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촌방향>은 2010년 12월10일부터 27일까지 7회차에 걸쳐 북촌 일대에서 만들어졌다. 여섯 번째 촬영과 마지막 촬영 사이 4, 5일의 휴지기가 있었다. 홍상수 감독이 들려준 거의 모든 대답의 서두였던 30여번의 “기억이 잘 안 나는데”는 생략했음을 일러둔다. <북촌방향>의 스포일러가 불가피하게 포함돼 있다.
-전작 <옥희의 영화>는 모든 여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이런 극한 상황에서 만들면 어떤 것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나는 어떤 상태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으로 시작된 걸로 기억한다. <북촌방향>의 시작은 어땠는가.
=<옥희의 영화>를 2009년 겨울에 찍은 뒤 영화제 다니고 개봉시키다보니 뭘 했는지 모른 채 시간이 갔다. 2010년이 가기 전에 새 영화를 찍어야지 생각했다. 실은 그 사이 전북 부안을 다녀왔다. 부안에서 찍을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아 어딘가에 들어가 잠시 생각을 하고 싶었다. 마침 PD가 아는 분이 싸게 해준다고 해서 인사동 레지던스 호텔에서 이틀을 보내게 됐다. 객실은 높은 층이었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는데 바로 내려다보이는 동네가 북촌이었다. 무심코 쳐다보다가 저기서 그냥 찍을까보다 싶었다. 내가 강북에서 가는 동네가 북촌밖에 없기도 하다. 밥집도 비슷한 두세곳만 가고 커피집도, 술집도 가는 데만 간다. 주인공이 한 장소를 세번 연달아 가는 이야기를 해보자 하는 안(案) 정도만 들고 시작했다.
-<옥희의 영화>는 재직하는 학교에서 대부분 찍었는데 이번에도 감독 본인이 일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영화에 들어온 셈이 됐다. 일부러 그 동네 레지던스를 고른 게 아니니 처음부터 우연이 작동한 것 아닌가.
=그런 일, 참 많다. (미소)
-<옥희의 영화>는 진구(이선균)의 하루를 그린 1부가 만들어지고 2부, 4부, 3부 순서로 하나씩 붙어나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북촌방향>은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이 서울에 온다”가 유일한 모티브였나? 아니면 몇명의 인물 구도가 있었나.
=처음에 유준상씨를 정했고 이어 순서는 확실치 않지만 송선미, 김보경, 김상중씨와 같이 하자고 했다. 결정돼 있던 것은 같은 장소를 여러 번 간다는 정도였고 배우들을 하나씩 정하는 과정에서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하는 시간이 한달 정도 있었다. 억지로라도 (트리트먼트를) 써서 들어갈까 망설이다 결국 아무것도 없이 들어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할 때는 다만 열쪽이라도 트리트먼트가 있었고 <하하하> 때도 짧아지긴 했지만 있긴 했는데 <옥희의 영화>는 1부 이야기만 촬영 며칠 전에 정했고 <북촌방향>은 전체 틀이나 전개가 전혀 없이 일기처럼 틈틈이 써둔 약간의 메모뿐이었다. 그냥 하루하루 찍어가자, 어찌 되나 보자 했다. 직감적으로 심어놓은 대사 하나가 다음 촬영 회차에 연결되어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식으로 6회차까지 어려움없이 갔다. 6회차에 술집 ‘소설’을 성준이 마지막으로 나서는 장면까지 찍고 마무리를 생각하기 위해 모두에게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눈 온다는 말이 있어 날씨를 기다리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영화의 결말에 눈이 오길 바란 건가.
=그렇다. 그러다 촬영 전날인 26일에 어떻게 찍을지 결정하고 백종학, 기주봉, 백현진, 고현정씨에게 연락을 했다. 세 분은 우연히도 이튿날 사정이 허락됐고 고현정씨는 밤에야 통화가 됐는데 중요한 선약이 있는 상태였다. 직접 찾아가 마지막 신이 될 것 같으니 죄송하지만 그 약속을 미룰 수 없냐고 부탁했다. 고맙게도 들어주었다.
