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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철마
수십 년 전
우리 국토를
신나게 달렸던 철마.
지금은 한구석에
그 때를 그리워하며
자리잡고 있다.
뽀얗게 쌓인 먼지
녹슬어 간 기계들
힘 잃은 바퀴.
철마는 밤마다
꿈을 꾼다.
수십 년 전
가로수를 지르며
달리던 그 때를.
다시 마음껏
달리고 싶어
녹슨 바퀴가
혼자 운다.
신의주로 달리는 길
그 길을 향해
달리는 꿈을 꾼다. - 소년동아. 송은영(서울 성원교 6학년)
* 모든 어린이에게 사랑을
여러분께서는 단 한 번이라도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입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셨던 분들이 물건을 잃어버리고 찾지도 않고,
마구 과소비를 하십니까 ?
지금 북한 어린이들은 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남한 어린이들은 어떻습니까 ?
원하는 것 다 가지면서도 더 가지려 하고, 원하는 것 다 먹으면서도
더 먹으려 하고, 원하는 것 다 입으면서도 더 입으려 하는 남한 어린이들.
남한 어린이들은 북한 어린이들을 너무도 모릅니다.
어제 우리 학교에서는 강냉이죽 급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린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
맛없다고 불평하고, 안 먹으려 하고. 북한에선 그런 맛없는
강냉이죽도 모자랍니다.
그런데도 불평했던 우리 어린이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저는 뼈만 남다시피한 아프리카 어린이의 앙상한 손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이의 손은 차마 더 이상 볼 수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세계 속에는 북한 뿐만이 아니라, 방글라데시나 소말리아
같이 못 사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기후 때문에, 또는 큰 홍수나 가뭄에 의해 못 사는 나라들.
같은 인간으로서 어느 곳은 잘 살고, 어느 나라는 못 산다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연필 한 자루로 굶주린 아이들 6명의 한 끼를 먹일 수 있습니다.
또 콜라 한 잔으로는 5명, 1천 600원짜리 피자 한 조각으로는 무려
200명의 한 끼를 먹일 수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아끼고 절약 한다면, 굶주린 아이들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어려운 처지의 나라 사람들은 어른들만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절대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아껴쓰는 그런 작은 마음으로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세계 속의 어려운 처지의 나라 중에 우리가 가장 먼저 시급히 도와야 할
나라는 북한입니다. 아무리 밉더라도, 전쟁을 일으켜 많은 희생자를 내도록 한
사람들이더라도, 우린 같은 겨레이고, 같은 한 민족이며, 같은 동포들입니다.
또 반 만년을 같이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아끼고 절약하여
북한 어린이를 도웁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를 돕도록 합시다.
- 백 두산/전북 전주 전주북교 6 -
* 북한의 특수성과 운명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때로부터 꼭 반세기가
흘러 9일에는 ‘공화국 창건’ 50주년을 맞이한다. 89년과 92년 사이
세계의 거의 모든 공산정권이 무너졌는데도 북한은 오늘날까지 버텨
온 것이다. 북한에 소비에트정권을 만들어내는 데 실질적 주역을
맡았던 소련도 해체됐음을 상기한다면 북한의 연명(延命)은
놀랍기조차 하다.
▼ 北정권 존속의 「비법」 ▼
5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최고인민회의에서 당 총비서
김정일(金正日)의 국가주석 추대가 유력시된다. 북한의 권력구조에서
국가주석은 그렇게 중요한 자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의 일부
관찰자들은 김정일이 국가주석직을 ‘원로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거나 아예 폐지시킬 것 같다는 추측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국가주석직을 맡았던 사람은 김일성(金日成) 한
사람뿐이었고 자연히 주석이란 명칭은 김일성과 동일시되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도, 없앨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떻든 김정일이
국가주석을 겸임하게 되면 김일성이 남겨놓았던 자리는 모두
김정일에 의해 채워지며 이로써 김정일의 권력승계는 공식적으로
완료되는 셈이다.
이 사실 또한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김일성 사망 직후 많은 관찰자들은
김정일의 권력상황을 불안정하게 보았다. 김정일의 몰락, 그리고
북한이라는 국가의 소멸까지 때때로 예견되곤 했다. 그러한 전망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침몰이 깊숙이 진행되는 난파선’에 비유될
정도로 파탄이 난 국가경제, 그것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수년 동안의
심각한 식량 위기,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기 시작한 탈북자의 행렬 등은
김정일과 북한의 장래를 모두 비관적으로 보도록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한 지 50개월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붕괴론은 현실과 거리가 먼 것 같다. 적어도 5년 정도의
시간대(時間帶)를 놓고 북한의 앞날을 전망한다면 김정일과 북한의
존속은 확실해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 사이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면 무엇이 존속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그 해답은 아무래도 북한의
특유한 성격에서 찾아야 하겠다. 사회과학의 일반 이론, 아니 평범한
시민의 상식으로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통용되는 북한 사회의 독특한 성격이 상식을 뛰어넘는 존속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뜻이다.
▼ 어버이와 자녀의 관계 ▼
북한의 특유한 성격은 우선 ‘가족주의적 국가관’에서 찾아진다.
수령은 온 백성의 ‘어버이’이고 이 ‘어버이’가 온 백성을 자신의
자녀처럼 돌보며 온 백성은 이 ‘어버이’에게 충성으로써 효도를
다해야 한다. 이처럼 ‘베풀어주는 사랑’과 ‘바치는 효도’의
교환체계 속에서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김일성 가족 국가’가 된다.
따라서 ‘어버이’에 대한 반란 같은 것은 일종의 존속살인과 같은 큰
죄로 인식된다.
북한의 특유한 성격은 또 ‘신(新) 전체주의론’에서 찾아질 수
있겠다. 호주국립대 게이번 매코맥 교수에 따르면 북한은 상상을
뛰어넘는 국가적 폭력과 감시 및 세뇌의 복합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국가’다. 민주사회가 중시하는 개인의 사생활은
철저히 부인되어 심지어 한 개인의 처녀성 여부가 국가에 의해
조사되기조차 한다. 바로 그러한 내용의 ‘신 전체주의’에 의해
북한의 공산정권은 지탱되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매코맥 교수를
인용하는 까닭은 그가 오랫 동안 북한을 높이 평가한 국제적으로
저명한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였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북한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북한의 본질을 ‘신 전체주의론’으로
꿰뚫어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언제까지 고립될텐가 ▼
마지막으로 북한의 특유한 성격은 ‘게릴라 국가론’에서 찾아질 수
있겠다. 북한의 통치자들은 북한을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이 침략의
기회만 엿보는 곳’으로 따라서 수령을 이러한 외침(外侵)에 대항하는
최고사령관으로, 그리고 인민을 게릴라 병사로 의제(擬制)시켜 놓은
것이다. 이 의제가 존속하려면 군사적 긴장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전체주의적 독재는 군사적 긴장 위에서 번영한다”는 병영국가론의
명제는 그래서 성립되는 것이다.북한이 최근 착점(着點)이 태평양에
이른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한 배경에는 그러한
고려도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특유한 성격만으로
언제까지 지탱할 수 있을까. 국경 없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21세기
정보화 세계화의 보편적 흐름에 끝까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인류사회의 보편성과 북한사회의 특수성 사이에서 북한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김학준 (인천대 총장).98/9/17-
* 뒷돈 방북 이래도 좋은가
- 우리 기업인들과 각계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북한을 방문하는 과정 에서
적지않은 뒷돈을 낸다는 얘기는 이제 비밀이 아닐 만큼 공공연 하게
시중에 퍼져있다. 방북자들이 북측에 내놓은 구체적인 액수를 직접
제시한 적은 없지만, 누가 얼마를 냈고, 누구는 무엇을 제공했 다는
등의 풍문은 당사자들의 구두전언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일반에
전파돼왔던 것이다. 적어도 빈손으로 북한에 다녀온 사람은 없다는
얘기다.
- 그런데 최근 '햇볕정책'에 힘입어 방북 희망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북측이 초청장 발급조건으로 요구하는 뒷돈의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 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얼마전까지는
몇만 달러나 그에 상응하는 물품, 기업인은 몇십만 달러를
내놓으면 방북을 허용했지만, 최근 어 떤 기업인은 몇천만
달러를 뒷돈으로 내놓은 다음에야 북한 땅을 밟 을 수있었다는
후문까지 나돌고 있다. 또 북측은 학술세미나 공동개 최를
추진하는 단체 간부들에게까지 초청장을 내주는 조건으로
콩기름 1만t과 비료 수천t을 요구했다고 한다. 북한측의
장삿속과 뒷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그러나 문제는 우리쪽에 있다. 북측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우리측
사람들이 감지덕지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니까 그들은 더욱 오만한자
세로 콧대를 높이면서 액수도 자꾸 늘려나가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렇다고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 "남이 가니까
나도.." 하는 식으로 비싼 돈 들여가며 덩달아 춤을 출 것인지,
당사자들은 한번쯤 되돌아 봤으면 한다.
- 정부당국 역시 지금과 같은 '너도 나도' 식 방북러시가 거액의
외화유출과 함께 여러가지 잡음만 가져올 뿐 '햇볕정책'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에 착안할 필요가 있다.
기업인들은 그들대로, 기타 사회단체 관계자들은 또 그들대로,
북측에 내는 뒷돈 이상의 소득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형편이 그토록 여유가 있다는 말인지 그
들에게 묻 지 않을 수 없다.
- 혹자는 "내돈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자기 돈이라고 아무데나 마구 써서는 안된다.
굳이 법적으 로 따지자면 북측에 당국 몰래 거액의 뒷돈을
건넨다면 그건 '교류협 력법'위반이며, 1만 달러 이상 해외
유출은 여행객 소지한도를 넘어 선 '외환관리법' 위반행위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행위에 해당될 수도 있다.
- 수해이재민, 노숙자, 실업자 등 우리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이 있는
판에 무질서하게 뒷돈을 내며 방북러시를 이루고 있는 우리 사회
일각의 현상은 분명 잘못돼 있다.-98/09/18. 조선 -
* 북한이 주는 섬뜻한 불안
지난 4년간 클린턴행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과의
核(핵)합의체제를 강력히 옹호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천진난만한 생각과 세계의 마지막 남은 철저한
스탈린주의 독재체제를 다루는 자기만족을 나타내고 있다. 전 미국합참의장 윌리엄
셸리 캐슈빌리 장군은 지난해 『무엇보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 큰 위협을 던져주고 있는 예측불허의 평양정권이다』라고 말했을 때
북한은 똑바로 알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그리고 양국에 살고 있는 약 16만3천명의 미국인들에 대한 북한의
다각적인 위협은 최근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로 확실해졌다. 북한
미사일들에는 고성능 폭약,화학-생물무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핵탄두가 무장될 수
있다. 반면에 서울과 도쿄에는 아무런 미사일방어체제도 없다. 즉 한-일 두 나라는
(미사일공격에)벌거벗은 상태로 남아 있으며 한 문서상의 합의가 그같은 위협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
현재의 미합참(JCS)의장 휴 셸턴장군은 『오늘날 미국이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위협은 자기만족이다』고 말해 왔다.
이 자기만족의 위협은 우리가 달러와 엔과 원화를 주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위협을
해결할 수 있다는 무지한 발상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발상으로 미국과 우리
동맹국들이 해야할 일은 46억달러를 들여서 북한에 안전한 원자로를 지어주고
해마다 평양정권에 50만t의 중유를 제공하며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굶어죽는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해 수백만달러 규모의 식량을 대주는 것이다. 어쩌면 북한이
이란,파키스탄,시리아 같은 나라들에 미사일을 만들어 주거나 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5억8천만달러 이상의 돈을 보상해주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열성적인 정부관료들이
시행하지 가장 어려운 것이겠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정책이 돼야 한다.
북한을 돕거나 해치지 마라.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철저한 공산주의 독재정권인
북한이 스스로의 경제적 失政(실정)과 무시무시하게 억압적인 정치체제,자연의 힘이
주는 중압 아래 침몰하게 내버려 두어라. 마치 소련이 가라앉 듯이 말이다. 그 반면에
북한의 벼랑끝 외교와 협박을 가능케 해주는 으뜸가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서울과 도쿄 주변에 대한 미사일방어망 설치에 최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98/9/17. 세계일보 -
* 북한에서 금지시킨 노래
-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처럼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인 노래도 드물다.
84년 해금됐으니 무려 22년동안 옥살이를 한 셈이다.
겉으로 내건 금지 이유는 왜색풍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60년대 초
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에 애조가 담긴 이 노래가 국민교육상
좋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 가장 많은 금지곡을 남긴 작사가는 조명암이다.
