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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956책 (탈초본 52책) 영조 19년 4월 22일 을사 22/23 기사 1743년 乾隆(淸/高宗) 8년
○ 二十二日申時, 上御宣政殿。兵曹判書·禮曹參判引見入侍時, 右副承旨李成中, 假注書李永祚, 記事官趙明鼎·李毅中, 兵曹判書徐宗玉, 禮曹參判吳光運。上曰, 前以樂章事, 有所下敎於禮參矣。予有所料得者, 樂則七節, 而文則八句, 此何以爲之耶? 吳光運曰, 典樂輩, 以四字爲一句, 一節而讀三句, 則爲三節, 故欲以第四句, 應第一矢, 而八句之內, 除却發矢前三句, 則餘者爲五句, 以四句應四矢, 而餘一句, 則禮畢前, 奏之耶? 上曰, 然矣。今此射禮時, 執事典樂, 使之來待。又命入樂學軌範及詩傳騶虞章, 假注書臣李永祚出去持軌範及騶虞章。入奏。其間未記 上曰, 解得騶虞章句節, 則自可知矣。因命李成中讀之。上聽之曰, 此二章, 只是六句也。何以分排九節耶? 成中曰, 迎神曲九成之義, 若詳問, 則或可推知耶? 上曰, 予亦欲知九成, 知此則可以傍照也。又敎曰, 騶虞章, 終不可解耶? 徐宗玉, 讀騶虞第一章, 則上曰, 三句也。又讀第二章, 上曰, 此亦然矣。上使成中, 考見軌範第二卷所付, 龍飛御天歌, 有諺解處。上曰, 今番見律呂新書之得來於彼國者, 一間用四字, 而字字能周旋, 極好矣。我國豈然乎? 宗玉曰, 我國善歌者, 亦能字字屈伸, 而近來則此亦無之矣。上曰, 此如夷狄有君, 不如諸夏無君之言, 誠寒心矣。成中, 讀昔周等章, 宗玉曰, 龍飛御天歌, 可謂奇特矣。上曰, 然矣。又讀慶興始宅章曰, 以二章爲一歌章, 似以上文, 合爲一章矣。上曰, 若詳見, 則聖人有聲入心通處。古人則誠難矣。成中, 讀野人章。宗玉亦同見曰, 此則章章解之矣。又曰, 此則句句解之矣。上曰, 然則一節爲一章也。光運曰, 節奏必和緩, 然後可合於禮度。讀四字爲一節, 則其間一矢, 似急, 若廣詢則似可覺得矣。昔朱子於未發之中, 其所註解, 與延平·南軒, 不同, 多有論難, 終未歸一, 及與蔡伯通[蔡季通], 復講前說, 而忽然起疑, 渙然覺得, 以程子·延平說, 爲是。夫以朱子之大賢, 而得力於講劘者, 如此, 故凡事莫如問難之爲好矣。樂章, 素非用工者, 今日上下論難之際, 漸生脈絡, 庶可究得矣。上曰, 必是一章也。大抵我國訓民正音, 至理存焉, 若默量則甚奇矣。宗玉曰, 我國, 無唇齒音, 而諺文則有之, 世宗朝所纂也。使成三問, 問於中朝學士, 而知之, 禽獸之聲, 亦能形容之矣。又曰, 臣等所見, 局矣, 而所謂疊者, 果一首之謂也, 拍者, 一節之謂也。此則似分明矣。光運曰, 如李延德者, 亦可問之矣。上曰, 此人, 初則自謂不知笙簧, 而亦能爲之。其人於所知者外, 則不欲爲之。爲人蓋質實, 故若不知者然, 此予所以貴之也。頃與崔逵泰, 論難於榻前, 所見不同, 而問於彼國, 則李延德之言, 果是, 雖若不知, 而能知之矣。光運曰, 樂之所關, 重矣。君宮臣商, 不可宮弱而商强, 故黃鍾當商, 則用黃鍾之半聲, 而不用全聲。觸類而長之, 聲音之與政通, 如此。今此典樂輩, 胡亂奏樂, 五音失序, 識者寒心。此豈可放過者耶? 上曰, 典樂來乎? 注書出去問之。李永祚承命趨出, 而未及來待, 故還入奏之。其間未記 上問成中曰, 彼注書, 誰也? 成中曰, 其名李永祚, 卽今奉朝賀臣李宜顯之至親, 而其祚字, 與李重祚同行矣。上曰, 然乎? 其父誰也? 成中曰, 其父李普春, 以蔭入仕, 屢典郡邑, 頃以惠廳郞廳, 瓜遞矣。上曰, 其登科, 在於何時也? 成中曰, 昨年秋親臨試士時, 以對策爲乙科第二人矣。宗玉曰, 李延德, 爲人篤實, 非常調也。深知經義。前日六品講時, 能凝然善讀四書, 而一吐不誤。其時銓長, 卽今領相, 心奇之, 翌日移義禁府都事, 親政時, 又移龍宮縣監矣。然其爲人, 似少鈍矣。上曰, 予則貴其鈍也。宗玉曰, 以銓曹之道言之, 則宜以此人, 兼判事而不爲之, 此非久任責成之道。有成命而不爲擧行, 誠可怪也。宜更授此任, 使之責成也。侍講兼職, 則以玉堂爲之, 故閔應洙難之矣。其實兼, 正爲久任之道矣。成中曰, 樂院兼官, 乃是古制矣。成中仍起奏曰, 頃日下敎御筆四大字及御製絶句, 幾盡開刊, 漆繪, 可及於二十五日懸板之期矣。所揭處, 定於何處乎? 上曰, 大字則寢室北壁, 絶句則奉安閣大廳東壁, 可也。成中曰, 修理亦幾盡爲之, 而寢室有仰帳, 若如前張之, 則懸板必低矣。上曰, 張帳後懸之, 似難, 且帳則非舊物也。去帳而揭之, 可也。上曰, 慶運宮, 在於何處耶? 諸臣皆對曰, 不知之矣。成中曰, 宣廟朝日記, 可貴矣。雖間有蠹蝕, 必其時日記也。壬辰·癸巳之間, 行幸龍灣, 還御貞陵洞矣。宗玉曰, 或言在大貞洞, 而未詳矣。成中曰, 龍洞宮大門, 出於大貞洞云矣。上曰, 明禮宮, 與龍洞宮相近, 而龍洞, 偏卽寢室云矣。成中曰, 傳言漏局洞·政院里, 而未有文蹟矣。上曰, 貞洞, 予於臨弔崔相家時, 見之, 而今未詳矣。宗玉曰, 此家卽大貞洞也。上曰, 頃以排定射耦, 而大司成以下, 則射於壇下事, 有所下敎矣, 更思之, 旣有壇上下, 則堂上·堂下, 以此分之, 可也。其射自然有耦, 不必更定也。光運曰, 若取考五禮儀, 而一從文券, 則好矣。上曰, 注書出去, 持五禮儀以入。臣李永祚, 承命趨出, 其間未記 持五禮儀, 又引大射禮時典樂執事而入。光運, 承上敎問典樂曰, 一章之內, 折其章句而爲九成乎? 九讀全章而爲九成乎? 典樂曰, 九讀後, 爲九成矣。光運曰, 成與節有異乎? 曰, 有異也。成則以一章爲一成, 節則以一句爲一節, 如啓我後人, 爲一節矣。光運曰, 一句爲一節云者, 何以知之乎? 有明證乎? 必汝之斟酌也。曰, 然矣。上又命注書, 召典樂黃世大以入, 命光運問之曰, 俗樂一成十二律, 爲幾次回旋乎? 對曰, 迎神, 則詩五字, 付樂十七字, 繹成, 則詩與樂, 字字相付, 故緩急異矣。今此大射禮樂, 則用繹成, 故詩四字, 與樂四字相付矣。上下敎曰, 四字付一節, 在於何處乎? 典樂對曰, 在樂譜矣。光運問曰, 以四字付一節, 則太促, 而八句之內, 又餘一句。考諸騶虞詩, 則二章六句, 不可付九節矣。此必以一章爲一節, 今亦依此未發矢前, 讀全章三番, 已發矢後, 讀四番, 以爲七節, 何如耶? 