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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도 끝나는 2월 22일 일요도보는 에비앙님이 깃발을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홍제동 일대를 도는 길이라 제가 진행 보조도우미로 차출되었습니다. 동네길이라 흔쾌히 동의했고 다 아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비앙님이 걸은 길은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알려지지도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멋진 길이었습니다.
보통 탕춘대성곽길은 불광동 혹은 구기동 방향에 걸쳐져 있는 사이길 성격이 강합니다. 메인 길이 아니라 사람이 손길이 덜 탄 곳이죠. 보통 탕춘대성 암문에서 상명대로 내려오는 길인데, 에비앙님은 그 길에서 더 멋진 길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 길은 보통 멧돼지 혹은 '외로운 늑대'가 출몰할 수도 있는 고즈넉넉한 길, 그 무섭고 힘든 길을 헤치고 멋진 길을 발견한 에비앙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에비앙님은 멧돼지가 나타날까봐 무서웠다는데... 멧돼지도 무서웠지 않았을까 생각도 합니다...
에비앙님이 길 안내를 하고 저는 제가 오랫동안 산 곳이라 중간중간 설명을 했지만, 많이 부족해서 후기를 길게 썼습니다. 모처럼 에비앙님 덕분에 제가 사는 홍제동 자랑할 겸 길게 썼으니 너그러운 양해를 바라며, 40여 년 넘게 산 동네사람도 모를 멋진 길을 찾아내신 불굴의 에비앙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앞으로 이 길을 걸을 때 '에비앙 루트'로 부르고, 신록이 무성할 때 에비앙님과 함께 다시 한번 모시고 싶네요.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재미없고 지루한 설명을 들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래는 홍제동의 역사에 관한 글입니다. 진행과 설명하느라 사진은 많이 못찍었네요.
서대문구 홍제동, 홍제동을 잘 아는 서울시민은 적습니다. 인왕산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중심이었던 경복궁 너머라 그런지 역사의 중심이 아닌 변방, 발전이 아닌 낙후된 지역으로 오버랩됩니다. 경복궁 일대가 역사의 중심이자 햇살 가득한 곳이었다면 인왕산 바깥쪽 무악재 너머 홍제동은 역사의 변방이자 이면이었고, 발전이 아닌 낙후와 정체의 반복이자 달빛만 가득한, 이른바 ‘해를 품은 달’이라고 할 수 있죠.
요즘 각종 걷기모임에서 서대문알프스 길이 각광받는 것은 홍제동으로 보면 오히려 역설적입니다. 서대문알프스라는 것은 백련산을 시작으로 안산-인왕산을 돌아 북악산 밑 한성대입구역까지 가는 코스를 말합니다. 북악산을 빼면 전부 홍제동을 둘러싼 곳입니다. 그만큼 이 지역이 발전없이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반면 알프스라 불릴만큼 산세도 경관도 빼어난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이런 곳에 산다는 것에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서대문알프스, 이를 봐도 홍제동의 자연환경과 역사성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홍제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지하더군요. 어쩌면 무관심과 무시가 더 큰 이유이기도 하겠죠.
백련산에서 바라본 홍제동 전경. 좌로 인왕산 우로 안산, 그리고 마주보이는 곳이 남산. 명당자리 아닌가요?
먼저 홍제동의 어원이 되기도 한 홍제원(현 홍제1동주민센터)은 조선시대 국내외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죠. 지금 독립문 자리에는 원래 중국 왕조의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이 있던 자리(개화기 독립문으로 개축)이고 중국 사신이 한양이 입성하기 전 머물던 곳이 바로 홍제원입니다. 홍제동은 이 홍제원이 중심인 곳이죠. 우리에게 익숙한 역촌동, 구파발을 생각하면 홍제원은 바로 조선시대 역참제도의 제1선에 위치하면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홍제원이 있던 길이 바로 조선시대 로드넘버원이라 할 수 있는 의주대로입니다. 지금 홍제동을 가로질러 구파발 벽제 판문점에서 평안북도 의주에 이르는 통일로는 사실 의주대로의 일부 구간이였지만, 어느새 이 길은 통일로로 불리고 의주로는 서대문에서 서소문에 이르는 길로 축소되었죠.
