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정조 사후 노론 벽파에게 소론, 남인과 실학파 계열 학자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전환점으로 그 뒤 해마다 끊임없이 대소규모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1862년의 진주민란은 체제개혁을 요구하며 아래로부터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폭동 사례였다.
1881년 조준영,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10여명의 신사유람단이 70 여 일 동안 日本에 머물면서 行政기관을 비롯하여, 軍事교육, 工業 등의 시설을 살피고 돌아왔다. 金允植을 영선사로 삼아 1,000여명의 靑年을 淸國에 보내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우게 하였다.
1899년에 조의연· 민영준· 조병하 등이 주동이 되어, 연안운송을 목적으로 이운사를 조직하였다. 그 밖에 1901년에는 통운사, 1903년에는 통동회사 및 종선회사, 1906년에는 창성사 등이 설립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우리 민족과 조선사회는 두 방향에서 커다란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그 하나는 외부에서 들어온 도전으로서, 선진 자본주의 열강들의 침입이었다. 이 도전은 개항을 요구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점유해 버리려는 도전이었다.
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삼정의 문란과 이에 따른 정치체제의 내재적 모순이 심화되고 이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천명덕치'의 통치이념위에서 유지되어 온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빠른 속도로 그 내부적 질서와 균형을 상실해 가며 약화 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朝鮮社會는 傳統體制가 붕괴되는 말기적 상황에서 대외적으로는 외래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의 이질문화권인 서구열강의 도전을 받았으며, 대내적으로는 1811년 洪景來亂 이래로 1862년 삼남지방을 중심한 壬戌農民抗爭에 의한 도전으로 봉건적 수탈과 신분제도의 폐기 등 체제변혁적 요구를 주장한 民衆抗拒의 도전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 사회에 개화(開化)는 이미 전반적인 시대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주요 쟁점은, 정치·경제·사회의 내적 모순과 제국주의 세력의 외적인 압력 사이에서 사회 제도의 개혁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개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제도 개혁의 관건은 무엇보다도 전제군주제의 개혁이었고, 실제로 현실정치에 깊숙이 간여했던 이들의 사상적 차이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도 바로 정치 체제의 개혁 방식에서였다. 하지만 서구 문물의 유입 속에서 이 격변기를 헤쳐 나가야 했던 지식인들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우기가 어려웠고,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한 사람의 생각이 여러 차례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근대사회를 예비하지 못한 정계는 개화사상과 척사사상의 갈등 속에서 임오군란(1882)·갑신정변(1884)·동학농민운동(1894)·갑오개혁(1894)·을미사변(1895)·아관파천(1896) 등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길을 잃었고, 한반도는 거문도사건(1885), 청· 일전쟁(1894), 러· 일전쟁(1904) 등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초에 친로수구파 정부가 절영도(絶影島)를 러시아에 조차해 주려고 하자,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전제군주체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1만여 명의 시민들을 모아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7월 3일 의회설립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독립협회는 공식적으로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자는 방안을 추구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일부 청년들은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자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는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지방 인민의 투표에 의한 선거로 관찰사·군수 등 지방관을 선출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중앙에서의 의회설립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여 중추원 개편에 의한 상원(上院)의 개원 직전까지 도달하였다.
독립협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자주독립사상을 강화하여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사상을 적극 도입하여, ① 생명(신체)과 재산의 자유권, ②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권, ③ 국민평등권, ④ 국민주권, ⑤ 국민참정권 등 민주주의사상을 정립하여 보급하였다.
독립협회는 친로수구파 정부를 퇴진시키고 의회설립에 동의할 수 있는 개혁파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판단하고 98년 10월 8일부터 궁궐을 에워싸고 철야상소시위를 전개하여 10월 12일 박정양· 민영환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내각을 수립하고, 98년 11월 2일 역사상 최초의 의회설립법인 중추원신관제를 공포하였다.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道)을 지키되 근대 서구적인 기술(器)은 받아들이자는 근대화의 방법론이다. 1880년 초 정치가이며 학자인 김윤식(金允植)이 주창한 것이다.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의 기치로 내세운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같은 맥락에서 물질적인 면에서는 서양 문명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동양의 정신문화 특히 유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우위에 두려한 것이다. 성리학의 이기론적 우위관에 근거를 두고 현실적으로 자강(自氈)을 꾀하기 위하여 과학· 기술 문명만을 수용하자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민족적 위기를 자각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의 우리 나라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1860년 영·프랑스 동양함대 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중국이 서양의 총력도 아닌 두 나라 동양함대의 공격 앞에서 수도를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곧 서양의 무력이 조선에도 닥쳐 와 식민지를 노리는 공격이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유생들은 1870년대의 문화 개방을 전후해서,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 개항 불가론을 들어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과 조선 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만인소 등 개화 반대 운동을 전개 하였다.
전통적인 신분체제가 변화되고 역사인식이 심화되면서 인간평등의식이 높아지던 조선 후기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식이 태동하고 발전하던 변혁의 시기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 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하였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면서 중국에 머물던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조선사회는 후기로 오면서 생산력 증대와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점차 해체 과정에 직면하였다. 여기에 부세운영의 문란과 군사력·치안의 공백까지 겹쳐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 이에 따라 통치기강은 날로 해이해졌고, 농촌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농민항쟁과 변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와해되어가고 있던 체제에 재차 타격을 가했다. 조선사회는 이러한 내적 도전뿐만 아니라 회적 충격에까지 노출되어 체제붕괴가 점차 가속화되었다. 자본주의 상품은 19세기 중엽부터 벌써 중국과의 밀무역을 통하여 침투해 있었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의 시장과 지방 장터에는 버젓이 외국 상품들이 공개 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여기에 전염병의 만연이라는 자연적 재해까지 겹쳐 농촌인구를 앗아감으로써 사회적 위기의식을 부채질하였다. 1821년과 1822년의 콜레라는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1859년 9월 말(양력)에는 서울에 콜레라가 침입하여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후기의 최대의 사회적 모순은 곧 지나친 사회계급의 형성이었으며, 水雲이 이러한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사회개혁의 방편으로 동학을 창도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동학의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냉대 받던 계층의 인물들이었다. 동학의 敎旨에 나타나고 있는 계급타파의 사상은 하나의 필연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학의 교리에서는 인류의 재해는 계급에 있는 것이요 경제적 계급의 차별에 있는 것이므로, 계급차별이 없고 利害가 일치하면 인간의 행복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한국의 증기기관차는 1889년 주미대리공사 이하영이 철도모형을 궁중에서 관람시켰으며, 1899년 서울∼인천(경인선) 개통 때 미국 브룩스에서 제작한 모걸형 탱크기관차가 등장한 것이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