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셔스 3> 세계문화유산 로몬산 등정 - 2024. 09. 27.
세계문화유산 ‘Le Morne Cultural Landscape르몬 문화경관’: 모리셔스 남서부, 대서양과 인접한 곳에 18세기~19세기 초에 도망친 노예나 유배자가 숨어 살던 바위투성이 산이다. 이곳은 험한 산이나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 부근에 있으며 무성한 숲으로 가려져 보호되어 있었다. 도망친 노예들은 르몬 산꼭대기나 부근 동굴에 작은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르몬 문화경관은 아프리카 본토, 마다가스카르,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온 노예들이 희생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 탈주 투쟁을 벌인 상징적인 곳이다. 실제로 모리셔스는 이전에 동방 노예무역에서 잠시 체류하는 중요 거점이었으며 수많은 노예가 탈출해 르몬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배자 공화국’이라는 뜻의 ‘마룬 공화국(Maroon republic)’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최근 연구로 인도양에서 행해졌던 노예무역에서 모리셔스 섬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인도에 설립된 다음 해인 1639년에 노예들이 모리셔스에 처음 도착했다. 1640년대 섬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려고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노예 300여 명이 발을 들인 후 노예들은 1710년 네덜란드인이 이 섬을 떠날 때까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1년 뒤 섬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노예를 통솔하였다. 1740년까지 노예 인구는 백인 1명에 7명꼴로 백인 인구보다 훨씬 많았다.
1769년 프랑스 왕실 칙령에 따라 이 섬은 자유무역 지역이 되어 무역은 증대하고 인구도 늘었다. 마다가스카르뿐 아니라 킬와(Kilwa) 섬과 잔지바르(Zanzibar, 탄자니아 자치령) 섬의 노예 시장을 통해 노예가 많이 유입되었다. 노예 인구는 1769년 15,000명에서 1797년 49,000명으로 급증하였다. 18세기 말 노예 인구는 전체 인구의 80%에서 85%로 추산된다. 19세기 초 노예 인구는 60,000명에 달했다. 그 뒤 노예 인구는 점차 줄었지만, 1835년 노예해방 시기에도 인구의 3분의 2가 노예였을 것으로 추산한다. 모리셔스의 노예는 인도양과 그 밖으로 송출되었다.
식민 시대 인구조사 기록에 따르면 모리셔스에 있는 노예는 인도양과 그 너머 마다가스카르, 모잠비크, 기니, 서아프리카의 기니 해안(Guinea Coast), 카나리 제도(Canary Islands), 아비시니아(Abyssinia)뿐만 아니라 인도 아대륙(亞大陸)인 벵골(Bengali), 말라바르(Malabar), 티모르(Timor)에서 왔다. 식민지 인구조사에 따르면 관례적으로 노예들은 모리셔스의 크리올에서 태어났거나 말라가시인(Malagasy), 모잠비크인(Mozambiquan), 인도인 네 그룹으로 분류된다. 그들 전체의 40%는 동아프리카에서 왔고, 50%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왔으며, 인도, 서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노예들은 6.8%였다.
투르 쉬니(Trou Chenilles) 마을은 해방된 노예를 위해 르몬 산기슭에 세워졌다. 1945년 사이클론으로 큰 피해를 입어 해안에서 좀 더 동쪽으로 올라간 곳으로 마을을 옮겼다. 1964년에는 해안 쪽으로 르몬 산 남서쪽, 오늘날 르몬 마을이 있는 곳으로 다시 옮겼다. 마을에는 르몬 산과 주변에서 살던 혼혈 노예의 후손인 크리올이 살았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르몬 산을 신성시하면서 산과 영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마을 공동체에는 노예였던 선조에게 물려받은 음악, 춤, 이야기, 요리 등 전통을 지켜나가는 수호자들이 산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중심지역과 완충지역이 부분적으로 발전하였다. 해안을 따라 리조트 호텔 건물 5채가 건축되었고. 르몬 산 북서쪽 비탈 모르셀망 캄비어(Morcellement Cambier)에는 상류층 저택들이 들어섰으며, 산 남쪽에는 주택 6채가 건축되었다.(UNESCO 홈페이지)
https://www.youtube.com/watch?v=5FlHbyeGVx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