-마지막 장면의 행인이 반드시 고현정이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존재감이 강한 배우라 앞의 내용을 삼켜버리는 역효과를 우려할 수도 있는데.
=물론 사정이 안된다고 했으면 어떻게든 다른 분을 구해보려 했겠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데 그냥, 거기 고현정씨가 있어줬으면 했다. 내가 믿는 배우가 그 자리에 떡하니 있어야겠다 싶었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고현정씨였다.
-인물들이 돌아다니는 북촌의 여러 장소 중 감독 머릿속에서 중심이 된 곳이 있었나.
=미리 한곳을 정해봤자 가게 주인이 한회차 촬영 뒤 마음이 변할 수도 있지 않나. 장소이용료를 많이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언제나 내 머리 밑바닥엔 예기치 못한 어떤 사정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바꾼다는 생각이 있다. 단 중심이 술 먹는 장소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식집 ‘다정’에서도 술은 마실 수 있지만 ‘소설’이 자리한 골목의 모양새, ‘소설’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 실내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어서 그곳으로 정했다.
-<오! 수정>에 이어 두 번째 흑백영화다. 흑백으로 가자는 결단은 어느 시점에 어떻게 내려졌나.
=편집하는 도중에 한번 흑백으로 바꿔보았는데 딱 맞는 느낌이 들어서 김형구 촬영감독에게 양해를 구했다. 여러 차례 함께 작업해본 터라 내 방식을 이해해준다. (웃음) 단순하게 눌러주는 느낌도 있고…. <오! 수정>도 그랬지만 내가 약간 겨울을, 특히 서울의 겨울을 흑백으로 볼 때 더 예쁘게 보는 면이 있나보다.
-홍상수 영화에 대해 “이 영화로 뭘 이야기하고자 했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모티브를 찰흙덩이처럼 감독이 던져놓으면 배우와 그날의 조건이 붙어가며 영화가 몸을 불려가는 방식이니까. 이제 우연이 영화를 밀어간다는 확신을 갖고 작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총괄하는 질문은 “이번에는 그 우연이 얼마나 원활하게 작용했는가?”가 돼야 할 것 같은데.
=6회차까지 순조로웠다는 아까 한 말이 그 대답이다. 1회차에서 성준이 아는 여배우를 만나는 장면을 찍으며 그녀가 “학생들을 만나기로 했다”는 대사를 짤막하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갈빗집에서 성준이 우연히 영화과 학생들을 만나지만 그들이 여배우의 학생으로 뒷부분에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엮여도 안 엮여도 상관없으니 혹시나 해서 짧게 넣었던 대사라 잊고 있었는데 결국 후반부의 장면이 됐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라는, 성준이 여배우에게 한 충고가 나중에 제작자(기주봉)에 의해 성준한테 돌아오는 것도, 6회차에서 “20분 안에 영화 관련된 지인 네명을 연이어 만났다”는 보람의 일화를 성준이 체험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인가.
=마지막 장면에는 당연히 앞서 찍은 모든 걸 사용할 수 있지 않나. 어떤 작품이건 촬영 중반이 지나고 나면 가끔씩 결말을 생각한다. 악착같이 고민하는 건 아니고 간혹 의식하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본다.
-앞에서 뿌린 단초를 거둬들이는 지점이니 결말부만큼은 우연과 생각의 비율이 좀 다르다고 봐도 될까.
=근데 생각이 우연을 통해 일어나지 않나. 중요한 사건과 포인트는 우연이 거의 다인데 그 사이를 우리가 인위적으로 연결시키며 한 덩어리로 만들기도 하고 폐기처분하기도 하는 거다.
-이번 영화에서 유준상의 의상은 감독 본인 스타일이다. 비슷한 옷인가, 진짜 감독의 옷인가.
