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에서
언제나 늘 그랬다. 난 한결같이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이렇게 가족 여행을 와서도 아프다. 목이 따끔거리고 이마가 뜨겁다. 참아보려 했지만 첫사랑보다 더 들키기기 쉬운 기침이 자꾸 나왔다.
“방학했다고 매일 올빼미처럼 살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즐거운 여행 와서 너 혼자만 아프니까 좋니? 당신은 리조트에서 가까운 소아과가 어디 있는지 검색 좀 해. 은수, 병원은 혼자 갈 수 있겠지? 네 나쁜 생활습관으로 아픈 거잖아. 네 잘못 으로 남은 가족에게 피해 주면 안 되겠지?”
엄마는 저 긴 말을 쉬지 않고 쏟아 낸 후 내 침대 옆에 휴지와 물병들을 갖다 놓으셨다. 그리고 5만원 신사임당도 함께.
“제가 구글맵 켜고 알아서 병원 갈게요. 머리가 흔들거리니까 모두 나가 줘요.”
엄마를 따라 은유도 나가고 아빠도 뜬금없이 윙크를 하며 사라지셨다.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아빠가 보낸 10만원이 송금되었다. 아까 그 윙크가 10만원이었구나. 서러운 마음을 10만원에 위로 받고 구글맵을 껐다. 택시를 호출 한 후 천천히 리조트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제기랄, 날씨 한 번 기가 막히게 좋다.
이상하게 피부를 관통하는 주사 바늘의 느낌도 없었고 약은 전혀 쓰지 않았다.
병원에서 어떻게 리조트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약 기운 때문인지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땐 벌써 저녁 노을이 하얀 커튼을 붉게 물들였다. 부재중 전화 5통, 자느라 전화벨 소리를 못들었다고 톡을 보냈다.
‘점심도 안 먹고 잔거야?’
‘이제 기침도 안나오고 열도 내려가서 상쾌해요. 나가서 뭐 좀 사 먹으려구요’
‘그러면 우리도 저녁 먹고 들어간다. 음식 좀 포장해 갈게’
어느새 노을빛은 자취를 감췄다. 겨울의 저녁은 노루 꼬리이다.
어제와 오늘 낮에 봤던 리조트 주변의 길이 처음 가 본 길 마냥 낯설다. 타박타박 걷다보니 노란 불빛들이 보였다. 야시장이 열렸나보다.
맛있는 냄새가 야시장에 가까워질수록 내 위장을 자극했다.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를 종이컵에 담은 후 천천히 시장 안을 둘러보았다. 떡볶이를 다 먹고 계란 튀김과 소고기 야채볶음까지 다 먹고 나서야 시장의 맨 끝까지 갔다. 사람들의 왕래가 없어서인지 노란 불빛은 어두침침했다. 여러 가지 물건을 벌여 놓은 좌판이 보였다. 그 좌판에서 낡은 화첩이 눈에 띄었다. 화첩을 펼치려 하자 주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보지도 않고 사라구요? ”
“원래 책은 보면 상품가치가 사라집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얼마에요?”
“십 만원”
“낡은 화첩이 십만원이라구요? 너무 비싼데”
“고책입니다.”
이 말 또한 설득력이 있다.
“더 비싼 책인데 이 책의 부록을 잃어버려서 저렴하게 내 놓은 겁니다”
난 몽롱한 정신으로 십 만원을 건네고 그 화첩을 받았다.
어떻게 리조트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웠는지 모르겠다. 저녁에 먹는 약봉투가 찢어져있는 걸 보니 약을 먹고 다시 잠에 빠진 듯했다. 야시장에 갔던 일은 내가 꿈 꾼 걸일까? 내 백팩을 뒤져보니 낡은 화첩이 있었다. 꿈은 아닌가보다.
리조트에서 3일을 더 묵었지만 야시장은 열리지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야시장, 그 좌판은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화첩에는 수묵화로 옛날 풍경이 그려져 있다. 사람들의 복장으로 봐서는 고려 시대도 있고 조선 시대도 있다. 모던 보이의 인물이 있는 그림은 근대기 시대일 것 같다. 시끌벅적한 장터의 그림, 숨막히는 긴장감이 흐르는 과거 시험장의 그림, 참혹한 전쟁터를 그린 그림도 있다. 많은 그림 중 가장 마음에 쓰이는 그림은 마지막 장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소녀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만 한자가 딱 한 글자 써 있다. 소녀의 이름일까? 그 한자를 사진으로 찍어 검색해 보니 ‘경(菮)’이다.
