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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집을 지은 문호
괴테하우스를 찾아서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 -
괴테하우스 현관엔 특별한 초인종이 있다. 앙증맞은 아기손이 철제 줄을 꼭 잡고 있는 초인종이다. 그 줄을 당기면 초인종이 울린다.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괴테하우스 원경-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에는 오래된 가구들이 잘 손질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러 개의 방에는 그 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는 듯 느껴진다. 괴테가 오르내리던 계단, 어린 시절 공부하고 동생과 함께 놀던 방과 뒤뜰의 정원......괴테의 정원을 보는 순간 ‘비밀의 화원’이 떠올랐다. 괴테 오누이는 그 정원에서 어떤 꿈을 키워 왔던 걸까?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년).
괴테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다.
어쩌면 이름과 작품으로 더 친숙해졌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작품을 직접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 파우스트'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에 따르는 괴테라는 이름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광장에 있는 괴테 동상과 독일에서 가장 높은 건물 코메르체방크 타워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괴테를 극찬했다. '이제껏 괴테만큼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인간이 있었던가? 괴테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 까닭은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진솔한 인간상이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니체와 괴테가 살던 시절은 중세의 기독교적 억압적 문화가 인간의 숨통을 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니체이다. 니체는 유럽 사상에서 소크라테스적 이성과 기독교적 윤리를 망치로 쳐부수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게 거부된 자리에는 인간의 본성이 자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의 눈엔 기독교적 윤리 안에서는 절대 불가한 기혼녀를 사랑하다 죽는 청년의 고백과 악마에게 끌려가도 좋으니 인간의 자연성이 추구하는 본능의 끝자락까지 닿아 보겠다는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창작해 내는 괴테는 용기 있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스스로의 삶의 주인인, 가장 수준 높은 경지의 진솔성을 보여 주는 위버멘쉬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괴테를 사랑한 사람은 니체만이 아니다. 헤겔, 쇼펜하우어, 토마스 만 등도 자신의 저서에서 괴테의 글을 인용했고, 모차르트, 슈만,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바그너, 괴테의 작품에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고 고백한다.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대문호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괴테는 1749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나 26살 바이마르로 가기 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다. 대학을 다니느라 잠시 집을 떠난 적도 있지만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에는 괴테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괴테하우스 입구-
괴테하우스에는 어린 시절 괴테의 유복했던 모습을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물건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작은 인형극 상영 무대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극에 사용하는 무대는 인형극을 좋아하는 마니아라 해도 쉽게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괴테의 할머니가 4살 된 괴테와 그의 여동생 코르넬리아에게 크리스마스 저녁, 인형극을 보여주기 위해 선물했다고 한다. 괴테의 할머니는 직접 주문 제작한 무대에서 손주들에게 인형극 상영을 선물하고 무대까지 함께 선물했다. 괴테 할머니의 경제적 힘과 손주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일화이다. 인형극 극장을 선물 받은 괴테와 그의 동생 코르넬리아는 이후 수시로 각본도 직접 쓰고 작품을 연출하며 여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창작 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 졌음을 짐작케 한다. 뿐만 아니라 두 꼬마는 이 인형극 무대를 통째로 들고 집근처 뢰머 광장으로 나가 이웃 아이들을 위해 공연을 하기도 했다. 무대를 옮길 때에는 어른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니 니체 집안의 여유 있는 생활상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선물한 인형극 무대-
이렇게 괴테의 친가는 잘 사는 집이었다. 외식업과 호텔업을 하며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유력한 자산가였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괴테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맞는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를 구매한 사람도 괴테의 할머니라고 한다.
괴테의 외가댁 역시 만만치 않은 재력가 집안이다. 괴테의 외할아버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이었다.
괴테하우스 곳곳에는 괴테가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물건들이 많다. 그 중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살림살이는 빨래 압착기다. 이불보와 침대보를 차곡차곡 넣어 한꺼번에 주름을 펴는 데 사용됐다. 이불보와 침대보가 144벌이나 되었다고 하니 괴테 집에서 일했던 하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불보의 수는 당시에 재력을 나타냈고 괴테 집은 일 년에 3번 몰아서 이불 빨래를 했다고 한다.
