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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호 하부 임청각 근처 다리건너 용상에서 출발
저번구간에이어 4구간을 이어가본다
상주보까지 90km가 넘을껏같기는한데 70km라고 하기도하고
최대한 멀리가보자 생각하고 출발한다
삼강주막에서 일박하고 이튿날 상주보까지~
명박이 씨야가 빤질빤질하게 빠대놓은 강길
발바닥은 불이나겠지만 사서하는 골빙길
산자락이 머리숙이고 바람이 쉬었다가고 물길도 쉬었다가는 그길위에
나역시 물아일체가되길 바라면서 흘러가본다
고행보따리 아무리작게 꾸릴라캐도 8.6kg가된다
항상 갖고다니는 물품외에 먹을거 이것저것 .....등등
낙동강의 시발지가 아니고 낙동강 잔차종주 시발점인것같다
반변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곳
반변천은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에서 용전천과 합류하여 임하댐을 이루고,
안동시 길안면 신덕리에서 길안천과 합류하여 서류하다가 안동시 정하동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주류의 길이는 109.4㎞, 유역면적 1973.11㎢의 낙동강의 1차 대지류이다.
반변천위에 놓인 잠수교 아침에 운동나오신 분들도보이고~~~
영남의 3대누각이며(밀양의 "영남루"진주의"촉석루"남원의"광한루"와 더불어 누각으로는 유명한 곳이다
영호루가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때의 일이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남쪽으로 몽진하여 경상북도 안동에 이르게 되었다.
공민왕은 자주 영호루에 나아가 군사 훈련을 참관하고 군령을 내렸으며,
배를 타고 유람하거나 물가에서 활을 쏘며 심회를 달랬다.
홍건적이 물러나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도 이곳을 잊지 못하여 1366년(공민왕 15)
겨울 친히 붓을 들어 ‘영호루(映湖樓)’ 석 자를 써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권사복(權思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주었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1274년(원종 15)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1274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367년 안동 판관 신자전(申子展)이 영호루의 규모가 작아
공민왕이 내린 현판을 걸기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영호루의 위치를 더욱 물에 가깝게 하고
규모를 크게 확장하여 중수하였다. 1488년(성종 19) 김질(金耋)이 중수하고,
1547년(명종 2) 홍수로 유실되자 5년 후인 1552년(명종 7) 부사 안한준(安漢俊)이 복원하였다.
1605년(선조 38) 두 번째 유실이 있었고, 71년 후인 1676년(숙종 2) 부사 맹주서(孟冑瑞)가 복원하였다.
1775년(영조 51) 세 번째 유실이 있었고, 13년 후인 1788년(정조 12) 부사 신익빈(申益彬)이 복원하였다.
그러나 1792년(정조 16) 또다시 유실되어 4년 후인 1796년(정조 20)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복원하였다.
1820년(순조 20) 부사 김학순(金學淳)은 영호루를 중수하고, 자신이 쓴
‘낙동상류 영남명루(洛東上流嶺南名樓)’라는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1934년(갑술년) 7월 안동시 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로 또 한 번의 유실이 있었고,
1970년에는 안동 지역민들이 모금한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옛 영호루 자리에서
강 건너편인 현재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한식 누각을 새로 지었다.
현재 영호루에 걸려 있는 공민왕이 썼다는 현판은 홍수로 영호루가 유실될 때마다 그 운명을 함께하였다.
유실되었던 현판은 한두 해 또는 십여 년 뒤에 가까이는 안동시 풍산에서 멀리는
경상남도 김해에서 그때마다 수습되었다. 따라서 영호루의 복원은 현판의 횟수와 늘 함께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현판은 1934년의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그해 가을 경상북도 구미 부근의 강물에서 회수한 것이다.
-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영호루에서 바라본 안동시내전경
선생의 옥중에서쓴 "사관"이라는 글을 옮겨본다
사람의 일생이 길어야 백 년이니
한 번 세상에 떨어지면 죽음이 이미 따른다
달은 얼마 아니 되어 어두운 밤으로 돌아가고
꽃은 열흘이 아니되어 진흙으로 떨어진다
성인만이 의를 취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니
구차하게 살려고 하면 어리석음을 면하지 못 한다
어디가 태평천국인가
청산은 말이 없고 풀만 흩어져 무성하다.
