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복음 3 : 13-18
제목: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일시: 2005. 3. 13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메를린 머리 오헤어“라는 여자는 무신론철학자이며 미국의 무신론협회회장을 지냈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각종 Anti-Christian Movement, 즉 반기독교운동의 리더였다. 그녀가 미국 공립학교에서 기도하면 안 된다는 기도금지 운동을 펴면서 그 문제를 법정에까지 끌고 갔고 시카고 법원에서 최종 판결에서 마침내 승리하게 되었다. 오헤어는 긴긴 기도금지 투쟁에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 학교에서 기도를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법정에서 판관의 승소판결이 나자 얼마나 감격하고 기뻤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입에서 기쁨과 감격의 감탄사가 나왔다. ”Oh my God" 그것을 기자들이 놓칠 리 없었다. 그것이 기자들을 통해 회자되고 뉴스에 보도되었다. 무신론자가 “아이구 하나님!”이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원한 존재에 대해 의식하게 하셨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알고 있다. 이대로의 삶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안다. 우리의 삶이 다하고 그 이후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고 성경은 영생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원한 삶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사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은 없는 것 같이 여겨진다.
“영생을 소유하셨습니까? 영생을 소유하시기 원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다들 아멘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으니까 예의상 아멘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영생에 관심이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런 재미없게 왜 그런 식어버린 구닥다리 테마를 끄집어 내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영생에 대해 관심이 있으십니까”라고 재차 물으면 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볼 것이다. 교회이름을 영생교회라고 해보라. 무슨 조희성의 영생교 이단인줄 알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 영생에 대해 말하면 별 흥미를 갖지 못한다. 기독교진리에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바로 영생이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영생을 주시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한다. 지금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영생에 대해서는 천천히 죽기 전에 논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래 이왕 영생이 있는 것은 좋은데, 뭐 그리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게 급한 것은 쓸 돈이요 유학생활을 잘하고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요 내 자녀들에게 어떻게 양질의 교육을 시키느냐요 나의 취미활동과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관심거리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지만 영원을 잊고 산다. 영원을 굳이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지금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말씀은 어떤 면에서 가장 재미없는 말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 되기도 한다.
II. 사실 굉장히 코미쉬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인간은 죄의 삯인 사망에 처해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영생이 필요하고 영생을 가져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들인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들은 영생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관심이 많은 분은 오히려 하나님이신 것 같다. 모든 성경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그 목적은 그를 통해 영생을 얻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급하지도 않은 하나님은 영생을 주고 싶으셔서 안달아신데, 정작 필요한 인간은 영 딴데 관심이 있으니 이 얼마나 코미쉬한 일인가? 뭐가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것 같다. 정작 필요한 인간은 관심이 없고 주려고 하는 분만 안타까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노방찬양을 하면서 이와 같이 아주 코미쉬한 일을 경험한다. 요즈음은 날씨가 차서 노방찬양을 하면 아주 추워서 고생이 많다. 손이 얼어붙어 기타를 치는데도 애로사항이 많고 날이 추워서 노래를 하는데도 자연 바이브레이션이 나온다. Keiner ist wie du... You are my strength when I am weak... 추운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열심히 찬양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본다. 그때 그들의 얼굴에 쓰인 단어를 역역히 읽을 수 있다. “추운데 고생하네.” 그들은 우리가 돈을 위해 노래하는 아시아인인줄 알고 동전을 넣어주기도 한다. 추운 날에는 돈도 더 많이 넣어준다. 그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본다. 하지만 찬양하고 있는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서로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불쌍히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왕이면 옷도 잘 입고 이왕이면 노래도 잘하고 이왕이면 꺼칠하지 않게 화장도 하고 나온다. 잘못하면 정말 불쌍한 거지처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은 영생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생에 필요성을 느끼려면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 나는 필요에 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영생이라는 이 테마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며 유한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필요를 알게 하는 부족이라는 것은 마치 영생을 갈망해하는 신경과도 같다. 살이 찌면 감각이 둔해진다. 배부르고 등이 따스워지면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그저 안락하게 있고 싶어 한다. 부족한 게 없으면 완고해진다. 부족한 게 있으면 하나님께 대한 신경이 예민해 질 수 있다. 영생에 대해 갈망하는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병든 것이다.
