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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 12-17의 석의적 연구
1. 서론
본문은 정통적 신자들에게 교회를 떠나간 거짓된 믿음을 가진 악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기록되었다. 저자는 이미 영적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굳게 붙어 있으라는 권면으로서 세상을 거부하면서 실천적 지침으로 세상을 거부하라고 말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견고하게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 크게 두 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교회의 ‘내부’와 세상이라는 ‘외부’와 관계다. 여기서 내부는 긍정적인 면이고 외부는 부정적인 면이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주는 믿음의 확신과, 당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을 위협하는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경고로서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당시 성도들은 죄사함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아는 삶을 통해 악한 세상을 이기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내용이다.
12-14절은 긍정적인 면을, 15-17절은 부정적인 면을 담고 있다. 12-14절은 저자가 이미 다루었던 내용들과 매우 친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쓰는 것은”의 표현은 이미 2:1과 7-8절에서도 등장되는 표현이다.
또 12-14절은 뒤에 나오는 15-17절의 세속적인 것을 거절하는 근원적인 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문맥적으로 서로 연결된다(단어적인 면에서는 연결점이 없다). 15-17절은 2장의 이후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 (10절).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절)등의 문맥을 볼 때, 이후의 내용은 15-17절의 내용과 계속 연결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소고는 교회의 내부적인 측면과 세상의 외부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믿음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문구조
12-14절: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15-17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3. 본문석의
3.1.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2:12-14)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요한은 그것에 대해서 교회 구성원들에게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한다. 이것은 요한이 편지를 쓰는 이유가 된다. 12-14절에 “ 쓴다(그라포)” 는 표현이 계속 반복하여 나오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본문은 시적으로 치밀하게 구성이 되어 있다(원문에는 시의 행들로 구성이 되었다). 문장들은 한 형태를 쫒아 구성이 되고 그 안에는 세 개의 요소가 포함되었다(“동사시제”, “호칭들”, “왜냐하면”). 그것은 본문 해석상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고 있다. 본 소고는 세 가지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본 석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1) 호칭의 반복과 호칭이 달라진 것에 대한 해석
2) 12-13절의 내용이 다시 14절에서 반복된 이유
12-13절/ 쓰는 것은 (현재형) | 14절 / 쓴 것은 (과거형) - 반복 |
자녀들- 너희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 | 아이들-아버지를 알았기 때문 |
아비들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 | 아비들-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 |
청년들- 악한 자를 이기었기 때문 | 청년들-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안에 거하기 때문 악한 자를 이기었기 때문 |
3) 12-13절의 “ 쓰는 것은”이 14절에서 “쓴 것은”으로 시제가 바뀐 이유
전체적으로 볼 때 본문 번역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원문에는 “왜냐하면(호티)”이 들어 있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때문입니다(표준 새 번역)” 로 읽을 수 있다. ‘호티’는 요한복음에 184회, 요한서신에 74회나 사용된, 요한이 즐겨하는 접두사이다. 문제는 이 번역이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선포적인 태도로 사용되는지 분별해야 하지만, 사실 어느 의미든지 이 문맥에는 맞는다. 어쩌면 저자가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유업의 본질을 상기시키기고 또 확신시키기 위해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12절: “자녀들아(테크니아)”의 호칭은 연령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교회 전체를 부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것은 뒤에 나오는 “너희 죄가 사함을 얻음이요“ 라는 구절과 연관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 용서 함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여기서 ”자녀“는 연령이라기 보다는 믿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죄 사함”의 의미는 이미 1:9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또 2:1-2에서 죄를 범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언자이 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함을 받는 것을 살펴보았다. 특히 성경에서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이런 관련성을 말하고 있다. 요한의 공동체는 예수의 “이름“이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것은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에서도 알 수 있다(요1:12; 3:18; 요일3:23; 5:15).
죄 사함은 구약이 약속하고 있는 새 언약에 속한 축복 중 하나다. 또한 이 사상은 요한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 수 있다. 요한은 이미 죄 사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시제가 완료형인 것은 아마 초기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1:9에서는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 2:1에서 “너희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말한 것과 비교하면 시제에서 차이가 난다.
13절: 저자는 여기서 “아비들아 ” 과 “청년들” 의 호칭을 사용한다. “자녀들”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지만 “아비들” 과 “ 청년들” 이라는 표현은 나름의 특징을 가졌다고 보여 진다. 아마 교회 내에 두 그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공동체 안에 젊은 신자들과 나이든 신자들로 구분될 수 있다. 아니면 이것을 영적인 발달의 층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비들아” (파테레스)는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을 제외하고는 나이든 신자를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 한 가지 가능성은 나이든 신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가 누구를 의미하는가. 하나님 아버지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 말씀에 관한 언급일까? 이 구절은 14절에서도 다시 반복하여 나온다. 그리고 이미 1:1에서도 언급된 반복된 구절이다. 단순한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1:1과 연관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말씀으로 보는 편이 옳다고 보여 진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앎”은 요한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볼 때 “태초부터 계신 이” 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언급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 우리 가까이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또 이 표현은 신학적으로 볼 때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그리스도 양자 모두에게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표현이 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기독론적인 것임에도 거의 틀림없는 듯하다.
