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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무 살까지 담양에서 살았는데 대략 6번 정도 이사를 다녀서, 읍내는 모두
고향 같습니다. 초등학교도 안 나온 우리 어머니께서 남다른 안목으로 읍내에서
6남매를 키워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천변 리는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영천
상회 안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때 우리 집식구는 할머니, 부모님, 큰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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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누나, 나, 진호, 명희까지 8명이었어요. 이사하고 바로 막내 희 정이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출산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산파가 오고 문고리에 천을 매달아 두 손으로 잡고, 용을 쓰시던 어머니께서 산통
때문에 지르던 소리나, 아기가 첫 울음을 터트리던 것까지 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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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따뜻한 물을 끓여서 산파에게 주었고 병원의 간호사처럼 보조 역할을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군불을 지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엔 가족계획이라는
것이 없어서 6남매는 많은 것이 아니라 흔한 일입니다. 전에 남학교 앞에 살 때는
영조네. 창희네, 홍신이네, 백미네, 우리까지 6가구가 살았으니 한 집 당 8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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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도 40명입니다. 가장 불편한 것이 화장실 사용이었는데 독채로 이사오니까
세상 편합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까지 살았다 치고 6년을 살았네요. 우리 주변
에는 앞집 병주네 3남 1녀, 옆집 '럭키 상회'하는 화영이네 4명, 화수네 2명, 골목길
100m쯤 지나 말더듬이 아줌마 금순이네 5명, 철홍이네 3명, 100m를 더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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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순채 6명, 훗날 우리 작은방에 세 들어온 종대 식구 5명 정도가 매일 보는 동네
사람들 입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도 1년 이상은 남학교 앞으로 동생 진호를 데리고
원정을 다니다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서서히 천변리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천변리가 왜 천변리 인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하천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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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 쓰는 걸로 봐서 양쪽에 천이 있어서 천변으로 이름을 지었을까요? 70년대 천변
리는 담양의 을지로 정도 될 것입니다. '삼천리 연탄공장'이 있었으니까요. 연탄공장
삼천리는 지금 삼성전자 같은 포지션입니다. 남중학교 후문 쪽에 있었던 연탄
공장이 80년 후반 정도에 없어졌을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삼천리 연탄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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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양반을 우연히 사장으로 모시고 1년 정도 강남에서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삼천리' 연탄이 지금은 도시가스 보안업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 아파트 도시가스도 삼천리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렌터카
검사 딜리버리를 갔다가 참고 자료를 모바일에 담아왔습니다. 위치는 평택과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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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있고 지금은 사업을 주택공사 쪽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잘 됐으면
좋겠네요. '땅벌'이란 노래를 아시나요? 이 곡은 원래 나훈아 씨 곡이죠. 히트는
조인성이 '비열한 거리'로 시켰어요. 그 시절(2007) 저는 주) 쉐링을 사직하고
퇴직금 1억 5.000으로 강남에서 놀던 때인데요. 인성이 콘셉트로 슈트를 맞춰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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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호박 나이트-텐 프로에서 땡 벌을 불렀을 것입니다. 이쁜 놈 용민이 녀석이랑
하루는 '보스'에서 장군의 아들 박 상민을 보았어요. 그놈 참 잘 생겼더라고요.
놈도 지금은 50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시망스럽고 한 성격한다는 말을 듣는
편인데 십 대에는 범 생이었다는 것을 제발 믿어주시라. 제가 이렇게 된 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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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가 환경 탓입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지만 청소년 시기엔
역기능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열 살 무렵 제 관심은 딱지와 구슬이었고
앞집 병주 형네가 이사를 온 후부터 수렵과 고기잡이에 빠졌습니다. 이미 중학생인
그 형은 병주, 병훈, 병석 삼 형제가 세트로 움직이는 통에 경쟁력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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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에 딱지나 구슬은 나한테 안 됐는데, 고기잡이만큼은 어부 수준이었어요.
우리는 고기잡이용 작살을 만들거나 더듬이 고기잡이였으니 장비라고 해봐야
작살과 수경이 전부이나 그 형네는 투망이나 초크도 있었습니다. 삼 형제가 초크를
다 칠 줄 알았고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고기란 고기는 다 잡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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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을 만들어 먹을 정도입니다. 한 번은 제게 메기매운탕을 먹으라고 줘서 기겁을
했어요. 저는 민물고기는 입에도 대지 못합니다. 내륙 사람들은 다들 민물고기를
좋아하더라고요. 반공 휴일에는 정오가 되면 소방서에서 사이렌을 불어줬어요.
4학년 3반인 저는 68명 중에 12번이었고 담임이 박 공옥 셈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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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때 담임은 이 상수, 6학년 때는 희리 형네 큰형 지은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소년중앙, 새 소년, 어깨동무. 일일 공부, 차돌바위 정도가 인기를
끌었고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지만 외화 '600만 불 사나이'나' 소머'즈 그리고 '타잔'은
사족을 못 쓰게 만들었어요. '어깨동무' 별책 부록으로 나온 '손오공' 만화책은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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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에 베고 잤습니다. 아, 저팔계, 삼장법사, 사오정, 여의봉까지 끝내줍니다.