예)나병이라는 것이 있다. 문둥병이다. 문둥병은 신경이 죽는 병이라고 한다. 나병은 고통신호전달말초신경이 활동하지 않는 병이라고 한다. 문둥병환자는 신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손가락이 문드러지고 코가 떨어져 나가고 해도 감각이 없다.
우리에게는 신경이 필요하다. 그래야 난로에 가까이 가도 손이 타기 전에 거리를 둘 수 있다. 양심의 가책과 같은 양심의 신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이들을 사기쳐먹은 다음에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아닌가!
성경에서 영생이 주어지는 자들은 언제나 필요한 처한 자들이었다. 주님께 나온 사람들을 보라. 풍요로운 사람은 주님을 떠난다. 재물이 많았던 청년과 같이 부자들은 떠나고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좀 안다고 하는 지식인들은 주님 곁을 떠난다. 하지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병든 자들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이었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부족해야 주님께 나올 수 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오는 것은 이제 믿을 만한 구석은 아무데도 없고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 되기에 나온다는 것이다. 부족해야 기도가 나오고 부족해야 주님을 소망하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도 주님께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 잔치에 모자람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팔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복이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요 핍박을 받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뭐든지 있기에 필요한 것을 모른다. 자기가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찾기 어렵다.
예)우리는 가끔 신앙간증에서 살인범 아무개가 주님을 믿고 형상의 이슬로 사라졌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람들은 어찌 그런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러한 사람이 구원받기 최적의 조건에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신경의 고통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다. 증상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의원되신 주님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증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착하게 살고 세상에서 문제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자선사업도 하고 사회에 좋은 일도 하는 사람들이다.
III. 우리에게 필요한 그 영원한 생명을 누가 채워줄 수 있는가? 오늘 성경본문은 그 해답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멋지다고 감탄해하셨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작품을 완전히 버려놓았었다. 이 우주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즉, 조물주인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못한 것이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다시 말씀으로 쭈릭시키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폐기처분하시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그 의미는 무엇인가? 사망이 주인 노릇하던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으로 오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영생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노래도 “생명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 주 안에 있네....“ 라는 것이 있다. 세상의 사람들은 길은 많다고 말한다. 다원주의는 뭐든지 열심히 믿어라. 다 절대자를 믿는 것이니... 꽤나 포용한 모습이다. 꽤 관용한 모습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위해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방법 중 아주 좋은 방법이 아니고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은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을 얻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오리라고 하던 메시야였다. 그 메시야는 바로 생명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세상이 필요한 것은 생명이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영생이라는 선물이다.
IV.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셨다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그 분이 나와 상관이 있어야 한다. 상관이 없으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 두레공동체 김진홍 목사는 1966년 계명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조교로 근무할 때였다. 하루는 영문과 교실에서 강의를 하다가 어떤 학생으로부터 “교수님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진리란 어떤 사물이 이루고 있는 형질과 그 사물을 인식하는 개념이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이다”라는 칸트의 인식론으로 대답을 했다. 그때 학생은 “교수님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의 인생을 걸고 목숨까지 받칠 수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여기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고, 교직을 떠나 방랑자의 삶을 살다가 후일에 예수를 만나고 목사가 되었다.
진리가 아무리 널려 있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할찌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늘 그 생명과 상관을 맺는 방법이 나온다. 중요한 단어가 계속해서 나온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상관을 맺는 방법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상관을 맺기 위해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관을 맺느냐는 것인데,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것을 믿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거기에는 영생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영생이니, 나는 길리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여기 펜이 있다. 그리고 여기 성경이 있다. 펜을 생명이라고 하고 성경을 예수라고 하자.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 우리가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셔 들여야 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생명이 없다. 생명이 과학 안에 있는가? 과학을 품어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지 않다. 어떤 철학과 세상의 가치에 생명이 있나보라.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다.