일제하에서 모더니즘 시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던 그는 무려 516곡을
작사했다.
이 가운데 「알뜰한 당신」 「낙화유수」「목포는 항구다」 등은
해방직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48년 그가 월북하면서
그의 노래는 대부분 사라졌다.
- 「동백아가씨」나 「낙화유수」 등은 일반인에게는 금지됐지만
청와대에서는 애창곡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이 하도 좋아해 이미자씨는 청와대 공연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 10·26 직전인 79년 5월 방한한 후쿠다 전일본총리의 만찬때도
이씨는 이 노래를 불렀다.
- 조명암의 노래는 시중에 음반이 없어 이미자씨가 청와대용으로 따로
녹음해 보내곤 했다는 것이다.
일반인은 못듣게 하고 정작 자신은 즐겨 듣는 권력의 이중성을 보인 것이다.
- 현대가 추진중인 금강산관광에서 「굳세어라 금순아」 「그리운 금강산」
등이 금지된다는 소식이다.
남쪽 관광객을 실어나를 유람선과 관광버스에 설치될 노래반주기에
수록된 6,000여곡 가운데 71곡이 북측에 의해 삭제요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 삭제곡은 「애국가」를 비롯해 국가경축일 관련노래, 「진짜사나이」 등
군가, 「가거라 삼팔선」 등 한국전쟁과 월남전 관련 노래들이다.
신세대 노래를 비롯한 5,000여곡의 노래들은 괜찮다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 어느 사회나 금지곡이 있기는 하다.
다만 남북한의 거리를 또 확인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인간관계를 도탑고 두껍게 해주는 것이 노래의 힘이다.
남쪽의「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아침이슬」,
북쪽의 인기가요 「휘파람」이 분단의 벽을 넘어 남북에서 불려지고
있듯 더 많은 노래가 함께 불려지길 기대해본다.- 98/9/24 경향 -
* 그리움의 경제학
- 참 힘 있고, 돈 있고 볼 일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누군가.
북한 시각으로 보면 그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 성공한
자본가이다. 또 대통령을 노렸던 정치인이다. 수많은 제의를 제치고
북한이 정회장과 「빅딜」을 한 것은 참으로 「자본주의적」이다.
북한에 가서 환영을 받는 사람은 한총련 대표같은 운동권이거나
정회장같은 재벌뿐이다.
- 물론 북한으로서는 정회장보다는 그의 돈보따리에 관심이 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돈없고, 빽없이 그리움만 큰 실향민들 마음 속에는
사실 정회장의 방북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 편으론 속쓰린
일일는지도 모른다. 『나도 돈이 많았더라면…』
- 정회장이 소를 주고 받아온 선물보따리는 참 크다. 가을부터 금강산
관광이 가능할 것 같고, 9월에는 김정일비서를 만나기로 했다는
희망적인 소식이다. 통일전문가들이 그렇게 많은 이 땅에서 아무도
못한 일을 자본은 해냈고, 정권마다 그렇게 「한 건」 올리려고
애썼지만 결국 확실하게 일을 한 사람은 대통령이 못된 정회장이다.
- 『고향땅 한 번 밟으려면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사람들이나 『통일
되면 북한 가서 한 밑천 건져 보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머지 않아
북한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기쁨을 주는 일이다.
- 이제 월드컵 16강 진출이 좌절된 이 땅에서는 「금강산마케팅」이
새로운 화두가 될지도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에선 당분간
금강산특집이 줄을 이을 것이고, 하루라도 고향땅을 밟아보려는
실향민들에게 달콤한 유혹도 있을 법하다. 이윤을 창출하는 게 목적인
기업에서도 새로운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북한땅을 밟아 보려는 꿈은 새로운 마케팅 포인트가 될 것이다.
- 하지만 잊지 말 일이다. 그리움에는 빈부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실향민들이 가져갈 것이라곤 커다란 눈물보따리 뿐이라는 사실을.
일을 추진한 것은 자본의 힘이지만 고향의 산, 금강산을 누리는 일은
고향잃은 이들의 즐거운 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98/6/24. 한국 -
* 북한의 제2 한국전 위험 경고
- 북한의 최수헌 외무副相은 28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반도와 인근지역에서 전개되는 북한을 겨냥한 군사훈련의 결과로
20세기가 끝나거나 21세기가 개막될 시점에 또다른 한국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더 임박했다』
고 말했다.
- 崔 副相은 이같은 상황에서 통일이 전쟁 발발 위험을 제거할
것이라고 주장하고주한미군이 통일에 최대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최 부상은 이어 최근 발사된 역사적인 첫 인공위성이 북한의
과학 및 기술발전능력을 증명했다고 자찬하고
『인공위성은 우리 지식과 1백% 우리 기술, 그리고 우리방식으로 개발된
다단계 로켓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고 말했다.
- 그는 일본 정부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에 의문을 품는 소동을
일으키고 유엔안보리가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급한
행위를 자행하는 등 비이성적으로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최 부상은
『우리의 인공위성 발사가 안보와 관련해 중대한 쟁점이 된다면
일본의 인공위성 발사 역시 안보리에 의해 논의될 첫 의제가 돼야할 것』
이라고 말했다.
- 그는 또 일본은 한반도의 긴장을 악화시킴으로써 통일을 방해해선
안되며 일본이 미국을 좇아 전쟁을 선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시사했으나 자세한 설명은 하지않았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이후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공격으로 부터
일본을 보호하기위한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공동 연구키로
합의했다.
- 또다른 한국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최 부상은 21세기는
평화롭고 번영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세계가 독립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북한의 번영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 부상은 통일문제에 언급, 『남,북한간 관계증진과 통일을
향한 대화를 갖자는것이 우리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 그는
『한국민들이 통일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관련국가들이 한국민들의 노력을 방해하는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
며 주한미군의 철수를거듭 촉구했다.
그는 이밖에 핵무장해제가 유엔의 주요의제가 돼야 한다고 말했으나
북한의 핵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98/9/29. 동아 -
* 북한의 허위 인공위성
-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28일(98/9)
"지금 조선의 첫 인공지구위성이 지구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다"
고 인공위성 발사 성공을 거듭 주장했다.
중앙통신은 `누리를 밝게 비치는 별 광명성 1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광명성은 누리를 밝게 비치는 별이라는 뜻으로서 경애하는 김정일
영도자의 위대성을 상징하고 있다.
1940년대 조선의 항일 혁명투사들은 김정일 영도자의 탄생을
조선을 빛내일(빛낼) 백두광명의 출현으로 높이 칭송했다"
고 주장했다.
- 이 통신은 북한의 첫 인공위성을 '광명성 1호'로 명명한 것은
"조선의 사회주의를 빛내 나가시는 위대한 김정일 영도자에 대한
인민들의 다함없는 흠모가 담겨져있다"
고 덧붙였다.
- 한편 노동신문은 이날 논평에서
"우리는 주변나라들의 자주권과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손해를
보면서까지 위성발사 방향을 수정했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위성을 더 높이 쏘아 올릴 수 있은 것도(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자주권을 존중하는 원칙에서 일부러 위성발사의 각도와
높이를 대폭 수정했다"
고 주장했다.
- 또 위성 운반로켓에는 로켓이 비행도중 예정된 '자리길(궤도)'에서
탈선되는 경우까지 가정, 로켓을 안전지대로 유도한 뒤
자체폭파시킬 수 있는 "고도의 기술장치도 갖춰져 있었다"고
전했다. -98/9/29.중앙 -
* 교육개혁 우수 30개대 선정
- 교육부는 29일 연세대 등 30개대를 교육개혁 추진 우수대학으로 선정,
모두 2백억원의 재정지원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올해로 3번째인 교육개혁 추진 우수대학 선정에서는 지난해 선정됐던
서울대, 부산대 등 16개대가 탈락하고 인하대, 춘천교대 등 6개대가
새롭게 선정됐다.
- 분야별 우수대학은
▶ 학생선택권 보장, 교육과정 개편 분야에 한동대 등 7개대
▶ 대학과 지역사회 연계분야 영남대 등 10개대
▶ 학생선발 분야 연세대 등 2개대
▶ 대학별 선택 교육개혁 실천분야 숙명여대 등 6개대
▶ 인천. 춘천 교육대
▶ 서울산업대. 방송대.동명정보대 등이다.
- 교육부는 이들 대학에 학교당 11억5천만∼2억7천5백만원의
재정지원을 하기로했다.
분야별 주요 우수대학의 선정사유를 보면 한동대는 학부제를 통해
2개의 전공학과를 통합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영남대는 실직자 재취업훈련 과정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연세대는 특기생 선발 등 다양한 전형방법과 입시결과에 대한
분석 노력이 돋보였고 숙명여대는 사이버 수업 등 가상교육
프로그램 실천에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서울대는 재정지원 신청을 한 1백23개 대학을 대상으로 46개
대학을 우선 선정한 1차 서류심사 과정에서 탈락했다.
- 교육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서울대가 제출한 보고서는 교육부가 요구하는 기준이나 체제에 맞지
않는 등 `부실'한데다 교육개혁 실적도 별반 없어 평가위원회에서
탈락시켰다"
고 설명했다. -98/9/29.조선 -
* 북에서 만난 사람들 1.
- 보통강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황소 울음소리처럼 우렁찼던 평양 도착
이튿날 아침.
우리는 호텔 식당에서 평양 출신의 젊은 여성과 첫 대면을 했다.
우리들이 둘러앉은 둥근 식탁의 당번은 리선영 (21) 이란 접대원이었다.
- 주홍색 원피스 위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키 큰 아가씨가 우리들의
식탁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은 당당했으나 정숙했다.
초면의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문을 튼 사람은 아무래도 두번째
방북으로 심리적 여유를 가졌던 유홍준 (兪弘濬) 교수였다.
- 兪교수가 그녀의 이름과 나이를 물어 손색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이, 우리는 저마다 귀를 곤두세우고 그녀의 대답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질문과 대답 사이, 우리들의 질문이 길어지면 그녀는 눈길로
주방과의 연락을 주고 받을지언정 대화를 두 동강내고 식탁을
떠나는 법은 없었다.
식탁의 당번은 순서에 따라 날마다 교체됐다.
다시 만난 접대원은 김화복 (23) 이었다.
- 리선영보다 약간 작은 키의 이 아가씨가 쟁반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은 내 사실적인 표현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교태스러웠다면 실례가 될까. 식탁에서
차반을 든 채로 서서 장시 (長詩) 한 편을 발성의 높낮이를
밀도감있게 배합하면서 암송했던 그녀의 낭랑한 음색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발성법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기가 충분했다.
- 그러나 아침 식탁에서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녀들과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 한장도 지금은 내게 남아있지
않다.
장마로 말미암아 첫날의 금강산 탐승길에서 삼선암의 하반신만
만나고 하산했던 우리는 호텔 옆에 있는 온천장으로 향했다.
바로 그 온천장 식음료매장에서 '도라지' 를 '더라지' 로 발음하는
것 같은 강원도 아가씨 리은숙 (23) 을 만났다.
북한 체류 며칠동안 벌써 넉살이 생긴 우리가 신덕샘물 한병을
시켜놓고 노래를 청했더니 그녀는 두말없이 '심장에 남는 사람들'을
들려주었다.
- 그리고 김민기의 '아침이슬' 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그처럼 우리는 북한 체류 14일 동안 아가씨들에게 노래를 청해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심지어 평양시내 옥류관에서 복무하는 접대원에게도 노래
한곡을 청했었지만 실패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럴까. 그녀들이 부르고 있는 노랫말에 담겨 있는 통치자에
대한 강도 높은 찬양성과 인생에 대한 긍정적 신뢰감은 정신적
친화력과 정화력을 함께 소유케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노래는 조금도 쑥스러울 게 없고 굳이 사양해 내숭 떨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노래부르기는 어느덧 그들의 전통적 정서로 정착됐고,
생활 그 자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터놓고 노래듣기에 극성을 부렸던 것은, 초면의 사람들과
친숙한 사이처럼 진솔한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단초로서는 그만큼 적절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던 아가씨 한 사람이 있다.
- 그가 바로 금강산 온정리려관 선물용 매장에 복무하고 있었던
노경란 (25) 이다.
그녀는 강원도 원산의 동해고등중학과 경제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금강산 온정리려관으로 배치돼 벌써 5년째 매장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알뜰했지만 극성스럽게 보이지
않고, 적극적이었지만 요란하지 않은 복무태도와 성품의
소유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희나리처럼 속으로 타고 있는 여성같이 보였다.
- 상당히 부끄러움을 탔으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여축없이
감당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는 원산시의 당일꾼이고 손위의 두 언니는
재봉연구소에 복무하고 있다고 했다. 노경란은 이 호텔에 숙식하면서
한달 1백30원의 급료를 받고 있었다.