“청년들아”는 문자적으로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활력에 차 있는 젊은 사람을 말할 수 있다. “악한 자를 이미 이기었다”는 표현은 힘을 가진 청년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도 완료형의 시제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승리의 결과가 계속되는 것과 아울러 이 싸움은 이미 승리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단을 이기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이긴 편에 속한 자로서 사단과 싸움을 하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또한 악에 대한 승리는 청년들에게만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야하는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청년들이 악을 이긴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아야 함을 폭넓게 의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한 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어두움의 세계를 조종하는 사단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14절: 이 구절은 12-13절의 반복적인 내용으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다른 점은 14절에서는 아이들과 아비들에게 공통적으로 “알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저자는 여기서 “알았다”는 내용의 반복을 통해 강조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12-13절에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 대한 호칭을 14절에서는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로 한꺼번에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요한이 자신이 앞에서 전개한 생각들을 다시 반복하여 정확하게 되풀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단순히 강조를 하기 위하여 반복했을까. 이것에 대한 한 가지 가능성은 12-13절과 14절에서 시제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형인 “내가 쓰는 것은” 이 과거형인 “내가 쓴”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스몰리는 저자가 주장을 진전하고 있으며 이제 뒤 따라 나올 가르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시작될 가르침의 본체를 기대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15-17절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이기는 것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호칭의 변화이다. 즉 “자녀들아” 에서 “아이들아” 로 변화되고 있는데, 스몰리는 이것에 대해서 공동체 전체를 “아이들아” 라는 호칭으로 사용하고 부르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보면 크게 다를바가 없다. “아이들” 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면서 특징이다.
“청년들아”는 13절에서 청년의 특징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14절에 “강하다“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육체적인 의미 보다는 영적인 것이다. 악한 자를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안에 거하시면 강하게 된다. 특히 말씀이 ”거한다“는 표현은 말씀을 내주하시는 신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성령과 연계성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말씀이 강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 빛 가운데 거하여“(1:7; 2:9,10) 라는 구절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진리가 그 속에 있는 것(2:4),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온전하게 되는 것(2:5), 그의 안에 있는 것(2:5), 그의 안에 사는 것(2:6) 과도 연관이 된다. 즉 주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의 자신 일수도 있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사랑의 계명인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급되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말씀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서신서에서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결국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믿음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악한 자를 이기고, 강하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고 그 말씀을 아는 것에 달려 있다. 말씀을 얼마나 확신 있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이기는 힘이 생긴다.
3.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2:15-17)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과제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저자는 본문에서 그 방법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세상으로 방향을 바꾸는 신자들에게 세속을 거부할 것을 직설적으로 권면한다. 세상이라는 용어가 반복(6번)하여 사용된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사랑을 비교하고 있는데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을 따라가는 삶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2:4)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1:6)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고 어둠에 행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15-17절은 세 개의 구문 형태로 서로 대조하는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다. 즉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 “세상으로 좇아 온 것”과 “아버지께 좇아 온 것”, “세상은 지나간다”와 “아버지께 순종하는 자는 영원하다” 등이다.
15절 : “세상(코스모스)”이라는 용어는 신약에서 187회 나오는데 요한 문서에는 106회 사용되었다. 요한 일서에는 23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에서는 두 가지 기본적인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하나는 피조 된 세계 또는 지상에서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대적되는 악의 세력에 의해 잠정적으로 통제되는 인간 사회이다. 곧 악한 자가 지배하고 있으며 온갖 욕심과 미혹을 통해 사람들을 유혹하게 하고 죄 짓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것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세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고백하지 않는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악된 세상과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고 살 수 없다. 여기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경우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세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둘 부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에서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 정황 속에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은 왜 같은 단어를 사용했을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형제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2:10)나갈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과 세속적인 것을 향해 사랑이 잘못되게 방향을 잡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 길을 모두 갈 수 있기에 바르게 방향을 잡고 나가야 함을 강조한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는 것은 세상과 아버지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의 마음 전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반대로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는 아이들(14절)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15-17절은 앞에 12-14절의 결과로서 주어진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목적격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주격으로 해석하면 아버지께 속한 사랑이 된다. 여기서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세속적인 것을 거부해야 한다.