無緩緩之弊乎? 曰, 似緩矣。曰, 可無移時之慮乎。上曰, 可比於一番拜禮時乎? 對曰, 一章時, 可爲四拜矣。上曰, 常時四拜, 入幾字乎? 斟酌言之, 可也。典樂曰, 比此則讀全章三番時, 幾四拜者, 三矣。宗玉曰, 贊儀李德寅, 熟諳此等事, 故射禮笏記, 亦善爲之矣。上曰, 此人將來, 必能辦事者矣。成中曰, 有可知者, 迎神曲, 果爲幾時乎? 典樂對曰, 頗久矣。上曰, 此若連續爲之, 則不但九成而止也。仍命諸臣考見軌範中, 節字成字有處。成中曰, 不可於猝乍間考出, 若令從容博考, 則好矣。上命注書召雅樂典樂以入。永祚承命趨出, 其間未記 引雅樂典樂以入。上曰, 雅樂則無節拍, 何如? 典樂對曰, 四字爲一節, 雅樂則本無五字矣。光運曰, 四字一節之云, 雅俗典樂, 所對同然矣。上曰, 今則無疑矣。以四字爲一節, 至第四節後告達, 而末節萬民所望, 則雖畢射, 必待樂止後, 告達, 可也。又下敎曰, 聲音必連續爲之, 而此似難矣。光運謂典樂曰, 汝輩, 臨時調合, 無有緩促, 可也。上曰, 習儀時, 亦如是爲之, 可也。命使退去。上命注書, 召贊儀李德寅, 持笏記待令於階下。永祚承命趨出召入。其間未記 上曰, 射耦未射時, 則在於同一隊乎? 考其數, 則堂上具宅奎·金聖應, 當爲一耦矣。前以射耦, 以左右弓排定事, 有所下敎, 而礪恩君, 似當爲第三耦, 使與儀賓同隊, 則爲好矣。光運曰, 必分排後單子, 可以修整矣。上曰, 然矣。上命入大射禮笏記於李德寅。成中跪上。上曰, 承宣亦在一邊乎? 成中對曰, 今番儀注如此矣。上曰, 進第一矢儀注, 見漏矣。仍下笏記於禮官, 使之考見, 又敎曰, 承宣讀笏記中, 以朱長畫處, 可也。成中讀之。上曰, 此則侍射者, 同入於班列之謂也。初四拜時, 與諸臣同立後, 乃入侍射位, 爲可也。四拜時, 佩弓矢, 可怪, 故臨射時, 出外具弓矢入射位, 爲可矣。五禮儀, 則無此文耶? 雖無, 何害之有? 德寅曰, 儀注, 本然矣。成中又讀笏記, 至衆耦, 以次射。宗玉曰, 此段則不緊, 不必別入笏記中也。上曰, 然矣。此則拔之, 可也。讀至以次付賞物。上曰, 此則豈必唱乎? 太長矣。只頒賞二字, 可矣。德寅曰, 改以軍器寺官, 頒賞物, 似好矣。上曰, 好矣。依此, 可也。讀至司饔院官員條, 又改以以觶酌酒, 跪置於豐。上曰, 習儀時, 亦當如此爲之, 如受罰者然, 可矣。讀至不中者, 上曰, 此亦長矣。只留卒觶, 而餘皆拔之, 可也。其以下二條, 又拔之。上曰, 習儀與正日, 禮官, 當入侍, 出擧條, 分付, 可也。成中曰, 禮官當盡入乎? 上曰, 禮堂一人, 入侍, 可也。出擧條 上曰, 射耦單子, 趁習儀時, 修整書入, 可也。
19-04-22[20] 병조 판서 등을 인견하여 대사례에 쓸 음악, 어필 등을 수집하여 정리하는 일, 세자를 교육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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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申時)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병조 판서와 예조 참판이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이다. 우부승지 이성중(李成中), 가주서 이영조(李永祚), 기사관 조명정(趙明鼎)ㆍ이의중(李毅中),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 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악장(樂章) 문제로 예조 참판에게 하교한 일이 있다. 내가 생각한 것이 있는데 음악은 일곱 절(節)이고 글은 여덟 구(句)이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오광운이 아뢰기를,
“전악(典樂)들이 네 글자가 글 한 구와 음악 한 절이라고 하였으니, 글 세 구를 읽으면 음악은 세 절이 됩니다. 그래서 네 번째 구를 첫 번째 화살에 대응시키려고 합니다. 여덟 구 중에 화살을 쏘기 전의 세 구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다섯 구인데, 이 중 네 구를 네 번 활을 쏘는 데 대응시키고 나머지 한 구는 예식이 끝나기 전에 연주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이번 사례(射禮) 때 집사와 전악이 와서 대기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또 《악학궤범(樂學軌範)》과 《시전(詩傳)》의 〈추우(騶虞)〉를 들이라고 명하니, 가주서 신 이영조가 나가서 《악학궤범》과 《시전》의 〈추우〉를 가지고 들어와 올렸다. - 그사이의 일은 기록하지 못했다. - 상이 이르기를,
“〈추우〉의 구절을 해독하면 절로 알 수 있다.”
하고, 이어서 이성중에게 읽으라고 명하였다. 상이 듣고 이르기를,
“이 두 장(章)은 여섯 구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아홉 절로 분배하는가?”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영신곡(迎神曲)이 구성(九成)으로 이루어지는 원리를 상세하게 알아보면 혹시 유추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구성에 대해 알고 싶다. 이것을 알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추우〉는 아무래도 분절할 수가 없겠는가?”
하였다. 서종옥이 〈추우〉의 제1장을 읽으니, 상이 이르기를,
“세 구이다.”
하고, 다시 제2장을 읽으니, 상이 이르기를,
