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문구 중에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참 그럴싸하게 들린다. 무릇 여자는 아름답지만, 아내에게는 여자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숱한 아내들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갖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남편들에게는 '한 눈 팔지 말고 아내만을 사랑하라'고 경고하는 뜻도 된다.
확실히 아내에게는 여자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아내의 손은 거칠지만 그 손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내의 손, 어머니의 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일해오다 보니 어느새 거칠어지게 된 것이 바로 아내의 손, 어머니의 손이다. 아내의 눈자위에서부터 하나 둘씩 늘어가는 주름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내의 주름살에는 남편과 함께 한, 그리고 자식과 함께 한 지난 세월이 숨어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마음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내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한없는 사랑과 봉사, 용서와 인내야말로 우리의 아내와 어머니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모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내가 여자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처럼 아내가 가진 모성을 새삼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성이 아름다운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이것을 구태여 다시 강조하는 것은 요즘의 세태가 자꾸만 모성의 중요성을 잊어 가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오늘날의 뚜렷한 흐름은 모성(母性)보다는 여성성(女性性)을 강조해온 것이다. 여성을 남편과 자녀에 구속된 하나의 종속적 인간상으로 보기보다는 독립된 인격체로 보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누구의 아내를 뜻하는 '미시즈(Mrs.)'라는 표현보다는, 결혼은 했지만 여전히 독립된 인격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미즈(Miz.)'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 그렇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처녀 같은 아내들을 일컫는 '미시'라는 말이 유행하고, 그러한 '미시족'들을 대상으로 한 잡지가 나오고 패션이 유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기 탤런트 황신혜와 유동근이 주연한 드라마 '애인'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마치 애인 없는 아내는 팔불출의 하나인 양 취급되어온 풍조가 또한 그러하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경찰'을 의미하는 '폴리스맨(policeman)'이 남성 편향적인 용어라 하여 중립적 표현인 '폴리스퍼슨(policeperson)'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내가 여자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세태를 향해 던지는 역설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 말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말이 자칫 아내와 여자를 상호 대립적인 개념으로 비치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 아내와 여자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여자라는 하나의 인격체 속에 모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아내에게는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아내로서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므로 둘 다를 소중하게 가꾸어 가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의 포기를 강요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아내들에게 '아내가 된 이상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부장적 봉건시대에서나 통할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는 아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속성, 즉 아내로서의 속성과 여자로서의 속성 가운데 후자가 더 본질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내로서의 속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후천적인 것인 반면, 여자로서의 속성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본능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본능적 속성은 인위적으로 억압하려 한다고 해서 잠재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현대의 센스 있는 남성이라면 아내가 결혼 후에도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가꾸려는 노력을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것이다. 여성은 나이가 들수록 화장을 곱게 하고 고운 빛깔의 옷을 입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특히 할머니들은 반드시 화장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어느 목사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권태기의 중년 부부들은 가끔씩 연애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도 권태를 이기는 훌륭한 하나의 방안일 수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거닐던 옛 거리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자녀들을 동반하지 않은 둘 만의 여행을 떠나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과 아내로서의 부담을 털어 버리고 한 번쯤은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남편에게는 가장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발휘되지 못하는 남자로서의 본성이 있고, 아내에게는 모성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발휘되지 못하는 여자로서의 본성이 있다. 이것을 잘못 억압할 경우 탈선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남성들의 그릇된 밤문화가 그것이고, 일부 여성들에게서 확산되고 있는 애인문화가 그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또 다른 저서 '남자들에게'에서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바라볼 때는 일차적으로 섹스의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 역시 이성을 인식할 때는 우선 수컷 또는 암컷으로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 역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숱한 여인을 마음으로 간음하였다고 회개한 바 있다.
간통죄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지만 나는 간통죄 폐지에 반대하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다. 아직까지는 간통죄의 존재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법익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남성의 횡포에 저항하여 이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가 여성계에서 날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가급적 그런 상황에 이르는 것을 미리 차단하여 이혼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혼을 통해서 한 여자의 혹은 한 남자의 자유는 보장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편부모 슬하에서 소외받고 자라야 하는 자녀들의 고통이 따른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족의 가치가 무너지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다원화 사회 그리고 정보화 사회가 될수록 가족의 가치는 소중하게 지키고 가꿔나가야 한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지만, 아내에게도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발산할 권리가 있다. 아내다운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여성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아내들이여!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말라. 그리고 남편들이여! 아내도 여자임을 잊지 말라." 아내는 아내로서의 아름다움과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조화롭게 가꿔 나가고, 남편은 그러한 아내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갈 때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