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일본거류민과 일본선박의 잦은 부산항 입출항으로 인해 앞선 상수도
시설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급수 양이었다. 이에 마침내 1900년부터 구덕산과 엄광산 계곡의보수천
과 구덕천 상류지역의 수원지 축조사업이 시작되었고 1930년대까지 축조와 확장공사가 계속되었다.
엄광산 수원지(고원견수원지,1902년 축조)는 현재 동아대학교 주변지역으로 지금은 동아의료원과
주변의 주택가에 해당하는 곳에 높이 약12m, 수심10m, 길이는 약260m이고 저수량은 약75입방미터
(인구 1만 명이 90일간 급수할 수 있는 양)의 규모로 흙 제방 형식으로 축조되었고, 이 후 구덕수원지
(구덕1저수지)는 현재 구덕초등학교 뒤편의 구덕터널 입구쯤에 높이 20m, 둑길이 20m 그리고 수면의
폭은 약 70m의 규모로 축조되었다.
구덕수원지(위 구덕1저수지)의 물은 관로를 통해 엄광산수원지(위 고원견곡수원지,구덕수원지)에 합류
하여 자연정화를 거친 후 대청동의 배수지에 모여 저장되었다가 서구와 중구의 1만 여명의 주민에게 식
수로 공급되었다. 이 수원지와 더불어 각각의 수원지 계곡의 중상류 지역에는 중ㆍ소규모의 저수 시설
을 추가로 갖추었는데 이것은 자연여과장치시설로 계곡물을 거르고 걸러서 취수장인 수원지에는 최대한
깨끗한 물을 저수하겠다는 목적인데, 이 중소규모의 자연여과장치시설이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수원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바로 꽃마을 아래 옛 구덕2저수지(현 구덕2수원지)와 대신공원
내 옛 고원견상저수지(현 구덕1수원지)가 그것이다.
구덕수원지(고원견곡수원지,엄광산수원지)'60년대 초반 모습
이후 수원지는 확장과 개ㆍ보수 공사를 거쳐 오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치른 후 부산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급수량이 한계에 달하자 1963년에는 마침내 낙동강 물을 이용한 상수도시설이 완비되면
서 수원지로서의 기능은 잃게 된다. 위 구덕수원지(고원견곡수원지,엄광산수원지)는 '60년대 후반에
매립되어 동아대학교 병원과 주택지로 변모되었고
구덕수원지(구덕1저수지 )붕괴된 모습, 붕괴된 둑 사이로 구덕실내체육관 건물이 보이네요
구덕수원지(구덕1저수지) 복구후 모습 '70년대 중반
현재(2018년2월)의 구덕터널 입구 모습
구덕수원지(고원견수원지,엄광산수원지)가 매립되어 없어지면서 구덕1저수지가 자연스럽게 구덕수원지
이름을 물려 받아 불리게 되었는데 이 구덕수원지가 1972년 9월 14일 전날부터 내린 폭우로 인해 둑이
붕괴되면서 주민 60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실종, 4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수재민 165세대가 반여동
으로 이주해 가는 등 아픈 상처를 가져다 준 후 다시 복구되었으나 1981년에 시작된 구덕터널 공사로 인
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축조된 이들 수원지가 일본거류민의 퇴각과 함께 이후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게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구덕계곡의 명당수이자 서구와 중구지역 주민의 생명수
로, 때론 일본거류민의 식수 취수원이었던 그곳엔 사상 뿐 아니라 김해 등 서부경남과 부산의 도심을 이
어 주는 교통의 요충지로 그리고 대학교 부속건물과 주거지로 변모되어 이제는 늙은 노모의 아련한 기억
속 한 페이지에 고이 남아있다.
위 까만 글씨의 구덕수원지에 대한 글은 부산 서구 향토자원조사 책만들기 카페의 "easygoingman" 님
의 글을 참조 했으며 사진은 인터넷 여기저기서 수집한 것 입니다.
현 대신공원내 구덕1수원지 (구 고원견상저수지)
현 꽃마을 아래 구덕2수원지 (구 구덕2저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