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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25일 화요일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해마다 6월 25일에 한국 교회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기억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이 땅에 평화와 일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무슨 전쟁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얀마 내전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많은 이가 상대를 누르고 자신을 지킬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닙니다. 참평화는 용서와 화해로 이루어집니다. 힘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2014년 유럽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 그 테러에 대응하도록 주요 명소에 군인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는 테러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도심에서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은 오히려 긴장과 불안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힘에 대한 더 큰 힘의 대응은 평화를 가져오기보다 더 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힘의 대결이 지속되는 한, 참평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북한은 미사일을 쏘며 힘을 과시하고, 남한은 군사 연합 훈련으로 이에 대응합니다. 더 큰 힘으로 서로 위협하는 이 상황에서 참평화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실천할 방식을 제시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형제의 죄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바탕으로 서로 화해하고, 대화로써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호적인 태도와 그렇게 쌓인 신뢰가 참평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는 것일까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물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선물을 주십니다.
동서독의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통일은 정말 선물과 같이 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귄터 샤보프스키 의원이 동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동독인들이 해외여행을 위해 비자를 더 쉽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샤보프시키는 일설에 의하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새로운 규정의 세부 사항과 시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인은 샤보프시키에게 새로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다소 불확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지체 없이 즉시 발효됩니다. 이 발언은 틀렸으며 동독 정부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해당 규정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시행되도록 의도됐습니다.
샤보프스키의 성명은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며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인구 유입에 대비하지 못한 국경수비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명확한 명령도 없이 늘어나는 군중에 직면한 그들은 결국 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이 물결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강화되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통일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철책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기쁘게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가 왜 그 많은 통일비용을 내야 하느냐며 통일을 반대합니다. 앞으로의 치안과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결혼도 안 하고 자녀를 낳지 않아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대립으로 우리가 소비해야 하는 군사비용이나 핵무기의 위협과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기대되는 이익도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북한을 이용하기 위한 것 아니냐, 우리가 북한이 불쌍해서 통일해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고마움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비굴해지느니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맞서다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했던 마사다 항쟁을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영화 ‘300’에서 자신은 관대하다는 페르시아 장군에게 목숨을 잃더라도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북한에게 다가갈 때는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선물로 통일의 물꼬가 트일 때 서독인들처럼 기쁘게 동독 사람들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너 나 아니었으면 거지로 살았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과 살겠습니까?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통일이 우리에게 더 좋다는 전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오면 내분이 없이 바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그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통일의 이점이 어려움보다 크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기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일의 준비가 된 것이고 이때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60이 넘으면서 꼭 지켜야 할 삶의 태도 5가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도 어느덧 60이 넘어서인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강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젊어서는 식탁에 꽃병이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식탁에 약병이 놓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점잖다.’라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그만큼 말에 품격과 품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늙은이’라는 말은 늘 그렇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면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점잖게 늙어가는, 늘 그렇게 변함없는 노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5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겁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무엇이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겁니다. 소신껏,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저는 신학생으로 지내면서, 사제로 살면서 소신껏 지내기보다는 아무래도 눈치를 보았습니다.
둘째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겁니다. 60년대에 태어난 저는 해외여행을 많이 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가능하면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습니다. 여행은 삶에 활력을 주고, 여행은 새로운 견문을 넓혀주고, 여행은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참다 보면 여행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몸이 떨릴 때 가면 어렵습니다. 여행의 목록을 정해놓고 떠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다행히 저는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힘들고 어려울 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33년 사제로 지내면서 동창 신부님들은 제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매달 서울에서 동창 신부님들이 만나는데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큰 아쉬움입니다. 뉴욕에서 팬데믹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동료 사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도 서울 교구 신부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 세상 떠나는 날 그 한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면 좋겠습니다.
넷째는 자기 계발입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좋습니다. ‘난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기 보다는 ‘나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하면 좋습니다. 본당에는 성경 공부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부채춤을 배우는 모임이 있습니다. 사물놀이를 배우는 모임도 있습니다. 저도 팬데믹 때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생은 많이 소유한 것으로 존경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이웃과 나눌 때 존경 받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건강관리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늘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집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면 건강해 집니다.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는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는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서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방법도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이룰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너그럽게 품어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결실을 맺기 어렵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관계는 꼭 시비를 가려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남과 북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비를 가리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는 더욱 심하게 꼬이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해결되나니 이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이다. 시비(是非)란 본시 그른 것만 취한다면 해결되지 않으며, 옳고 그른 것을 동시에 놓아버려야 끝이 난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라고 합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普施와 容恕 그리고 사랑이만이 냉각된 남과 북의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 함께 계시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짐이 아니라
나눔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내침이 아니라
품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름이 아니라
이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맞섬이 아니라
화해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폭력이 아니라
평화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오늘의 성인
성 빌리암(William)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지역 : 베르첼리(Vercelli)
활동연도: 1085-1142년
같은이름 : 굴리엘모,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이탈리아의 베르첼리에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난 성 빌리암은 불행하게도 아기 때에 고아가 되어 친척들에 의하여 자랐다. 그는 14세 때에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여행을 떠났다가 몬테 솔리콜리(Monte Solicoli)에서 은수자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예루살렘 순례를 계획하였으나 강도들의 습격을 받은 후 이를 포기하고는 몬테 베르질리아노(Monte Vergiliano)에서 은수자로 지냈다.
이때부터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몬테 베르지네(Monte Vergine)의 은수자들'로 알려진 수도자들이다. 그 후 그와 그의 친구인 마테라(Matera)의 성 요한(Joannes, 6월 20일)이 이끄는 수도원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회원들이 반대하자 그는 몬테 라체노(Monte Laceno)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는 등 여러 지역에 그가 세운 은둔소가 남아 있다. 그는 나폴리(Napoli)의 로제르 1세(Roger I)의 고문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성녀 페브로니아 (Febronia)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 니시비스(Nisibis)
같은 이름 : 뻬브로니아
성녀 페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니시비스에서 살았으며 그 지방 최고의 미녀로 유명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지방 장관 셀레누스(Selenus)는 그녀가 만일 신앙을 포기하고 자기 조카 리시마쿠스(Lysimachus)와 결혼하면 석방하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리시마쿠스도 이미 신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기 시작한 줄 알고 그녀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이때부터 그녀에게 온갖 형태의 고문이 시작되어 마침내 죽게 되자 셀레누스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사건 때문에 리시마쿠스와 수많은 부하들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 소문은 삽시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