“여기도 그렇다.”
하였다. 상이 이성중에게 《악학궤범》 제2권에 붙어 있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언해(諺解)가 있는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淸)나라에서 가져온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이번에 보니 1칸에 4글자를 사용하여 글자마다 주선(周旋)할 수 있어 몹시 좋았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노래 잘하는 자들도 글자마다 굽혔다 폈다 할 수 있었는데 근래에는 이런 것도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임금이 있는 이적(夷狄)이 임금이 없는 중화(中華)보다 낫다는 말과 같은 격이니 참으로 한심하다.”
하였다. 이성중이 《용비어천가》의 석주장(昔周章) 등을 읽었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용비어천가》는 대단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성중이 또 경흥시택장(慶興是宅章)을 읽고는 아뢰기를,
“두 개의 장이 하나의 가장(歌章)이 되니, 위의 문구를 합하여 하나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인(聖人)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통한 곳이 있다. 옛사람은 참으로 어렵다.”
하였다. 이성중이 야인장(野人章)을 읽으니, 서종옥도 함께 보고는 아뢰기를,
“여기는 장 단위로 분절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여기는 구 단위로 분절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한 절이 하나의 장이 된다.”
하였다. 오광운이 아뢰기를,
“절주(節奏)는 반드시 온화하고 느긋해야 예식의 법도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네 글자를 읽는 것을 한 절로 삼으면 그 사이에 화살을 한 번 쏘기가 촉박할 것 같습니다. 널리 의견을 물으면 깨우칠 수 있을 듯합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중용》의 ‘미발지중(未發之中)’에 대해 주해한 것이 이동(李侗)이나 장식(張栻)의 의견과 달라 논란이 많았고 결국 하나로 귀결되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채원정(蔡元定)과 전에 주장한 것을 다시 강론하다가 불현듯 의심을 품고 환하게 깨우쳐서 정자(程子)와 이동의 학설이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주자와 같은 대현인도 이렇게 강론하고 절차탁마하는 데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건 묻고 토론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악장(樂章)은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던 것인데 오늘 임금과 신하가 논쟁하는 과정에서 점차 맥락이 생겨나 거의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명 하나의 장이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훈민정음(訓民正音)에는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어서 묵묵히 헤아려 보면 매우 대단하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는 순치음(脣齒音)이 없는데 언문에는 있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편찬하면서 성삼문(成三問)으로 하여금 중국의 학사에게 묻게 하여 순치음에 대해 알게 되었고 금수의 소리도 형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서종옥이 또 아뢰기를,
“신들의 소견이 좁기는 하지만, ‘첩(疊)’이라는 것은 과연 한 수(首)를 의미하고 ‘박(拍)’이라는 것은 한 절(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하고, 오광운이 아뢰기를,
“이연덕(李延德) 같은 자도 자문을 구해 볼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 입으로 생황을 모른다고 했지만 역시 잘했다. 그 사람은 아는 것 외에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마도 사람됨이 소박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는 것일 터이니 이것이 내가 그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전에 최규태(崔逵泰)와 탑전(榻前)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소견이 서로 달랐다. 청나라에 물어보니 이연덕의 말이 과연 옳았다.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알고 있다.”