요한은 1장 12절에도 그렇게 말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V.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멘! 그렇다면 영생이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 분명히 약속되어 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믿는 자들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는 것이냐? 저는 믿는다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냐?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예)대학원을 다니면서 수업의 일환으로 병원전도를 가는 것이 있다. 둘씩 짝을 이루어 가게 되어 있다. 매주 방문하게 되는 병원에서 어느 한 병원동에 들어갔다. 동료전도사님과 본 그 사람은 무척 말라있었고 기력이 쇠해 있었다. 우리는 그분과 얘기를 하면서 그가 폐병환자 말기임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의 숨은 박자를 맞추게 되었다. 그분이 내 쉴 때 나는 되도록 마시지 아니하고 내쉬었다. 그리고 그분이 들이쉴 때 나도 들이셨다. 얼마나 찝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전도하러 온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나누려고 왔는데 그를 내 팽겨치고 올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되심과 소망되심을 전했다. 그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붙잡고 싶어 했다. 그는 예수를 믿고 싶다고 했다. 어떻게 믿으면 되겠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의 마음속에 예수를 받아들이세요. 그러니 “어떻게”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꼭 마음속에 품어 넣으라고 했다. 꼭에 힘을 주면서... 주님이라는 영생과 진리는 역사적이요 객관적이요 사실적이지만, “믿는다”는 말은 참으로 추상적으로 들린다. 이 말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과연 믿는다는 것을 좀 더 구체화시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것을 어떻게 구체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을 내 삶 속에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인격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분이 소망이고 우리의 생명의 수여자임을 알고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심은 어디인가? 말 그대로 중심이다. 변방이 아니다. 그 중심은 무게중심이 되어 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에 계신 분이다. 그분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나의 삶의 선택들, 추구하는 목적이 모두 주님이 중심에 계셔야 하는 것이다.
예)씨름의 원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힘으로 이기는 것도 아니고 기술로 이기는 것도 아니다. 무게 중심이 흩뜨러지지 않는냐가 승리의 관건이다. 이만기와 이봉걸의 씨름을 아는가? 이봉걸은 2m7cm의 거구이다. 이봉걸은 여전히 크지만 그에 비하면 애와 같다. 그러나 이 싸움이 재미있는 것은 거의 이봉걸이 진다는 것이다. 왜지는가? 그가 무게가 안나가서 키가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게중심을 잃어서이다. 씨름은 무게 중심을 놓쳐서 모래바닥에 먼저 쓰러지면 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만기는 무게 중심을 잘 잡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무게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게 중심을 잡고 있으면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 말은 다른 어떠한 가치가 무게 중심의 자리에 와 있으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세상의 가치보다 귀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흔들 수 없다는 말이다. 초대교회성도들은 그 많은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아니한 것은 무게 중심을 바꾸려 해도 그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기에 신앙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옮겨버렸다. 그는 은 30냥이라는 무게 때문에 흔들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어떤 것도 저울에 올려놓아도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려놓는다는 말은 가장 높은 권위를 예수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인다.
VI. 하지만 가끔 사람들이 영생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의심하는 때가 있다. 자신을 잃기도 한다. 왜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를 믿어도 짓는 죄를 또 짓고 마음에 하는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뿐인데”라는 생각이 든다. 이래 가지고 어디 주님이 내 중심에 계시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우리가 고통스러워할 것이 없다. 그 속에 은혜가 더한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벌주기 위해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17절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처벌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요,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다음 주일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사역의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고난주간이 된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 분 안에 영생이 있음을 믿으라. 그분의 사역을 인정하라. 2000년 전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작업을 해 놓으신 것을 믿으라. 그때 갈보리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상관이 있음을 알라. 그분을 믿으라. 오늘의 말씀과 같이 이는 저를 믿는 자와 상관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중심에 놓으라. 삶의 목적이요 기준이 주님임을 알고 그를 삶의 무게 중심에 놓으라. 이 한주간도 주님의 무게에 실려 움직이는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