4학년이 되도록 저는 공부도 운동도 뭐하나 잘하는 것이 없는 조용한 아이였어요.
그렇지만 만화책보고 본떠 그리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렸습니다. 주먹대장, 마징가Z,
우주소년 아톰, 5학년 땐 로버트 태권 V가 나와서 애니메이션 히어로들을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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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 500개 정도를 그려서 보물단지처럼 가지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도 똑같이
그렸어요. 이것은 제 미술 인생의 중요한 시발점입니다. 우리는 여름방학 내내
수발에서 살았어요. 멱도 감고 다슬기나 고기를 잡으러 다녔어요.
우리가 집에서 수발까지 가려면 석유 집-철홍이네-순채네-삼천리 연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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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집을 지나면 정미소가 있고 그 옆에 돌집-소전-둑길-딸기밭-수발로이어집니다.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추억 사냥을 멈출 수가 없어 우산을 하나
샀어요. 지금 제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양쪽으로 실개천이 흘렀어요. 정미소 옆쪽으로
합류하는 도랑은 제법 큰 도랑이 있어서 다리 밑에 논 메기가 양 수염을 쫙 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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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나게 올라오곤 했습니다. 세상에, 정미소 자리에 죽여주는 카페가 있네요. '정미 다방'
이라고 앙증맞게 쓰여 있었어요. 명절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떡을 쪄오고,
고추 방아를 빻아왔는데 말이에요. 요새 커피숍들이 방직공장이나 폐건물 같은 곳에다
오픈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실물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인테리어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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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훨씬 좋아 보입니다. 카페에 정신이 팔려 10분 이상을 둘러본 것 같습니다.
돌집은 내 친구 최 진호네 집입니다. 혹시나 하고 구역 안으로 들어가 보았어요.
우 씨, 아무도 없네요. 수발로 가려면 소전머리 쪽으로 꺾어야 합니다만 '뚝 방 국수'
간판이 발길을 잡습니다. 우산을 접고 들어가 국수 한 그릇을 시켰어요.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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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구먼요. 신분을 밝히고 이곳이 내가 아는 그 집이 맞느냐고 물었어요. 맞대요.
'한신 포차'처럼 꾸며놨더라고요. 50평 남짓 한 홀 안이 테이블로 빽빽했어요.
2층은 ‘관방천’으로 이어지는 둑길에 방부목과 어닝을 치고 야외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 집 주인장은 매형 친구이고 동생은 제 친구인데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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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타 중입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원래 하던 경운기 수리 점을 없애고 가건물에 시작한
국숫집이 먼저 대박을 쳐서 동생을 주고 수택이 형은 이곳으로 이전을 했답니다.
10년 전에 강호동 이승기가 하는 1박2일이 잘 나갈 때 죽녹원 입구 쪽부터 번지기
시작한 국숫집이 담양 전체를 먹 여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1년 후배 진0 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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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이었는데 지금은 병이 났다고 하는 것 같아요. 벤츠 타고 다닌다고 하더니만
인생 일장춘몽입니다. 10분 앉아있다 나왔어요. 마중 나오는 안주인이 미인입니다.
쉰한 살이면 내 동생 0희보다 후배에요. 그래도 형수님이라고 깍듯이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가야 해서 돌집 안쪽으로 길을 잡았어요. 시화전 형태로 된 벽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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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반겨줬습니다.'소머리의 흔적' 2018.10. 한 삼채는 저랑 동문수학하던 친구입니다.
미술부를 같이 하고 아마도 조선대를 나왔을 것입니다. 노 0호, 한 삼채, 김 0석을
담양 미술인 3인방으로 치면 욕먹을까요?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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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발로 가는 뚝 방 길을 올라탔어요. 오른쪽(양각리 )으로 가면 관방천이 나오는
줄 저도 다 알지만 왼쪽 길을 선택했어요. 40년 전에는 이쯤 해서 소전을 내려다보면
장날 소 팔고 사는 사람으로 미어터졌습니다. 한 번은 개가 불붙었는데 사람들이 다들
구경을 하는 겁니다. 저도 조무래기들과 서서 구경을 했지요. 꼰대들이 노닥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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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괜히 내가 창피했지만 다음 액션을 어떻게 취할지를 몰라서 불편하게 서있었어요.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뜨거운 물을 세숫대야에 한가득 가져오더니 개와 개 사이에
들이붓는 겁니다. 개들이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구판이 끝났어요. 아마 그 개들은
다시는 붙지 못할 것이고 그 아줌마는 필시 과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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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머리에서 둑길을 따라 300m쯤 가면 왼쪽으로 딸기밭이 있었어요, 봄에는 앵두도
함께 팔았어요, 저는 어머니께서 5학년 때 딱 한 번 데리고 와서 찍은 흑백사진이
지금도 있습니다. 누나 주려고 산 청바지를 왜 제가 입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색깔이 빨강이라서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지금은 딸기밭이 농기구 공장으로 바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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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렸네요. 저기 수문이 바로 수발을 알려주는 표식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지금도 고기가
많게 생겼어요. 저 수문 꼭대기에서 다이빙을 했고 내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익사
사고가 없었어요. 고기는 물 내려오는 돌무덤에 많았어요, 올여름에 가평계곡에서 어항을
넣고 고기를 잡아봤는데 몇 마리 못 잡아서 다 놔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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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까지 뚝 방 길이 없었는데 지금은 약 1km 정도를 가로수를 심고 맞은편 고수
부지와 연결해놓았더라고요. 물론 다리도 새로 놓았어요. 1998년이면 20년 전입니다.
