳐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100여 곡을 지어서 연주하였더니 검은 학이 날아들어 춤을 추었기에 현학금(玄鶴琴)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뒤에 ‘학’자를 빼고 ‘현금’이라 하였다고 한다.
교룡산성
돌로 쌓은 이 산성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3.1km 가량에 이른다. 산 중턱에 성벽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으며, 동쪽에 계곡이 있어 그곳에 무지개형 출입문을 두었다. 성을 처음 쌓은 내력은 분명치 않으나. 그 터와 형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룡계곡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구룡 분소가 있는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펼쳐지는 심산유곡이다.
구룡폭포[九龍瀑布]
가파른 절벽에서 급하게 낙하하는 폭포가 아니라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바위를 타고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두 갈래의 폭포이다. 폭포 아래쪽에 형성된 작은 소(沼)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교룡담이라고도 한다.
남원 맛집 새집추어탕 1959년 남원시 조산동에서 ‘새집’(억새풀집)을 창립한 서삼례(하동 출신)가 처음으로 요천 은어 음식, 추어탕, 추어숙회 등을 선보였다.
전북 남원의 '새집'이라는 대폿집에서 미꾸라지를 갈아 속풀이용 국물로 내놓은 것이 인기를 끌면서 '남원추어탕'이 됐다. 서삼례 할머니가 처음 추어탕집을 시작할 때 지붕을 억새로 이었다는데서 '새집'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 100선 선정의 집
미꾸라지라는 이름은 미끈미끈한 비늘을 가지고 있어 표면이 미끄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미꾸리라는 이름은 밑구리, 즉 밑이 구리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미꾸리의 항문에서 기포가 방출되는 것이 꼭 방귀를 뀌는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원목기 남원의 목기는 지리산을 배경으로한 풍부한 임산자원과 더불어 사용되는 목재의 독특한 향과 함께 모양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목기 자체가 단단하여 더욱 유명하다. 남원의 목기는 옛날부터 왕실에 진상하는 진상품이었다. 목기의 역사는 신라고찰 실상사의 스님이 3천여 명이 넘었는데 스님들로부터 바리 만드는 기술을 전수한 것이 목기제작의 시초라고 한다.
달궁 계곡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서 3도에 걸쳐 전라북도 쪽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달궁 마을에서 동북으로 반선을 거쳐 내령으로 빠지는 계곡을 말한다.
민살풀이춤 살풀이춤은 원래 수건 없이 추는 거여. 명색이 춤꾼이라면서 수건 덕이나 볼라고 하면 쓰겄능가? 명주 수건 한 장 없이 맨몸으로 추는 것이 진짜 살풀이춤이라는 호남 민살풀이춤의 마지막 명인인 조갑녀(84)씨.
살풀이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을 벌였는데 그곳에서 무당이 즉흥적으로 나쁜 기운을 푸는 춤을 춘 것을 살풀이춤이라 하며 ‘도살풀이춤’‘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 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옥보고[玉寶高] 《삼국사기》에 따르면 옥보고는 지리산의 운상원(雲上院:雲峰)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의 기법을 닦고 30여 곡의 새로운 거문고가락을 지어 신라에 거문고가 널리 퍼지게 하였으며, 제자인 속명득(續命得)에게 그의 음악을 전하였다.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금송정(琴松亭)은 그가 거문고를 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피바위 인월면의 남천내에 있는 바위
고려 후기인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남부 지방으로 쳐들어왔는데, 그 괴수 이름이 아지발도(阿只拔都)였다. 이성계장군이 왜구 아지발도를 쏘아 죽이니 흘린 피가 바위 속까지 깊이 스며들어 지금까지 바위색이 빨갛게 물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산대첩비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싸움으로, 당시의 승리 사실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대첩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석이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비각·별장청 등의 건물을 지어 비석을 보호하도록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광한루원→만복사지→만인의총→신계리 마애불상→수지 몽심재→옻칠공예관(숙박)
주천면→ 육모정·춘향묘→구룡계곡→정령치휴게소→성삼재→노고단등반→달궁
→뱀사골→실상사→(숙박)흥부마을→질그릇박물관→황산대첩지·동편제탯자리→
여원치→혼불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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