16절: 그렇다면 세상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세속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세속적이 행동을 거부하도록 권면한다. 왜 세상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가.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세상으로서 좇아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세계이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아버지께로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세상이 악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근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점에서 이 세상은 악하다.
저자는 여전히 세상(코스모스)을 타락한 사람들이 죄성이 가득한 태도와 정욕을 표출하는 장소로 간주하고 있다. 요한의 이원론은 윤리적인 것이지 우주론적인 것이 아니다.
요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세 가지 범주를 설정했다. 이 세 가지는 주관적인 것으로 사람의 내적인 마음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저자는 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욕망들을 자제하라고 경고한다.
첫째, 육신의 정욕이다.
여기서 “육신적인 정욕”이란 무엇인가. “육체(사룩스)”는 단어는 요한에게는 신체적인 측면의 인간을 표현하는 중성적인 의미로 사용되곤 했다. 요한의 관점은 육체가 태생적으로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육체를 세속적인 관심으로만 살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안목의 정욕”은 육체의 정욕을 더 구체화시키는 구절이다.
안목의 정욕은 보이는 것에 대한 죄악 된 정욕을 말한다. 보는 것을 도구로 삼아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눈이 정욕을 일으키는 방법과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로 소유를 갈망하고 축적하는 죄들이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결국 “안목의 정욕”은 “육신의 정욕”과 그 의미가 같으며, 죄 가운데 있고 욕망으로 가득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셋째, “이생의 자랑”은 정욕의 또 다른 측면을 말한다.
세속적인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함과 자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우리 번역에 있는 ‘이’는 원문에는 없다. ‘생의 자랑’이라는 표현이 옳다. 그렇다면 ‘생의 자랑’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사용된 ‘생’은 ‘비오스’로 영적인 생명을 말하는 ‘조에’(요1:4; 10:10; 20:31)와 구별된다.
‘비오스’는 모든 인간이 유지하고 있는 생물학적인 생명, 생활을 의미하며, 이것은 또한 생활수단, 재산을 가리키기도 한다. 결국 ‘생의 자랑’은 생활수단인 ‘재산’과 ‘부’를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체적인 의미에서 보면 ‘비오스’는 항상 생명의 외적 측면들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생명에서 유래된 자랑’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는 가르침과도 통한다(요한서신의 저자도 요일3:17에서 ‘이 세상의 재물’을 언급한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세상의 재물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오늘날 만연하는 물질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자랑은 포장하고 과장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 범주는 모두 이기심과 탐욕을 보여준다. 특히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고 자기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닌 피해야 하는 것들이다. 물론 세상이나 인간의 존재나 물질적인 소유는 그 자체가 죄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향한 사람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런 것에 집착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기원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말 보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아버지의 자녀들( 12절, 14절)에게는 맞지 않는 삶임을 강조하는 단어다. 그리스도인은 시작이 위로부터 생명을 받아 새로운 탄생을 얻은 사람이기에(요3:3)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사랑할 수 없다.
17절: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원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결과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것들은 일시적이고 궁극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붙들고 의지할 것이 못된다. 여기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아닌 세속화 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시제는 진행형을 사용함으로 지금도 이런 세속적인 것은 계속 진행 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게 된다. 이것은 순종적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세상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하다는 비교는 세상의 정욕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을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법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영원히 거한다”는 구절은 15-17절의 내용을 완성시키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생명은 영원하다. 여기에서도 앞에 언급된 “거한다” 는 구절이 나온다. “거한다”는 개념은 요한 신학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는 말씀은 미래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영원히 거한다”는 표현은 지금까지 “거한다”는 여러 표현들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요한일서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귐(1:3, 6)을 의미하며 아울러 이 세상에서 사는 생명을 초월하여 영원까지 지속되는 삶을 말한다.
세상으로부터 온 세상의 욕심은 헛되고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을 붙잡고 그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게 된다. 이것은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적 요지라 할 수 있다.
4. 결론
본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요한이 독자들에게 주는 도전은 강력하고 단호하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거부하라는 것이다. 믿음은 곧 실천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잠시적이고 영원하지 않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그리스도와 관계 그리고 악에게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이것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부정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고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순종을 의미한다. 결국 저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확신 있게 거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에 있는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세상의 정욕과 악을 능히 이길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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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ton, B, B. 외.「요한 1. 2. 3서」,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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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y, S, S.,「요한 1. 2. 3서」, 조호진 역, 서울: 솔로몬, 2005.
Smith, D, M.,「요한 1. 2. 3서」,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이대희 목사
첫댓글 재난지원금으로 방세도 공과금도 못내요...
현금화가 안되니 먹을것만 사야됩니다
인터넷비도 휴대폰요금도 내야 카페를 관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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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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