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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026 (월)
- 전라북도 정읍시 ② - 다시 찾고 싶은 곳 (3-2)
* 단풍 많이 즐기고 계신지요?
지난번 (1) 내장산국립공원에 이은 제2편입니다.
내장산 단풍은 11월 둘째 주 정도가 피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던데
회원님들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요?
2.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습니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던
“황토현 전적지(黃土峴 戰迹地=사적 제295호)”의 자리인데 기념관과 전시물이
아주 잘 갖추어 있어서 한번 들러볼만 합니다.
1894년 갑오년 1월초에 시작된 농민전쟁은 약 1년간 계속되었는데 여기서
“동학”과 “동학농민전쟁”을 자세히 다루기에는 회원 여러분들이 대부분 내용을
잘 알고 계시고 또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다음 기회로 넘기고 관련된 중요한
내용 또는 널리 알려진 얘기만 올립니다.
동학농민혁명당시 호남지방은 3년 내내 가뭄이 들어 사람들의 삶이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당대의 실력자인 조대비(趙大妃)의 조카이자 이조판서 심상훈
(沈相熏)과 사돈 간이었던 탐관(貪官) 조병갑(趙秉甲)이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고
오게 됩니다. 조병갑이 고부에 군수로 와서 자행했던 일을 “황현(黃玹)” 선생은
“오하기문(梧下記文)”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계사년(癸巳年-1893년)에 충청우도 일대가 가뭄이 극심하여 세금을 거둘 수
조차 없었는데 “고부”는 산과 바다가 서로 엇갈리는 지형으로 북쪽은 흉년이
들었지만 남쪽은 그런대로 추수를 하였다. “병갑”은 가뭄에 대한 보고를 받고
각 고을을 순시하면서 북쪽 4개 면의 세금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나 각 고을에는
“가뭄의 재해로 세금을 탕감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북쪽지방의 세금을
남쪽지방에다 옮겨 부과하고 실제보다 배나 되게 독촉하여 받아들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세금을 다른 지방에 옮겨 부과한 것을 자랑하고 백성들에게 후한
보상을 요구하여 논 100이랑 당 거두어들인 것이 100말이나 되었다. 이것은
실제로 국세의 세배나 되었다. 또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에 집을 짓고 첩(妾)을
사서 거기에 살도록 하였다. 그 집을 지을 때 국가의 공사보다 더 심하게
닦달하여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수천 명이 모여서 이러한
사정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병갑은 전주로 달아났다.
이것이 2월초순의 일이다.
⇒ 이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조병갑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 군수로
전임되었습니다. 이후 “이은용(李垠鎔), 신재묵(申在黙), 이규백(李奎白), 하긍일
(河肯一)“ 등이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부임을
기피하였습니다. 이렇게 발령을 받은 고부군수들이 부임을 하지 않은 까닭은
조병갑이 고부마을을 떠나지 않으려는 유임공작을 이면에서 치열하게 벌였기
때문입니다. 조병갑 역시 익산 군수로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조병갑은 나중에
고부 봉기가 일어나자 파면됩니다.
➜ 황현(黃玹 - 1855. 12. 11~1910. 09. 10) :
호는 매천(梅泉), 한말 문장가, 역사가, 순국지사인 선생은 1910년 한일 강제
합병(경술국치=庚戌國恥) 소식을 전북 남원에서 듣고 “순절시”(또는 “절명시”
라고도 하지요) 7언 절귀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셨는데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남기신 글들은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文)” 등에 남아 있습니다.
[ 순절시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합니다. ]
亂離溒到白頭年 백발이 성한 세월에 난리 속을 이르르니
幾合損生却未然 이 목숨 물리칠까 하였지만 그리 하지 못하였고
今日眞成無可奈 오늘에는 더 이상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 바람에 날리는 촛불만이 푸른 하늘에 비치도다.
妖氛掩翳帝星移 요망한 기운에 가려 제국의 별 옮겨지고
久闕沉沉書漏遲 옛 궁궐은 가라앉아 글은 새어 버리고 느려지는데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는 따르고 쫓을 조칙마저 다시없을 것이려니
琳琅一綜淚千絲 옥같이 아름다웠던 우리 천 줄기 눈물만 흘리도다.
鳥獸哀鳴海岳嚬 고국강산 찌그러져 짐승들과 나는 새도 슬피 우니
槿花世界己沉淪 무궁화 이 강산은 가라앉아 사라지고
秋鐙揜卷懷千古 세월의 등잔불 아래 천고의 한 덮어두려니
難作人間識字人 참다운 지식인 되어 인간답기 어렵도다.
曾無支厦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위해 반 조각만한 공로도 세우지 못했고
只是成仁不是忠 다만 인의 만 이룰 뿐 충성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止意僅能追尹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윤곡"의 뜻을 따를 뿐이고
當時愧不攝陣東 당연히 "진동"처럼 몰아 부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뿐이로다.