십 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화첩이다. 그런데 문득 잃어버렸다던 이 화첩의 부록이 궁금했다.
2. 생일 선물
나는 침대에 엎드려 화첩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수선화가 가득 핀 한옥 그림을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분명 낯설지 않은 정경이다. 하지만 이 정경을 어디서 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했다. 먹물로 그려진 꽃들은 내 머릿속에서 노란빛깔로 인식되었다. 그 그림에 정신이 팔려있어 아빠가 내 방에 들어온 지도 몰랐다. 등 뒤에서
“대체 그 그림책은 어디서 난 거냐?”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아빠의 얼굴과 부딪쳤다.
“아이고, 이 녀석이 흉기로 사람 잡네”
“많이 아프셔요? 그러게 노크도 없이...... 제 머리보고 흉기라고 하는 건 너무해 요.”
“그렇게나 딱딱한 머리인데 흉기 맞지. 아파 죽겠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뭐냐? 산 거야?”
“네, 지난 가족 여행 때 저 혼자 리조트에 있을 때 심심해서 야시장 갔는데 거기서 샀어요.”
“얼마?”
“......”
“비싸게 샀나보다? 엄마 아시면 또 벼락 떨어지니까 헌책방에서 주웠다고 해라”
“이 화첩에 부록도 있대요. 그런데 부록을 잃어버렸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싸 게 판대요”
“싸게 산 것도 아니고 싸게 판다고? 너한테는 비싼 가격이구만”
이런 걸 보면 아빠가 엄마보다 눈치가 빠르시다.
“좋아. 네 생일 선물로 이 그림책인지 화첩인지는 비밀로 해 주마.”
“아니, 이러는 게 어딨어요?”
내 항의는 가뿐히 무시하고 아빠는 빙글빙글 웃으시며 방을 나가셨다.
“가만 보니까 네가 뚫어지게 보던 그 고택 그림은 우리가 봄에 갔던 추사 고택 갔 구나”
아빠는 내 마음을 일기라도 한 듯 한마디를 등 뒤로 던지셨다.
추사 고택! 노란 수선화!
솔직히 그 고택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단지 노란 수선화가 고흐의 해바라기보다 강렬하면서 여리게 느껴져 아름다운 수선화만 기억난다. 다시 수선화가 피는 계절에 또 오겠노라고 마음먹었던 곳이었다. 그림 속 먹물로 그린 수선화에 노란빛이 어린다.
생일과 시험 보는 날은 미역국으로부터 시작된다. 엄마는 생일뿐만 아니라 시험 보는 날에도 쇠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이신다.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진다는 것은 게으른 사람들의 구차한 핑계라는 것이 엄마의 신조이다. 나도 그 게으른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미역국을 먹고 늘 시험은 미끄러져 내려왔다. 하지만 은유는 엄마의 신조대로 미역국을 먹고도 시험 성적은 쭉쭉 잘만 위로 달렸다. 생일날 아침, 아빠는 정말 그 비밀유지만을 선물 하셨다. 서운했지만 그 비밀유지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화첩은 엄마의 손을 거쳐 재활용장으로 사라졌을거다. 오늘은 특별하게 아빠의 차를 타고 은유와 나는 등교를 했다. 생일과 시험 보는 날에만 베푸는 엄마의 은혜이다. 엄마가 내리는 은혜에 아빠가 고생을 한다. 은유를 내려 준 후 아빠는 포장된 뭔가를 내게 주셨다.
“두 번째 생일 선물이다. 조용히 확인해봐.”
포장을 만져보니 책인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 전혀 아빠답지 않은 선물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의 한바탕 생일 축하로 아빠가 주신 선물은 까맣게 잊었다. 며칠 동안 아빠의 선물은 책가방 안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 학원 교재를 챙기면서 가방 안에서 며칠 내내 뒹굴고 있던 아빠의 선물을 보게 되었다. 포장지를 뜯어 확인해 보려고 했으나 학원차를 타는 시각이 다 되어 책꽂이에 꽂아 두고 또 다시 잊고 말았다. 아빠의 선물은 엄마가 발견하시는 바람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아빠에게.
“그나저나 공부하기 싫어해서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애한테 어떻게 이런 걸 사 준데? 당신은 왜 그러는거야? 애들 교육에 신경을 쓰기나 해?”