하였다. 오광운이 아뢰기를,
“음악은 관계된 바가 중대합니다. 임금은 궁(宮)이고 신하는 상(商)이니, 궁이 약하고 상이 강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황종(黃鍾)이 상에 해당하면 황종의 전성(全聲)을 사용하지 않고 반성(半聲)을 사용합니다. 유추한 바를 확장해 보면 이런 식으로 성음(聲音)이 정치와 통합니다. 지금의 이 전악들은 주악(奏樂)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오음(五音)이 질서를 잃게 하여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방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악이 왔는가? 주서가 나가서 물어보라.”
하였다. 이영조가 명을 받들고 달려 나갔는데 아직 와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들어와 상주하였다. - 그사이의 일은 기록하지 못했다. - 상이 이성중에게 묻기를,
“가주서는 누구인가?”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이름은 이영조이고, 현재 봉조하(奉朝賀)인 이의현(李宜顯)의 가까운 친척입니다. 이름에 조(祚) 자가 있으니 이중조(李重祚)와 같은 항렬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런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그의 아버지는 이보춘(李普春)입니다. 음관으로 벼슬을 했고, 여러 차례 군읍을 맡아 다스렸습니다. 얼마전 선혜청 낭청으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체차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거 급제는 언제 하였는가?”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작년 가을 친림(親臨)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일 때 대책(對策)으로 응시하여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습니다.”
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이연덕은 사람됨이 독실하니 평범한 인물이 아닙니다. 경전의 의미를 깊이 알아서 전에 육품강(六品講)을 할 때 사서(四書)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편안하게 잘 읽었습니다. 당시 이조 판서가 지금의 영의정인데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서 다음 날 의금부 도사로 옮겨 제수하였고, 친림한 도목 정사 때에는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옮겨 제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약간 둔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의 둔함을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전조(銓曹)의 도리로 말하자면 이 사람을 장악원 겸정(兼正)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구임(久任)시키고 책임을 완수하게 하는 원칙에 어긋나고, 명이 있었는데도 거행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다시 이 직임에 제수하여 책임을 완수하게 해야 합니다. 시강원의 겸직은 옥당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응수(閔應洙)가 반대했던 것이고, 사실 겸정으로 차하하는 것이 이연덕을 구임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장악원의 겸관은 고대의 제도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이성중이 일어나 아뢰기를,
“얼마 전에 하교하신 어필(御筆) 4자와 어제 절구(御製絶句)는 거의 다 판각하고 옻칠하였으니, 현판 기일인 25일에 맞출 수 있습니다. 거는 곳은 어느 곳으로 정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큰 글씨는 침실의 북쪽 벽에 걸고, 절구는 봉안각(奉安閣) 대청의 동쪽 벽에 걸도록 하라.”
하였다. 이성중이 아뢰기를,
“수리도 거의 끝났습니다. 그런데 침실에 있는 앙장(仰帳)을 전처럼 펼치면 현판 위치가 분명 낮아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앙장을 펼친 뒤에 현판을 거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앙장은 원래부터 있던 물건이 아니니 앙장을 제거하고 현판을 걸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운궁(慶運宮)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니, 신하들이 다 같이 대답하기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성중이 아뢰기를,
“선묘조(宣廟朝)의 《승정원일기》는 소중합니다. 간간히 좀먹은 데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 그 당시에 쓰인 《승정원일기》입니다.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 연간에 의주(義州)로 행행(行幸)했다가 정릉동(貞陵洞)으로 환어했습니다.”
하고, 서종옥이 아뢰기를,
“혹자는 대정동(大貞洞)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확실치 않습니다.”
하고, 이성중이 아뢰기를,
“용동궁(龍洞宮)의 대문은 대정동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례궁(明禮宮)이 용동궁과 가까웠고 용동궁 쪽은 침실이었다고 한다.”
하였다. 이성중이 아뢰기를,
“전하는 말로는 누국동(漏局洞) 정원리(政院里)라고도 하는데 근거가 될 만한 문서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동(貞洞)은 내가 정승 최규서(崔奎瑞)의 집에 조문하러 갔을 때 보았는데 지금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그 집은 대정동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얼마 전에 활을 쏘는 조를 짜서 정하고 대사성 이하는 사단(射壇) 아래에서 활을 쏘도록 하교한 일이 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왕 사단의 위아래를 나누었다면 이에 따라 당상관과 당하관을 각각 위아래로 나누어 보내면 된다. 함께 활을 쏘는 짝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다시 정할 필요가 없다.”