-- 그런데 이 시는 당시 “경남일보 1910. 10. 11일자”에 실리는데 그 신문의
주필인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매천이 남긴 시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떨어
지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줄도 몰랐다”라는 느낌을 함께 실었는데 그래서
총독부에서 경남일보를 10일간 정간토록 탄압하였지요. 한편 장지연 선생은
그 이전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
에 이에 반대하는 논설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발표했는데 이 사건으로 선생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신문은 다음해까지 정간
되고 선생도 사장자리에서 물러났지요.
# 을사늑약(乙巳勒約) : “을사5조약”을 일제가 강제로 체결했다고 해서
“늑약‘이라고 고쳐 부르고 또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을사년“에서 나온 것은 아시지요?
* 고부(古阜) : 현재 정읍시 고부면인 이곳은 농민혁명 당시 “고부군”으로 지금의
정읍시보다 훨씬 컸고 전북지방에서는 전주시 다음으로 번창했는데
즉 지금의 정읍시, 부안군, 고창군 일부를 포함한 매우 넓은
지역이었고 인근지역 쌀의 집산지이고 서해안 해산물이 풍부한
고장이었는데 또한 그만큼 탐관오리의 횡포가 극심한 곳이었는데
농민혁명 후 여러 갈래로 쪼개져서 지금은 작은 면(面)입니다.
# 옛날에는 나라에 반역 등을 일으킨 마을은 쪼개서 조그맣게 만들거나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그 예로 조선 영조시절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안의(安義)”(옛날에는 “안음(安陰)”이었는데 지금은 함양군
안의면) 사람이었던 정희량(鄭希良)이 주동세력으로 끼었다는 이유로
“안의” 땅 절반은 “거창”에, 나머지 절반은 “함양”에 주고 안의사람들의
벼슬길을 막았던 적이 있었는데 “고부”가 쪼개진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하는데 어쨌든 철도가 놓이면서 정읍이 중심지가 되면서 밀려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부안, 고창, 정읍으로 쪼개져서 지금은 정읍시에 딸린
면(面)으로 전락했지요.
-> 조선 영조 때 위의 “안음(安陰)”과 같은 경남의 “산음(山陰)”이 발음도
나쁘고 또 음기(陰記)가 세어 좋지 않다고 하여 각각 “안의(安義)”와
“산청(山淸)”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 황토현전투 : 1894년 4/6일 밤 ~ 4/7일 새벽에 걸쳐서 농민군이 전라 감영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관군을 크게 물리친 첫 승리의 전적지.
# 이 전투에는 “임오군란(1882년)” 때 명성황후를 업어서 여주로 피난
시켜서 유명한 ”홍계훈(洪啓薰)“이 초토사로 내려왔다가 여기서 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후에 농민군에게 빼앗겼던 전주성을 다시 찾기도 합니다.
얼마 전 개봉했던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주인공인 이 무신은 결국
다음 해인 1895년 8월 “을미사변"때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을 막으려다
광화문에서 전사합니다. 결국 명성황후와 함께 운명을 달리 했으니
영화로도 나올만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명성황후와 사랑했나???
* 사발통문(沙鉢通文) : 아직 농민군이 봉기하기전인 1893년 11월 초순, 전봉준 등
19명의 농민지도자들이 고부군 신중리 죽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모여
조병갑 등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등의 거사를 결의한 내용으로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이 나서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였는데 “사발통문”이란
사발 모양으로 찍은 문양에 둥글게 서명을 해서 주모자를 알 수 없게
만든 통문입니다.
*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 1894년 3월 농민들은 죽창을 들고 고부의 “백산”
이라는 산에 모여들었는데 원래 이름은 “심미산”이었는데 죽창을 든
흰옷차림의 농민군이 지휘자의 호령에 따라 앉으면 죽창들이 햇빛을
받아 번뜩거려 마치 “죽산(竹山)” 처럼 보이고 농민군이 일어서면 온통
흰색으로 눈이 부셔서 “백산(白山)”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백산은 높이가 47미터로 나지막한 동산인데 주변이 평야라서 이곳에서는
멀리까지 내다 보여서 처음에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었습니다.
* 우금치전투 : 1894년 10월 21일 전봉준이 이끄는 10만 호남군과 손병희가
이끄는 10만 호서군이 서울로 올라가려고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결국 농민군이 참패를 당하는데 이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농민혁명은
끝이 나게 됩니다. 이곳에는 위령탑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 이때 사용된 일본군 무기 중에는 “캐트링 기관총”이라고 1분에 1,000발을
쏠 수 있는 기관총도 있었고 “무리다”라는 최신식 소총도 가지고 있어서
농민군으로서는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 전봉준장군 : 농민혁명에서 전봉준장군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생가가 있습니다. 사적 제293호입니다.
전봉준장군은 키가 5척으로 약 152센티의 작은 키였지만 매우 옹골차서
1890년경 동학에 입문하고 농민혁명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1894년 12월
체포되어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을 당합니다.