엄마는 아빠에게 쏘아대며 물어봤지만 엄마도 아빠도 모두 대답은 애초부터 필요 없다. 시무룩한 아빠는 겉옷을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서슬퍼런 아빠의 눈치를 보며 아빠 뒤를 따라 나섰다.
“아빠, 죄송해요. 책 인줄 알고 그냥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뒀어요”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선물이 뭔지는 아냐?”
“정말 죄송해요. 확인할 새도 없이 엄마가 갖고 가셨어요.”
“아무래도 네가 야시장에서 샀던 그 화첩의 부록 같다.”
“뭐가요? 저한테 주신 선물이요?”
“그래. 네 화첩에서 봤던 그 추사 고택이 그대로 똑같이 있더라니까.”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지나가다가 그걸 발견했는데 네 화첩의 그림을 따라 그린 그 뭐라더라. 맞다. 그 컬러링북 같더라고”
아빠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내 심장은 요동을 쳤다.
3.추사의 집
우여곡절 끝에 겨우 그 화첩의 부록인 컬러링북은 내 손에 들어왔다. 그 컬러링북은 화첩의 부록이 틀림없었다. 화첩 속의 그림들이 그대로 모두 먹물로 형태만 그려져 있었다. 나는 화첩을 보면서 가장 먼저 노란 수선화가 가득 핀 추사 고택 그림에 색을 채웠다. 화첩 속 추사 고택 그림과 다르게 한 점은 하늘이었다. 어두운 하늘은 우울해서 노란 수선화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난 잿빛 하늘대신 밝은 파란 하늘을 그려 넣었다. 하늘빛만 바꿨을 뿐인데 이제 행복해 보였다. 모든 색을 꼼꼼하게 칠한 후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잘 수 없다. 영어 단어를 억지로 머릿속에 밀어 넣고 서야 잠에 취할 수 있었다. (이것은 엄마와의 굳은 약속이다. 컬러링북을 받기위해 난 이렇게 엄마의 위험한 요구들을 최대한 수용해야만 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컬러링북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난 정말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이렇게 깊은 잠에 빠진 것은 중학교 입학 후 처음 있는 일 같다.
내가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곳은 익숙한 내 침대가 아니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수선화 향기가 가득 찬 풀밭 위이었다. 내가 갑자기 그 곳에 있는 사실도 신기하지만 수선화 향기만 있고 꽃은 단 한 송이도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느끼는 이 향기는 무엇일까? 난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일까?
“뛰어!”
어디선가 들려온 나지막한 그러나 단호한 이 외침에 나는 어느 아이의 손을 잡고 무작정 뛰었다. 불현듯 나타난 아이와 함께 영문도 모른 채 전력질주라니.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나보다.
“넌 또 누구지? 이번엔 어느 시간대에서 온거냐?”
“......”
“말 못해? 아니면 내 말을 못 알아들어?”
“나, 지금 꿈꾸는 건가?”
“뭐야.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여기는 조선이야. 네 행색을 보아하니 너는 미래에 서 왔나보군. 네가 궁금해 할 것 같아 미리 알려준다. 지금 시기는 선대왕께서 영 조 대왕인 시기야. 미래에서 온 손님은 네가 세 번째고. 첫 번째 손님도 두 번째 손님도 처음 여기 왔을 땐 너처럼 얼이 빠졌었지. 그 중 네가 제일 정신이 없구 나. 이번에는 부디 똘망한 녀석으로 오길 바랐는데. 가장 어리숙하게 보여 걱정이 다”
“나를 아니?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거니? 내가 조선에 와 있다고? 그것도 선대 왕이 영조 대왕? 그러면 정조 시대? 이게 말이 돼?”
“네가 소개를 안했는데 내가 뭔 재주로 네 녀석을 알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건지는 이제 안다. 너도 낡은 화첩을 보면서 색깔이 비어있는 또 다른 화첩에 같은 색깔을 채우고 잠 들었을거야. 네가 가장 먼저 색을 그린 그림은 여기일테 고. 물론 그렸다기보다는 색을 칠한 것이지만. 먼저 온 손님 두 명도 모두 그렇게 왔었거든. 여기는 너희들 손님 말대로라면 과거 시간 속이야. 그림 속이기도 하 고. 넌 이런 여행이 처음인거냐? 앞 선 손님들은 다른 곳을 그러니까 다른 시대 를 거쳐왔던데.”
그림 속이라고? 과거라고?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면 나는 미친 게 분명하다. 어쩐지 요즘 내가 안하던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