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임종게의 바른 이해
성철스님은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하라.”는 마지막 한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습니다. 스님이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생평기광남녀군(生平欺狂男女群)
미천죄업과수미(彌天罪業過須彌)
활함아비한만단(活陷阿鼻恨萬端)
일륜토홍괘벽산(一輪吐紅掛碧山)
성철스님께서 이 게송을 남기고 열반에 들자 많은 인구에 회자(膾炙) 되었습니다. 불자들은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비(非)불자들이나 이웃 종교인들은 대단히 의아해 하였습니다. 나아가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철스님이 열반하신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임종게룰 글자대로만 해석하여, 성철스님이 임종 시에 양심선언을 했느니, 성철스님은 지옥에 갔느니, 불교에는 구원이 없느니 하며, 불교를 폄훼하는가 하면, 실명을 밝히지 않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임종게를 제멋대로 날조하여 인터넷에 퍼트리고 있으니, 종교인으로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인지 적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 것 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 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날조된 성철스님 임종게)
오늘 경주교사불자 법회에서는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성철스님 임종계의 논란을 불식시키고, 임종게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경전과 큰스님들의 말씀을 참고하여, 성철스님의 임종계를 해설해 보고자 합니다.
임종게 본문 해설
[제1행]
생평기광남녀군(生平欺狂男女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부처님의 말씀을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합니다. 이는 의사나 약사가 환지들의 병에 따라서 다른 약을 처방하듯이 대하는 사람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듣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맞추다 보면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도 전혀 다른 각도의 해법을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표현된 해법을 절대적인 것처럼 집착하면 큰 오류를 법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느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펴시고는 “나는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을 배워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 있겠느냐.”(남전 중부 사유경)라고 말씀하셨고, 열반에 드실 때에도 “나는 한마디도 말한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5년간이나 쉼 없이 가르침을 펴셨던 분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건 말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남겨 기억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말이라는 방편을 활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극단적 표현을 한 것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초탈(超脫)ㆍ초연(初演)한 ‘대자유인’이 되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철스님 임종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철스님께서 남녀의 무리를 속였다는 것은 깨달은 자의 입장(성철스님의 입장)에서 하산 말씀입니다. 깨달은 자가 볼 때, 우리 모두는 본래 부처인데,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근본 마음자리[自性]에서 보면 깨닫느니, 성자니, 중생이니, 범부니 구분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성철 스님은 1,987년 4월 초파일 봉축 법회에서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마저도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생명이고 중생이라서 당연히 불성을 가진 본래의 부처이므로 부처님으로 존경하고 예배드린다고 한 것입니다. 부처를 보고 부처기 되라는 것은 헛짓거리입니다. 번뇌 망상과 꿈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깨달아라’, ‘수행해라’하는 것은 하나의 구원 같은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1983년 하안거 결제에서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 하는 사람이여!"라고 하신 적이 있고, 또 전에 방송국 기자들이 찾아와 물으니 마지막에는 “내(성철스님) 말에 속지마라.”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왜 성철스님은 “내 말에 속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말이란 진리를 가리키는 수단에 불고할 뿐, 진리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스님이 평생 진리의 말을 했지만 진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니, 자신의 말이 진리에 대해서 말하기는 했지만 진리 자체는 아니다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려 손가락질을 했으나, 중생은 손가락만 보니 손가락이 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중생을 속였다고 한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임종게에 굳이 이 말을 한 이유는, 스님이 온갖 법문을 하고 책을 내고 했지만 그 말은 언어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니, 그 말의 너머의 진리를 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스님은 평소에도 늘 “금가루가 귀한 것이나 눈에 들어가면 병이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법을 말로 설하지만 언어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것을 넘어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표현하고, 한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다는 그 말은 자신의 말과 가르침, 심지어는 성철이라는 인간 자체를 존경할 것도, 절대화할 것도 없다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말씀인 것입니다.
[제2행, 제3행]
미천죄업과수미(彌天罪業過須彌),
함아비한만단(活陷阿鼻恨萬端)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치고.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앞의 구절에서 다 말했으므로, 이것은 앞 구절을 더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시적 표현입니다. 즉 앞에서 일생동안 남을 속였다고 했으니, 당연히 상식적으로 죄가 아주 크고, 그 결과로 산채로 무간 지옥에 간다고 한 것입니다. 즉 정말로 지옥 간다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스님은 일평생을 법을 설하셨지만 진리는 언어가 닿지 않는 곳이고, 그래서 설법이 바로 진리 자체가 아니니 자기 말을 말로만 듣지 말고 뜻을 새겨서 진리의 길을 갈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첫 번째 구절에서 말은 다한 것이고, 뒤의 두 구절은 그냥 이어서 시적으로 강조했을 뿐입니다.
무비스님(전 조계종 교육원장)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습니다.
“절대긍정의 지극한 표현이다. 선불교에서의 지옥은 극락의 다른 표현이며, 한은 기쁨의 또 다른 표현이다. 큰 죽음은 큰 삶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제4행(임종계의 결론)]
일륜토홍괘벽산(一輪吐紅掛碧山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앞의 두 번째, 세 번째 구절(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을 두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철스님이 임종 시에 후회했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마지막, 이 네 번째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보통 성철 스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빼고 넘어가는데 자기들이 봐도 도저히 자기들 결론과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륜은 스님의 깨달은 불성이고, 부처로서의 모습입니다. 푸른 산은 임종의 때, 그리고 서방정토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스님의 깨달음, 해탈, 그리고 사후의 가는 길을 보여주는 결론입니다. 즉 성불 해탈하여 열반의 경지에서 극락정토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중생구제를 위해 다시 인간세계로 오시거나 지옥중생을 구제하러 가시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끝맺음을 하며
성철스님의 임종게에 대해 많은 오해와 비판이 있는데, 이는 불교에 대한 무지로 인한 오해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일부 기독교인들이 선교목적으로 의도적 왜곡이 더 큰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성철 스님의 임종게를 비판하고 싶으면, 불교의 선(禪)에 대한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 보고 했으면 합니다. 성철 스님의 임종게는 선(禪)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는 글이 아닙니다. 그것을 시비하는 기독교인이 스스로의 무지를 들어내는 것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불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불가(佛家)의 맥락 에서 보고 이해를 해야지,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분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성경 말씀 중에 어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선하신 선생님이여!”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하신 이는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없다.”(눅 18:18)고 하셨는데, 불교를 믿는 누군가가 이 말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지 않다.”고 하셨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건 성경의 문맥에 맞지 않고, 당시의 어법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 입니다. 성철 스님의 말씀들도 불가의 맥락에서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남들보다 더 철저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진리를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가장 뛰어난 사랑의 실천, 가장 탁월한 진리 사랑, 그 배타성을 나는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