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간의 현지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중대에 배치되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은 미군은 연대나 대대급으로 주둔하는 것에 비해서 중대 단위로 작전지역을 나누어서 공군력이 없는 베트콩이 접근 할 수없는 고지대에 3, 4 중 철조망을 치고 진지를 지어 놓고 주둔을 했었다. 그 때까지 "뭉쳐야 산다."는 고전적인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던 미군은 한국군이 이렇게 "흩어져야 산다."는 전술을 펴자 처음에는 위험한 전술지역에서 소규모의 부대가 고립해서 주둔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다며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치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고립되어 벽을 쌓고 사는 것 같지만 명령이 내려지면 가까운 거리의 기지에서 나와서 작전과 매복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나타나자 나중에는 미군도 따라 해보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편의시설과 오락시설까지 갖추어져야 하는 미군들이 최소 생존의 조건만 갖춘 한국군 같은 생활을 장기간 동안 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당시 미국과 한국의 생활수준이 차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두 나라의 생활수준의 차이는 마치 오늘 날 이것저것 갖추고 사는 남한 사람의 생활과 밥만 먹으면 되는 북한 사람들의 생활의 차이만큼 났었기 때문에 한국군에게는 가능한 열악한 기지 생활이 미군에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내가 가본 미군 중대 단위 막사는 개인용 침실에 냉장고는 물론이고 당구대까지 갖춘 시설이었다.
미군의 경우 월남전에서 3,0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의 실종자 수는 놀랍게도 달랑 6명이다. 이 숫자도 월북으로 간주된 2명 중 가족들의 기나긴 싸움 끝에 나중에 납북으로 판명된 안학수 하사까지 포함된 것이다. 안 하사는 전사한 것으로 판단해서 호적에 '사망'으로 처리했는데 나중에 살아서 나타난 일이 있었다. 시골 면사무소의 호적계 직원은 이 사건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부활'이라고 기록을 해서 덕분에 공식적으로 예수 이후 최초로 부활한 케이스가 되었었다.
월남에 선발대로 갔다가 납치된 안학수 학사가 북한 방송에 나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권에서는 그가 월북했다고 뒤집어쒸우고 연좌제를 적용하여 가족들에게 무자비한 고통을 주었다. 이 사건은 50년이 지나서 끈질긴 가족의 투쟁에 의하여 밝혀지고 국가는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배상을 했다.
안 하사도 붕타우에서 사이공으로 출장을 갔다가 납치가 되었다고 하니 부대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보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전방도 없고 후방도 없는 게릴라전이 펼쳐지는 곳에서 감히 외출이나 개인행동은 생각할 수도 없고 결과는 죽음일 수가 있는 것이다. 가끔 월남전을 다룬 소설에서 사병들이 외출을 자유롭게 즐기고 월남아가씨들과의 로맨스가 등장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소수의 특수한 보직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참전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군과 달리 우리는 소규모의 방어적인 전투를 주로 벌였기 때문에 미군처럼 대규모로 포로가 발생할 소지는 없었다는 설명을 들었다』면서 『미군 실종자 수와 우리 실종자 수의 지나친 차이를 거론하는 것은 월남전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 같다』고 설명했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미군에 비해서 한국군은 완벽하게 통제된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미군의 철수로 전황이 급격하게 변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베트콩이 아닌 월남 정규군의 남침으로 극소수 피해를 당한 일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군의 중대 단위 전술기지는 베트콩이 접근 할 수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베트콩의 박격포 공격을 당하는 경우는 하늘에서 번개를 맞을 확률일 정도로 안전했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의 월남에서의 생활은 대부분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작전을 나가서도 긴장 속에서 1 M 앞을 알 수 없는 정글 속을 한 발 한 발 옮기는 것도 모르는 길이었다. 나무 뒤에, 바위틈에, 숲 속에, 나무 위에,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따다땅. . . 쏘지나 않을까? 보이지 않는 부비트랩선이 나무 사이에 연결돼 있지는 않을까? 그 무섭다는 독창이 바늘처럼 솟아있는 함정이 위장돼 있지나 않을까? 몰라서 불안한 것뿐이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작전지에 가서는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찰라 같은 순간 동안 총질을 하다가 헬기를 기다리다 돌아왔다.
작전을 끝내고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무전을 치면 헬기가 날아오지만 헬기가 내릴 만한 평평한 공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는 적에게 노출될 위험성이 있어 불안하기 때문에 헬기가 내릴 만한 정글에 대기 하고 있다가 헬기가 내리면 재빨리 타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헬기가 적당한 착륙지를 찾지 못해서 우리가 있는 정글의 주위에서 맴돌기도 하고 반대로 부대가 헬기가 내릴 곳을 찾아서 신속하게 이동을 해야만 하기도 했다. 하여간에 헬기가 뜨면 극도로 긴장해서 신경이 곤두서게 되어 있었다.헬기를 타면 항상 초긴장을 해야 하지만 한 번은 헬기가 착지할 때 지상이 불안전해서 높지는 않지만 완전히 땅에 닿지 않은 상태에서 뛰어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전혀 알 수 없는 남의 나라 전장에서 헬기에 탈 때보다는 내릴 때는 긴장이 아니라 무심한 무아경에 빠지게 된다. 좋은 의미에서 감정이 없는 상태가 완전히 공포로 얼어서 기계가 된다는 의미이다. 즉 내 의지나 감정이 전혀 없는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로보트 같은 상태인 것이다. 그럴 때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다. 내려서 주변을 살피고 조금 있으면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중대 기지와 가까운 거리는 도보로 수색 정찰을 할 수 있지만 조금 먼 거리로 이동하려면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헬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참전군인들 가운데는 1년간 월남에서 복무하면서 월남 마을이나 월남 사람을 본 일이 없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서 수송선을 타고 월남에 가서 하선하자마자 트럭과 헬기를 타고 중대로 가서 기지에서 생활을 했던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 만 파월 장병 중 절대 다수인 소총수들은 월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미군의 월남전 참전 영화를 볼 때가 있는데 한국군이 그 영화에 나오는 미군 병사들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면 아마 월남에 말뚝을 박고 싶었을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는 정찰, 수색 외에 대부분의 한국군의 생활은 한국에서와 똑같이 부대 밖으로 나가볼 수 조차 없는 생활이었다.