홍제역 1번출구로 나와 의주대로에 있는 유진상가를 지납니다. 지난 70년대 주상복합건물로 당시 타워팰리스로 불린 곳, 이제는 재개발 처지. 왼쪽의 고가도로는 내부순환도로. 유진이라는 이름, 유신진흥의 준말입니다. 70년대 3공 박정희 시절을 생각하게 합니다.
홍제원과 의주대로, 이 길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주체적 길이 못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이 있을 때마다 가장 수난을 받은 곳이었죠. 이런 피상적 이해에서 역사를 한꺼풀 벗겨내면 더 슬프고 비참한 역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홍제동이죠.
중국에서 명나라를 대신해 만주족 청나라가 흥기해도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유교적 명분에만 집착했던 조선왕조와 관료들은 무너져가는 명나라만 고집합니다. 그 틀을 깨트린 임금이 바로 광해군(광해, 왕이 된 남자는 주로 국내용만 다뤘죠)이고 이를 유교적 명분으로 권력찬탈을 한 이가 바로 인조입니다. 인조와 관료들의 친명정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청에 항복하고 조선의 남녀 수십만명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청나라가 조선인, 특히 조선여자 수십만을 끌고 간 것은 전뱅배상금을 물릴 수 없어 사람을 끌고가 돈을 받고 돌려주기 위한 속셈이었지만, 이 여자들은 나라 뿐 아니라 가문에서도 외면 받습니다. 돌아가는 여자가 극소수에 불과하자 청나라는 몇 년 후 귀환을 원하는 조선 여자 수만명을 돌려보냅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들이 바로 환향녀로 불립니다. 고향에 돌아온 여인(還鄕女)들이 돌아오자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조선 양반들은 그 분풀이 대상을 이 여인에게로 전가하는 치졸함을 보여줍니다. 청나라 포로로 잡혀갔으니 몸이 더렵혀졌다며 이혼이 아닌 자결을 강요합니다.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는 이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국왕 조차도 이런 양반의 요구에 거부할 수 없었지만 워낙 수가 많아 일종의 타협책으로 사면령을 내립니다.청나라로 끌려간 여인은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죄를 사해주고 청나라에 잡혀간 것을 불문에 부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홍제천 변에서는 때아닌 환향녀들이 뛰어들어 몸을 씻어내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홍제천 건너 지역에서는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의 홍은동(弘恩洞)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코메디이면서 비극적인 일인지. 자신의 여인을, 누이를 지키지 못한 남자들은 청나라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에게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여인에게 가장 치욕적인 정절을 잃었다며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을 환향녀에게 돌리는 비열한 수법을 씁니다. 어쩌면 패전과 망국의 분풀이를 힘없는 여인에게 전가, 희생양으로 삼을려는 속셈이었죠.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이른바 ‘화냥년’이 나왔고, 행실이 나쁜 사람을 화냥년의 몸에서 난 호로(胡虜-오랑캐 포로)자식이라 부르며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화냥년'과 호로자식-후레자식 등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에게 내린 주홍글씨이자 낙인입니다. 이런 용어는 쓰면 안되는 것이죠. 민족적 모멸감을 안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여인의 행실 그 자체를 전적으로 남자의 도덕적 잣대로만 규정하는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홍제천의 비극이나 홍은동의 어처구니 없음(가해자인 왕에게 감사하라는 억지)은 유교적 신분제 질서가 얼마나 여성들에게 잔혹할 수 있는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남자들을 위해 홍제천에 알몸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여인들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그짓을 하고서 임금님 은혜에 감사하라고 홍은동이라고 이름지어준 것을 알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그러나 역사는 항상 승리자 남성의 입장에서 씌여집니다. 역사기록에 화냥년은 없고 임금의 성은에 감읍했다는 기사만 남아 있는 것이죠. 홍제동은 바로 이런 한스런 역사를 품고 있는 고장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의 주무대는 성남의 남한산성이었고 치욕의 장소는 지금의 잠실, 삼전도였지만 전후 가장 큰 상흔을 남긴 곳은 바로 홍제천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인지 조선후기, 숙종 임금이 들어서면서 국방을 강화하면서 첫 번째로 북한산성을 정비하고, 그것도 모자라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잇는 성곽을 쌓습니다. 이를 편의상 탕춘대성곽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5km의 구간만 남아있지만 그마저 보존이 안되어 유명무실 합니다.
