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실종 - 이청준
■ 핵심 정리
• 배경 : 현대. 서울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등장인물의 눈을 빌려 서술하되, 장면에 따라 시선을 바꾸고 있다.)
• 주제 : 평화와 안주를 욕망하는 개인과 이를 억압하는 현실
• 의의 : 이 소설은 윤일섭이 보이는 안과 밖의 비약과 전도를 통해 개인의 평화와 안주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을 보여주고 있다.
■ 등장 인물
• 윤일섭(은행원) : 증상 - 안과 밖을 나누어 보는 도착 증세를 보임
• 손박사(의사) : 윤일섭의 도착 증세는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욕망에서 온 것으로 잘못 판단함.
■ 줄거리
은행원 윤일섭은 대리 승진에서 몇 차례 탈락하면서 의식의 도착증, 가학성 유희욕, 대인 기피증 등의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손 박사의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윤일섭은 자신의 학창 시절의 시위 경험에 대해 교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다는 전도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손 박사는 그러한 안으로의 지향이 사실은 밖으로의 지향에 대한 도착이라고 해석하면서 은행원으로서의 윤일섭도 은행 문 바깥의 자유를 욕망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자신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나열하며 윤일섭을 설득한다. 그러나 윤일섭이 실종된 후 찾아온 직장 동료는 윤일섭이 문 안의 평화와 안주를 외면했다고 한다. 행방이 묘연해진 윤일섭은 결국 동물원에서 사자를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정신 분열증 환자인 윤일섭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 실종을 꿈꾸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과거 사실에 대해 보이는 비약과 전도를 통해 안주를 욕망하는 개인과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을 보여 주고 있다.
-대학 시절을 학생 시위로 어수선하게 보냈던 윤일섭은 은행에 취직해 정신적인 안도감과 안정감을 얻으려 하지만, 그 은행마저도 그에게 안정감과 안도감을 주지 못한다. 은행의 승진에서 탈락하고 언제 은행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의사는 윤일섭의 병의 원인을 그의 과거(대학 시절)에서 찾기 위해 그의 과거의 행적을 조사한다. 조사를 통해 윤일섭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었으나 전경들로 가로막혀 있는 문 때문에 공부를 못하게 되고, 은행에 입사하고 나서도 은행의 배치가 전경들의 스크럼과 유사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 의사는 윤일섭이 문을 들어가려고 하는 행위가 전도되어 문을 나가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결국 윤일섭은 실종을 원했고, 사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그 사자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한다. 이것은 기성 체제의 질서에 편입되고서도 그 체제로부터 탈락, 배제되지 않기 위해 그 체제를 순응해 살아가는 모습과 그 이면에 추방과 배제에 대한 불안이 겹쳐져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생겨나는 스펙트럼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현대의 작가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가장 첨예한 위기의 시대로 인식하는 듯하다. 위기의 현재성 내지 영속성은 ‘세상에는 더 이상의 꿈이나, 희망, 유토피아가 없다’고 읽어낸다. 이제는 전쟁의 아픔을 잊어도 되는 때가 된 것일까. 아니면 과학문명의 진보가 낳는 심각한 폐해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일까, 전쟁의 상흔을 그려내거나, 근대화 이후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된 삶에 천착하던 작가들의 시선이, 근래에 들어와서는 인간살이의 불구성에 초점화되기 시작했다.
-이청준의 시선은 어느 순간 ‘개인의 진실과 사회적 진실이 어깨를 함께 할 수 있는가’에 멈추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정할 때 그것은 사회의 고정화된 틀에 희생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야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다만 환부를 청진기나 메스가 아닌 문학을 통해 해결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황홀한 실종>에서 사용된 정신병은 그리 특이한 소재가 아니다. 인간을 관찰하는 각도를 달리한다면 그 누구도 정신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자기성찰의 기회를 부여하는 소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청준은 개인의 진실과 사회의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두 그룹으로 나눈다.
