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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인간관계로 인한 정신적 고민과 육체적인 고통 등 삶을 유지하며 많은 혼란과 충격에 휩싸인다. 혼자 생활하는 개인적인 단절보다는 집단체제를 이루어 부딪히며 살아가기 때문에 겪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더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후세계의 불안에 젖어 토속적인 신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의지하며 살다가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며 모든 신앙이 불교 쪽으로 기울어 불교의 종사자인 승려들을 높여 부르게 되어 스님이라고 불렀다.
스님 중에 경전에 능통하고 민중의 우상이 되어 도력이 높은 스님을 화상이라는 극존칭을 쓰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불계에 화상이라고 불리는 스님은 적은 수에 불과 한 것을 보면 승려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스님’ 얼마나 존경스러운 말인가. 부처의 가르침대로 민중에게 삶의 기반이 되는 자비와 사랑, 공동체의 협력과 인·의·예·지를 지도하며 개인의 정신수양에 전력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승려, 승려야말로 사람답게 살고 사람 앞에 설 수 있는 진정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스님이라 칭송하며 따르는 것이다.
한데 요즘 들어서는 자신을 자신이 높여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고 승려는 없고 중이 판치는 불교가 되었다. ‘승려’는 불교에 종사하며 민중을 지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가장 보편적인 용어다. 이에 비하여 ‘중’은 승려 자신들이 스스로 낮춰 부르는 말로 겸손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현세에 이르러 승려와 중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전부가 ‘스님’ 뿐이다.
남들이 공경하여 불리는 스님이 아니라 자신들끼리 높여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 불교종단 조계종이 파벌과 분파의 난장판이 되어 국가 전체를 흔들고 있는 시점에 과연 이 땅에 진정한 스님이 몇이나 되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불교에서는 혼인과 개인재산을 금지하고 가족관계를 끊어야 진정한 수도자라고 인정한다.
이렇게 세속을 떠나 부처의 가르침에 정통하고 새로운 정신세계를 구축한 승려를 비구승이라고 부르고 가족관계를 유지하며 승려생활을 하면 대처승이라 불리는데 출가 전의 이력은 불문에 부치고 오직 수행의 도력으로 가늠한다. 이 중 비구가 대체로 많은 칭송을 받는 형편인데 특이하게도 우리에게 이름 높은 스님은 대체로 결혼한 승려가 많다. 승려가 되기 전에 결혼하였으나 일절 관계를 끊고 수도에 전념하여 도를 얻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몇 분을 본다면 신라의 의상대사, 고려의 의천대사와 근세의 성철스님 등등 이름난 스님은 출가 전에 결혼했으나 이후 불가에서 으뜸가는 수행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전력이 문제가 아니라 출가 후의 수행이 평가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계종은 한국 최대의 불교 종파다. 겉으로 드러난 재산이 얼마인지 보이지 않는 금전은 또 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를 관장하는 몇몇이 독점하다보니 불교 본래의 정신을 잃고 암투에 휩싸여 낯부끄러운 행태를 보인 것이다. 수행자들은 전부를 공개하고 대중 앞에 서서 모범을 보여야 진정한 불자라고 불리며 스님이라 불릴 자격이 주어진다.
한데 현재의 사태와 과거의 행위를 본다면 이 땅에 과연 진정한 스님이 존재는 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들 스스로가 스님이라고 높여 부른다고 진정한 스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비단 불교뿐만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