=속에 입은 윗도리가 촬영 첫날 내가 입고 간 옷이다. 이번엔 내 옷을 안 주고 준상씨 옷 중에 괜찮은 게 있어 입기로 했는데 촬영 당일 그 친구가 자꾸 내 옷을 입고 싶다고 해서 봉고차 안에 들어가 바꿔 입었다. (웃음) (이에 배우 유준상이 밝힌 진실은 단순하다. “감독님 옷이라서가 아니라, 옷이 예뻐서 그랬다. 어릴 때 입던 팔꿈치에 가죽 덧댄 스웨터를 좋아했는데 요즘엔 안 나와 아쉽던 차에 감독님이 입고 오셨기에 빌려 입었다.”)
-서울에 도착한 성준의 첫 대사,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어. 그리고 집으로 슝슝!” 하는 대사가 단호하고 인상적이다.
=서울에 그런 마음으로 왔음을 설명하는 셋업(set-up)이다. 조금 빨리 가면서도 볼 건 보고 맛볼 건 맛보는 정도의 접촉은 있는 거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 만나 주저앉혀지고 싶지는 않고. 말로는 형만 본다고 하지만, 그런 마음이 없다면 형을 대구로 불러내리거나 형 집에만 처박혀 있었겠지.
-그러다 옛 여자인 경진(김보경)의 집 앞까지 같이 술 마시던 학생들을 끌고 간 성준이 갑자기 성질을 부리고 달아난다. 그걸 보면 성준이 평온한 상태가 아니었나보다 싶다. 보통 영화라면 성준의 진짜 목적지는 경진의 집이었는데 망설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우회로를 택했다고 볼 것이다.
=맞다. 여자 집에 가고픈 밑바닥 마음을 인정하지 않은 거지. 그러다 취하니까 구실로 경진네 근처 술집을 떠올려 “좋은 데 가자고” 학생들을 몰고 간다. 혼자서 가면 너무 스스로에게 뻔하니까. 막상 도착하니 내가 왜 얘들이랑 있나 싶어 말도 안되는 성을 내고 도망친 거지. (웃음)
-홍상수 영화는 여행 가는 영화와 안 가는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이번 배경은 서울이지만 여행지로서 서울이다. 주민의 서울과 여행자의 서울은 어떻게 다른가. 한편 성준은 서울에서 살다 지방으로 이사간 입장이기도 한데.
=그래서 주민과 여행자의 서울이 반반씩 있는 거다. 반은 여행지고, 반은 그의 모든 추억이 그대로 있는 곳. 섞여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처음부터 재밌더라.
-그와 관련해 섹스신을 빼면 여행기인데도 성준의 숙소가 끝내 불분명하다. 어디서 자는지 명시하는 장면이 불필요하다고 보았나, 아니면 반드시 지워야만 했나.
=“동생 집이 비어 있다”는 대사가 나오긴 한다. 근데 결국 큰 문제가 안되는 건, 이 영화가 하루하루 이어져 축적되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그날그날이 매번 첫날처럼 보일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텔이건 동생 집이건 묵었다 나오는 모습이 나오면 그건 명확히 이튿날이 되지 않나.
-<북촌방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옥희의 영화>는 한 배우가 연기하는 같은 이름의 사람인데도 인물의 동일성이 모호했는데, <북촌방향>은 시간의 동일성이 모호하다. 특히 술집 ‘소설’과 근처 골목 장면은 시간이 소용돌이치는 장소 같다. 인물들은 계속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고, 두 번째 나오는 상황을 처음처럼 받아들이는 리액션도 있다. 반면 영화의 일부를 덩어리로 보면 그 안에서는 최소한의 선후 관계가 보인다.
=성준과 영호(김상중)가 여배우(박수민)와 다시 마주쳤을 때 “형님 만난다고 하더니 만나셨네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럼 아까 만남이 먼저라는 건 확인되지만, 그 두 만남이 같은 날 오후 1시와 4시에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는 거다. 또, 형과 처음 만나는 신에서 영호가 성준에게서 생선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앞서 경진 집에서 나오는 신이 있지만 냄새가 이튿날까지 날 리는 없으니 형과도 첫날 만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감정이나 정보가 축적되어가는 축이 있고, 매일이 첫날처럼 보이는 축이 있다. 양축이 동시에 가고 왔다갔다한다. 이어지지도,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 느낌이 섞인다.
