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16장 1절 ~ 22절
요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욥기 16:21)
서론: 키에르케고르와 단독자 '욥'
첫번째 논쟁에서 욥의 친구들은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라는 전통적인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욥을 타일렀고, 욥 역시 그 전통적 틀 안에서 신음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격(15장)을 거치며 16장에 이르면, 욥은 더 이상 인간적 교리와 세상의 인과율적 논리에 설득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수평적 교리의 종말”과 “수직적 신앙의 개막”을 선언하는 정점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그의 저서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욥이야말로 “보편적인 윤리적 차원(인과응보)이 파산했을 때,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Der Einzelne)'”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상식과 교리의 시스템이 나를 증명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죄인으로 단죄할 때, 영혼은 극심한 실존적 절망에 직면합니다. 바로 그 비참함의 최저점에서, 욥은 수평적 대화를 끊어내고 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1차 변론 때의 욥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며 당황했다면, 본문의 욥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기에, 나는 오직 하늘에 계신 변호자만을 바라본다”는 치열한 신앙적 도약을 이뤄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약이 완성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조명하고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인간의 교리와 규범이 주는 한계를 직시하라
본문 2절에서 욥은 친구들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מְנַחֲמֵי עָמָל, 메나하메 ‘아말)이로구나" 여기서 ’아말(עָמָל)‘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남에게 수고와 고통을 덧붙여 더 깊은 괴로움으로 밀어 넣는 상태"를 뜻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으나, 자신들이 가진 인과응보의 신학적 틀(Frame)에 욥을 강제로 맞춰 넣으려 했습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 Kant)는 인간이 세상을 자신의 고정된 인지 범주(Category)로 해석하려 할 때 오만이 생겨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오묘한 뜻과 한 인간의 깊은 고통을 자신들의 좁은 '신학적 범주'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역시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보고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라는 인과율적 질문에 갇혀 있었습니다(요 9:2).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 하시며 교리의 틀을 깨뜨리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욥의 친구들처럼 ’아말‘의 위로를 던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난당한 형제자매를 향해 "기도가 부족해서", "죄가 있어서"라며 조급하게 정죄하거나 상투적인 원인 분석을 남발하는 것은 정서적·신학적 폭력입니다. 교회는 타인의 아픔을 나의 정형화된 틀로 심판하지 않고, 그저 함께 울어주는 성령의 위로(파라클레시스)를 실천해야 합니다.
2. 수평적 절망 속에서 하늘의 절대적 인정을 구하라
세상의 법정과 친구들의 비난 속에서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 난 욥은(12~14절), 마침내 땅에서의 변호를 포기하고 하늘로 시선을 돌립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 16:19) 여기서 개역개정 성경은 '중보자'로 번역했지만 인성을 가진 중보자(예수 그리스도)가 확정되지 않았던 구약시대의 히브리어 ‘사하드(שָׂהֵד)’는 '변호자, 보증인'의 의미로서 "하늘의 결정적 법정에서 나의 진실함을 입증해 줄 궁극적 증인(Heavenly Witness)"을 뜻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J. P. Sartre)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규정하는 감옥이 되는 상태를 "타자의 지옥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시선(타자의 지옥)에 갇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세상의 평판과 정죄를 탈출하여, 나를 온전히 아시는 오직 한 분, '하늘의 증인(사하드)'에게로 나아가는 '거룩한 전향'을 이룹니다.
스데반 집사가 불의한 재판에서 돌에 맞을 때, 땅의 시선은 그를 범죄자로 보았으나 그의 눈이 열려 하늘을 보았을 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인자"를 보았습니다(행 7:55~56). 예수님은 이 땅에서 버림받은 성도들을 하늘 법정에서 친히 증언해 주시는 완벽한 '사하드'가 되십니다.
성도는 세상의 평가나 오해, 때로는 교회 내부의 오해로 인해 억울함을 겪을 때 사람을 향해 다투거나 분노를 쏟아내지 말아야 합니다. 욥처럼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다"(20절)고 고백하며, 오직 나의 진실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정직함을 지켜내야 합니다.
3.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참된 중보자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욥기 16장의 신학적 아치(Arch)는 21절에서 완성됩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בֶּן־אָדָם, 벤-아담)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아람어적 방언의 영향이 짙은 이 구절의 ‘벤-아담(בֶּן־אָדָם)’은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Son of Man)"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고 인간은 피조물이자 죄인이기에 직접 맞설 수 없으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인성을 입은 중재자"가 절실하다는 욥의 사모함입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Sein zum Tode)'로 보았습니다. 22절에서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이라는 욥의 고백처럼, 모든 인간은 유한함과 죄성이라는 절벽에 서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어 하나님과 연결해 줄 절대적 중재자 없이는 영원한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욥이 어둠 속에서 아득히 갈망했던 그 '벤-아담(인자)'은, 신약에서 스스로를 '인자(Son of Man)'라 부르시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히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예수님은 욥처럼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셨고, 옷이 찢기고, 뺨을 맞으시며(욥 16:10, 마 26:67), 마침내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셨습니다. 욥이 18절에서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고 외친 기도는, 골고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가 하늘을 향해 우리의 무죄함을 대변하는 구속의 역사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담대히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의로움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참된 '벤-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롬 8:34).
결론: 십자가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공동체
1차 변론 때의 욥은 세상의 논리와 싸우며 번민했으나, 본문에 이르러 세상의 원칙이 무너진 극심한 고통('아말') 한가운데서 하늘의 증인('사하드')을 발견했고, 마침내 사람의 아들('벤-아담')의 중재를 소망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 까닭을 알 수 없는 고난의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만든 정죄의 틀이 나를 짓누를 때,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단독자'가 되어,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참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변론의 궁극적 도약을 이룬 욥처럼, 교회는 성도 상호 간에 정죄하는 정답을 던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ㆍ타인의 아픔에 함부로 잣대를 대는 '아말(עָמָל)'의 폭력을 내려놓읍시다.
ㆍ오해받고 상처 입은 이들의 '사하드(שָׂהֵד,하늘의 증인)'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봅시다.
ㆍ나 같은 죄인을 위해 친히 '벤-아담(בֶּן־אָדָם, 인자)'으로 오셔서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함께 울어주는 복된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