- 빨래 압착기-
- 부티나는 시계-
이 외에도 괴테하우스에서는 괴테가 생존에 있을 때부터 있었다는, 사람의 키만큼 큰 시계도 있다. 어찌보면 사람의 형태를한 로봇 같이 생겼다. 가이드 아저씨는 한국인들이 가면 간단한 한국말로 내부를 안내한다. 손으로 가리키며 '괴테 시계' '괴테 동생 방'하고 말이다. 한국사람들이 괴테하우스 방문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는 당시 사용하던 주방기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주방, 지금도 잘 정돈 되어 있는 게스트 룸, 뒤뜰의 작은 정원 등을 일일이 설명하며 어린 시절의 괴테와 누이동생의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뒤뜰에 숨겨져 있는 비빌의 화원-
저 멀리 나와 나의 딸래미가 카메라에 잡혀있다
-시인의 방-
프랑크푸르트 괴테 하우스에 ‘시인의 방’이라는 방 하나가 있다. 괴테가 생활하고 창작을 했던 방이다. 희곡 '괴츠 폰 베링힝엔(1771년)'과 60년에 걸친 대작, '파우스트'의 집필을 이곳에서 시작했다고 한다.(1773년)
-샤를 로테 실루엣-
한때 괴테는 한 여인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샤를 로테 부프. 그녀는 괴테가 베츨라에서 법관 보좌로 일할 때 알게 된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약혼녀였다. 괴테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로테를 향한 사랑에 힘들어하며 프랑크푸르트 부모님 집으로 돌아온다. 고백도 해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괴테에게 때마침 들려온 소식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했던 예루살렘이란 친구의 자살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괴테는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지인들의 방문까지 사절하고 소설을 위한 정보를 정리했다고 한다. 본인의 생활과 마음도 다시 한 번 돌이켜보며 소설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펜을 든 지 4주 만에 소설은 완성된다. 다른 구상 없이, 어떤 한 부분 미리 써놓지 않은 채 그렇게 써 내려간 소설이 젊은 베르터의 슬픔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하여 '나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라고 말한다. 이는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창작은 없다’라는 말과 ‘진정한 문학은 사실을 옮겨놓는 것이 아니다.’라는 창작이론의 의미가 담겨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베르테르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도 샤를 로테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방에 걸려 있는 샤를 로테의 실루엣은 보는 이의 감정을 사로 잡는다. 그래서 그 액자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게 된다. 아련히 스며드는 괴테의 러브스토리를 떠올리면서......
여행에서는 사전 공부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숨겨진 이야기를 알고 대하는 전시물과 아무런 정보없이 대하는 경우는 그 느낌이 천지차이 이기 때문이다. 저 액자도 롯테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그냥 걸어 놓은 장식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라는 작품 속에 힘들었던 자신의 사랑을 모두 털어냈다고 말했다. 그의 소설이 자전적 소설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소설은 괴테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1772년 23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무명작가였던 괴테는 단숨에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진다. 이후 4년 뒤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작이 추밀고문관으로 그를 임명하며 정치에도 참여한다. 독자들은 소설에 감동했으며 사람들은 베르테르의 옷차림과 행동을 따라했다. 뿐만아니라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속출하여 이 책은 한 때 유럽에서 금서가 되기도 했다.
-서재-
괴테 아버지는 서재에 약 2,000권의 값진 책을 소장했다고 전해진다. 일부는 괴테 하우스에 보관되어 있다. 법률 서적과 신학 서적 외에도 고대에서 괴테가 살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서적이 있다. 로마 시대 미술에 관한 책과 이탈리아 서적들도 빠지지 않았고 여행기도 있다. 괴테도 이에 지지 않고 이후 바이마르에서 생활할 때 자신의 서재에 6,000권의 책을 두었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괴테의 이 말은 어 어떤 수식어보다도 괴테에 대해 잘 말해 주는 것 같다.
괴테는 자신의 삶을 세 단어로 표현한다. ‘사랑했노라 괴로워했노라 배웠노라.’
그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통해 배우고자 했다.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점령기와 몰락을 겪으며 그 어느 하나 허투루 보지 않았다. 유년 시절의 배움이 그를 깨어있게 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로맨티시스트로 끊임없이 사랑하고 시를 쓰고 편지를 보냈다. 괴태는 사랑을 통해 아파하고 배움을 갈구하며 고민했던 인물이다.
-공부방-
서재이기도 한 고풍스런 방에서 괴테는 그의 동생 코르넬리아와 함께 공부했다. 괴테 아버지의 직업은 황실 고문관이었다. 명예직에 가까워 남는 시간을 자식 교육에 쏟았다. 직접 괴테와 코르넬리아를 가르쳤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일일이 가정교사를 두어 가르쳤다.