-‘소설’의 주인 예전(김보경)과 성준이 골목에서 두 번째 키스할 때도 성준은 지난번 키스를 기억하는데 예전은 모르는 일처럼 반응한다.
=70%는 정말 기억이 안 났을 가능성이 있고 30%는 여자가 내숭을 떠는 걸 수도 있다. 말하자면 축적되는 축과 축적되지 않는 축이 충돌하는 건데, 벽에 기대 다시 뽀뽀한 다음에는 돌연 예전이 성준을 “오빠!”라고 부른다. 그 순간 예전이 느낌상으로는 경진이 돼버린다. 과거의 경진과 지금의 예전이 한몸이 된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충돌이 터져버린다고 해야 하나.
-그 장면의 대사도 중의적이다. “돌아올게. 다 보내고” 하는데 술집의 동행을 보내고 예전에게 온다는 것 같기도 하지만 “모든 걸 버리고 너한테 갈게”라고 경진한테 말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현실적으로는 술집으로 다시 온다는 뜻으로 정리가 되지만, 성준이 “돌아올게”라는 말과, 부연하는 다음 대사를 조금 떼어서 말한다. (그 틈에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
-<북촌방향>의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조짐을 처음 느낀 건 성준과 경진이 침대에 쓰러지는 숏이 성준이 그녀의 집을 나서는 장면으로 거의 이음새없이 미끄러질 듯 연결된 장면이 나왔을 때였다. 거기까지는 사건과 시간이 반복 없이 직선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보통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관람했는데, 그때 타임슬립이 일어난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장면을 촬영한 시점에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결정된 상태였나.
=말한 두숏은 편집하면서 줄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침에 떠올라 애당초 그렇게 찍었다. 시간 구조는 경진 집 장면을 찍은 다음날이었나, 2회차 뒤에 그렇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럼 기자가 그 편집에서 받은 느낌은 영화의 뒷부분에 의해 사후적으로 덧씌워진 걸까.
=앞과 뒤는 계속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는 거다. 이후 경진을 문자메시지로만 등장시킬지 아예 현재 북촌으로 불러들일지는 망설임이 있었다.
-결국 골목의 뽀뽀장면에서 마치 유령 같은 방식으로 경진이 북촌에 오긴 온 셈이다. 전작에 꿈 시퀀스가 많은데 <북촌방향>에는 꿈은 없고 성준이 조는 장면만 하나 있다. 그래서 예전과 경진 중 한 여자가 꿈 시퀀스의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옥희의 영화>와 달리 김보경씨는 확연한 1인2역인데 배우에게 어떻게 설명했나.
=그런 부분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다. 그냥 대사를 써서 건네고 배우가 처음 읽는 걸 보고 대사와 신의 느낌을 배우가 받아들이는 방식이 내가 원한 방향이면 아무 말 않는다. 좀 오해한 듯한 구절이 있으면 교정하는 정도. 내 영화는 분석해서 인물을 이해한 다음 들어가는 영화가 아니니까. 대부분 아무 말도 더할 필요가 없는 걸 보면 배우와 나 사이에 무슨 작용이 분명 일어나는 것 같다.
-술자리에서 성준이 하는 대사에도 나오지만, 감독님은 심리적 동기와 결과가 직접 연결돼 있다는 걸 부정하는 입장이다. 심리적 인과로 그어지는 연속성이 삶에서 거의 의미없다는 입장인가.
=심리적 인과란 본인이 됐건 타인이 됐건 관찰자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거다. 본인이라 하더라도 관찰자의 제한된 정보와 목적에 의해 왜곡되고 관찰 당시 감정 상태에 의해 또 왜곡된 결과다. 실제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보따리로 꾸려낸 것일 뿐이다. 그 보따리가 삶의 총체적 그림을 제대로 그려냈다고 말한 순 없다. 거대한 하늘에 보따리 하나를 갖다대는데 눈앞에 바짝 대니 보따리밖에 안 보이는 거다. 가위로 잘라버리면 다 터져버릴 건데.