항일의열투사 김지섭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풍산(豊山) 김씨(金氏)인
부친 김병규(金秉奎)와 모친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자(字)는 위경(衛卿)이고 호는 추강(秋岡),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어릴때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학문에 출중하여 천재의 칭송을 받았고
일찍이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에 능통하였다.
특히 집안의 숙부되는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이 학문을 터득하였다.
15세에 인근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竹林洞) 예천(醴泉)권(權)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와 혼인하였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같은 성격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벌인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의사는 일어를 배추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습득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과 금산 지방법원(錦山地方法院)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되자 자신도 공직을 분연히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김원봉(金元鳳)․곽재기(廓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시국을 담론하여
조국독립운동방략에 대하여 숙의하였다.
1923년 9월 1일 도쿄 일대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혼란을 기회로 삼아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대량 학살하였으며,
이러한 만행에 대하여 1924년 1월 5일 도쿄 일본왕궁 입구(이중교)에 폭탄을 던져
일본왕에게 학살만행의 책임을 물었던 사람이 바로 경북 안동 출신 추강 김지섭의사이다.
중앙선이 놓여있는 안동철교
경기도 양평군, 강원도 원주시, 충청북도 제천시·단양군, 경상북도 영주시·안동시·의성군·영천시를 지난다.
일본은 내륙일대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조선·만주·일본 간의 여객·화물의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이 노선을 건설했다. 1935년에 노선이 확정되어 중앙선이라 하고,
1936년부터 실측공사에 들어갔다. 1939년 청량리-양평간 52.5㎞를 시작으로 안동-단양간 73.5㎞가
1942년 2월 개통되면서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일본은 구간을 경주까지 연장하여
노선명을 경경선으로 개칭했으나 1945년 10월 중앙선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중앙선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역에서 충북선에, 제천역에서 태백선에,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역에서 경북선·영동선에 연결되어 영동·영서 지방을 잇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임천서원이 자리하는 용암지맥끝자락
용암지맥은 그리길지않은 것으로안다
풍산대교 다리밑 이제 풍산으로 접어듭니다
*낙암정*
이 정자는 문종<文宗> 원년(1451)에 배환<裵桓>공이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하네요.
조선<朝鮮> 순조<純祖> 13년(1813)에 중건<重建>하였으나
그 후 퇴락하여 고종<高宗> 18년(1881)과 1955년에 다시 중수하였답니다.
낙암정가기전 데크에서 바라본 풍산대교
북대구에서 춘천까지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위 다리이며 우측끝에는 안동휴게소가 자리한다
*상락대*
상락대(上洛臺) 회곡 남쪽 강 건너 있으며 洛東江이 흐르고 마암절벽이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상락대 고려 후기의 명장 金方慶이 즐겨 유상하던 상락대는 豊山邑 丹湖洞 지경으로 남후면 검안 속칭
대애실 앞 眉川 물이 낙동강에 合流하는 목중이에서 서쪽으로 약 5里 지점이다.
南先面 亭上洞 앞에서 半邊川을 합쳐 영호루 앞을 지나며 밋밋하게 서남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水下洞의 속칭 무주무 마을 앞에 이르러 우회전으로 꺾여 북으로 ㄱ자를
그려 松峴·막곡(安東市와 豊山邑의 경계) 앞까지 깊숙히 들어 갔다가 소쿠리형을
그리며 남으로 되돌아 나옴으로 완연히 ㄹ자를 그리고 나서 桂坪 洞 속칭 윗절마을 앞에
이르러 완만히 굽이를 틀어 잠시 서쪽으로 흐르고 속칭 아랫절마을 앞에 이르러 북서로 방향을 바꾼다.
강굽이가 북서로 꺾이는 아랫절마을 對岸. 길게 이어진 철길 절벽이 검푸른 강물,
沼를 굽어보며 굽이굽 이 山水의 寄景이
펼쳐지는데 金方慶이 노닐던 상락대가 바로 여기이다.
상락대에서 江기슭을 거슬러 굽이를 돌아 오르면 江心에 드리운
절벽 위에 古色?은 한 채의 정자가 있는데 世宗대의 文臣 裵桓(杜門강 洞 七十二賢인 裵尙志의 아들)이
은퇴하여 만년을 지내던 별장이다.