-손박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신병 환자가 병원을 찾아오지 않고도 자신을 견딜 수 있게끔 치료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학습해온 이론에 기초해서 환자를 바라보는데 충실할 수밖에 없고, 그 본연의 자세가 지탄받을 일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의 증상과 그 증상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심리까지도 논리적으로 증명, 해석, 설명하려 한다. 이는 그에게 있어 세상의 진실이 되며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로까지 확대된다. 대상을 정신병 환자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 틀은 자신이 영원히 안주하고 싶은 유토피아를 견고히 하는 것과 동시에 그 주위에 쇠창살을 치는 결과까지 낳는다.
-윤일섭에 대한 손박사의 치료는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손박사와 사내의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논쟁은 쇠창살의 존재와 사실의 진실성에 대한 생각이 각각 얼마나 철저하게 관념화되어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사실의 확인만이 환자의 의식을 바로잡아 나갈 수 있다는 손박사의 믿음은 오류이기에, 진정한 치료의 부재를 낳았다. 결국 윤일섭은 실종을 원했고, 사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들어앉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와 안정도 영원할 수 없을 뿐더러, 사자와 구경꾼을 가르는 사자우리의 철책도 임의로 설치한 또 다른 쇠창살이 된다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개인적 진실과 사회적 진실이 대결할 경우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격이 되기 쉽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사회가 개인의 진실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선험적이거나 고정된 틀에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실종을 꿈꾸는 또 다른 윤일섭이 양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식인이 나서야 한다. 먼저 스스로 둘러친 쇠창살을 쳐부순다면 윤일섭의 병은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상황에 놓여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청준이 안내하는 유토피아로의 길에 서는 것이리라.
■ 작가 이청준(1938-2008)
1960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했다. 〈사상계〉·〈여원〉 등에 근무했고, 1986~87년 한양대학교에 출강했다. 대학 졸업 전인 1965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작품공모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그뒤 〈병신과 머저리〉(창작과 비평, 1966. 9)·〈과녁〉(창작과 비평, 1967. 9)·〈소문의 벽〉(문학과 지성, 1971. 6)·〈이어도〉(문학과 지성, 1974. 9)·〈잔인한 도시〉(한국문학, 1978. 7)등을 발표했다.
글쓰기의 문제와 종교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의 소설적 주제는 '진실된 삶'의 문제였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보면,
첫째, 진실된 삶을 가로막는 억압의 실체를 탐구하는 작품으로 〈병신과 머저리〉·〈소문의 벽〉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병신과 머저리〉는 사회적 억압의 실체에 대한 끈질긴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의 체험을 상처로 간직하고 있는 형과 화가인 동생을 비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소설의 초점은 궁극적으로 동생에게 맞추어져 있다. '병신' 세대인 형은 적어도 억압의 실체가 6·25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고 그것의 극복도 가능하지만, 아픔만 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머저리' 세대인 동생은 근원적으로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둘째, 진실된 삶에 대한 동경과 추구를 그린 작품으로 〈이어도〉·〈당신들의 천국〉(신동아, 1974. 4~1975. 12)·〈잔인한 도시〉 등이 이에 해당된다. 〈당신들의 천국〉은 〈이어도〉에서 보여주던 현실도피적 발상을 벗어나 '현실 속에서 이상향의 건설은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끈질기게 파헤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그의 모든 소설에 나타나는 기본 관점은 진실과 거짓, 자유와 억압, 사랑과 증오 등의 이분법에 기초한 초월적 이상주의이며, 〈당신들의 천국〉은 이러한 관점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소설집으로 〈별을 보여 드립니다〉(1971)·〈가면의 꿈〉(1975)·〈예언자〉(1977)·〈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자유의 문〉(1989)·〈흰옷〉(1994)·〈날개의 집〉(1998) 등 다수가 있고, 수필집으로 〈작가의 작은 손〉(1978)·〈사라진 밀실을 찾아서〉(1994) 등을 펴냈으며, 희곡 〈제3의 신〉 등이 있다. 그동안 발표한 작품을 모아 2003년 이청준 문학전집(열림원) 총 25권으로 완간하였고, 2007년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마지막으로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