-그렇다면 인간 행위에서 책임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책임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에 뭔가를 더 할 수 있다고들 생각하지만 한발 물러나보면 과연 그럴까. 하고 싶고 할 수 있어서 하는 일을 책임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하고 다른 말을 통해서도 하는 거다.
-듣고 나니 여건이 안돼 영화를 못 만드는 거냐, 안 만드는 거냐는 질문에 성준이 “무슨 차이가 있나”라고 반문한 대사가 떠오른다. 동틀 때까지 술을 마신 손님들과 술집 주인이 눈 오는 아침에 택시를 잡아 차례로 떠나는 장면이 스산하면서도 아름답다. 사실 없어도 무방한 장면인데.
=그날 배우 전원이 모였는데, 그쯤에서 다들 모인 걸 안 찍으면 나중에 보여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던 게 그 장면의 단순한 이유다. (웃음) 촬영 끝난 배우들도 가지 않을 수 있다면 있어달라고 청은 했지만 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머물러 있었다. 근데 뭘 찍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웃음) 그래서 슬슬 큰길로 걸어나가 배우들 서는 위치를 정해주고 어떻게 되나 봤다. 세 테이크 갔는데 운좋게도 택시들이 원하는 타이밍에 도착했다. 통제? 전혀 안 했다. 기사는 보통 승객인 줄 알았을 거다. 한참 가다가 택시를 세우고 기본요금 내고 돌아오고 그랬다. (폭소)
-팬을 자처하는 여자(고현정)에게 사진을 찍히는 마지막 장면의 성준의 표정 때문에 이 영화가 악몽 같은 잔상을 남긴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 같다. 그 순간의 표정을 어떤 말로 배우에게 설명했나.
=집중하는 얼굴을 요구했던 것 같은데 기억 잘 안 난다.(유준상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특별한 말씀은 없었다. 당시에는 엔딩 장면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신이라고 생각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사진 찍히고 있는 상태에만 집중했는데, 나중에 그 신이 엔딩이 되고 나서는 라스트신인 줄 알았으면 그 얼굴이 안 나왔을 거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랬다면 그만큼 자연스럽지 않은, 다른 걸 의식한 얼굴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 현장 지척에 있던 정한석 기자는 홍 감독이 갑자기 몸을 기울이며 “준상아, 눈깔이 확 변해야 돼!”라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감독님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으면 “내 영화가 발전한다, 개선된다”는 개념이 없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 혹시라도 자연스러움이라든가, ‘더 좋아지는 것’의 기준이 있는지.
=내게는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태도와 세부적인 몇 가지 원칙이 있고 그게 시간, 사람, 배우, 무수한 우연과 맞닥뜨리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기만 하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목표점 같은 건 없다. 변한다고 말하기도 싫고 어디를 향한다고 말하기도 싫다.
-‘움직인다’고 표현했는데 머릿속에서 그 운동을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나? 분자들이 떠도는 운동 같은 건가 움찔거림 같은 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자리를 이동하는 것? 삶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공간은 이미 한계가 지어져 있는 것 같다. 유한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안에서 오늘은 A동에 갔다가 내일은 B동에 가서 살고 C동으로 갔다가 다시 B동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거다. 그때마다 ‘움직였다’는 쾌감이 있다. 같은 지점으로 돌아와도 그동안 내가 변했기에 새로운 걸 느끼는 쾌감도 있고.
-성준은 예전과 헤어지며 매일 일기를 쓰라고 당부한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가 일기의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있나.
=어떤 식의 일기냐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책임이나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어떤 틀거리를 갖고 그걸 내가 왜 잘 못 맞췄을까 후회하는 내용으로 일기를 쓴다. 그런 일기와 영화 만들기는 다르다. 그런데 다른 식으로 일기를 쓴다면, 매일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쳐다보는 행위라면 영화 만들기와 비슷할 수 있겠지. 쓴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물을 낳는 점도 같고. 하지만 흔히 쓰는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려고 쓰는 일기는 영화 만들기와 닮은 점이 없다.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미디엄을 통해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이니까.