그 동쪽엔 馬岩이 있어 절벽이 천길이나 깎아지르고 마암 서쪽엔 石臺가 서려 돌아
그 기괴함이 이를 데 없다. 그 아래 못이
있는데 배를 대고 오르면 石臺는 수십명이 앉을만큼 넓다.
바위틈에는 부추가 많이 나 있는데 金方慶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지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강굽이 절벽 아래 깃든 上洛臺 一境 은 江을 사이에 둔
들녁 저편에 마을이 빤히 건너다 보이지만 고요하고 깊숙한 맛은 그대로 속세를 멀리 떠난 심산 유곡이다.
등 뒤에는 온통 울창한 숲과 천길만길의 위태로운 절벽이
저 멀리에 까지 이어 뻗고 앞은 널따란 소를 이루어 검푸른 강물이 유유히 굽이치며
太古의 자연 그대로 원시의 정적이 고스란히 이어 흐르는 천고의 秘境이다.
*낙강정*
낙강정(洛江亭)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아담한 건물로 마애(磨厓) 권예(權輗) 선생의 정자이다.
안동권씨인 권예는 151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519년 己卯士禍때
조광조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전해진다.
원래는 예천에 있었던 정자를 이곳으로 이건하였다고 하며 당시의 이건기와 상량문이 있으나
자세한 연호를 기록하지 않아 확실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단호교*
병산서원앞 352봉
*병산서원*
사적 제260호. 1613년(광해군 5)에 창건되었으며 유성룡의 위패를 모셨다.
원래 고려 말기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 유진을 추가 배향했으며, 1863년(철종 14) 현재의 이름으로 사액받았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았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 가는길에 만난 분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인문학을 하시는 분인데
책을 내시기위해서 걸으러 오셨다고 하네요
조만간 "금호강"길을 걸어러 가신다고 잠깐얘기를 나누고 각자의 길로 갑니다
안도현 시인의 "낙동강" 함읽어보시구요
"서애 유성용 할배네집"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1542년(중종 37년) 10월 1일,
외가인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사던 그는 세 살 어린 이순신을 만난 뒤 평생의 후원자가 된다.
1558년(명종 13년) 17세 때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결혼했고, 1562년(명종 17년)
1568년(선조 1년), 사헌부 감찰 직에 있던 유성룡은 사신 이후백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갔다.
당시 그는 명나라의 태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왕양명과 진백사의 학문을 유학의 정통으로 여기던
그들에게 설문청이라는 학자를 소개함으로써 충격을 주었다.
그처럼 유학의 본고장에서 자신의 뛰어난 학문을 과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같은 요직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학식이 뛰어난 관리가 마음껏 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의 혜택까지 받았다.
유성룡은 39세였던 1580년, 부제학에 임명됨으로써 조선의 유학을 선도하는 인물로 인정받았다.
1582년, 대사헌으로 임명된 후 중국의 역대 황제들의 은덕을 모은 《황화집서》,
1583년 나라를 지키는 방책을 궁리한 《비변오책》, 1585년 《정충록발》을 지었고,
1986년 《포은집》을 교정하는 등 활발한 학문 활동을 펼쳤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유성룡은 1588년 조선의 학문과 지성,
정신의 최고봉을 상징하는 양관대제학의 영예를 얻기에 이른다.
양관대제학이란 한 사람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는 것으로 속칭 문형(文衡)이라고 한다
그는 경상도 의성 땅 사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글을 배웠다.
그가 이웃 고을 안동의 도산(陶山)에 가서 글을 배운 것은 21세 때였다.
이때에 퇴계 이황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글방을 열고 제자들을 기르고 있었다.
특히 이황의 문하에는 조목(趙穆)과 김성일(金誠一) 등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선배로 활동했다.
그가 주자의 《근사록(近思錄)》을 들고 이황에게 중요한 항목을 물어 나가자,
이황은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며 칭송했다. 그리하여 선배인 조목과 김성일,
그리고 정구 · 김우옹과 함께 퇴계학파의 줄기를 잇게 된 것이다.
그는 3년 남짓 이황 밑에서 글을 읽고 벼슬길에 나섰다.