서재 한쪽에는 길가가 잘 보이도록 새로 창문도 내었는데 창문으로 거리에 어디쯤 괴테가 오는 지, 어떤 사람이 지나다니는지 자주 쳐다보았다. 괴테는 이런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질 때면 창문에서 보이지 않는 길로 돌아 집에 가기도 했다고 한다. 넘치는 사랑, 그 넘치는 사랑이 살며시 부담이 되었을 어린 괴테. 가족의 든든한 지원 속에 자란 그이지만 사랑의 열병만큼은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사랑은 괴테를 괴롭히는 유일한 요소였다. 14살, 그에게도 아픈 시련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은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프랑크푸르트의 한 식당에서 만난 첫사랑 그레트헨을 시작으로, 72세 노장이 되어 만난 울리케까지 그의 삶을 통틀어 나이와 상관없이 놓지 않았던 사랑의 열정, 수만 세어봤을 때 괴테가 특별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주목받는 이유는 사랑할 때나, 사랑 때문에 괴로울 때나 그 감정과 상황을 작품으로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괴테 하우스에서도 사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가 글을 썼던 방문 옆에는 하나의 실루엣이 걸려있다. 실루엣의 주인공은 샤를 로테 부프다. 괴테가 이 방에 살 때도 늘 같은 자리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친필원고-
-괴테 하우스를 방문한 유명인의 사진 (괴테하우스에 보관 되어 있다.)
- 캄파냐에 있는 괴테
요한 하인리히 티쉬바인이 1787년 그린 괴테의 초상화. 현재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뢰머 광장 먼 거리-
-광장의 다른 시점-
-괴테의 집에서 가까운 시장-
-광장의 나무들
푸랑크푸르트를 찾았을 때는 겨울이었다. 시가지의 광장에 서있는 나무들은 여러 해 동안 같은 부위에 가지가 잘려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수십 개의 팔을 들쳐 올리고 뭔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형상이다. 마치 오랫동안 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의 내 모습처럼.......
여행은 나무가 나비가 되는 일이다. 작은 나라 한국의 작은 도시 안산이라는 곳에서 나의 생활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한 그루 나무였다. 보이는 만큼 보고, 찾아오는 것들, 햇살과 바람과 비와 눈발을 느끼며 그런대로 살면 한 생애 마치게 되는...
한곳에서 니체도 만나고, 요한스트라우스도 만나고, 괴테도 만날 수 있는...
희한하게도 한 번도 본적도 만난 적도 없는 먼 곳에서 한 생애를 살다간 이들이 내 안에 집을 짓고 들어 앉아 있었다. 난 이들이 늘 궁금했다. 이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용기를 내어 행동에 옮기는 순간 난 나비가 되었다. 내 안의 것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어디라고 날아 갈 수 있는, 괴테의 흔적을 따라 나선 길에서 이미 떠나고 없는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비로소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무였을 때에는 보지 못했던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내 모습.
앞으로의 나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낯선 곳을 찾아 이미 친숙한 이들의 삶의 모습을 대하며 난 내가 긍금하다.
괴테의 문학 세계
'파우스트'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라도 영원한 진리를 찾고자 했던 파우스트의 끊임없는 도전을 그린 대작이다.
괴테가 세상을 떠나기 전 무려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 『파우스트』는 괴테의 역량의 결정체라는 평가를 받으며 독일 문학사의 핵심으로 전 인류의 역사에 획을 그은 인간 파우스트의 생애를 그려낸 걸작이다. 인식과 향락에 대한 끝없는 욕망 때문에 악마와 계약을 맺고 마술의 힘을 빌어 세상에서 온갖 향락을 누리다가 계약 기간이 끝나자 악마에게 끌려갔다는 전설적 인물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적인 운명 이야기가 이 대작의 소재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천상에서 가장 밝은 별'을, '지상에서 가장 큰 쾌락'을 얻고자 방황하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탐구와 영혼 구원의 진리를 괴테는 이 작품을 통해 찾고자 한다 .
괴테 문학인생의 보고서 같은 이 작품은 시인으로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젊은 괴테에서부터 고전주의에 심취했던 장년의 괴테, 사회주의적인 이상향을 펼치는 말년의 괴테까지, 괴테의 문학적 이력과 삶을 비중있게 담고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소설은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주제의 최고봉이며, 괴테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와 경향이 음양으로 명백하게 또 아련하게 표명되어 있는 고전의 명작이라는 이 책을 본 젊은이들 중 자살자가 속출 발매금지가 되기까지 한 문제의 소설이다.