하니, 오광운이 이르기를,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확인해 보고 모든 절차를 문권(文券)에 나온 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가 나가서 《오례의》를 가지고 들어오라.”
하니, 신 이영조가 명을 받들어 달려 나가서 - 그사이의 일은 기록하지 못했다. - 《오례의》를 가지고 대사례 때 참석할 전악과 집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오광운이 상의 하교를 받들어 전악에게 묻기를,
“하나의 장(章) 안에서 장구(章句)를 분절하여 구성(九成)이 되는 것인가, 장 전체를 아홉 번 읽어 구성이 되는 것인가?”
하니, 전악이 아뢰기를,
“아홉 번 읽어야 구성이 됩니다.”
하였다. 오광운이 묻기를,
“성(成)과 절(節)이 차이가 있는가?”
하니, 전악이 아뢰기를,
“차이가 있습니다. 성은 하나의 장을 1성으로 하고, 절은 하나의 구를 한 절로 합니다. ‘우리 뒷사람들을 계도해 주소서.〔啓我後人〕’ 같은 구가 한 절이 됩니다.”
하였다. 오광운이 묻기를,
“하나의 구가 한 절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가? 분명한 증거가 있는가? 분명 너의 짐작일 것이다.”
하니, 전악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주서에게 명하여 전악 황세대(黃世大)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오광운에게 명하여 묻게 하고서 이르기를,
“속악(俗樂)은 1성에 12율(律)이 몇 차례나 돌아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영신곡은 시는 다섯 글자인데 대응되는 음악은 열일곱 글자입니다. 역성(繹成)은 시와 음악이 글자마다 서로 대응합니다. 그래서 완급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 대사례의 음악은 역성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 네 글자와 음악 네 글자가 서로 대응합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네 글자가 한 절에 대응한다는 말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전악이 대답하기를,
“악보에 있습니다.”
하였다. 오광운이 묻기를,
“네 글자가 한 절에 대응한다면 너무 촉박한 데다 여덟 구 중에 한 구가 남는다. 〈추우〉를 고찰해 보면 2장 6구라 아홉 절에 대응할 수 없다. 이는 분명 한 장이 한 절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에 근거하여 화살을 쏘기 전에 장 전체를 세 번 읽고 화살을 쏜 뒤에 네 번 읽어 일곱 절로 친다면 어떻겠는가? 너무 느려지는 폐단은 없겠는가?”
하니, 황세대가 아뢰기를,
“느릴 것 같습니다.”
하고, 아뢰기를,
“시간이 지체될 우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배례를 한 번 할 때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한 장을 읽을 때 네 번 절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통 때 네 번 절하면 몇 글자나 들어가는가? 짐작으로 말해도 괜찮다.”
하니, 전악이 아뢰기를,
“이것을 비율로 따져 보면, 모든 장을 세 번 읽었을 때 절은 거의 네 번 씩 3회를 하게 됩니다.”
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찬의 이덕인(李德寅)은 이런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대사례의 홀기도 잘 작성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앞으로 분명 사무를 잘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이성중이 말하기를,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영신곡은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하니, 전악이 대답하기를,
“꽤 오래 걸립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신곡을 연속해서 하면 구성(九成)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신하들에게 명하여 《악학궤범》 안에 절(節) 자와 성(成) 자가 있는 곳을 찾아보게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갑자기 짧은 시간에 찾아낼 수는 없으니, 차분하게 두루 조사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주서에게 명하여 아악(雅樂)을 담당한 전악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이영조가 명을 받들어 달려 나가, - 그사이의 일은 기록하지 못했다. - 아악의 전악을 데리고 들어왔다. 상이 이르기를,
“아악은 절과 박(拍)이 없는데 어째서 그런 것인가?”
하자, 전악이 대답하기를,
“네 글자가 한 절이 됩니다. 아악은 본래 다섯 글자인 경우가 없습니다.”
하니, 오광운이 아뢰기를,
“네 글자가 한 절이라는 것은 아악의 전악이나 속악의 전악이나 대답이 똑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는 의문이 없어졌다. 네 글자를 한 절로 삼고 제4절에 이른 뒤에 보고하되, 마지막 절인 ‘만민소망(萬民所望)’에서는 활쏘기가 끝났어도 반드시 음악이 멈추기를 기다린 뒤에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성음은 반드시 계속 이어져야 하지만 이는 어려울 것 같다.”
하니, 오광운이 전악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그때 가서 잘 조절하여 느려지거나 급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자, 상이 이르기를,
“습의(習儀)할 때도 그렇게 하라.”
하고,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상이 찬의 이덕인을 불러 홀기를 가지고 섬돌 아래 대령하게 하라고 주서에게 명했다. 이영조가 명을 받들어 달려 나가 불러들였다. - 그사이의 일은 기록하지 못했다. - 상이 이르기를,
“활을 쏘는 조가 아직 활을 쏘지 않았을 때에는 동일한 대열에 있는가? 인원수를 따져 보면 당상관인 구택규(具宅奎)와 김성응(金聖應)이 한 조가 되어야 한다. 전에 활을 쏘는 조는 좌궁(左弓)과 우궁(右弓)으로 짜서 정하라고 하교하였다. 여은군(礪恩君 이매(李梅))은 제3조가 되어야 할 것 같고, 의빈(儀賓)과 같은 대열에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오광운이 이르기를,
“반드시 나누어 배치해야만 단자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상이 대사례의 홀기를 들이라고 이덕인에게 명했다. 이성중이 무릎을 꿇고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도 한쪽 편에 있게 되는가?”