'예쁘다' 는 말을 북한에선 '곱다' 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런
칭찬을 건네자 그녀는 금강산 8담에 내려와서 승천하지 못하고
속세를 살게 된 8선녀의 전설을 나직나직하게 들려주었다.
- 조용하지만 할 말은 다하는 성품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배당된 근무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라운지에 투숙객이나
고객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한 매장을 닫지 않고 지키고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이 일정에 따른 금강산 탐승을 위해 배낭을 챙겨들고
라운지로 내려오기 전 그녀는 남보다 먼저 매장으로 나와 닦고
윤기내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체류했던 6일
동안 3일 정도를 제외하곤 투숙객들은 거의 우리 일행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끝내는 그녀의 열성적인 복무
태도조차 시험해 보기로 작정했다.
- 그녀의 매장에는 '양기보' 라는 강장제를 팔고 있기도 했는데, 그
약품의 효능을 소개한 전단은 매우 광범위하고 길어서 언뜻
보아도 원고지 6 - 7장 분량은 됨직했다.
그 전단을 객실에서 숙지하겠다는 핑계를 만들어 내용을 빠짐없이
복사한 두벌의 전단을 요구하고 객실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예외없이 매장으로 출근해 청소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고, 나는 그녀가 손수 꼭꼭 박아 필기한 두벌의
전단을 건네받았다.
- 지난 저녁 내가 그녀 손수 베껴 쓴 전단을 요구했을 때, 대꾸만
하고 적당히 얼버무린 채 지나쳐버릴 것이란 예상을 했었다.
아니면 이미 매장에 비치해둔 전단을 가져가서 읽은 뒤 돌려달라는
대답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요구대로 두벌의 전단을 밤새 손수 베껴온
것이었다.
- 북한의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든 국가가
지정해주는 직업에 순응하며 열성적으로 복무한다는 정신 한가지는
투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두산 등정길, 삼지연의 베개봉려관 매장에서 복무하고 있던
김홍실 (24) 의 경우도 그런 아가씨였다.
그녀는 예술고등중학에서 악기연주를 전공했었는데, 국가가
그녀에게 지정해준 직업은 베개봉려관 매장의 판매원이었다.
- 그런데 그녀는 나와 말문을 튼 이후부터 행동거지가 눈에 띄게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낌새가 역력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태어나서 스물다섯살이 되는
지금까지 남한 사람을 처음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심란하기 그지없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 구태여 소녀적인 동경심은 없었다 할지라도 평생 만나볼 수 없을
사람들로 여겨만 왔던 남한 사람을 꿈도 아닌 현실에서 만나고
있는 그녀의 일손이 제대로 잡힐리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설혹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끼리라 할지라도 '만남' 이란
것은, 육질화된 정치적인 견고성과 종교적인 사랑과 신뢰감까지도
무릇 초월해 인간의 내면에 깊이있게 투영돼 애틋한 정한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수단이라는 것을 나는 예고되지 않았던
그녀와의 짧디짧은 만남을 통해 터득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 우리가 백두산 등정을 마치고 평양으로 출발하려는 날, 그녀는
검은색 투피스를 단정하게 차려 입고 라운지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에게 하필이면 왜 떠나는 날에 곱게 차려 입고
나타났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이었다.
"손님들이 좋은 인상을 남기고 떠나시라고요. "
- 글 = 김주영 (소설가)- 중앙. 98/8/5-
- 북에서 만난 사람들 2.
- 평양의 보통강 구역을 둥글게 싸고 돌아나온 보통강의 두
물줄기가 대동강으로 합류하려는 안산다리 근처 언덕에 우리
일행이 투숙한 보통강려관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맨 처음 하는 일은 만사 제쳐두고
커튼부터 열어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번의 답사여행이 공교롭게도 7월의 장마와 때를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비가 내리지 않는 한 우리는 꼬박꼬박 호텔 주변의 아침산책을
즐겼다.
보통강려관 근처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용이 자라고 있었다.
산골도 아닌 평양이란 대도시 한복판에서 저녁이면 손쉽게
별자리를 찾아볼 수 있고, 부용이 자라는 연못이 있다는 것이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 연못에는 상당수의 낚시꾼들이 몰려들어 망중한을 즐기곤 했다.
- 뿐만 아니라 주변 잔디밭에서는 열애중임이 분명한 젊은 남녀들이
행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눕거나 앉아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7월 17일. 호텔 근처에 있는 안산관이란 소문난 단고기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가던 중 잔디밭에 모여 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
40대 사내들을 발견하고 무턱대고 접근했다.
노상에서 벌이는 장기판이란 전통적으로 임자가 따로 없는 법이다.
- 그래서 조용히 섞여 앉아 관전하기보다 불쑥 끼어들어 훈수까지
거들기로 했다.
남한에서 온 사람이란 것을 알아차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내심 기대치 이상의 반응을 기대했던 나는 그러나 실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고, 내 서툰 훈수 따위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나 낯선 사람에 대한 상투적인 경계심 따위도 느낄 수 없었다.
- 그날 밤 안산관에서 나는 난생 처음 단고기를 먹으며 노래를 부른
꽤 점잖지 못한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어쨌든 우리를 대하는 평양 시민들의 태도는 너무나 담담하고
자연스러워 '이 사람들, 혹 훈련받고 나온 사람들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낯선 것에 대한 의문이라든지, 몰라서 묻는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응은 매우 애성바르고 적극적이어서 어떤 복선이 깔려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 그런 진지한 태도를 가진 사내들 중 기억에 남는 첫번째 사람은
우리 일행의 백두산 등정에 자동차를 운전해 주었던 김홍철 (46)
이었다.
전세비행기로 삼지연읍에 도착한 우리는 여장을 풀자마자 빗속을
무릅쓰고 베개봉려관을 출발해 백두산으로 향했다.
등반도로 주변은 온통 높이 자란 수목으로 들어차 있었다.
- 그런데 수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문비나무와 분비나무,
그리고 이깔나무는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판별이 쉽지 않았다.
그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운전사는 즉시 버스를 정지시키고
운전석을 나가 일일이 잎을 꺾어 그 특징을 알려주려고 애썼다.
그런 태도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 동승했던 유홍준 (兪弘濬) 교수가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저 숲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운전사의 대답도
거두절미였다. "길을 잃어버립니다. "
그보다 앞서 우리는 금강산의 오묘한 풍광에 관한 비유법에는
가위 문장가의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과장이 아닌 외금강 산지기
장영철 (37) 을 만났었다.
- 물론 그의 공식적인 직책은 금강산 관리원이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의 공식 동반자나 안내의 임무도 맡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의 만남은 비 때문에 일행과 잠시 헤어져 있었던
동안의 우연이 제공한 것이었다.
兪교수와 나는 그에게 넌지시 접근해 수작을 걸어 보았다.
- 兪교수가 수첩을 꺼내들며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때서야 그는 우리가 남한에서 온 사람들이란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놀란 표정이 이마를 살짝 스쳐가는 순간, 그는 얼떨결에 아귀가
맞지 않는 한마디를 쏟아냈다.
"이름 말입니까? 필요 없습니다. 장영철입니다. " 미소짓게 만드는
대꾸에 흥미가 폭발한 兪교수의 좌충우돌식 질문 공세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 兪교수는 가을의 금강산 풍광, 일만이천봉에 덮이는 구름, 그리고
아침에 바라보는 금강산의 일출 광경에 이르기까지 미처 감당못할
정도로 속사포같은 질문을 파상적으로 퍼부어댔지만,
그는 조금도 시큰둥한 기색없이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금강산의 계곡물 소리에 대한 질문도 그중 한가지였다.
-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려 계곡물이 불어났을 때와 약간의 비가
내렸을 때, 그리고 가뭄이 계속되고 있을 때의 금강산 계곡
물소리의 오묘한 차이를 물었다.
그는 폭우가 내렸을 때와 가뭄이 계속되고 있을 때의 계곡물
소리는 그럴싸한 비유법을 동원해 표현했으나 약간의 비가
내렸을 때의 물소리를 놓고 잠시 머뭇거렸다
- 그러자 성급한 兪교수가 앞질러 물었다.
"혹시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의 코고는 소리 같지는 않습니까?"
그랬다.
그는 兪교수의 앞지른 대답에 벌컥 화증을 돋우면서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되먹잖은 소리가 금강산에서 왜 납니까 ?"
금강산의 정화력에 대한 경외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신뢰는 비단
장영철 뿐만이 아니었다.
- 모두가 금강산을 세계적인 보배로 일컬어 조금의 손색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이 가꾸며 돌보고 있다는 자부심
속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숙연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장영철을 만나기 전 우리는 7월 9일부터 투숙했던 금강산
온정리려관에서 오명철을 만났었다.
한달이면 40일 동안 비가 내린다는 소문이 있는 금강산에 당도한
후부터 장마에 시달려온 우리는 숫제 날씨 노이로제에 부대끼고
있었다.
- 비가 내리는 가운데 결행됐던 9시간의 긴 여정 끝에 우리는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에 있는 금강산 온정리려관에 당도했다.
정문에서 우리를 맞아준 사람은 바로 정문담당 경비원 오명철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문을 지키고 있는 호텔종업원의 상투적인 업무 중
어느 한가지 일에도 관심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촬영장비와 가방을 난삽하게 챙겨들고 차에서 내리는 우리
일행을 약간 젖혀 쓴 제모 아래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 수작걸기가 약간 껄끄러운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을 보낸 이튿날 아침, 우리는 역시 정문을 서성거리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금강산에 살고 있으면 하루 날씨 쯤은 짐작하실텐데, 오늘 날씨는
어떻겠소 ?"
그런데 이 친구는 냉큼 대답은 않고 손으로 자신의 뒤통수부터
긁기 시작했다.
- 그곳에서 6일간을 체류하면서 우리는 그를 만날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그는 언제나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요' 하는
표정을 전혀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흐린 날씨가 흡사 자신의 탓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한 쑥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처럼 날씨에 대해선 전혀 불분명한 태도로 6일간을 버티던 그도
단호하고도 분명한 그 날의 예보를 우리에게 던진 일이 있었다.
- 미진한 금강산 탐승을 끝내고 평양으로 회정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을 때 兪교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일 날씨는 어떻겠소?"
그러자 그는 차렷자세로 화들짝 거수경례를 붙이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내일 날씨는 쾌청하겠습니다. "
우리가 떠나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글. 김주영 (소설가)- 중앙. 98/8/5-
* 북한 식량사정 에티오피아 수준
- 북한의 일인당 식량소비는 82-84년 205㎏에서 지난해 100㎏까지
점차로 줄어든 반면 에티오피아는 74-76년 105㎏에서 87-89년 120㎏로
약간 늘어 두나라가 비슷한 식량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일간 '엘디아'가 최근 보도했다.
- 부에노스아이레스州 주도 라플라타에서 발행되는 엘디아는
세계식량계획(WFP)자료를 인용, 82년부터 97년까지 걸친 북한의
일인당 식량 소비량과 64년부터 89년까지 걸친 에티오피아의 일인당
연간 식량 소비량을 비교하면서 지난해의 북한 식량사정은 74-76년의
에티오피아 식량사정보다 뒤떨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 이 신문은 지난달 14일자 3면 전면을 할애, '金왕조 북한의 권력
확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식량난, 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취임과
북한의 군사력 등에 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북한이 金正日 서기를 국가원수격인 국방위원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직계 세습을 이룩한 최초의 공산국가이자 일부
국가에서 나타났던 종신 대통령의 개념을 넘어서는 절대 권력자를
배출한 최초의 국가가 됐다고 전했다.
- 엘디아는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지난 83년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한차례 외유만을 했고 공산주의자가 아닌 외국정상과 회동한 적이
없는 이상한 지도자중의 한사람이라고 소개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나오고 있어 향후 북한의 진로를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 이밖에 신문은 북한이 세계 제6위의 군사강국으로 상당량의 재래식
무기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짐작되고 파키스탄에
미사일을 수출하는 등 군사부문에서 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최근 3년간
2백만명이 아사했고 현재 주민 10%가 굶주림의 고통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98/10/02.한국일보-
* 북한과 인도주의
- 총체적 경제정책실패와 잇단 재해가 겹치면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피원조국가 신세가 됐다. 많은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들이 북한원조에 나서고
있으며 남한에서도 「북한돕기」라는 용어가 어느덧 낯설지 않게 됐을 정도다.