수색 정찰은 나가서 베트콩을 발견하면 앞에 가는 첨병은 그대로 보내버리고 그 뒤에 오는 본대를 노리라고 했지만 베트콩은 전술적인 승리보다 심리전, 선전전 차원에서 전투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첨병을 노렸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공격을 당하는 것은 맨 앞에 가는 첨병들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첨병은 가장 경험이 많은 병사로 세웠지만 3 개월 이상 시키지 않아서 첨병생활을 끝내면 월남생활의 3분의 2는 무사히 넘겼다고 보아도 지장이 없었다.
가장 괴로운 경험은 매복 작전이었다. 매복이라는 것은 적이 나타날만한 지점에 나가 며칠이고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이다. 3, 40 Kg의 무거운 군장을 짊어지고 매복 지점에 도착하면 우선 먼저 전방에 실 같은 구리줄로 된 인계철선과 45도 방향으로 크레모아를 설치한다. 인계철선에 조명탄을 매달아 무엇인가가 인계철선을 건드리면 저절로 조명탄이 터지게 된다. 조명탄이 터져서 전방이 밝아지면 격발기를 눌러서 크레모아를 터트리게 되어 있었다. 크레모아 안에 700 개의 쇠구슬이 있어서 격발기를 누르면 구슬이 터지는 것이다.
매복에 나가 좌표지점에 자리를 잡으면 철수를 할 때까지 일체의 소리도 빛도 냄새도 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훨씬 현지 실정에 민감한 베트콩에게 포착이 되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도리어 우리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남에서는 밤 말은 베트콩이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는 말이 있었다. 수도원에서 침묵수도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철저할 수 있으랴 싶다. 작전에서 소리를 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글 속에서 엎드려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하다 벌레가 전투복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했다. 오줌을 서서 누면 소리가 커서 무릎을 꿇고 누어야 하는 판에 함부로 부스럭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기가 많은데 모기약을 바르면 약 냄새가 날 수 있어 바를 수도 없었다.
매복을 하다가 기다리던 적을 발견하면 타격을 줄 수가 있지만 반대로 적에게 우리의 존재가 들어나면 우리가 당하는 것이 마치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물론 병사 개인의 입장에서 최선은 적이 오지도 않고 들키지도 않아 무사히 부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다행히도 매복을 나갈 때마다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정글 속에서 엎드려서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엎드려 있으면 정글 속의 각종 곤충들이 친하게 지내자고 다가온다. 어찌하다 벌레가 전투복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는 일이 발생하면 이건 베트콩이 문제가 아니다. 작전지에서 전투복을 마음대로 벋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옷을 입은 채로 손을 넣어서 잡아야 하는데 이게 마음대로 안 되니 참으로 사람 환장을 할 지경이다.
오줌을 누워도 서서 누면 소리가 커서 무릎을 꿇고 누어야 하는 판에 함부로 부스럭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기다 비까지 오면 정말 곤란하다. 비가 많이 오면 그대로 물구덩이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발이 군화 속에서 퉁퉁 붓도록 서 있어야 한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비가 오면 웬만한 소리는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피부에 모기약을 바르면 모기를 물리칠 수 있지만 약 냄새를 피울 수가 없어서 바를 수가 없다. 모기를 피하기 위해서 밤만 되면 모포로 뒤집어써야 하는데 월남 모기는 모포도 뚫는다. 밤에 교대로 잠을 자지 않고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데 이 때 코를 고는 전우가 있으면 정말 문제가 크다. 옆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마치 탱크가 굴러오는 소리처럼 들려서 코를 골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해지는 판이다. ‘드르렁’ 소리가 나기 전에 코를 틀어막아야지, 전방을 주시해야지, 그야말로 신경이 곤두서는 밤을 보내야 한다. 그것도 나보다 신참이 코를 골면 발로 한 번씩 차기라도 하지만 선임이 코를 골면 애인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장기간 버텨야하기 때문에 식수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야 하지만 한 번은 예정보다 훨씬 빨리 철수 명령이 떨어져 너무 덥고 온 몸이 끈적끈적하고 소금기가 버석버석해서 군장도 줄일 겸해서 3 수통의 물을 손수건에 적셔서 목욕을 했다. 그것은 내 생애 최고의 목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