그런데 이 탕춘대성 성곽길은 북한산 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과 구기동 구간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북한산 방향이 아닌 상명대방향으로 인왕산과 연결,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곳이 됐습니다. 자체 들머리도 없어서 동네 뒷산이라 할 수 있는 홍은동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북한산둘레길에서도 떨어진 지역, 불광동과 구기동 가는 중간에 빠지는 길,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거나 외면받은 곳, 오히려 그점이 탕춘대성곽과 숲길을 더 오래 원형에 가깝게 보존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탕춘대성 암문에서 상명대로 빠지는 길, 그 길에서 다시 홍은동 방향 옥천암으로 나오는 길은 인적이 드문 길입니다. 이 길을 걸으니 잠시나마 조선시대를 걷는 기분이 났습니다.
숨어있는 명품숲길, 탕춘대성곽길에 대한 재발견.
홍은동 방향으로 내려와 바로 옆 옥천암으로 갑니다. 옥천암이란 절 보다 보도각 마애불상이 더 유명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기도했다는 전설은, 무악재의 무학대사 고사와 함께 권력의 외탁이란 점을 상징하지만, 마애불상이 고려시대부터 존재한 것을 보면 유서갚은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옥천암에서 상명대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탕춘대성 출입을 위한 홍지문이 있습니다. 바로 위 한양도성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지문을 새로 낸 것은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탕춘대성의 관문 역할을 한 홍지문
홍지문을 거쳐 창의문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석파정(현 서울미술관 위)의 일부인 석파랑이 있습니다. 석파랑은 석파정의 별채만 옮겨 놓은 것인데, 조선후기 안동김씨 60년 세도를 상징하는 당시 최고 아름다운 별장이었고 안동김씨의 위세를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합니다. 야사에서는 대원군이 석파정을 탐내 몇 번이고 돈을 주고 살려다가 실패하자, 임금인 자신의 아들 고종을 하루밤 기거하게 하는 꾀를 내서 안동김씨 일문에서 어쩔 수 없이 석파정을 바쳤다는 일화를 전하지만, 대원군 입장에서는 안동김씨의 세를 꺽기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원군이 말년 자신의 호를 ‘석파’라고 한 만큼 이곳을 지극히 사랑할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석파정 별채를 가져와 석파정을 재구성한 석파랑
석파정이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지역의 한국 산수화의 원형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배경이기도 한 것에 있습니다. 안평대군이 꿈에 노닌 도원(桃園)의 모습을 안견에게 말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라고 합니다. 3일만에 완성된 몽유도원도, 조선 최고의 산수화는 바로 이곳 석파정과 무계정사가 있는 곳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만큼 조선시대 풍광이 가장 뛰어난 지역입니다.
역사의 무대에 가까우면서도 한발 비켜 간 홍제동, 그 홍제동 외곽에 있으면서 북한산과 한양도성에 가려 존재감이 없었던 탕춘대성곽길, 그 안에 숨어있는 명품숲길을 발견한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회가 되면 천천히 오래 머물고 싶은 길입니다.
홍은동 뒷산으로 올라간 탕춘대성 들머리...이름없는,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걸어갈수록 탄성이 나옵니다.
걷기좋은 명품숲길이지만 북한산둘레길에 가려진 길.