- 그런데 원조를 둘러싸고 불미스런 논란과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게 대북지원의
특징이다. 가령 식량원조와 관련해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수백만명에 이르며
심지어 인육(人肉)을 먹기까지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가 하면, 쌀을 줄 만큼 사정이
나쁘지는 않다는 주장도 제기돼왔다.
- 도대체 실체가 불투명한 것이다. 또한 북한의 정치적 또는 군사적 움직임에 따라
원조의 정당성이 새삼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인공위성 발사를 둘러싸고 미국
조야(朝野)에서 제기되고 있는 대북지원 중단론이 비근한 사례다.
- 인종·국적·종교를 불문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는 운동으로
나타나는 게 인도주의다. 그럼에도 유독 북한은 인도주의에 따른 수혜(受惠)조건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최근 1년3개월간 북한에서 의료지원활동을 펴온
「국경없는 의사회(MSF)」라는 프랑스의 민간의료봉사단이 철수했다고 한다. 이유는
의료지원품이 북한당국에 의해 전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단체는 특히
다른 원조기관들에 북한지원정책을 재고하라고 촉구하기까지 했다.
- 한국에서 서울평화상을 받았고 지난 71년 출범한 이래 세계적 명성을 쌓아온 이
단체가 북한당국의 처사에 꽤나 실망한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인도주의를 내세우는
비정부단체의 조처치고는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세계식량계획(WFP)은 MSF의 주장을 확인할 수 없다며 계속적인 원조계획을 밝힌
것이다.
- 오늘날 대북원조에 관한 논란은 「무능한 아비가 밉다고 결식아동을 방관할 수
없다」는 정황에 비유할 수도 있을 법하다. 「인도주의와 북한지원」은 국제적
딜레마다. - 경향일보.98/10/ -
* 북한의 인권
올해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50주년 되는 해다. 50주년을 맞는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광복한 후 외세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자주운동, 즉 제2의 독립운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탁통치에
찬성하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했던 스탈린의 「괴뢰」는 한반도의 북쪽에서
기상천외한 세습왕조를 만들어놓고 2000만 우리 동포들을 억압하고 있다. 건국
50년이 지나도록 북한 동포들을 이 악(惡)의 집단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건국 50주년을 맞는 마음이 무거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건국의 완성은
자유민주주의의 통일을 이루고, 일제 이상으로 고통받는 북한 동포를 구제하는
것이다. 새 정부는 「제2의 건국」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 민족의 최대, 최우선의
과업을 계승하고 있는지 챙겨 보아야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건국 50주년 기념일인 지난 8월15일을 전후해서 남북한간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새정부 출범 초기인 지난 6월에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500 마리를 이끌고 북한을 다녀왔고, 정씨 일행에 의해 북측과
합의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와중에 북한 잠수정이 동해안에서 또
발견됐다. 지난 번 북한 잠수정 사건은 북한에 쌀을 지원해준 직후 일어난 일이었고
이번은 소를 보내준 직후였다.
김일성은 1961년 7개년 경제계획에 착수하면서 그것이 완성되면 북한 주민이
이밥(쌀밥)에 고깃국 먹고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호언했고, 87년에도 이 말을
반복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 쌀과 고기를 모두 보내주는 남한에 그들이
보답한 것은 잠수정 도발이었다. 그럼에도 햇볕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새 정부는
분명한 사과도 받아내지 못한 채 금강산 유람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작년 김정일 전처의 조카 이한영(李韓永)씨를 암살한 북한 공작원이 북한에 돌아가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 암살범이 무엇을 타고 들어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우리
정부는 정확히 모른다. 이번 북한 잠수정에 탄 사람들이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잠수정으로 침투해 남아 있는 간첩이 과연 몇 명인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우리 정부는 햇볕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새정부가 내세운 상호주의 원칙은 어디로 갔는가.
1. 북한의 일석삼조 술책
금강산 유람을 놓고 벌이는 북한의 전술을 들여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게
그들의 술책에 말려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1959년부터 조총련계 재일동포
10만여명과 일본인 처 수천명을 북한으로 송환하고, 미국에서도 제2의 조총련을
조직해서 북한의 이산가족을 볼모로 많은 자금을 수탈하고 미국에 친북세력을
확장했다.
그들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봤다. 우선 송금되는 외화를 쉽게 갈취할 수 있었고,
체제안정과 홍보에도 크게 활용했다. 그리고 그들을 볼모삼아 일본에 계속적인
세력확장을 도모했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 반면 북송 동포들의 애절한 상봉과 서신왕래는 지금껏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번 금강산 관광건도 이와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입산료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다. 금강산 유람객 1인당 북한에 지불하는 비용은 300달러로 결정됐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는 업체들이 목표하는 대로 연간 50만명이 금강산을 찾는다면
연간 1억5천만 달러, 북한이 1년간 벌어들이는 외화의 10%에 해당되는 막대한
금액이다. 1t당 300달러쯤 하는 쌀값으로 계산하면 우리쪽 한 사람이 1t의 쌀을 입산비
명목으로 갖다 주는 셈이다. 또 미사일 개발비용도 우리가 대주는 셈이다. 이것이 IMF
위기에 처해 수십만의 결식아동이 있고 수해 때문에 쌀값도 폭등해 당장 내년부터
식량수입에 어려움을 겪게 될 상황인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게다가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는 과정에 우리 국민들의 대북 안보관을 희석시킬 수
있는 효과도 얻었다. 금강산 관광을 추진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만은 북한의
고향을 방문하고 가족들을 만났다.
정회장 일행이 가족을 만나는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수많은 실향민들은
진실로 살아 생전에 고향에 갈 수 있다는 허황된 희망을 얻었다. 현실로 다가온
금강산 관광이 곧 고향 땅을 밟고자 하는 월남동포들의 잠을 설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금수강산 한반도의 금강산은 김정일의 개인 소유가 아니다. 금강산 관광객은
북한 출신들이 대부분일 텐데 탄압받고 굶주린 북한 형제들은 보지도 못하고
금강산의 환경만 오염·파괴했다는 역사적인 책임만 뒤집어 쓸 것이다. 그러니
함경도, 평안도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주마간산식 금강산 유람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거기에 더해 북한은 이 관광사업을 통해 대외적인 홍보효과와 김정일 체제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부수적인 이익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일석삼조의 작전을 가장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것은 정부의
「정경분리」라는 용어에 끌려서, 너도 나도 막대한 입북 상납금을 내고 북한
고위층을 만나 사업권을 따려고 경쟁하는 우리 기업들이다. 북한은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 팔 아먹듯이 금강산 개발회사 박경윤 여사장과 통일교, 현대, D재벌 등을
경쟁시켜 비싼 값에 금강산 이권을 팔고, 국내의 각 방송들도 금강산 환상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휴전선을 지키는 우리 군과 사병들은 금강산 유람객들의 관광안내
경비원 역할을 해야 되겠는가. 참으로 이 세계에서는 처음 보는 희비쌍곡선이다. 만일
이 사업이 실패한다면 그 국민적 실망과 책임을 누가 어떻게 져야 할 것인가.
2. 국회는 왜 외면하나
금강산 유람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더욱 용납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금강산 유람을 통해 망향의 설움을 달래고 오는 바로 그 시간에, 북녘
동포들이 지구상 최악의 지옥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입산료로
지불하는 300달러씩의 돈은 만성적인 외화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김정일 병영의
국방비에 보태져 북한 동포들이 그 폭정에서 더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는 애국·애족 인사는 정녕 없는 것인가.
우리 정부는 이토록 심각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가 알려지고,
수많은 북한 동포들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다 죽어가고 있다. 정확한 숫자도 알 수
없는 탈북 동포들이 공포와 기아에 떨면서 중국과 소련에서 난민으로 헤매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 정부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기 주저하고 국회는 이를 외면했다. 그
이유는 늘 북한 정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는 항상 그들의
눈치만보고 끌려만 갔다.
필자는 지난 6월 초 「국경없는 의사회(MSF)」의 비베르송 회장을 만났다. 그는
북한의 식량원조 호소에 따라 지난 5년간 북한에 의약품과 식량을 지원해왔다. 그런
그가 앞으로 북한에 대한 직접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등 구호품
지원을 고대하는 난민 지역도 많은데,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로부터 지원단을
격리시키고 구호품만 놓고 가라고 하는 북한을 더이상 지원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원하는 구호품이 인도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지 확인도 할 수 없는
지역에 어떻게 지원을 더 하겠느냐는 얘기다.
따라서 그들은 대북 지원단을 조만간 철수시킬 예정이며, 대신 중국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은신해 있는 수만 명의 탈북자들을 직접 구호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우리 대사관 문을 두드리는 탈북자들을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 그들이
나서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 가을 유럽에서 국제 민간단체들이 국제회의를 열어 그동안
무원칙적이었던 대북지원을 지양하고 대북지원 문제를 참혹한 북한의 인권 상황과
연계시키는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치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권단체조차도 무작정 북한을 지원하는 것이 인권과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버티니 세계식량계획(WFP) 사무국장도 북한이 분배 감독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일부 지원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됐다고 지적하면서 지난 4월 식량지원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 바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당사자인 우리보다도 세계기구들이
먼저 나서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방위포럼재단(DFF)의 수전 솔트
이사장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탈북한 이순옥 여인과 강철환씨를 미국
의회에 초청해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인권상황을 폭로시킨 바 있다.
3. 꼬리 없는 짐승들의 지옥
이순옥씨는 이 자리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한마디로 「꼬리없는 짐승들의
지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북한 정권이 구걸한 식량이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씨의 증언으로 「꼬리없는 짐승」이라는 말은 미국 내에서
한동안 유행했고, 솔트 이사장은 미 의회는 대북청문회를 계속 개최할 것과 유엔
인도기구가 북한에 들어가 구호식량 배급상황뿐 아니라 인권 상황까지 감독할 것을
국제적으로 촉구한 바 있다.
마침내 지난 8월에는 유엔 인권소위원회가 북한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7개항
결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인권소위는 작년에 북한의 「심각한 인권위반」을
규탄했던 차원을 넘어서 북한에 대해 「접근권」 보장을 요구하고 식량원조를
인권문제와 연계시키자는 권유 등 좀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이 지금까지
어려운 식량난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극복해가면서도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인권기준」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해온 것을 지적하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유엔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처럼 국제기구들이 북한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데도 정작 동족인 우리 정부나
국회, 심지어 종교 지도자, 대북 지원단체들은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다.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북한 동포의 비참한
운명을 유엔 등 국제기구에 맡겨두어야 하는가.
이러한 때에 또 하나의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지난 8월 평양장충성당 축성
10주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 등
일행이 정작 방북 목적으로 승인받았던 성당축성식에는 참석조차 않고 판문점으로
내려가 북측이 주관한 8·15 통일 대축전에 참석해 연설까지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규현 신부는 이보다 앞서 김일성의 시신이 안장된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고
『김일성 수령님의 영생과 조국통일 평화를 기원한다』고 방명록에
기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북한측 강요에 따라 8·15
통일대축전에 문규현 신부 등 2명을 대표로 파견했고, 나머지 7명의
신부들은 장충성당 미사봉헌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편집자>).
수천만 동포가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 땅에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이 여기 저기 정치 행사에 참석한 것은 종교인에 대한 우리 국민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국내 인권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왔다. 그들의 인권 투쟁이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데 기여했음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삶을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4. 남북정상회담과 한건주의
1994년 국내 언론에 의해 시베리아 등지를 헤매는 탈북 벌목공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우리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망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나고 나서야 밝혀진
일이지만 당시 김영삼 정부는 암암리에 북한과 정상회담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건주의」는 정당한 원칙조차도 무시하게 만들어버린다.
비단 김영삼 정부뿐 아니라 역대 군사정권들조차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정식
문제제기를 한 적이 없다. 그들 또한 이후락(李厚絡), 장세동(張世東), 박철언(朴哲彦)
씨 등 밀사를 비밀리에 보내면서 정상회담 성사와 같은 한건주의에 매달렸다. 이러한
한건주의는 자기 정권의 비정(秕政)을 호도하려는 것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볼모로 삼고 반민족 전범세력인 김일성 부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 잠수정 사건, 미사일·인공위성 사건 등에서 주변국보다
모호하고 미온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나서서 대응무기를 개발하고 세계
여론을 이끌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오히려 북한이 「최악의 상황에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묵인해주고 있다. 그것이 햇볕정책인지 모르지만, 그
정책 역시 한건주의에 매달린다면 북한 주민들은 햇볕은커녕 일제시대 정신대
이상의 강압적이고 더더욱 짙어진 그늘 속에서 오랫동안 신음하게 될 것이다.
햇볕정책에도 원칙은 있어야 한다. 정부 대 정부 간의 공식적인 지원 요청, 지원
내용이 올바르게 집행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투명성,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북한 인권상황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개선 약속이 선행돼야 한다.