하니, 이성중이 대답하기를,
“이번 의주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첫 번째 화살을 올리는 의주가 누락되어 있다.”
하고, 이어서 예관(禮官)에게 홀기를 내려 확인해 보게 했다. 또 하교하기를,
“승지는 홀기에서 붉은색으로 길게 획을 그은 곳을 읽도록 하라.”
하니, 이성중이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시사(侍射)하는 자들이 반열에 함께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처음에 네 번 절할 때 다른 신하들과 함께 서 있다가 뒤에 시사하는 자리로 들어와야 한다. 네 번 절할 때 활과 화살을 차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에 활을 쏠 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 활과 화살을 갖춘 뒤에 활을 쏘는 자리로 들어와야 한다. 《오례의》에는 이 내용이 없는가? 없다 해도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니, 이덕인이 아뢰기를,
“의주의 원래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이성중이 다시 홀기를 읽었다. ‘중우이차사(衆耦以次射)’까지 읽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이 단락은 중요하지 않으니 홀기 안에 따로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맞다. 이 부분은 빼도록 하라.”
하였다. ‘이차부상물(以次付賞物)’까지 읽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어찌 굳이 외칠 필요가 있겠는가. 너무 길다. ‘반상(頒賞)’ 두 글자만 넣도록 하라.”
하니, 이덕인이 아뢰기를,
“‘군기시관반상물(軍器寺官頒賞物)’로 고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좋다. 그렇게 하라.”
하였다. 사옹원 관원에 대한 조목까지 읽고, 또 ‘이치작주궤치어풍(以觶酌酒跪置於豐)’으로 고쳤다. 상이 이르기를,
“습의할 때도 이와 같이 해야 하니, 벌을 받는 사람처럼 해야 한다.”
하였다. ‘불중자(不中者)’까지 읽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도 길다. ‘졸치(卒觶)’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빼도록 하라.”
하였다. 그 아래 두 조목도 뺐다. 상이 이르기를,
“습의할 때와 대사례 당일에 예관(禮官)이 입시해야 한다. 거조(擧條)를 내고 분부하도록 하라.”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예관들이 전부 입시해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예조 당상 한 사람이 입시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활을 쏘는 조를 적은 단자를 습의하기 전까지 정리하여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광운은 나아오라. 내가 하교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 또 조용해졌기 때문에 말한다. 《자신만고(紫宸漫藁)》에 대해 신료들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갑오년(1714, 숙종40) 즈음에 정섭(靜攝)하면서 모아 기록하신 것이다. 이런 일들을 말하려 하면 나도 모르게 슬픔에 목이 멘다. 성고(聖考 숙종)의 깊은 뜻이 담겨 있고 권말에 써서 보이시기도 했다. 경자년(1720, 경종 즉위년) 이후 자성(慈聖)께서 이에 대해 대신에게 하교했었다. 내가 어찌 옛날의 수준을 쫓아갈 수 있겠는가마는 《열성어제(列聖御製)》의 간행은 곧 《열성지장(列聖誌狀)》이나 《선원보략(璿源譜略)》의 경우처럼 규정이 있으니 생략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지은 것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누가 하겠는가. 실록이 있다 해도 내가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내가 젊었을 때 시 읊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다 근래의 문집들이 번다하고 변변찮은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우스워하며 ‘왕자군(王子君)이 어찌 문집을 가지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더 이상 뜻을 두지 않았다. 내가 후대에 남길 자료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번 정돈해 두려는 것이다. 평소에 부득이하게 수응(酬應)할 일이 있어도 모두 그때 가서 입으로 부르고 원고를 남긴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경으로 하여금 수집하고 베껴 써서 들이게 하고자 한다. 오늘 경을 부른 것은 단순히 대사례 때문만이 아니라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관각의 관원 및 문임을 거친 인원이 참으로 많지만 나는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이 없고 인력을 가려 뽑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경이 현재 예관을 맡고 있고 전에 아뢴 것도 있기 때문에 경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주서에게 명하여 어제(御製) 중에 궐 밖에 있는 것을 쓰게 하고서 이르기를,
“사직단(社稷壇), 헌릉(獻陵)의 재실, 남한산성 행궁, 송도(松都)의 남문과 삼절헌(三節軒), 선무사(宣武祠), 태학(太學), 안향청(安香廳), 명륜당(明倫堂) 등에 쓴 글, 비변사를 신칙한 글, 무사들을 신칙한 글, 예문관과 효릉(孝陵)의 재실 등에 쓴 글, 어죽시(御竹詩)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서문,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서문,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서문,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서문, 《병장도설(兵將圖說)》의 서문, 《내훈(內訓)》의 서문, 《여사서(女四書)》의 서문이 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관이 베껴서 올리는 일을 주관하되, 승지도 《승정원일기》를 가져다 조사하여 어제가 있으면 베껴 내도록 하라.”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무신년(1728, 영조4)에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치제(致祭)할 때의 제문을 어필(御筆)로 써서 내리셨습니다. 옛날 문종조(文宗朝)에도 여제문(厲祭文)이 있었는데, 백대가 지난 뒤에도 모든 사람들이 성인의 문장으로 보고 찬탄합니다. 안성과 죽산의 제문은 실로 문묘(文廟)의 어제와도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정합(養正閤)에서 원량(元良)을 책봉할 때 기문(記文)을 지어 걸었다. 이 밖에 대내(大內)에도 많이 있으니 베껴서 내보여야 하고, 궐 밖에 있는 것은 베껴서 들이도록 하라. 내가 한번 직접 보고 싶기는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것과 금석에 새긴 것 외에는 역시 베껴 두고 싶지는 않다.”