무리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담배를 문다. 그를 뒤쫓아 나온 여자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여기 나오는 데에 몇 가지 우연이 작용했을까요?” 사실 남자가 기대한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고, 그래서 다소의 실망과 약간의 헛웃음이 교차되는 순간이지만, 이때 여자가 짓는 웃음과 그녀의 말투는 이 남자에게 새로운 기대를 심어놓는 듯 보인다. 여전히 ‘애교’라는 두 글자가 선명한 송선미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속이 뻔히 보이지만, 거부하고 싶지 않은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건 당연하다. “평소 내 모습이다. 애교스러우면서도 장난기 있는 그런 거. (웃음) 나는 잘 몰랐는데, 영화를 본 누군가가 말하기를 <북촌방향>의 나는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요부처럼 보이기도 했다더라.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송선미가 <북촌방향>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해변’의 기억 때문이었다. 홍상수 감독과 <해변의 여인>을 만들면서 느꼈던 “세포를 깨우는 자극과 신명”이 그녀를 북촌으로 이끌었다. “나이가 들고 그만큼 연기생활이 늘어나면서 더 그런 갈망이 많아지는 것 같다. 예전에 한 선배가 어떤 작품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요즘에 와서 깊이 공감을 하고 있다.” <북촌방향>에서 송선미가 연기한 여자는 영화과 교수 보람이다. 물론 ‘미모’의 교수라는 게 중요하다. 그녀는 자신을 매우 아끼는(사실 사랑하는) 영화평론가 영호(김상중), 그리고 북촌에 놀러온 영화감독 성준(유준상)과 술을 마신다. 이때 영호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심하게 대하는 송선미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은근히 갖고 노는 게 있는데, 좀 재밌더라. 한정식집에서 영호가 보람의 동의를 구하며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할 때, 보람이 ‘난 모르겠는데?’라고 하지 않나. 리허설할 때는 좀더 정색한 표정으로 연기했는데, 상중 선배가 민망해하셔서 촬영할 때는 약간 웃으면서 했다. 그게 오히려 더 얄밉게 보인 것 같다. (웃음)”
극중에서 영호는 보람에게 “넌 착해, 넌 재능이 많아. 남들이 부러워할 게 많아”라고 말한다. 송선미는 <북촌방향>을 네 번째 관람하면서 “사람들이 실제의 나와 대입해볼 수 있는 대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슈퍼모델이었고, 큰 부침없이 안정적인 연기생활을 해왔고, 무엇보다 여전히 예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오히려 여우처럼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잘 챙기는 편은 아니다. 스스로 이 사회를 살아가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열등감을 갖기도 했었다. <북촌방향>을 하면서 감독님이 ‘아직도 예쁜 걸 간직하고 있으니, 잘 간직해서 멋있게 나이가 들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 때문에 좀더 나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북촌방향>이 이전 작품들과 달리 자신의 속내를 내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도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함께 택시를 기다리던 장면을 주목해야 한다. 혼자 삐져나온 송선미가 비틀거리며 담배를 무는 모습은 찰나의 순간에도 보람이 지닌 피곤함과 사연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영화를 보니까 너무 리얼하게 나와서 당황했다. 실제로 술을 마시고 연기한 것도 아닌데, 너무 추해 보이더라. (웃음) 그런데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예전에는 대부분 곱게 자란 느낌으로 보여졌는데, 이제야 좀더 인간적인 모습이 보여진 것 같았다. 영화에서 내가 종종 짜증을 내는 소소한 부분들이 모두 나에게는 시원한 느낌이었다.” 송선미는 지금 <북촌방향>에서 느낀 만족감이 오히려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면서 자신을 흥분시킬 수 있었던” 느낌을 다른 작품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일단 고민을 제쳐두고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30년 뒤에도 지금을 추억하는 거다. 그때 되면 감독님도 머리가 더 희끗해졌겠지. 그래도 그때도 모여 같이 술을 마시면서 옛일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다. (웃음)”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홍상수의 영화가 점점 밝아지고 있다면, <북촌방향>은 가장 밝은 영화일 것이고, 송선미는 <북촌방향>의 가장 화창한 단면일 것이다.