신록이 무성할 때 오면 더 좋은 길
북한산이 손을 뻗치면 닿을 듯 가까이 있습니다.
탕춘대성곽도 복원 보존이 시급합니다.
탕춘대성곽에서 본 구기동 평창동 방향
탕춘대성곽길은 북한산둘레길 불광-구기동 구간에 가리워진 길. 어쩌면 그 덕택에 더 오래 보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많이 알려진 상명대 방향 아닌 홍은동 마을로 내려오는 길. 바로 옆이 옥천암
옥천암
보도각과 옥천암 전경
석파랑 대문
백만년만에 본 에비앙님의 리딩 모습. 후미아닌 선두에서 에비앙님 모습을 운좋게 찍었네요. 긴장해서 약간 떨렸다는...
전망좋은 장군바위에서....
홍지문 앞에서
홍은동 방면에서 올라갑니다. 선두는 번개도보의 달인 해리님, 한분은 사진찍히기계의 전설 마음의 평화님
프란이님과 동행분
두루두루님과 갑시다님
나길님과 오크님
연송이님과 동행분
즐겁게 걸은 길
숨어있는 명품숲길, 앞으로 이 길을 에비앙 루트라고 이름지어야 할 것 같네요~
옥천암 가는 길.
뒤로 홍제천 맑은 물이 보이네요.
모델계의 독보적 존재. 전설의 그분입니다.
시집가기 전까지 홍제동에 사셨다는 하치님
엘리님
즐거우셨죠~~
* 홍제동 역사를 보실려면 [해를 품은 달, 홍제동에는 역사도 전설도 많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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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답사를 했어도 마지막길에서 잠시 돌아 내려왔다는...
그러니 찍었어도 찍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에고...나이를 한개 더 먹으니 조금씩 티가 납니다.
예전엔 공부는 못했어도 머리 좋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는데...믿거나 말거나~ㅋㅋ
저는 혼자서는 리딩을 못한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평지길은 없으니...
그러나 누구라도 해야하니...답사 하면서 딱 낙화님이 떠오르더군요.ㅋㅋ
예상은 적중했죠. 덕분에 홍제동 역사까지~
여유로운 걸음 함께 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리고
낙화유수님께는 더더욱 감사의 맘 전합니다.^^
멧돼지, 외로운 늑대와 싸우면서
지역 주민도 잘 모른다는 길을 찾아내는 에비앙님의 불굴의 리딩정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깝고도 참 좋은 길이더군요. 오후 늦게 나가 천천히 옛이야기 하며 걸을 수 있는 나만 알고 싶은 길 ㅎㅎ
옥천암 개울에 물이 많이 줄었군요.... 어릴적 발가벗고 수영하던 곳인데 ㅎㅎ...40년이 훌쩍 흘렀네요...
고맙습니다.
에비앙루트 서울의 숨겨진 또 저만 몰랐던 명품길이더군요
황사가 자욱해서 취소할까 하던 길이었는데 큰 즐거움과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한 일년간 낙화유수님을 못 뵈어 늘 안타까웠다는 ㅎㅎㅎ
역사가 숨쉬는 길은 낙화유수님과 함께여야 한다는..
저는 요즘 궁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 깊은 흥미가 생기고 있습니다.^^*
신록이 무성하고, 홍제천 맑은 물에 발 담글 수 있는 계절에 또 가고 싶습니다. 에비앙님~ 낙화유수님~ 고마웠습니다 ^&^
열심히 설명해 주시고 사진찍으시고...수고 많으셨어요.
그날 서 있으면 추워서 뒤에서 말안듣는 불량학생이었는데
후기로 확실한 복습합니다.
생각나느니 홍제동 화장터만 났었는데...ㅎㅎㅎ
감사합니다.
아주 즐거운 길이었어요.
에구머니 지금에사 후기를 봤네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그리 같은동네를 살아도 모르는길이 많은데
길이면 길
역사면 역사
설명도 너무 잘해주시고
낙화유수님 ---
정체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