하니, 오광운이 아뢰기를,
“자고로 역대 제왕들의 문장은 대부분 음풍농월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전부였는데, 우리 왕조의 《열성어제》 같은 경우는 모두 심법(心法)을 전수하였습니다. 그래서 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모두 지극히 훌륭한 심학(心學)이었으니, 백대 뒤에도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찬탄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비록 심상한 글이라도 수사의 아름다움과 저술의 정교함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는 부분을 깨닫는다면 좋을 듯합니다.
속된 유자(儒者)의 공부에 대해 말해 보더라도, 서책을 보고 있을 때에는 절로 좋은 생각이 났다가도 오래 되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저술을 하는 이유이니 나중에 잃어버릴 때를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저술의 정교함에 관심을 두다 보면 역시 이로 인해 깨우치고 계발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고 후대에 전할 글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오로지 정밀하고 전일하라는 요순(堯舜)의 이 가르침이 바로 저술이고 이후에 제왕가에서 나온 글은 음풍농월에 불과합니다.
성상의 학문은 백대(百代)의 왕들보다 탁월하여 동궁에게 훈유(訓諭)한 글 같은 것은 모두 격언입니다. 더욱 계도하여 심법을 전수한다면 아래에 있는 조정의 신하들도 당연히 심학으로 가르치고 인도할 것입니다. 근래에 경연을 오랫동안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과 같은 자들조차 공부를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역시 너무 방탕하게 지냈다는 탄식을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어떤 상황에 맞닥뜨려 깨달은 것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저술을 하여 기록해 두소서. 그리고 자주 유신(儒臣)을 만나 경전의 의미를 탐구하고 난 여가에 저술한 것을 꺼내 보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정의 신하들도 어찌 감히 찬탄만 하고 말겠습니까. 당연히 논쟁이 일어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성상의 학문에 매우 큰 보탬이 될 것이고 후세에 좋은 유산을 남기는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학집요》의 서문은 이 책을 진강할 때 지은 것이다. 전에 기후가 조금 괜찮았을 때에는 그래도 간혹 이런 글을 짓곤 했는데 근래에는 소소한 시 구절조차 날로 점점 엉망이 됨을 느낀다. 훈유의 경우는 내 정신이 담긴 곳이니 다른 모든 글보다 위에 실려야 한다.”
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대체로 글이라는 것은 입언(立言)을 위한 방법입니다. 경전의 여러 훈고들은 모두 찬술(纂述)을 근본으로 하였습니다. 더구나 제왕의 심학은 특히 정치의 법도와 계획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미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셨으니 역시 스스로 깨우친 곳이 응당 있을 것입니다. 지금 꼭 많이 저술하는 데에 힘쓸 필요는 없지만 평소 이런 글에 마음을 두고 있다가 논(論), 기(記), 제발(題跋) 등과 같은 글도 이따금 저술하면 이는 통치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후손에게 심학을 전수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유념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글 쓰는 일은 정신이 괜찮을 때는 그래도 할 수 있다만, 심학이라면 내가 어찌 체득했겠는가.”
하였다. 오광운이 아뢰기를,
“동궁의 타고난 자질이 영명하여 오로지 정밀하고 전일하라는 심법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학문과 공부는 직접 배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조정의 신하를 기준으로 말해 보더라도 근시의 반열에 있는 자가 가장 낫고 그 밖의 신하들, 유사(儒士)들, 먼 지방 사람은 순서대로 점점 그보다 못하니, 성상께서 어찌 겸양만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이 심법을 아침저녁으로 동궁에게 가르치고 계도하소서.
또한 성상께서 신료들을 훈계하기 위해 그동안 쓰신 글이 지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선비들을 교도하는 조치에 있어서만큼은 흠이 있었으니 이것도 유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시대의 유생들은 요순이 다시 살아난들 어찌하겠는가. 전에 성균관에 세운 비(碑)를 유생들이 비웃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그 비문도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오광운이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는 등급이 다르지만 서로를 아끼는 방법에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선비들에게 훈유하는 일을 다시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또 《성학집요》는 매우 훌륭하고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특히 긴요한 책으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저술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하자, 오광운이 아뢰기를,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선정신 이황(李滉)이 그린 것입니다. 이 두 책을 어전에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은 누가 지은 것인가?”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선정신 이황이 편집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교서관에 분부하여 《성학십도》와 《고경중마방》을 목판으로 간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주연(胄筵)하는 곳에 세워 둔 병풍에 쓰인 글씨는 내가 지은 것이다. 강관(講官)은 혹시 본 적이 있는가?”
