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삶과 세상 이야기] 39번째: 성역없는 감사 上
1993년 2월 초, 나는 서울 남산의 하야트 호텔을 방문했다.
바로 며칠 전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점심약속을 청하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김 대통령 당선자와는 그 전까지 아무런 개인적인 접촉이 없었다. 내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일할 때 당시 민주당 총재였던 그에게 불법 선거운도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접촉이라면
접촉의 전부였다.
"반갑습니다.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반갑게 첫 인사말을 시작한 김 대통령 당선자는 이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이 대법관께서 감사원을 맡아 주시오."
새 총리와 감사원장을 인선중이라는 보도가 있던 때여서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만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혹스러워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 이틀은 참으로 긴 시간이 되었다. 30년 동안 지켜온 법관직을 버려야 할 것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행정부로 들어가 일하는 게 과연 옳은가, 게다가 감사원장이라는 직책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갖가지 의문과 회의가 편한 잠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당시 감사원의 위상에 대한
외부의 인식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정치권이나 공직사회가 부패하고 비리가 넘치는 것은 바로
감사원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처럼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렇게 위축된 감사원을 이끌고 새 정권의 기강을 세우는 일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멀고 험한
길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결국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구정물에 손 담그지 않고 깨끗하게 판사생활을 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혼자 사법부에 집착하는 것도 이기적인 일이었다.
주변의 친구와 선후배들도 한결같인 그런 조언을 했다.
이틀 후 나는 서면으로 김 대통령에게 수락의 뜻을 전달했다.
"감사원은 직무상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한 지위에 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의 부당한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다."
감사원장 취임사에서 밝힌 이 첫 마디는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감사원법에 명시된 내용을 인용하여 얘기한 것이었음에도 언론계에서는 꽤나 요란스럽게 이를
다루었다. 과거의 어느 감사원장도 직설적으로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감사원의 위상 변화를 바깥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이 말을 하면서 겨냥했던 일차적인 대상은 대통령도 정부조직도 아닌 바로
감사원 직원들이었다. 그동안 감사원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 부패와 비리가 만연된
것이 감사원의 책임인 것처럼 여론에서 질타당하여 직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며 분위기는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감사원에 부임하던 날 입구에 줄 맞춰 선 채로 나를 맞이하는 직원들을
보니 마치 군영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새로운 감사원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은 역시 감사원 직원들이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싸움터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취임사에서 나는 감사원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으로 그 자존심을 자극하였다.
감사원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는 사실 내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대통령이나 청와대와 어긋
나더라도 독립적인 노선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이나 청와대와 조율하여 조화를 이루어
나갈 것인가.
그때 나는 이 나라를 커다란 배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았다.
대통령은 선장이고 각 부처의 장들은 항해사, 기관장, 조타수 등이 된다. 대통령은 국민을 태운
배를 선장직을 교대할 다음 항구까지 안전하게 끌고갈 책임이 있다. 감사원은 바로 이런 임무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감시역이다. 각 조직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선장이
원한다 하여 이를 본체만체한다면 그 배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므로 감사원은 대통령의 뜻에 맞고 안 맞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조직이 얼마나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바로잡도록 노력하는 것이 핵심 임무이다.
청와대를 시작으로 감사원의 이른바 '성역 없는 감사'가 착수되었다. 청와대 비서실의 직원들은
처음에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박정권 이래로 근 20년 동안 청와대는 그야말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풍지대였다.
청와대를 들여다보겠다는 감사원의 요구는 사실 대통령에게도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원의 '서릿발 같은 감시자' 역할은 누구보다도 김 대통령이 여러 번 요구했던 것이고,
이런 차원에서 결국 청와대는 감사원에게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