북한 통일전선전술에 대응하는 아킬레스건은 인권문제다. 건국 5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제1차 과업은 5만여명에 달하는 미귀환 포로들과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안재홍(安在鴻)·백관수(白寬洙)·현상윤(玄相允)
선생 등 8만여 명의 애국지사, 선량한 민간인들의 송환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납치된 동진호 선원 등 4백여 우리 국민의 생사조차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문제삼아야 한다.
인권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반독재 인권투쟁을 해온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인권문제를 외면한다면 바로 그들이 설 자리가 무너질 것이다.
우리가 북한 주민의 인권을 최우선적으로 중시해야 하는 이유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어느 정권이든 인권을 억압하면 정권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잃어 결국은 그 정권이 무너진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이철승. 월간조선 -
* 방북 여대생 박성희 고백
한총련, 이젠 헛된 꿈에서 벗어나라
91년 여름 의 방북과 98년 여름의 귀국―. 그 사이에 놓인 8년간의
망명생활을 평가하는 것은 나에겐 아직도 어려운 숙제다.
그것은 그간 나의 경험들이 출국 당시의 생각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도 아니며, 이 시기를 평가하기 위해서 시간적인 여유가 좀더
필요하기 때문도 아니다. 스물셋에 느꼈던 8월의 무더움과 서른에
느끼는 8월의 무더움 사이에서 나는 스스로 숨가쁜 변화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결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숨결과 역사의 뜨거운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8년이라는 세월은 나에게 시간의
산술적 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간의 경험들을 단편적으로 엮어내는 것은 나에겐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나와 동료들이 진정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간 우리의 통일관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이며,
따라서 나의 망명시절은 우리의 통일관이 현 사회에 어떻게 부합돼
나가는가에 따라 평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세계적으로는 탈(脫)국경의 글로벌과
탈(脫)물질의 정보지식사회 도래가 당대의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반도 주변에서는 체제대립을 외양으로 한 4대 강국의
관계가 냉전종식과 함께 극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4대 강국들의
새로운 관계는, 그것이 아무리 냉전과 유사한 형태를 띤다
하더라도, 신(新)냉전이라고 불릴 만큼 고착된 형태가 아닌 예측불허의
상황을 조성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내부 상황 역시 근본적인 전환 국면에 서 있다. 북은 포스트
김일성 시대를 맞아 탈사회주의의 길로, 남은 6월항쟁과 IMF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본격화된 포스트 박정희시대 속에서
탈자본주의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북은 체제생존을 위해서 자본주의화의 길로 나서고 있으며, 남은
위기극복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복지와 사회적 연대, 그리고 대중들이
정치·경제에 적극적인 참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남과 북에서 전개되는 이런 변화는 당연히 남북관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이는 기존 통일운동의 전면적인
재검토와 방향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1. 근대적 패러다임으론 안 된다
탈냉전과 글로벌시대의 통일은 민족자주권을 확립하거나 근대적
민족국가를 완성한다는 기존 통일론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의 다양성이 혼재하고, 민족국가를 넘어
경제·사회의 다양한 활동이 현실화되는 시점에, 통일은 근대적
과제를 넘어서는 창조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90년대 들어 가시화된 이런 저런 변화를 보면서
러시아혁명 이후 지속돼왔던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냉전적 사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안목이 이렇게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의문시되고 있는 패러다임은 단지 사회주의라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근대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계급, 민족,
민족국가,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진보에 대한 신앙적 믿음
등 근대라는 시대의 담론들이 도전받고 있는 세기말의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통일문제 역시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과거 통일문제는 크게 계급과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인식됐다. 즉
체제통일은 계급문제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은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통일론이었다. 한반도에서 통일은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체제통일을 중심으로 논의돼왔다. 북진통일과
무력통일은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분단체제가 점차 공고화됨에
따라 체제통일은 현실성을 상실했고, 그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민족통일이었다. 이른바 연방제, 국가연합 등등은 체제 담론을
넘어 민족을 매개로 전개된 통일논의였다.
전형적인 냉전시대 통일론의 특징은, 그것이 계급에 기반한
것이든 민족에 기반한 것이든 분단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체제통일론은 분단체제를 어느 일방으로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민족통일론은 분단체제의 본질적 변화 없이
민족을 매개로 통일로 가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남의
분단체제를 북으로 확장하건, 북의 분단체제를 남으로 확장하건,
혹은 남북의 분단체제를 그대로 둔 채 통일을 이룩하건
분단체제의 문제점을 그대로 통일사회로 이전시키는 결함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2. 탈냉전에서 탈분단으로
나와 범민련 공동사무국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이러한
냉전시대의 통일방안이 안고 있던 문제들을 피부로 느꼈다.
우리는 냉전시대의 통일방안을 정태적이라 생각했으며, 이것은
탈냉전시대에 걸맞은 통일방안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냉전에 기반한 분단체제는 그 어떤 것이든 완성된 체제가 아니며,
통일사회의 모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통일운동은
어느 일방을 통일사회의 모델로 삼고 전개된 경향이 농후하다.
가령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통일운동은 사회주의가 운동의
지향점으로 자리잡았던 당시로는 북을 통일사회의 모델로
바라보았다.
연방제를 지향점으로 삼았던 통일운동 역시 사회주의라는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치·경제·사회의 전반에서
대외관계를 자주와 예속이라는 대립항 속에서 단순화시켜 폐쇄적
자립을 기본으로 했던 북한은 진보적이고, 대외관계 속에서
발전을 추구한 남한은 반동적 혹은 진보적이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기존 통일운동은 북의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아 이른바 북의 자주성을 전 한반도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의 전반적 붕괴와 탈냉전, 그리고 글로벌
현상이 가시화된 90년대에 80년대식 통일운동이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존 통일운동을 「탈냉전의 통일운동」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분단체제를 한반도 전체로 확산하는 것이건, 아니면
분단체제를 민족이라는 담론 속에서 용인하는 것이건, 기존
통일운동은 통일을 체제대립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통일은 체제대립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며, 이는 한쪽 체제가
다른 체제를 평정하거나 아니면 민족을 매개로 그대로 양립 혹은
공존하는 것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체제통일의
논리는 북진통일, 무력통일 그리고 흡수통일이라는 용어 속에
담겨 있다.
민족통일을 방향으로 삼는 남쪽의 통일운동은 연방제,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요 과제로 제기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실질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과제라기보다는
냉전의 해소, 즉 탈냉전을 지향하는 것이었을 뿐 탈분단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제외한다면 제반
과제들은 분단체제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일사회로
전향시키는 내용들을 담고 있지 못하다.
탈냉전시대에 탈냉전을 지향하는 통일운동은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 북한을 통일사회의 모델로 삼았던 기존 통일운동
방향이 잘못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러한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기존 통일운동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됐는데 과제는 유효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방향이 잘못됐다면 과제 또한 새롭게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냉전이 이미 막을 내린 이 시점의 통일운동은 탈냉전이 아니라
탈분단을 지향하는 통일운동이어야 하며, 분단체제의 문제점을
용인하는 정태적 통일이 아닌 분단체제를 통일사회로 전향시킬 수
있는 적극적이고 동태적인 통일이어야 한다.
3. 남북 분단체제의 근대적 유사성
분단 이후 남과 북은 이른바 세계적 차원의 계급전선이라는
냉전적 체제대립을 매개로 각각의 분단체제를 건설했다. 북쪽은
자신을 사회주의 동방초소로, 남쪽은 자신을 반공전선의
최전방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대립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자신의 분단체제 건설을 근대화, 즉 민족국가의 건설로
보았다. 남과 북은 분단체제를 전제로 한 각각의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고,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각각의 국가건설에
상당한 에너지로 작동했던 것이다.
민족주의는 남북 집권세력의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 하에서 근대화의 실질적인 이념적 기초였다. 남과 북
모두 국가의 정통성을 반일 민족해방에서 찾았고, 대외관계의
외양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은 국가의
형성·발전·유지의 기초였으며 근대화의 기반이었다. 「한국적
민족주의」 「민족 자주」는 「조국근대화」 「4개 현대화」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돼 있었다. 60년대와 70년대 「꼭두각시」와
「괴뢰」라는 상대에 대한 비난이 상대 체제의 후진성과 연결돼
있었음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전혀 다른 모델로 상정됐던 「김일성 모델」과 「박정희
모델」은 근대라는 커다란 담론에서 볼 때 이렇듯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국가, 강력한 카리스마, 권위주의적 통치,
유교적 전통과 민족주의적 근대화 이념의 결합 등 냉전시대 남과
북의 근대화는 휴전선 양쪽에서 동질적인 수단을 통해 진행됐다.
그러나 탈냉전과 글로벌이 시대의 담론으로 부각된 90년대,
양상은 다르지만 한반도의 남과 북에 구축된 분단체제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냉전에 기반한
근대화 모델로서의 분단체제가 탈냉전과 민족국가의 약화, 그리고
포스트 산업화시대에 도전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반쪽의 근대화, 불완전한 분단체제는 역설적으로 냉전이 보장했던
「둥지 속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의 장막」이
걷히고 둥지가 무너지자 냉전에 기반했던 분단체제는 체제간의
평화뿐만 아니라 체제내 평화가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됐다.
탈냉전과 글로벌 현상은 남과 북의 분단체제에 위기가 됐지만, 그
위기는 남쪽의 통일운동을 주도해왔던 「NL주류」의 인식과는
정반대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90년대
식량위기로 결국 부인할 수 없이 노출된 총체적인 체제모순
속에서 「폐쇄적 예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립성과
자력갱생을 강조했던 북의 경제는 일반적인 경제의 자립 정도와
무관하게 자본, 기술, 에너지 등 핵심분야의 예속성과 비자립성을
극명하게 노정시켰다. 반대로 예속적이라고 생각됐던 남한의
체제는 IMF위기로 인한 세계시장과의 긴밀한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그간 얼마나 세계경제로부터 독립적인
자립체제를 구축해왔는가를 보여주었다.
위기에 대한 분단체제의 대응방식 또한 기존 통일운동권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사실들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 북은
폐쇄적인 예속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분단체제하에서 구축했던
강성국가, 권위주의적 통치, 사회의 군사화와 군사통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반면에 남은
세계경제와 새로운 연계를 수립하고 국가·경제·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편성, 민주화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극복 노력은 남과 북의 집권 주체들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에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북은 현재 자신을
「김일성 조선」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단군조선과 현체제를 동격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김일성 주도하에 건설됐던 분단체제를 영구화·공고화하려는
것이다. 「붉은기 정신」 「유훈계승」이라는 북의 구호는 북이
어떠한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남은 「제2의 건국」을 위기극복의 캐치프레이즈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 분단체제를 새롭게 편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4. 민주주의와 동태적 통일
나는 계급과 민족이라는 기존 통일 담론이 거센 도전을 받고 있던
90년대에 통일운동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나와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에서 같이 활동했던 동료·후배들은 이런 격변의
시대에 남쪽의 민간 통일운동 세력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북과
해외의 통일운동세력과 하나의 장에서 교류하며 정기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해외라는 공간은 이러한 조직적·정기적 활동과 교류를 가능케 하는
유리한 입지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가 얻은 경험과 교훈은
일반인들이 우리에 대해서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갔다.
동서독의 통일이 보여주듯이 분단 후유증은 최소한의
민주주의라도 보장된 사회에서 나름대로 해결·치유해갈 수 있다.
독일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회 내부에 소수를 존중할
준비가 돼 있었고, 다양한 가치와 견해가 토론을 통해서 공유될 수
있는 분위기가 성립돼 있었기 때문에 분단 후유증을 나름대로
최소화해 나아가고 있다. 즉 독일은 동서독 사회에서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는 밑으로부터의 교류와 연대를 통해서 점차
통일체로서 제 모양을 갖춰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체제통합으로 파생된 분단의 문제점을 사회
내부에서 최소화시킬 수 있는 기본 전제다. 민주화를 상정하지
않은 통일이란 한반도에서 격심한 혼란과 격렬한 지역갈등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남북의 지역적 분단을 자칫 사회의 상하
분단으로 전이시켜 유혈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즉 동태적·역동적 통일론의 핵심은 민주화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북의 민주화는 통일에 관건이다. 물론 이 말은 남쪽에서
민주화가 완성됐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 김대중
정부는 6월 민주항쟁의 계승선 위에 서 있으며, 87년 이후 남쪽은
민주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아직 박정희 모델의
잔재가 사회 도처에 남아 있지만, 적어도 근대사회가 추구했던
모든 개체의 평균적 민주주의, 대량생산의 성과 속에서 이뤄진
대중민주주의는 남쪽에서 많은 진전을 이룩했다.