<책 내용 보기>
언젠가 더운 여름날에 로테와 산책하다가 쉰 적이 있었던 버드나무 그늘을 구슬피 내려다보았지만, 지금 그곳 역시 물에 잠겨 버드나무조차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빌헴름, 그녀의 목장, 그녀의 수렵 별장을 둘러싼 일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정자는 지금쯤 격류에 휩쓸려 얼마나 형편없이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p.170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은 어쩐 일일까? 내가 나 자신을 겁내고 스스로에게 놀라다니!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순수하고 남매간 같은 우애, 사랑이 아니던가? 이제까지 단 한번이라도 마음속으로 죄스러운 소원이나 엉큼한 욕망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물론 맹세할 수는 없다. 그런데 꿈을 꾼 것이다. 아아, 이처럼 모순되는 갖가지 작용을 불가사의한 간밤의 일이었다!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몸이 떨린다.
나는 그녀를 두 팔로 껴안고 가슴에다 꼭 품은 채,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의 입술에다 한없이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나의 눈은 그녀의 황홀한 눈동자 속에서 떠돌고 있었다. 신이여, 지금도 저 불타는 기쁨을 마음속 깊이 가득한 그리움으로 되살려 생각하고 행복감에 잠긴다면, 과연 나는 벌을 받아야 할 죄를 짓는 것입니까? 로테! 로테, 나는 이제 마지막에 다다른 것 같다! 나의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고 벌써 일주일 전부터 사고력을 잃었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어딜 가도 기분이 좋지 못하고 그래서 어디에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으니, 떠나버리는 것이 좋을 듯싶다. pp.171-172
내 마음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대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그 침식의 힘, 그것이다. 바로 그 힘이 만들어낸 것은 그 사람의 이웃과 그 사람 자신을 파괴하고 만다. 그것을 생각하며, 하늘과 땅과, 그리고 그곳에서 작용하는 온갖 힘에 둘러싸여, 나는 불안스레 비틀거리는 것이다.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영원히 집어삼키고, 영원히 되새김질하는 괴물뿐이다.(p. 88)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1749년 8월, 황실 고문관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5년에 법률학을 배우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처음으로 자유롭게 레싱, 빙켈만 등을 읽었다. 그러나 1768년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했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 대학에 입학하여 다시 법률 공부를 하는 동시에 의학 강의도 들었다. 이때 헤르더와 교제하면서 호메로스, 성서, 오시안, 민요, 셰익스피어 등을 알게 되는데, 이로써 '슈투름 운트 드랑', 즉 질풍노도 문학 운동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법률 학위를 받은 괴테는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문학에도 열성을 다하여 『괴츠 폰 베를리힝엔』의 초고를 완성했다. 이 희곡은 출간되자 대중과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고, 괴테는 독일의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1772년 괴테는 베츨라의 고등 법원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괴테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바로 그를 독일의 작가에서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서게 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의 무대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베츨라에서 괴테는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연모했는데, 이 체험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거의 사실 그대로 담겨 있다. 부프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괴테는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3년간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적 결실을 거두었다. 바로 기존의 무미건조한 형식미에서 탈피하여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할 것과 인습적에 것에 대한 저항을 모토로 한 슈투름 운트 드랑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 절정을 이룬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1775년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를 방문하여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이로써 괴테는 슈투름 운트 드랑의 시기를 마감하고 추밀참사관에 임명되어 행정적인 활동을 했다. 다망한 정무 생활 틈에서도 지리학, 식물학, 광물학 등 자연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러나 창작 면에서는 침체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1786년(37세)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름으로써 다시 예술의 세계로 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2년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에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788년 바이마르로 돌아온 괴테는 정무에서 떠나 고독 속으로 숨었다. 이때 나중에 정식 부인이 된, 평민 출신의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실러와도 처음으로 만났다. 1794년부터 실러와 깊은 친교를 나누기 시작한 괴테는 실러가 발행하던 문학 잡지인 『호렌』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805년부터 1815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 동안 나폴레옹을 세 번이나 만난 한편, 독일 문학 최초의 사회 소설로 평가받는 『친화력』를 완성했고, 자서전의 백미로 꼽히는 『시와 진실』 1∼3부도 완성했으며, 『서동시집』 집필에도 착수했다. 1821년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완성했으며, 죽기 1년 전 대작 『파우스트』를 완성했으며 1832년 바이마르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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