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왕 25년, 왕이 태자 복남[[신당서]에는 남복이라 하였다.]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의 봉선에 참가케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그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하여금 조정에 남아 뒷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당신들을 처치하려 합니다. 먼저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자가 남생에게 또 말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남몰래 자기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두 아우가 이를 알고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웅거하면서, 그의 아들 헌성을 당 나라에 보내 구해줄 것을 애원하였다.
6월,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남생은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9월, 고종이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 대사로 특진시키고, 현토군공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 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육과 학 처준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 동선과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인 두 의적·독고 경운·곽 대봉 등은 모두 이 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7년 봄 정월, 당 나라 고종은 우상 유 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 처준과 김 인문 등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2월, 이 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설 인귀는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군사 3천 명을 이끌어 부여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 편 군사가 적다고 하며 이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인귀가 말했다.
"병력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우리 군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가 또한 부여성을 점령하자, 부여천 안에 있는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시어사 이 언충이 임무를 받들고 요동에서 귀국하였다. 고종은 "군대 내부 상황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전에 선제께서 고구려에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됨으로써, 적의 내부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기 전에 80대장이 있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 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들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항상 수탈을 당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천 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냈는데, 설하수에서 이 적 등과 조우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사망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적은 대행성으로 진격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 나라 허 경종이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 이 적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 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승리하자, 다른 도로 출동하였던 제군이 모두 이 적과 만나 압록책으로 진군하여 왔다. 우리 군사가 대적하여 싸우다가 이 적 등에게 패배하였고, 이 적 등은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켰다.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연이었다. 설필 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 적의 군사가 뒤따라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 장이 천 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 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그러나 천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그는 자주 군사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배하였다. 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이 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 적은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 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겨울 10월, 이 적이 귀국하려 하자, 고종이 그에게 먼저 고구려의 왕 등을 소릉에 인사시킨 후,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서울로 들어와 다시 태묘에 인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12월,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를 전해 받았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원외동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천 남산은 사재 소경, 승려 신성은 은청 광록대부, 천 남생은 우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적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정도에 따라 주었다. 천 남건은 검주로 유배시켰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 대장군 설 인귀를 검교안동도호를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진무케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었다.
2년 기사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4월,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경서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함형 원년 경오 여름 4월,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으로 되어있다.]을 임금으로 세웠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 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2년 신미 가을 7월, 고 간이 안시성에서 우리의 남은 군사를 격파하였다.
3년 임신 12월, 고 간이 우리의 남은 군사와 백빙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격파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고 간이 이를 다시 격파하여 2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4년 계유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대장군 이 근행이 호로하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의봉 2년 정축 봄 2월, 항복한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 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 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있던 자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왕은 요동에 도착하여 당 나라에 대항하고자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하였다.
개요 원년, 왕이 앙주로 소환되었다가 영순 초에 사망하였다. 고종이 그에게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영구를 서울로 오게 하여 힐리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다. 묘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수공 2년,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 초에 좌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구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원화 13년에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쳤다.
저자의 견해 : 현토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