정부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정부가 계획한 경제개발의 성과
여부에 근대화가 달려 있다고 이야기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정치는 사회의 참여를 기대하며, 경제는 사회와 정치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하는 시대가 됐다. 민원이 정치의 준거가 되고, 주민의
적극적인 정치사회 활동 참여가 성공적인 지역사회를 보장하는
시대가 남쪽에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에서 향후 민주주의의
과제는 근대의 평균적인 민주주의, 대중민주주의를
참여형·연대형 그리고 좀더 높은 차원의 투명한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5. 통일의 관건은 북의 민주화
그러나 북에서는 민주주의가 아직 요원하다. 민간운동으로 통일의
물꼬를 트려 했던 우리의 시도는 판에 박힌 북의 관(官) 앞에서
번번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7년간 우리가 겪었던 경험은
북에는 민간운동이 없다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당의 방침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개인과 사회의 자주성은 수령과 국가, 당 앞에서
철저한 피동성으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북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북은 단결된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하려 했다. 그러나
수령·당·대중이 일심단결돼 있다는 북의 이야기는, 단결의
구심이라는 수령이 모든 인민들의 자주성의 발현자이자
체현자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속에서 기만적인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북은 단결된 사회라기보다는 획일화된 사회였으며,
인민 대중의 자주성은 지도자에게 박탈당하고 있었다.
북이 견지한 「보존의 논리」는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의
운동논리와 번번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의 완전
승리는 전국적 차원의 자주권 회복, 즉 통일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기존 사회주의 건설 논리는 이제 분단체제 속에서도
「우리식 사회주의」로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논리로 변질됐다.
북의 집권세력이 의도한 것은 결국 자율적 분단체제의 구축이며,
현체제의 수호였다. 전국적 차원에서 자주권을 회복하는 것, 즉
자신의 폐쇄적 체제를 전국적으로 확장하는 팽창논리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으며, 90년대 들어 체제수호의 보수논리로
변질됐다.
그러나 북의 집권세력이 분단을 지향하며, 체제수호를 최선의
가치로 내세우는 세력이라는 사실은 현재 북의 현실에서 오히려
부차적일 수도 있다. 주목해야 할 문제는 북의 집권세력은
인류사의 견지에서 볼 때 전혀 진보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정권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의 해방을 가로막으며, 수백만 주민들을 굶주림과
기아로 몰아넣으면서도 체제유지와 집권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북의 현 집권세력을 보수적인 체제수호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정권이 단지 무능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무능력은 능력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므로 꼭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북의 현 집권세력은 무능할 뿐만 아니라 체제수호에
모든 권력수단을 집중하고 있는 지극히 부정적인 세력이다.
건설사업의 80% 이상을 혁명사적지 건설에 집중하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미사일을 개발하고, 수십만 달러를 들여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의 언론에 김정일을 선전하면서도 굶어죽는 수백만의
주민들을 방기하는 것이 현재 북의 집권세력이다. 자신의
통치기반을 「혁명의 주인인 인민대중」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의
물리적 기반강화에서 찾는 정권은 더 이상 진보적일 수 없다.
자주성과 진리를 수령이 독점하는 체제에서 대중의 자발성과
참여를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억압의 대상일 뿐 발전시킬 대상이
아니다. 초기 서유럽의 동구권 연구자들이 동구 사회주의
연구틀로 채택했던 전체주의라는 개념은 지금 거의 채용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북의 사회를 바라볼 때 전체주의론과 북 사이에
많은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 동구권은 물리적 통제에서는 스탈린 체제의 공포정치와 같은
극단적인 양상을 띠기도 했지만 사상적 통제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그러나 북의 현 체제는 주민들을 물리적인 측면에서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까지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와 상당히 흡사하다. 북은 사상교육을 전면에 틀어쥐지
못했던 것이 동구권 붕괴의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보고
사회주의적 사상통제를 강화했다.
「NL 주류」들은 흔히 북에 대한 이런 비판에 대해 북이 여태까지
붕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북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하며, 북은
아직도 굳건하다고 답변한다. 그러나 문제는 왜 북이 여태까지
붕괴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북은 왜 여태까지 개혁을 못하고
있는가이다. 물리적 통제와 사상적 통제를 통한 권위주의적
통치체제 확립, 대립적 분단체제의 확립을 통한 내적
체제안정이야말로 북이 개방을 하면서도 개혁할 수 없는 원인이자
개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근거다.
국방위원장이 전권을 틀어쥐고 있어 군사화된 사회, 수령의 지휘
아래 탄력성과 능동성을 상실한 동원체제가 현재의 북이다. 나와
동료들은 북의 현체제하에서 전개되는 물리적 수준을 넘어선
사회적·의식적 차원의 군사화를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었다. 사회
전반은 물론 의식조차 군사화하는 것은 자칫 체제의 호전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탈냉전시대 분단체제하에서
한쪽 체제의 군사화는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넘어서는 위험을
한반도에서 연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와 동료들은 북한의 민주화가 동태적 통일론의
관건이라고 판단하게 됐다. 이러한 분단체제를 전 국토로
확장하거나,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위에서 통일하는 것이야말로
자칫 통일을 유혈적 비극으로 몰고갈 수 있다는 결론을 우리는
내리게 됐다.
6. 대안 없는 북의 집권세력
북이 통일의 모델이나 대안이 될 수 없음은 이제 명백하다.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북의 현 집권세력에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는
대안이나 에너지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의 자주, 경제의
자립, 국방의 자위, 사상의 주체라는 북의 총노선은 90년대 들어
총체적인 파국의 위기에 직면했다. 정치의 자주는 주권의
자주성이라는 본원적 의미보다는 집권세력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그 어떤 외적·내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는 수령체제로
귀결됐다. 경제의 자립은 일반적인 자립도와는 무관하게 핵심
분야에서 외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허약성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90% 이상의 자립경제라는 양적
수치보다는 결국 10%의 대외의존이 북한경제의 질을 결정했던
것이다.
국방의 자위는 경제와 인민의 희생 위에서 체제수호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주권의 물리적 방어와는 무관했다. 사상의 주체는
철학보다는 통치를 위한 것이었으며, 주체사상이 김일성주의로
변질된 것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총체적으로 북의 집권세력이 내놓았던 노선은 자신들에 대한 그
어떠한 도전도 용납할 수 없는 폐쇄집적체제의 구축으로 귀결됐다.
때문에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는 물론 개방과 투명성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글라스노트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북이 내걸었던 현대화 노선과 경제전략은 전형적인 산업화
전략으로, 탈국경·탈물질화라는 세계경제의 발전방향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는 것이다. 경제건설의 방향은 여전히
노동집약적 산업의 발전, 자연의 파괴와 희생으로 치러지는
경제발전, 질의 경제보다는 규모의 경제 추구, 소프트웨어적인
발전보다는 하드웨어적인 발전 등등 산업시대의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른바 「혁명적 경제전략」이라는
경공업·무역·농업 제일주의는 체제의 경직성과 폐쇄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는 이 노선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경제특구처럼 새로운
경제실험과 모범의 확산이라는 개방적 모델과 달리 나진·선봉
지구는 북의 표현 그대로 「달러벌이」를 위한, 고립된
경제지역이다. 중국의 경제특구는 외자 비율이 전체투자의 25%를
넘는 곳이 없는 데 반해 북은 전액 외자로 나진·선봉 지구를
개발하려 하고 있다.
북의 노선은 80년 전의 러시아혁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낡은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변혁에 대한 이들의 노선 또한
새로운 사회의 변화와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반영하지 못한
낡은 것일 수밖에 없다. 전위당이 주도하고, 통일전선이
뒷받침하는 사회변혁,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기초가 된다는 발상, 대중의 창발성과 자주성을 억압하는 지령식
계획경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기계적 관료주의 구축 등
북이 내걸었던 혁명노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를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새 시대를 열기에는 너무나 낡은 노선이다. 북의
집권세력은 새로운 비전도, 그리고 에너지도 없는 보수적인
세력에 불과하다.
후대의 사가들은 현상황에 대해서 진보적인 사회주의와 반동적인
자본주의가 한반도에서 대립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체제는 남이 더 전향적인 것으로, 그리고 북은 시대의 흐름에
저항했던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더 크다.
7. 낡은 시대의 낡은 대안
그러나 한총련을 비롯한 남쪽의 일부 운동세력은 지금도 북의
체제를 변혁의 대안으로 삼아 그들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이며, 남쪽 사회의 변혁은 전위당의 지도와
통일전선에 기초한 반미민족해방투쟁을 통해 실현될 수 있고,
통일은 북의 주도하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식민지 시절에는 본국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진보냐 아니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었다.
즉 반일은 진보이고 친일은 진보가 아니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간 현상황에 반미는 진보이고,
친미는 반동적이라는 입장은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미국에
대한 견해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면, 지금
지구상에서 반미 국가는 거의 없다. 북한도 이런 시각에서 보면
친미를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나라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반미나 친미는 애국과 매국을 가르는 기준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한반도나 세계 정세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정세 인식일 뿐이다.
남쪽이 미국의 식민지라면 일본·독일처럼 오히려 남쪽보다 미국
정책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는 나라 또한 미국의 식민지로 불려야
한다. 남쪽을 식민지로 규정하고 민족해방을 사회변혁의 목표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자주·민주·통일을 3대 목표로 삼고 있는 북은 실제로는 모든
것을 자주에 맞추고 있다. 『자주 없이 민주 없다, 자주 없이 통일
없다』는 이들의 구호는 자주라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핵심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주라는 과제 자체가 시대착오라면,
나머지 과제들도 본질적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전위당과 통일전선이 변혁의 핵심과 기반이라는 이들의 시각 또한
낡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이 고안한 「새로운 유형의
조직」이라는 전위정당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전위정당은 결국 계급을
대표하는 엘리트들의 결사체일 뿐 전체 대중을 대변하지
못했으며, 지금처럼 이해와 요구가 다양한 시대에 전위정당이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은 뒤떨어진 발상일 뿐이다.
확대된 계급동맹이라 할 통일전선도 이미 낡은 개념이 되고 있다.
전위당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이 주축이 돼 광범위한 계급 계층을
하나의 전선에 세운다는 것이 이른바 통일전선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느끼듯 현 사회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전선들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것은 이미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다.
노농동맹이 통일전선의 주력군이라는 발상 또한 초기 산업화시대
계급 인식의 소산에 불과할 뿐 현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진보적이고, 인텔리는 기회주의적이라는 신념은
역사적으로나 혁명사적으로나 잘못이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가령 우리는 지금 독일 신나치 세력의 주요 기반이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자임을 목격하고 있으며, 소위 사회주의 혁명과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을 주도해온 세력이 혁명적 엘리트임을 목격했다.
통일된 전선 혹은 전선의 통일이라는 발상은 덜 발전되고 단순한
사회구조에서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현재의 남쪽 사회에서는
기대할 수도, 기대해서도 안 되는 형태다.
8. 한총련, 해체하라
한총련 지도부는 이러한 낡은 노선에 아직도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총련의 문제는 단지 이러한 노선의 낙후성과 오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적 조직구조, 음모적 사업방식, 다른
입장에 대한 패권적·종파적 태도 등 조직구조와 형태, 그리고
이른바 「사업작풍」의 문제를 넘어 한총련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조직 노선에 기초하고 있다.
전대협의 학생회 운동을 계승한 한총련은 학생운동의 모든
다양성을 학생회로, 즉 과 학생회 - 단대 학생회 - 총학생회 -
총학생회연합으로 단순화·획일화하고 있다. 심지어
동아리·동호회 등도 학생회로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발상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국문과 학생이 국문과에서만 자기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거나, 과 학생회에서만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학생회 운동은 학생운동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모든 학생을 학생회로 수렴하고,
학생회를 수직적으로 조합한다고 해서 모든 학생들을 대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학생회 외에도 다양한 조직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학생조직들 중에는 학내 활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외 활동을
하는 조직도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한총련이 생각하는 방식인
수직적 조합을 통해 결합될 수 없는 독자적인 활동방식을 이미
터득하고 있으며, 수직적 조합으로의 결합에 대해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한총련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여러 가지 배경
위에서다. 우리는 94년부터 한총련의 개혁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총련은 지금까지도 이러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조직으로부터 배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
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한총련의 최고 구호는 조직 사수다.
대중조직이 3년 동안이나 조직사수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면,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말이나 같다. 이제 한총련은 그
존재 자체로 학생운동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총련
주도세력이 진정 학생운동의 발전을 원한다면, 자신을
해체함으로써 다양한 논의와 견해가 토론될 수 있는 넓은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난 7년간의 경험과 교훈은 나를 새로운 통일론으로 이끌어왔다.