그가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었을 때나 낮은 벼슬아치가 되고 나서는
스승 가까이에서 글을 익힐 수가 없었다. 특히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오고 인사권을 쥔
이조정랑을 지내는 바쁜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황을 만난 지 7년 만에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듬해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30세에 말미를 얻어 안동 낙수(洛永)의 서쪽 언덕 밑에
스승의 학문을 전수하기 위해 서당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이 서쪽 언덕의 뜻을 따 ‘서애(西厓)’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
일찍이 이황은 임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학문을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관에 ‘처사’라고만 쓰고 벼슬 이름은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진심으로 산림처사를 표방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인들은 조목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벼슬길에 나와 활동했다.
유성룡도 곧 서당 짓는 일을 거두고 다시 벼슬길에 나왔다.
그 뒤32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복상한 기간, 그리고 홀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 가까운 곳의 벼슬자리를 원하여 33세 때 1년 남짓 상주목사를 지낸 것과
그 뒤 잠시 경상관찰사를 지낸 것 외에는 중앙의 요직에서 거의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순탄한 벼슬길에서 도승지 · 대제학 · 이조판서 같은 요직을 거쳐
1590년(선조 23) 우의정에 올랐다. 48세로 정승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출세는 문벌의 덕을 본 것도 아니고 이황의 후광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능란한 처세, 신중한 몸가짐과 선조의 남다른 신임도 작용했다.
이즈음 조정은 동인 · 서인으로 갈라져 대립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동인에 속했지만 상대 당파에 대해서도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동인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질 때에, 그는 온건파인 남인에 속했다.
그가 정승으로 있을 당시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들이 무수히 걸려들었다.
동인에 속한 벼슬아치들이 속속 쫓겨나거나 귀양 가거나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끝내 자리를 지켰다.
그의 이름이 연루자들 속에 끼여 있을 때에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는 자핵소(自劾疏)를 올렸다
유성룡은 또 하나 중대한 일에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한 뒤,
그동안 중단되었던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해 왔다.
이를 놓고 조정의 의논이 어수선할 때 그는 통신사를 파견하여 저들의 속셈을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왜가 내침하면,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없는 조건을 들고 그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의 의견은 첫째, 삼남지방에 연거푸 흉년이 들어 민심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둘째,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여 적을 막을 군사력이 부족하고 셋째,
왜적의 동향을 탐지하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의견에 따라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한 황윤길, 곧고 기개가 넘치는 김성일,
이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허성을 통신사 일행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일본의 국서에 담겨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들어갈 터이다”거나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길을 빌리자”는 따위의 내용을 놓고 조정은 또다시 의견이 분분했다.
각각의 의견이 팽팽히 맞설 때 유성룡은 커다란 회의에 빠졌다.
그는 결코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사실 조정의 대신들도 많은 의구심을 가졌고, 선조도 이 문제에 대해 무척 고심했다.
선조는 정승 박순에게 만일 왜구가 쳐들어오면 도원수감이 될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박순은 비록 신분이 미천하지만 지략이 뛰어난 정개청을 기용해 보라고 권고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유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했고 권율을 기용하라고 했다.
선조는 정읍현감 자리에 있는 낮은 벼슬아치인 이순신을 일약 전라좌수사로 삼아 바다를 맡기고,
형조정랑인 권율을 의주목사로 삼아 육지의 방비를 맡게 했다.
끝내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는 허겁지겁 몸을 빼서 서울을 떠나 개성에 이르러서
유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난의 수습을 온통 그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반대파는 쫓겨 가면서도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고 그를 매도했다.
곧 통신사의 파견을 주장하고 왜의 국서 내용을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몰아붙인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이 함락되는 시기에 그는 파직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승이 맡는 임시직인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소임을 띠고,
군량미를 거두어들이고 의병봉기를 격려하는 한편 명나라와의 파병 교섭을 추진했다.
그는 겁쟁이 선조가 중국 요동이나 함경도로 처소를 옮기려 할 때,
의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군과 의병에게 반격의 기세를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처럼 대들었던 것이다.
