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보의 변辯 / 김나현
손바닥만 한 땅을 세내었다. 땅심도 있어 보였다. 종일 볕이 드는 지대라 텃밭처럼 채소를 가꾸기에는 그만일 것 같았다. 한데, 가벼운 소일거리 정도로 여긴 애초 생각이 크게 빗나갔음을 오래지 않아 땅이 일깨워 주었다. 지속적이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시작한 농사도 아니었다. 통나무집을 짓고, 순전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월든』의 저자 소로우처럼, 축소판 농사로 작은 땅에 있으면 불끈 힘을 얻었다.
김매기는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여남은 평 땅에서 뻗쳐오르는 풀은 끈질겼다. 풀은 기특하게 커가는 채소 사이사이로 훼방꾼처럼 빈틈없이 머리를 내밀었다. 잠시라도 발길이 뜸하면 내 작은 밭은 그야말로 잡초 반 채소 반이 되어버렸다. 비 온 뒤에 가보니 지지대를 받치지 않은 고추는 뿌리가 들떠 비스듬히 쓰러졌다. 키가 웃자란 상추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서로 뒤엉켰다. 줄기를 뻗기 시작한 호박 넓적한 잎이 고추밭을 덮다시피 했다. 찬거리 하겠다며 기대에 부풀어 심은 고추며 감자, 부추, 열무는 못 먹고 자란 아이처럼 꺼칠했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꼴 베기며 나무하기, 모심기, 벼 베기 등 안 해본 들일이 없다. 이렇게 농사짓는 사정을 모르지 않는 내가 게으르다고 손가락질 받게 생겼다. 자꾸 이웃한 밭을 거들떠보게 된다. 이는 필시 힘 다해 키우지 못한 자격지심에서일 거다.
가끔 산행객이 두렁길로 지나가다 밭 구경을 한다. 이들 시선도 부담스럽다. 올망졸망 붙은 주변 다랑논을 둘러보면 보나 마나 내밭은 한마디씩 거들기 좋은 모양새라 그렇다. 아침마다 들러 토닥토닥 손보고 가는 그들 밭 채소는 함치르르하다. 그에 비해 마지못해 후다닥 발 도장 찍는 내 밭은 주인이 파종만 하고 팽개친 밭 같다. 손바닥만 한 밭농사로 이렇게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될 줄이야.
밭을 넘겨받았을 때 무슨 농사를 지으려 했는지 밑거름도 잘 되어 있었다. 거름기를 씻어낸 듯 척박한 땅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상추는 별로 쏟은 정성 없이도 무럭무럭 자랐다. 보드랍고 싱싱하여 단맛이 나는 상추 덕분에 삼겹살을 실컷 구워먹었다. 주변 사람과 나눠 먹는 즐거움도 누렸다. 어떤 퇴비나 거름도 삽으로 땅을 깊이 파서 뒤엎는 것에는 견줄 수 없다고 했다. 호미로 땅을 쪼는 정도의 힘만 쓰고서 삼겹살을 신나게 구워먹은 입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라면 거뜬히 지을 수 있겠다고 가벼이 여겼다.
그런데 웬걸, 기온이 오르고 습한 여름에 접어들자 사정이 달라졌다. 웃자란 상추 줄기 끝엔 꽃이 피고, 덮쳐오는 집요한 풀의 기세에 어이 상실일 지경이었다. 나도 풀이 꺾여 슬슬 뒷걸음질 치고있었다. 사람들은 시꺼먼 비닐로 땅을 덮어 풀이 질식하게 수를 썼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과 벗하리라며 벌인 농사에 전업처럼 매달릴 짬도 없을뿐더러, 농사폐기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을 합리화할 그럴 듯한 핑계였다.
해가 긴 여름 저녁나절, 시원할 때 풀을 뽑자며 일복으로 갈아입고 밭으로 갔다. 손에 잡히는 대로 풀을 뽑다 보니 사위에 금세 어둑발이 내렸다. 산기슭 어둠은 금방 짙어졌다. 무서운 생각이 순간 덮쳐 허겁지겁 밭을 돌아 나오는데 섬광처럼 떠오른 단어 하나가 있었다. 바로‘초보’라는 말이었다. 마치 도를 깨우치듯 뇌리를 친 단어에 부족함을 인정하자며 맘을 죄던 부담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농사꾼의 딸인 나는 초보가 아니라 초짜였다. 어설픈 농사꾼의 한계였다. 이참에 돌아보니 나는 두루 초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초보딱지를 떼어낼 때쯤 어깨통증으로 포기한 수영이 그렇다. 성급하기만 해서 결과물이 신통찮은 도자기 만들기에도 만년초보로 머물고 말았다. 남들처럼 깊이 정진하지 못하는 사진에서도 슬렁슬렁 겉돌기만 하고 있다. 그뿐인가. 절편을 잘한답시고 찹쌀을 넣어 더위에 늘어난 엿가락처럼 질게 했다. 결혼 30년 차에 주부 초보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게다. 이것도 슬쩍 건드려 보고, 저것도 건성으로 맛보기 하며 전만 펼쳐놓았다. 딱히 이룬 게 없다. 고작 여남은 평의 농사에서 누구도 충고해 주지 않은 진실을 터득한다.
비가 온다기에 서둘러 감자를 수확했다. 이것 역시 주변 밭에 비하면 늦사리다. 많은 양도 아니고 알도 메추리알 굵기를 겨우 넘어섰다. 그래도 여름은 날 것 같다. 콩알만 한 감자도 버리지 않고 주워 담는다. 기대가 컸던 메주콩은 호박넝쿨에 점령당했다. 처음 목적이 소로우의 큰 양심처럼 작은 동물을 위한 것이었을 리가 없다. 모조리 거두어들일 욕심에 차 있었다. 이런 마음을 비웃듯 콩깍지는 쭉정이뿐인 거지주머니다. 마음을 비우고 빈 콩깍지를 대지로 돌려보낼 수밖에.
봄부터 내내 말간 생기를 주었던 그 땅으로 콩알 하나 거두지 못한 채. 밭농사랍시고 지으며 누린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월든 호숫가에서 완전한 전원의 삶을 산 소로우의 마음과 일치한다. “내가 진정 아끼는 만병통치약은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아침공기 한 모금이다.”바로 이것이다.
|
|
첫댓글 농사만큼 초보의 티를 드러내는 것도 없지요. 깐봤다간 큰일납니다.ㅎㅎ
애교스런 초보의 변, 깨우침만은 초보가 아닌 듯 싶습니다.
나현 샘, 다시 한 번 <화색이 돌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많이 바쁜와중에 수필집 출간한 것 정말 축하합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에 큰 박수 보냅니다. 그 어느 것도 초보를 거쳐야 프로가 되게겠지만 나현샘의 지나친 겸손 같슴다. 다 잘 해내는 능력이 부러울 따름임다. 책 제목처럼 표지처럼 환한일 많기를 바랍니다.
나현샘, 두번 째 수필집<화색이 돌다>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행사에 오시면 만나빕고 직접 축하의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늘 샘의 얼굴이 화색이 돌길 기원합니다.
밭농사 짓는 거라면 초보라고 해야 할지. 여름에는 풀과의 전쟁, 호미가 닳도록 싸움을 했건만 일주일만 되면 원위치...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싶어요. 그래도 손수 기른 채소를 나누는 정은 참 뿌듯하였지요. 김나현 샘 정감이 가는 수필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필집 출간 크게 축하합니다.
선생님들,,출간 격려 감사합니다.
또 한 권의 분신을 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후련하고 애틋하고 그렇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