키가 작아서 “녹두장군”이라고 불리었던 것은 아시지요?
# 전봉준과 함께 유명한 지도자들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오시영, 최경선,
성두환 등이 있습니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농민전쟁의 실패와 전봉준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부르던 노래인데 전국적으로 노래가사가 조금씩 다릅니다.
“파랑새”라는 말은 그의 성(姓)인 “전(全)”을 풀면 “팔왕(八王)"이 되어
“팔왕새” 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가사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전라도지방에서의 노래가사
-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열나무 딱딱 후여
# 이 외에도 원주, 평양 등에서 나온 노래가사도 있습니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전봉준 생가
-- 매천 황현 선생
--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이 내용은 무효라고 세계 각국에 밀사를
보내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영국 트리뷴지 등에 실렸었지요.
옆의 사진은 고종황제이신데 물론 신문에 사진이 나온 것은 아니고 여기서
편집하여 하나의 사진으로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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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읍사(井邑詞)
정읍시 시내에 “정읍사공원”이 있는데 여기에는 백제시대부터 구전되어 온 민간
전승의 가요로서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인 “정읍사”를 기려 만든 공원으로
노래비와 함께 관련 자료를 모은 기념관도 같이 있습니다.
* “정읍사”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절이 어디 있어?" 하시는데
“절(사-寺)”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사(詞)“입니다. ㅎㅎ
이 노래는 작자와 연대가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행상을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그의 아내가 고갯마루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지은 노래인데
조선 문종 때 지은 “고려사(高麗史)”, 조선 성종 때 지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또 같은 조선 성종 때 지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악학궤범”에는 이 외에도 신라 때의 “처용가(處容歌)”, 고려 때의 “동동(動動)”.
같은 고려 때의 “정과정(鄭瓜亭 = 鄭瓜亭曲) 등의 가요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 정읍사 --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되를 드되 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가논되 졈그를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멀리 멀리 비춰주시옵소서. ~~~~
어느 시장에 가서 계신지요. 진 곳(위험한 곳)을 디디실까 두렵습니다. ~~~
어디에든지 짐을 놓고 오시옵소서. 가시는데 날 저물까 두렵습니다. ~~~~
# 그런데 노래가 약간 야한 내용이라고 우기는 학자 분들도 있는데 글쎄요.......
이 노래는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그래서 정읍시에서는
매년 가을 “정읍사 여인상”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 정읍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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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읍 한우고기
정읍시에는 유명한 한우고기가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단풍미인한우고기”이고 다른 하나는 “산외면 한우고기”입니다.
(1) 단풍미인 한우고기
정읍시에는 “단풍미인한우고기”라고 부르는 1등급 한우고기(A++)가 있는데
이는 횡성, 평창, 안동, 양평군 개군면 한우고기 등의 다른 지방의 고기 맛에
비하여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무척 자랑합니다.
최근에 이 한우고기가 “신라호텔”에 독점적으로 납품하게 되어서 정읍시가
아주 축제분위기입니다.
먹어보니 맛은 참 부드럽고 맛있기는 한데 조금 비싸서 많이 먹기는 약간
망설여지지만 음식점 주인은 고기 맛이 떨어지니까 상추쌈으로 싸 먹지 말고
고기 맛을 음미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계산서가 무거워지는데... ㅎㅎ
(2) 정읍산외한우고기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정읍시 산외면에서 운영하는 “산외한우마을 소고기”가
전국적으로 매우 유명한데 이는 산외면에서 직접 사육한 비거세한우로서
“한우 등심 600그람”이 20,000원 안팎으로 엄청 싸고 그런데도 매우 맛있습니다.
* 그곳에서 드시면 채소와 불 값을 따로 약간 받습니다.
정읍시 산외면은 마치 한우고기를 위한 마을 같이 조그마한 면소재지에 약 35개의
정육점과 25개 이상의 한우전문음식점들이 줄지어 있고 전국에서 일 년 내내
열심히들 찾아오시는데 매일 관광버스 여러 대가 들어 닥치고 일 년에 소비되는
한우 수가 약 12,000마리 이상이라고 하는군요. 비록 면(面) 소재지이긴 해도 아주
작은 마을인데 외지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원래 주민보다 더 많아 보입니다.
물론 일부러 정읍시 산외면을 찾기는 그렇겠지만 주변에 가실 일이 있으면
낮은 가격에 한우 좋은 부분을 실컷 드실 수 있습니다. (차비 빠져요!!! ㅎㅎ)
산외면을 가지 않더라도 정읍시에서도 약간 값을 더 주고 드실 수도 있고
타 지역에서 우편 주문도 가능합니다.
-- 정읍산외한우 : 낙엽살
-- 정읍산외한우 : 채끝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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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정읍시에는 “보화리 석불입상(보물 제914호)” 등 여러 문화재와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옥정호 구절초군락”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들을 보실 수
있는데 너무 길어서 오늘은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 옥정호 구절초 군락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