선조는 유성룡의 강경한 요구를 속으로는 싫어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민중들은 선조의 어가에 돌멩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등 저항의 기세를 보인 것이다."징비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어릴때 살았던 울집이랑 똑같다
"ㄱ"자집에 조그마한 마루까지 어쩜 구조까지 ~~~
저기에는 양반집 종들이 살았지싶은데 그럼 나도 노예집의 자식 ? ㅎ
피는 속일수없나보다 노예근성 !!! 그런데 왜 "김해김씨" 왕손은 거짖말? 헷갈리네
뭐 노예면 어떻고 왕손이면 뭐하나 현실에 사는게 중요한게 아닐까
문제는 한번씩 튀어나오는 그놈의 노예근성 ㅎ
ㅎ~~ 기가차서 말이 안나옴
랑랑인지 잉잉인지 태풍에 섶다리가 떠내려가 배가 운행을 안한다네
무슨 이런일이 ㅈㄹ도 가지가지한다
빙빙 돌아가야한다니 구담까지 !!! 할수없지
피할수없다면 즐겨야지 주차장에가서 콜라 한비하고 께끼 두개물고
풍천면쪽으로 바지런히간다
출발도 예상보다 한시간 가까이 늦었는데 우야노
삼강주막까지가야되니 마음만 급해진다 시간당 5.5의 속도로가본다
마음은 급하고 해는 떨어질라카고 배는 고프고 ~~~
빙빙돌아 구담이 저앞에 보인다
냄새나는 쇠고기 국물이라도 한저까치 묵어야될낀데 우짜노
둑방에 올라보니 이놈의 자슥들이 세멘트길에 흙을 깔아놓은거 까지는 박수칠일이나
삐대놓지는 안았네 으이구 신발에 돌이구 흙이구 막들어간다
어쨋든 고지가 눈앞이다
저기가면 삼강주막이 한십여키로 남았을같은 예감 ~~~ 희망을 가져본다
구담도착
간판을보니 어라 ??? 삼강주막 25.2km란다 진짜 순간 머리속이 하예진다
버스가 있길래 기사한테 물어보니 30키로란다
시계는 5시가까이를 가르킨다 여기서 숙박 ?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어쩐다
그럼 내일은 삼강주막에서 시마이! 안되지 상주까지가야 계산상 맞아떨어지는데~~~
텐트도 안가지고 왔잖아
안동선비님께 정확한 정보를 알려고 전화드린다
곧어두워지니 무리하게 진행하지말라고 하신다
자기가 호텔은 빌려드릴테니 나중에 한턱쏘라고 하시면서~
에이 모리겠다 갈데까지가보자싶어 일단출발한다
가다가 지치면 풀밭에라도 드러누워 쉬다가 가지뭐 ~~
최대한속보로 가다보이 어느새 암흑천지가된다 조용하니 만고좋다
조그만 불빛에 의지해 하염없이 걷고또걷는다
낮에는 그많던 능금밭은 왜? 없는거야 하나 슬쩍할라캤더니만
얼마나 갔을까 ? 선비님 저나오신다
요기에 기다리신다고 문자보내났다고 확인해 보라신다
알았다하고 부지런히간다
두시간남짓 걸었나보다 차가한대 뚝방길로 내려온다
이밤중에 아베크족인가 ? 걸음은 더빨라지고 ~~
가까이가보니 선비님이시다
밤중에 걱정이되신가보다
정맥에서 신세지고 또신세를 지게된다
그기에서 호텔두동을 분양하고 저녁을먹고 꼬꾸러진다
첫댓글 강가는날 비오고
다리는 떠내려가고 배는 운행하지않고
해안 가는날 태풍치고
참 힘들게 합니다
그래도 힘내서 즈려밟고 가십시요
오늘 지리산 코스
형님조언으로
신의한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삶의 무게와
배낭무게와 비슷한듯합니다
20킬로이상 메고
다니면. 처음은 어깨가
빠질듯한 고통이있는것 같지만
바로 적응하는게
삶인것같습니다
멋진발걸음
응원합니다
이글스님 4대강 길 꾸준하게 진행 하시네요.
주변의 새로운 모습들 즐감합니다.
항상 무탈하고 즐거운 걸음걸이가 되세요.
발바닥은 괜찮으신가 모르겠습니다.
아스팔트 걷다보면 발에 물집 많이 잡힐텐데요.
홀로 유유자적하며 걷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애스럽기도 합니다.
즐기며 걸으시겠지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