하니,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감히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50년 공부는 마음을 붙잡아 지키는 데에 주안점이 있었다. 이번 대사례에서 내가 얼마나 마음을 잘 붙잡아 지켜 왔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혹시 감상적인 마음과 교만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움직인다면 모두 마음을 붙잡아 지키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 내가 이런 생각 때문에 활을 쏘려고 하는 것이다. 신하들은 이런 것을 보고 내 기후가 나아졌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내가 본디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니, 오광운이 아뢰기를,
“이번 대사례는 선왕을 잊지 못하는 깊고 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절실하고 엄숙한 공부입니다. 성학이라는 것은 대개 마음의 공부에 불과합니다. 고대의 명철한 군주를 말해 보더라도 욕(慾)이라는 한 글자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또한 방금 전의 하교에 대해 논해 보자면, 학문을 하는 방도는 어떤 일에 맞닥뜨려 행위를 할 때마다 반드시 고요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이것은 과연 의례적인 예의를 지킨 것인가, 공부에서 나온 것인가, 명성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기 전에는 함양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바라는 것 없이 행하는 것은 천리(天理)요, 바라는 것이 있어 행하는 것은 인욕(人慾)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점검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맞다. 얼마 전 밤에 날이 추워서 두꺼운 옷을 입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군사들에게 아직 유의(襦衣)를 지급하지 않았기에 결국 입지 않았다. 이 한 가지 일을 보더라도 나의 공부는 아직 미진한 곳이 있다.”
하니, 오광운이 아뢰기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은 초학자를 위한 비결입니다. 3개월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았다고 했으니, 역시 마음을 잃어버린 곳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자(顔子)와 같은 성인조차 마음을 잃어버릴 때가 있으니, 이는 두려워할 만합니다. 고작 이 작은 마음이 이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나이가 젊어 앞날이 먼 데다 오늘 마침 또 권유도 있었기에 내가 하교할 것이 있다. 세자의 기질은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할 만하지만, 나만큼 긴장하고 고생하지는 않은 것이 걱정스럽다. 사람은 반드시 긴장해야만 보탬이 있을 수 있다. 승지의 아버지는 전에 익위사로서 나를 모셨다. 내가 학문의 조예는 없었지만 오로지 긴장을 많이 했기 때문에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세상에 나만큼 긴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이가 시릴 지경이지만 역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옛 역사를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선왕이 이룬 성과를 유지하는 것은 궐 밖에서 들어와 왕위를 계승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이 내가 세자를 걱정하는 이유이니 그를 잘 보좌하고 인도하기를 바란다. 신하들도 이 방도를 깊이 생각하여 잘 보좌하고 인도하라.”
하니, 오광운이 아뢰기를,
“자고로 제왕은 시련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성인조차 그러했으니 성상의 이 하교가 참으로 적절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漢)나라나 당(唐)나라를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창업과 수성(守成)이 어렵지만 그래도 유쾌한 점이 있는데, 나처럼 긴장하며 산 경우는 옛 문헌에도 드물다. 임금이 되어 어찌 유쾌한 일이 있었겠는가.”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천자 노릇도 큰 고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오광운이 아뢰기를,
“천리와 인욕의 경계에서 늘 유의하고 점검하며, 이를 동궁에게 훈유한다면 실로 종묘사직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신하들은 보좌하거나 인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저 수만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같이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천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함으로써 하루에 세 번 반성하는 노력을 다하게 한다면 어찌 효과가 없겠습니까.”
하니, 이성중이 아뢰기를,
“옛날에 주(周)나라는 고공단보(古公亶父), 문왕(文王), 무왕(武王)부터 고난을 많이 겪었고, 《서경》 〈무일(無逸)〉에서 성왕(成王)을 훈계한 것도 그가 어렸을 때 왕업과 민생의 고난을 먼저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하께서 아침저녁으로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가르침을 동궁에게 주셔야만 합니다.”
하였다. 상주(上奏)를 마치자,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주-D001] 경흥시택장(慶興是宅章) : 원문은 ‘慶興始宅章’이다. 《용비어천가》에 근거하여 ‘始’를 ‘是’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2] 시강원의 …… 방법이었습니다 : 1742년(영조18) 9월 9일 연석에서 송인명(宋寅明)이 장악원 정 이연덕을 시강원의 겸관으로 차하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에 민응수가 시강원의 겸직은 통청(通淸)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반대하고 대안으로 시강원의 실직을 주고 장악원 겸정으로 임명하도록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이후 민응수는 이후 계속 패초를 어기며 출사하지 않았고 이연덕은 다시 장악원 정에 제수되었다가 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英祖 18年 9月 9日ㆍ12月 27日, 19年 3月 5日》[주-D003] 아뢰기를 : 원문은 ‘曰’이다. 발언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대화의 순서로 볼 때 오광운인 듯하다.[주-D004] 성고(聖考)의 …… 하교했었다 : 1720년 8월 19일 인원왕후(仁元王后)는 대신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숙종의 글을 베껴 써서 내렸는데, 그 글에서 숙종은 본인이 지은 《자신만고》를 굳이 간행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글을 《열성어제》에 추가하여 간행할 것이라면 베껴 써서 내라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景宗 卽位年 8月 19日》[주-D005] 성균관에 세운 비(碑) : 1742년 영조가 당쟁을 일삼지 말라는 뜻으로 성균관 유생에게 써서 내린 어필을 비석에 새겨서 성균관에 세웠다. 《承政院日記 英祖 18年 3月 26日, 4月 4日》[주-D006] 3개월 …… 않았다 : 공자가 안회(顔回)를 평가하기를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은 하루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만 인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주-D007] 오늘 …… 있었기에 : 세자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앞서 오광운이 세자 교육에 대해 건의한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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