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月尾)공원
2023. 5. 31.
월미도의 역사
인천을 상징하는 가장 이름난 명소를 꼽으라면 월미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유공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수문식 독이 있는 인천 내항 오른편에 울창한 숲으로 덮인 작은 섬이 바로 월미도이다. 한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관광지로서 또 근대 100여 년 한국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뚝 솟은 이 섬은 말 그대로 인천의 상징이다. 월미도가 한국사의 중심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프랑스, 미국함대가 닻을 내리고, 그 뒤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영종진(永宗鎭)을 포격하면서부터였다. 구미 열강이나 일본이 서울을 침략하기 위해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그 한강 하구에 서울의 길잡이처럼 서 있는 월미도를 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 인천 내항에 독을 건설하면서 한강으로부터 흘러드는 급한 물살을 막고 아울러 월미도까지 나룻배에 의존해야만 했던 교통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북성지구(현 대한제분 앞)로부터 약 1㎞에 달하는 2차선 둑길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총 둘레 4㎞ 정도의 이 작은 섬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둑길이 놓인 철도국이 소형 해수풀과 해수를 데운 이른바 공동목욕탕식의 조탕(潮湯)을 만들고 이곳을 임해유원지로 개발한 후부터였다. 당시 알려진 휴양지로서 원산의 송도원, 부산의 해운대를 제치고 월미도는 단연 전국 최고의 명소로 이름을 날렸는데 봄에는 월미도 중턱을 지나는 순환도로에 만발한 벚꽃놀이로 붐볐고 여름에는 해변가 수영장에 헤엄치는 인파가 들끓었다.
해넘이 언덕
저녁노을과 인천항을 오가는 배들이 발길을 머물게하는 언덕
인천상륙작전 참가세력
UN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지휘 아래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미군 225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들란드 1척, 프랑스 1척, 한국 15척)의 함대를 동원해 7만 5천명의 상륙군 및 지상군과 장비를 탑재하고 목표지역으로ㅗ 이동하여 육상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제7합동상륙기도부대는 인천상륙작전 부대의 병력, 장비 및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해상공격부내(TF-90), 상륙돌격 및 육상작전부대인 10군단(TF-92), 항공지원을 위한 항공모함부대(TF-77), 봉쇄 및 엄호부대(TF-91), 초계 및 정찰부대(TF-99), 군수지원부대(TF-79)로 편성되었다. 인천상륙작전 돌격 주력부대인 미 해병대 1사단(-5연대)은 8월 중순 미국 본토의 서해안에서 출발하여 9월3일 일본 고베에 도착한 후, 전투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을 탑재한 후 9월 11일 출항하였다. 그리고 후속 지상군 부대인 미 육군 7사단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9월 11일 출항하였다. 그리고 상륙작전의 지휘부인 맥아드 장군, 제7합동상륙기동 지휘부, 공격부대 지휘부 및 지원부대가 9우러 12일 일본 사세보항을 출항하여, 9월 14일 인천 앞바다 해상목표지점(덕적도 부근)에 집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