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신과 인간 사이
이한오 신부 (프란시스, 춘천성공회)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예수 스스로 자주 자신을 칭할 때의 ‘사람의 아들’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하느님의 아들로 원래부터 하느님이신가 아니면 인간인데 어느 순간 하느님으로 신격화되었는가?
아니면 그냥 위대한 역사적 인물의 하나인가?
우리는 니케아 신경을 통해 예수는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라고 하는데, 나는 이 고백문을 외울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떤 존재가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최근의 독서에서 이 물음에 대한 아주 탁월한 해석을 발견했다.
마커스 보그는 <기독교의 심장>에서 부활 이전의 예수와 부활 이후의 예수 사이를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죽음 이전의 예수로, 기원전 4년경에 태어나 기원후 30년경 로마인들에게 처형된 갈릴리의 유대인이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죽었으며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어느 곳에도 없다.
반면에 부활 이후의 예수는 죽음 이후에 되어진 분, 곧 그리스도교인들의 체험과 전통의 예수인 것이다. 체험의 예수라는 말은 이후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신적인 실재로서 계속 체험되고 있다는 뜻이며, 전통의 예수는 초기 그리스도교 이후 발전하는 교회의 전통 속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로서 복음서와 서신 그리고 신조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보그는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라고 물으면서, 그런 구분을 하지 않을 경우에 부활절 이전의 예수(인간적 측면 강조)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신적 면모 강조)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이의 신학’이 추구하는 주제에 매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성서나 신조가 알려주는 성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육신을 입은 하느님, 삼위일체의 2격, 하느님의 외아들 등 신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이시기만 하다면, 그의 지혜와 용기, 치유의 능력이나 기적은 별것이 아닌 게 된다.
하느님이 물 위를 잠시 걸었다는 사실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나?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가 부활 이전에 갈릴리의 한 사나이로서 했던 일이다.
그가 인간이기에 그의 수난과 고독한 결정과 기도가 위대한 것이지, 하느님이시기만 하다면 시시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습기까지 하다.
거꾸로 예수를 인간으로만 생각하고, 부활 이후의 예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남을 수 없다.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선포는 간단했다.
“그는 죽었고, 부활했고,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은 자는 부활 이전의 예수이며, 다시 오실 분은 부활 이후의 예수이다.
이런 구분 없이 역사의 예수만 생각하면 부활 이후의 예수, 곧 보편적인 구원자로서의 신적인 체험을 매개하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작년 12월 주간기독교에 실린 유동식 박사의 표현대로 하면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는 것일 텐데, ‘사이의 신학’의 관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유동식 박사의 글을 인용한다.
“역사의 예수와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거야. 하지만 나는 역사적인 예수에 초점을 두지 않아.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이지. 평생 애독하는 것이 요한복음이야. 내 신앙은 요한이 말한 구세주,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이지.”(주간기독교 1789호, 6쪽)
‘사이의 신학’이 생각하는 예수는 “역사의 예수와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애매하게 연결하거나 한쪽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둘 사이를 구분하고 부활 이전과 이후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일찍 기록된 마태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었던 예수가 부활 체험 백 년이 지난 이후 쓴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게 되고, 우리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혼돈 없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끔 두려운 마음으로 자문한다.
“내가 죽고 나면 아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가끔 이렇게 설교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자 인간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느님이고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