김포공항 쪽에 가든 을 가보셨나요? 꼭 그런 스타일의 가든 레스토랑이 있었고,
중간에 버스 종점도 하나 있습니다. 비가 적당히 와줘서 직사광선보다는 운동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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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것이 그래도 낫습니다. 관방천 맞은편 뚝 방 길을 경유해서 향 교 다리를
건너면 객사리가 나옵니다. 객사리도 왜 객사리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질 않았습니다.
설마 '밖에서 죽는다'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가끔 동사무소 공터에 딱지나
다마치기 원정을 나온 것 빼고는 객사리에 오지 않았고 중2 때쯤 기저기(기정우)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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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공 차러 동교 운동장에 들락거렸습니다. 기저기 형은 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그 형은 감독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저만 그랬을까요? 동교는 히스토리가
남교보다 훨씬 오래되어서 우리 때는 부자 학교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남교가 더 커진
이유가 백동이나 남산리 쪽에 아파트가 밀집되면서 그리되었다고 합디다. 우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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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k 이상을 걸었더니 피곤이 몰려옵니다. 그래도 소확행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점심 겸 저녁을 내장 탕으로 먹고 막걸리도 한잔했습니다. 밑반찬이 대체적으로 짠데
겉절이가 제 입에 딱 맞아서 후회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담양 택시 부가 있는 양각리
다리까지 올라갔다가 영천 상회 안집까지 거슬러 내려왔는데 '아인 당구장'도 없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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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다방'도 보이질 않았어요. 제가 고3 때 중앙 다방 옆에서 정'든 집'이라는 식당을
잠깐 했는데 1년도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어요. 어머니께 물어봤더니 3000원 주고
식재료를 사서 500원 남고 팔았으니 손님은 바글바글한데 안 망하고 베깁니까?
60-70년대 유일하게 아스팔트길이었던 파출소에서 우리약국까지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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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서 '소년은 이로 할 새 학 난성 하니'가 저절로 떠올라서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할 즈음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늙기도 설 커 늘 짐을 조차 지을 소냐?'
"할머니 몇 살 잡수셨어요?" 91살이랍니다. "명자 엄마를 아시나요?" 글쎄 모르신대요.
태양 상회 뒤편이었던 우리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석유 집만 유일하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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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어요. 태양 상회를 기준으로 길 건너는 지침리입니다. 지침리는 발음 할때는 기침리와
혼돈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과거 이곳에 한지공장이 있었다하여 '지침리'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압니다. 골목에 들어서면 오른 편 첫 번째 집이 살훈, 상철, 상래 네 집, 다음은
내 친구 형기네, 그리고 오른쪽 긴 담벼락이 김 만수 씨 저택이 있고 골목 끝에 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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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 형 네, 좌측으로 재홍이네 집이 있어야 맞는데 유일하게 김 만수 씨네 저택만 남아
있었어요, 영록이 형네 탁구장은 헬스클럽이 들어 섰고 그 뒤로 석이네 목욕탕 건물이 식당으로
바뀐 것 같았어요, 우리는 이곳에서 골목축구를 거의 매일 했어요. 공이 담을 넘어가면 제가
담을 타서 꺼내 오곤 했습니다. 이집 딸내미 은미는 우리 동창인데 그때도 신분 차이가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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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몇 번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지금 뭘하고 살까요? 어느 보름날이었는데
영호 형 네 담을 넘어, 수성 병원 안집 단감나무를 서리하던 기억도 납니다. 그 집 단감이 대개
크고 달았을 것입니다. 40년이 지났고 만 이 감나무가 저를 알아볼까요?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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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분꽃, 무궁화가 아니어도 아름드리나무 가지들이 떨 켜를 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나무들도 월동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광합성을 하는 나무들은 가을에 접어들어 기온이 떨어
지고 햇빛이 약해지면 그 기능을 못해 영양분도 못 만들고 나무가 머금은 수분만 빼앗아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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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이때 나무가 쓰는 전략이 이별입니다. 나무와 잎 사이에 ‘떨 켜‘라는 얇은
막을 만들어 물과 영양분이 잎으로 흘러가는 것을 차단한다네요. 제가 비루하게
지냈던 5년 전에 살아남기 위해서 마음에 떨 켜를 치다 보니 셀프 디스가 버릇이 돼
버렸어요. 이제 그러지 않고 살려고요. 이게 다 급해서 그런 것입니다. 천천히
느릿느릿 생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힘!
2019.9.24.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