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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김시민(金時敏) 장군과 그의 숙부인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김시민(1544~1592)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3대첩(三大捷) 중 하나인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
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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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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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갑(金悌甲)은 문신으로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명종 8년(1553)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을 거쳐 선조 14년(1581)에 충천도 관찰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원주 목사로 영원산성에 들어가 적과 싸우다가 아들과 부인과 함께 순절하였다.
뒤에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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