지금까지 밝힌 나와 동료들의 통일론은 우리들이 어제 오늘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작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현재에 사는 우리는 과거에
살아왔고, 또한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는
현재,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 현재는 독선일 뿐이다. 과거, 미래와
분리할 수 있는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7년의 세월 속에서
내가 바라본 북의 집권세력은 과거에 대해 개방적이지 못했으며,
미래에 대해 전향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고수와 옹호」가 그들의 레퍼토리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현재를 고수하고 옹호하는 것이 최고
가치였으며 지상 목표였다. 항상 최고의 현재 속에서 과거는
고사했고, 미래는 질식하고 있다. 그들은 인민과 외부세력에만
모기장을 치고 빗장을 건 것이 아니라 역사와 미래에 대해서도
모기장을 치고 빗장을 걸어두고 있다.
수백만 주민이 굶어죽어도 현재를 고수하고 옹호하는 것만이
관심사인 그런 체제를 그대로 두고 통일을 논하는 것은 기만일
뿐이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분단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북의 민주화를 통일의 핵심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월간동아 -
* 이산가족들의 애달픔
본국의 이산가족 관련 단체들이 이달말 민간협의회를 구성해 이산가족
교류를 적극 적으로 추진할 계획(본지 4일자 참조)을 세 우고 있는데도
남가주 한인사회는 오히려 관련 단체들간의 입장 차이와 준비부족으로
상봉사업이 계속 답보상태에 빠져 있어 이 산가족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본국의 관계기관에 따르면 대한적십자사 의 주도로 20여개
민간단체들이 참여하는 ‘ 이산가족 교류 민간협의회’는 정부차원의
이산가족 교류와는 별도로 이산가족 문제해 결을 위한 민간활동을
촉진할 방침이라는 것.
이에 반해 ‘한인이산가족 정보센터’, ‘우 리민족 서로돕기운동
미주본부’(KASM), ‘재 미남가주 이북도민회연합회’ 등 이산가족
상봉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남가주지역 단체 들은 통합기구 구성은
고사하고 개별적인 상봉작업 조차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남·북한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민간차원의 역량을 결집시킬
목적으로 구성된 제 8기 ‘LA평통’도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이북도민회연합회와 창구단일화 원칙에 합의하고 이산가족
찾기 및 상봉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했던 KASM의 한 관계자 는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6단계 방안을 마련하고 구체적인 실시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북도민회가 사업의 이관을 강 력히 요구해 더
이상 상봉사업에 관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KASM에 이산가족 상봉 의사를 접수시켰던
1백40여명의 실향민들이 상봉문제를 조속히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 고
있으나 이북도민회의 반발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난감해 했다.
이산가족 상봉사업은 실향민 당사자들이 주축이 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북도민회연합회는 본국 정부차원 의 이산가족
문제가 통일부에서 이북오도민 위원회로 이관된 만큼 모든 것은 본국
정부와 연계해 남북관계의 진척에 따라 처리하 겠다는 신중한 입장만을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이산가족 정보망 구축을 위해 인터넷 웹사이트를 개설하겠다고
발표, 남 가주지역 이산가족 상봉사업에 물꼬를 텄던 ‘한인이산가족
정보센터’의 경우에는 이산 가족들의 신원이 2만명 정도 확보될 경우,
미 정부차원의 상봉추진을 촉구한다는 방침 이어서 실제적인 이산가족
교류는 아직 요원한 실정이다.
한편 많은 이산가족들은 “설사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차원에서의 입장 변화가 없더라도 민간차원의 이산가족 교류를
추진해 나가다 보면 궁극적인 해결의 실마 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냐”며 “이 차원에서 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 상봉은 더욱 앞 장서
나갈 필요가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 미국 뭗앙. 98/4 -
* 북한은 독일 극우파의 국가모델
- 북한 독재정권이 독일 극우파들에게 이상적인 국가모델이 되고
있다고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테른이 8일 보도했다.
슈테른은 독일의 대표적 극우정당인 독일민족민주당(NPD) 대표단이
최근 베를린주재 북한 이익대표부를 방문했으며 조만간 평양도
방문할 계획이라고 전하고
"북한은 한 지도자에게 모든 개인들이 무조건 복종하는 권위주의
국가의 이상형을 극우파에게 제시하고 있다"
고 말했다.
- 위르겐 쇤 NPD 부당수는 이익대표부 방문에서 "북한은 美 제국주의에
대해 정당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이 주간지는 전했다.
또 NPD와 북한간 접촉을 주선하고 있는 미하엘 코트씨는
"金正日의 저서들은 독일에서 자본주의의 어둠속을 헤쳐가는
우리들에게 앞길을 밝혀주고 있다"
고 말했다.
- 지난 95년까지 극좌 독일공산당(KPD) 부당수를 지내기도 한 코트씨는
수개월전 NPD에 '정치적으로 망명'했으며 지난해 10월에는 金正日의
노동당 총비서 취임이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줬다"고 말했다고
슈테른은 덧붙였다. -한국일보.98/10/9 -
* 남북한 언어 이질화 심화
- 남북한 언어 이질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8일 귀순자들및 국어학계에 따르면 외래어나 전문용어는 물론 의.식.주등
일상생활어에 이르기까지 남북한간의 용어가 너무나 달라 이질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 음식과 관련된 말 중 우리가 흔히 쓰는 「도넛」은 북한에서는 「가락지빵」으로
불리는 것을 비롯, 쥬스-과일단물,도시락-곽밥,인삼주-삼로주, 카스테라-설기과자,
계란말이-색쌈, 라면-꼬부랑국수, 젤리-단묵, 아이스크림-얼음보숭이 등 서로
상통할수 없을 정도로 표현의 차이가 심하다.
- 또 가족관계 용어도 장인-가시아버지, 처가-가시집,
계모-후어머니, 올케-오레미, 고종사촌-고모사촌 등으로 생경하기
이를데 없다.
의학용어도 협심증은 `가슴조임증'으로, 체증-배덧, 탈모증-털빠짐증,
해독제 - 독풀이약, 한약 - 동약, 빈사상태 - 얼죽음, 배탈-배증,
꾀병 - 건병 등으로 다르다.
- 생활용품의 경우 개수대(씽크대)-가시대, 브래지어-가슴띠,
외출복-갈음옷, 원피스-나리옷, 찬합-달개동이, 가발-덧머리,
필터담배-려과담배, 볼펜-원주필, 전기밥솥-전기밥가마, 믹서-전기분쇄기,
운동화-헝겊신 등으로 낯설다.
- 이밖에 횡단보도-건늠길, 꽁생원-골서방,민속놀이-민간오락, 눈사태-누고패,
징검다리-다리돌, 각선미-다리매, 애연가-담배질군, 파마-볶음머리,
연애결혼-맞혼인,맞벌이부부-직장세대, 헬리콥터 -직승기, 초등학교-인민학교 등 서로
다르다.
- 북한 전문가인 李恒九씨(65)는 『북한에서는 1월15일을 한글창제 반포일로
정해행사를 치르고 있다』면서 『북한은 「주체사상」에 입각, 한글전용에다
혁명의식 고취를 위해 전투적인 용어가 많다』고 말했다.
李씨는 또
『한국에서는 표음문자가 기본이나 북한에서는 발음나는 대로 쓰고 있다.
북한은 한국과는 달리 언어생활을 혁명과 건설의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 덧붙였다.
- 연세대 南基心교수(국어국문학)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 현상으로 통일 이후 사전편찬, 컴퓨터 자모순서
등의 재정비 등이 필요할 것이며 언어 이질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하루 속히 남북한간 국어통일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고 지적했다. - 경향 98/10/08 -
* 북, 보리대신 밀기울로 이유식 제조
- 평양어린이영양식료품연구소는 최근 보리 대신에 밀기울로 새로운
형태의 이유식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노동신문 최근호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평양어린이영양식료품연구소(소장 최선규)가
"종전에 애기젖가루(이유식)을 만들때 쓰는 흰쌀, 콩, 기름, 보리 등
원료들 중에서 100여㎏의 보리와 9㎏의 중조 대신 밀기울 8㎏을
쓰면서도 유해성분이 없고 소화흡수율이 1.5배 높은 애기젖가루를
만들었다. 된장을 만들때 이용하는 3가지의 종류의 균으로 기초효소제를
만들고 이것으로 콩과 알곡을 처리했다"
고 공정을 설명했다.
- 특히 전분분해효소, 단백분해효소, 젖산균 등으로 만든
기초효소제를 사용할 경우 가정에서도 쉽게 애기젖가루를 만들수
있다면서
"새로운 애기젖가루에는 콩속에 있는 소화를 저해하는
물질, 음식물속의 미량원소를 배설시키는 성분이 없으며 그리고
갑상선비대인자, 소화흡수를 낮추는 인자등이 없다"
고 이 신문은 밝혔다. - 중앙일보.98/10/13 -
* 통일과 북한선교
- 12일 오전 앰배서더호텔에서는 북한선교를 위해 10여개 신학대학의
총장과 교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다.한국 신학계 거봉들의
공통된 목소리는 더이상 `분열'과 `경쟁'을 일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북한선교는 강도 만난 우리의 이웃을 구출해내는 것이다.이제
한국교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돼야 한다”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지덕 목사는 북한선교를 더이상 미룰 수
없다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현재 북한은 한국을 연구하고 있는
석·박사만도 3천여명에 이르고 있으나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 한기총 통일선교정책위원회가 주최한 이날 모임에 참석한 교수들은
서울신대 한영태 총장,침신대 이정희 총장,한영신학대 한영철
총장,아세아연합신학대 임택권 총장,대한기독교대 최윤권 총장과 각
신학대학의 교수들이었다.`북한선교'를 위해 10여개 신학대학 교수들이
자리를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참석자들은 회의에 앞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교회의 연합은 남북통일보다 더 어렵다….현재 북한에는
5백여개의 가정교회가 있다...
북한의 현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떻게 북한선교를 말할 수 있는가..
현재 북한에는 까만 성경책이 들어가고 있다”
-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을 만한 정보들이 교환됐다.그리고 국내
신학대학들이 `북한선교학과'를 개설해야 할 때가 왔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실제로 아세아연합신학대는 북한선교학과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날 공개됐다.
한 교수는
“통일됐을 때 북한사람들이 `한국교회가 북한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통일이후를 위해서라도 `북한선교학'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한 총장은
“북한에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지하교회 신자들이 있다”며
한국교회가 이런 현실을 알아야 한다”
고 말했다.어떤 교수는
“북한선교학과 졸업생들의 진로와 현장실습 등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 이날 모임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성경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열
처녀'와 흡사한 상황을 맞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기름'과 `등'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석하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는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성경의 비유가 떠올랐다.예수님은
준비없는 다섯 처녀를 향해 준엄하게 꾸짖는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남북통일의 그날은 성경에 인용된 것처럼 `도적같이' 다가올
것이다.한국교회는 지금 `기름'과 `등'을 준비해야 한다.`준비없는
그날'은 혼란과 분열만 가중시킬 뿐이다.이제 신학대학이 먼저
북한선교학과를 개설할 때가 왔다. - 국민일보.98/10/12 -
* 한국전 발발 책임논쟁
- 한국전쟁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두 지식인의 정치적·사상적 행로를
엇갈리는 방향으로 교차시켜 놓은 듯싶다. 전후 좌익 지식인의 총아였던
메를로퐁티는 인민군의 남침을 보고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고백하게
된다. 1947년에 써서 스탈린의 부하린 숙청을 위한 날조재판까지 옹호했던
메를로퐁티는 공산주의 체제는 이웃나라를 공격한 일이 없다는 근거 위에서
스탈린의 소비에트 체제를 옹호하는‘護敎論(호교론)’을 펼수가 있었다.
- 그러나 이제 공산권의 한 나라가 분명히 소련의 동의를 얻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은 메를로퐁티 앞에 이제는 보나파르트적인
전제정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반면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전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르주아지에 대한 ‘영원한 증오’를 다짐하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사태진전은 오직 미국만이 인류를 3차대전으로 끌어들이려 위협하고 있다고
사르트르를 확신케 한 것이다.
도대체 6.25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물론 사르트르도 눈가리고 아웅하는 투의 평양이나 모스크바의 ‘남한군
북침설’을 공산주의 소아병자들처럼 호락호락 믿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았고 불확실한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6.25의 ‘남침전쟁’으로 사르트르도 막다른 골목에 빠져든
셈이었다. 이 불확실성의 ‘출구없는 방’에서 사르트르와 그에 동조하는
‘아직도 親共(친공)’지식인들을 구출해 준 것이 두 저널리스트였다.
벨기에의 언론인 젤레피(E N Dzelepy)와 미국의 언론인 스톤(I F Stone).
- 한국전쟁이 일어난 첫 해인 1950년의 늦가을부터 사르트르가 발행하고 있던
월간 ‘현대(Les Temps Modernes)’지를 뒤져보면 메를로퐁티는
절필·침묵하고 있고 사르트르는 정치엔 함구한 채 문화평전 ‘장 주네’를
연재하고 있을 때 이 잡지에 시사문제를 다룬 정치평론은 젤레피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지의 10월호와 11월호에 ‘미국정치의 드라마’를
연재하고 연말의 12월호에는 ‘맥아더와 한국사태’라는 장장 50쪽에
이르는 권두논문을 기고하고 있었다.
- 한편 스톤도 이 무렵에 유럽에 건너와 있었다. 그는 젤레피나 사르트르가
살고 있던 파리에서 한국전쟁을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여, 뒤에 가서
‘한국전쟁 비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라는 문제의 책
속에 그가 펼쳐낸 견해들을 프랑스의 주간지
‘옵세르바퇴르(L'Observateur)’지에 발표하고 있었다.
- 사르트르는 젤레피와 스톤의 글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6.25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옳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의 견해란 무엇인가.
“나는 이 불행한 역사의 戰犯(전범)이 남쪽의 봉건군주와 미국의
제국주의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북쪽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는 사실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사르트르는 적고 있다.
- 일종의 兩非論(양비론)이라고 할 이 기묘한 변증법은 그 근거를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과 하나의 주관적인 ‘추론’에 두고 있다. 그가 믿어
의심치 않는 객관적인 근거는 6.25가 북침이 아니라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그에 못지 않게 믿어 의심치 않는 주관적인 확신은
이른바 함정설.북쪽이 속아넘어가 먼저 공격하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도록
미국의 군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추론이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준 것이 젤레피와 특히 스톤의 글이었다. 스톤은 문제의
‘한국전쟁 비사’에서 이 함정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용공주의자들은 북한이 침략을 준비하고 계획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용인하려 하지 않고, 반공주의자들은 남한이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1차 대전 발발 당시) 불쌍한 작은 나라 세르비아나
벨기에의 역할을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 용공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 사이의 말다툼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침략이 정치적으로는 침묵에 의해서
고무되고, 군사적으로는 방위진 형성에 의해서 유인되고,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가 이루어지자 경계선을 넘는 소규모의 출격에 의해서 개시되었다는
假說(가설)이다….”
- 정치적으로 침묵했다는 것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격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는 여러 정보, 특히 6.25를 앞두고 수주일 동안 38선 이북에서
계속적인 병력집결이 있다는 미국과 한국측의 여러 첩보 보고에 대해서 미국
여론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어떤 성명도 없었으며, 한국 정부도 이 위험한
사태와 국군의 장비부족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톤은 들고
있다.
- 군사적으론 방위진 형성으로 침략을 유인했다는 추론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방위진은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연결고리요, 한국은 극동에
있어서 미국 방위에 절대불가결한 일부가 아니라고 한 50년 1월12일 애치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발표와 텍사스 출신의 코널리 의원 등의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요컨대 미국은 담 밖으로 뻗은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잘 익은 홍시를 손만
뻗으면 금방 따먹을 수 있을 것처럼, 북한이 선제공격만 하면 쉽게 남한을
집어삼킬 수 있을 것처럼 침묵의 위장을 하고 방위선의 함정을 파서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 한국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서 쓴 스톤의 ‘비사’는 자세히
읽어 보면, 이 책을 불온서적처럼 배격하는 옹고집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온건하고 객관적이며, 거꾸로 이 책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용공적 수정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냉엄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씌어진 책이다.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스톤은 한국전쟁의 진상을 다 알고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答(답)을 알지
못한다”고 그는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다만 그는 한국전 발발에 관한
한국·미국정부의 공식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북한이나 소련 정부의 공식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스톤은 “전쟁의 기원에 관한 북한의 공식보고서를 주의깊에
조사해 보았으나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내용이 빈약한 것”이라고 지적도
하고 있다.
- 전쟁이 일어나면 그 첫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란 말이 있다. 스톤도
그렇기에 6.25전쟁의 발발에 관해서는 적대하는 양쪽의 주장을 다같이
신뢰하진 않았던 것이다.
스톤의 업적은 한국전쟁의 ‘역사의 진상’을 밝힌데 있다기보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선전의 진상’을 밝힌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천명하고 있는 것처럼 ‘비사’는 역사의 연구가 아니라
‘전쟁선전의 연구’이며 ‘전시중에 어떻게 신문이나 공식문서를 읽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연구’이다.
- 스톤의 ‘비사’가 이처럼 한국전쟁의 와중에 쓴 한 언론인의 저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사실이 이 저서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 스톤의 ‘비사’는 6.25전쟁의 발발로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린
사르트르와 같은 서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다시 미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소련의 사회주의 진영에 계속 동조할 수 있는 정신적 발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의 휴전 이후에도 미국·일본 그리고 서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두고두고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이른바 국제정치학에서 수정주의 학파라 일컫는 학자들도 한국전쟁에 관한
그들의 저서를 보면 역시 스톤의 ‘비사’의 그늘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전후 냉전의 기원에 관한 전통주의 학파의 이론에
도전해서 수정주의 이론을 내세운 개척자라 일컫고 있는 플레밍의
저서(Denna Frank Fleming:The Cold War and It's Origin 1917∼1960)도
한국전 발발에 관한 논의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스톤의 ‘비사’를 인용하며
그에 기대고 있다.
- 그러나 스톤의 ‘남침함정설’ 또는 ‘남침유도설’은 서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誤讀(오독)과는 달리, 궁극적으로 한국군의 ‘북침설’ 주장하는
북한측의 주장에 전혀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스톤의 명제는
‘함정’에 빠졌든 ‘유도’당했든 일단 6.25는 인민군의 선제 또는
예방(preventive)공격을 위한 남침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스톤의 ‘함정설’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도 북한의 남침이
전제되어야 논리가 맞는다. 왜냐하면 스톤이 말하는 ‘함정’은 38선 이북이
아니라 이남에 있었고, 거기에 빠진 것은 남한군이 아니라 북한의
인민군이었기 때문이다.
- 설혹 ‘함정설’이나 ‘유도설’의 가설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하자. 그것은
한치의 실수도 없는 미국의 첩보전략·정보공작의 수행능력을 시위해 주는
것이 못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공작이나 전략의 수를 읽지 못하고
함정에 빠져버린 북한의 어이없는 우둔함을 입증해 주게 된다는 것이 논리의
필연적 귀결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오류도 범한 일이 없는 것으로
추앙되는 ‘위대한 영도자’의 위신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이러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정주의 학파의 새로운 논의가, “누가
한국전을 시작했나”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커밍스,
할리데이 등의 주장이다.
- 이러한 주장은 6.25직전까지 소비에트 진영이 서방세계를 겨냥해서
대대적으로 전개한 평화공세를 완전히 없었던 것으로 덮어버리고
코민포름의 ‘두 진영론’도 무시해 버리면서, 실인즉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서방 선전용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내부의 조교적 해석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立論(입론)이다.
- 1950년대 말까지 전세계의 공산당에 있어 이데올로기의 교전으로 간주된
‘소련 공산당사’를 보면, 침략전쟁과 방위전쟁의 분류는
‘잘못된’것이며 의미있는 것은 오직 ‘正義(정의)의 전쟁’과
‘不義(불의)의 전쟁’의 구별이라 밝혀놓고 있다. 누가 먼저 공격했느냐
하는 물음은 궁극적으로 불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소련 공산당사’는
① 압박계급에 대한 피압박계급의, 노예상인에 대한 노예들의, 지주에 대한
농노들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임금노동자들의 전쟁
② 민족해방전쟁
③ 노예화의 위협에 반대하는 여러 민족의 전쟁
④ 제국주의 제국에 대하여 사회주의의 수호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전쟁
등을 ‘정의의 전쟁’이라 정의해 놓고
“이러한 정의의 전쟁은 斷罪(단죄)되어서는 아니된다”
고 못박아 놓고 있다.
서유럽 지식인을 향한 평화공세, 남한 인민을 향한 평화통일공세의 절정에서
남침하여 전면전쟁을 도발한 김일성이 6월26일의 방송에서 이 전쟁을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고 구가했던 까닭을 알
만하다.
“누가 한국전을 시작했나”고 묻는 것이 잘못된 질문이라 함은 바로 전쟁에
관한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때만 할 수 있는 주장이다.
- 문화.98/12/11 <최정호·연세대교수>
* 북한(北韓)어린이 참상
- 북한 어린이들이 식량난과 失政(실정) 때문에 빠져 있는 참상이 단편적
관찰이 아니라 북한 전역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확인됨으로써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다.
- 지난 12월10일 뉴욕 타임스 1면에 뼈만 앙상한 11세 소녀의 앞가슴 모습과
함께 북한 어린이들의 굶주림과 발육 不全(부전)에 관한 유엔의
세계식량계획(WFP), 유니세프(UNICEF), 유럽연합(EU)의 합동 조사 결과를
알리는 긴 기사가 실린 것이다. 이 기사는 이 어린이들의 신체 발육과 두뇌
발달이 장차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는 조사 결과를 전하고
있다. 원조 기관들의 접근이 아직 금지되어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북한전역에 파견된 18개 조사반은 1천8백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금년
가을 3주간에 걸쳐 조사를 실시했다.
- 그 결과 놀라운 집계들이 나타났다. 7세 미만의 어린이들중 62%가 발육부전
상태이며, 16%가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만 1세와 2세의
어린이들중 30%가 장기적 영양실조 상태여서 신경 계통이 급속히 성장하는
시기에 받은 피해때문에 나중에 영양이 좋아져도 심신의 발육이 제대로 안될
전망이라는 것이다.
- 요즘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미사일 개발, 핵개발의 부활 의혹등으로 몹시
꼬여있기 때문에 밀 30만t을 주기로하는 등 미국의 대북 식량 원조가
‘인도적’인 이유로 제공된다는 미국 정부의 말이 곧이 안들릴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미국의 포용정책에 호응토록 만들기위한 ‘당근’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번 뉴욕타임스 보도를 본 다음에는 미국 정부의
‘인도적’입장에 새삼 수긍이 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북한 참상에 대한 또한가지 반응은 격분이다. 10일 국무부 대변인 회견에서
한 미국 기자는 물었다. “어린이들을 그처럼 아사 지경에 몰아넣은 나라의
집권자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피골이 상접하여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영양과 발육이 나쁘고 두뇌까지 온전치 못한 아이들 모습을
신문에서 보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백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는
정권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기자는 국민을 굶겨두고 무슨
원자로가 필요하며 지하 핵시설이 필요하냐고도 했다. 제임스 폴리 국무부
대변인은 ‘죄없는’국민들에게 식량을 보내 도울적에 어떤 정치적 조건을
달 생각은 없다는 것이 미국 정책의 기본이라고 답했다.
- 식량 분배후의 감시를 담당하는 ‘모니터’들에 대한 개방이 만족하지는
않지만 원조를 계속하는데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 현재 국무부 입장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계속 엉키고 있는 대북관계를 폭넓게 재검토하여 새 방안을
짜기 위해 윌리엄 페리 전국방장관을 불러들여 그 일을 위촉했다. 누가
검토하든간에 북한이란 ‘현실’이 만만치 않은 것만은 틀림없다.
- 최근 국무부 대변인의 말에 나타난 미국의 대북 인식은 첫째, 인도적
입장에서 무조건 식량원조를 해야할 정도로 북한 사정이 심각하다는
판단이다.
- 둘째, 북한은 미사일 문제등 미국이 해결을 원하는 이슈들을 안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고 4자 회담이 진전하는등 변화가 일어나야만 북과의 관계
개선이 가능하며 그래야 경제제재 완화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다. 현행 협상들이 잘 풀리면 미국도 그것을
도모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 이런 입장에서 미국이 대북협상을 어렵게 진행중일 때에 한국이 경제제재
완화를 포함한 대북 현안의 ‘일괄 타결’을 원한다는 보도가 최근에
나온것은 한·미 공조에 도움이 되지못할 듯하다. 페리 전장관을 만났을때
김대중 대통령이 그런 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된데 대해 국무부 반응은
냉담했다. 대변인은 페리 전장관은 한·중·일 각국 요로의 의견을
듣기만하는 입장임을 강조하면서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대변인은 페리
전장관이 김대통령 의견도 ‘신중히’참작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협상하러
간 것도 아닌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이상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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