나는 <북촌방향>의 시간의 체험록을 써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이 영화의 비밀을 밝히고자 한 것이 아니다. 작용은 무수한데 뜻은 없는 이 영화는 그래서 의미상으로는 밝힐 비밀이 없다. 그 표면들의 작용 자체가 비밀이어서, 느끼다보니 감정들이 비밀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초입에서 영화가 시간을 다룰 수 있다고 한 나의 표현을 지금에 와서는 기꺼이 바꾸려고 한다. 어떤 영화들은 시간을 다룬다. 많은 공상과학영화들이 시간을 다룬다(<소스 코드>). 얼핏 <북촌방향>과 비슷한 이야기인 것 같은, 시간의 고장으로 한 남자의 하루가 끝없이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할리우드영화도 시간을 다룬다. 시간을 다루는 건 문학도 할 수 있고 어쩌면 더 잘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영화들은 시간을 다루지 않고 시간을 체험케 한다. 언어로는 포착하기 힘든, 그 시간의 작용을 체험케 한다. “영화는 시간이 내게 하나의 지각처럼 주어지는 유일한 경험이다”라고 장 루이 셰페르는 말했다는데,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북촌방향>을 보고 나니 그의 말에 일부분만 공감이 간다. 영화라 불리는 모든 영화가 시간을 지각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주는 영화가 진정한 영화이고 그런 영화가 적을 뿐인데, 나로서는 <북촌방향>과 같은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다.
삶의 실체 혹은 그중 하나인 시간을 체험하고 나니 꼭 꿈을 꾼 것 같다. 물론이다. 표현상 그렇게 말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실체를 체험해놓고 기껏 꿈을 비유해 말하는 건 나의 무능함이지만 실체를 다 ‘알고 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체험한 다음에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일면으로는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여기서 핵심은 ‘꿈’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꿈 ‘같다’는 형용사에 있다. 비밀을 풀어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새로운 느낌을 새기게 된 것에 대한 감격에 있다. <북촌방향>에는 홍상수의 전작들과 달리 단 한 조각의 꿈도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 중 가장 긴 꿈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아직은 말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기이한 정서적 라스트신이자 에필로그, 거기에 정념이 가득 넘치는 건 당연하다. 당신도 나처럼 그 장면에 이르면, 우린 북촌의 꿈에서 또 다른 북촌의 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인가, 북촌의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면서 중얼거릴지 모른다. 이 영화는 탁월하게도 거기 멈췄기 때문에 그 두 가지 다 가능하게 하며 두 가지 다 아니게 하고 그 때문에 더없이 아름답다. 이제 끝에 이르니 내가 쓴 건 결국 북촌의 꿈, 북촌몽유록(北村夢遊錄)이 아니었나 싶다.
홍상수와 비견되곤 하는, 삶의 실체에 과격했던, 그래서 꿈 혹은 꿈과 같음의 미학을 맹렬히 시도했던,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분명한 차이를 지닌 그들 초현실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글에서 발터 베냐민은 “혁명을 위 한 도취의 힘들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 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그 핵심 내용을 “범속한 각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베냐민은 낡은 풍경에서 혁명을 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태도를 짚으며 “대도시의 빈민구역에서 신에게 버림받은 일요일 오후나, 새집의 비에 젖은 유리창을 통해 첫눈에 경험하는 모든 것”이라며 범속한 각성을 이뤄내는“사물의 숨겨진 정조”의 예들을 들었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사물의 정조 혹은 사람이 사물화되어 만들어지는 정조를 우린 수없이 열거할 수 있다. 지금은 <북촌방향>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하나로 대신하려고 한다. 술집을 나온 성준 일행(영화 속 배우들이 한 프레임에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 그리고 영화에 음악이 흐르는 유일한 장면)이 함박눈이 내리는 새벽에 다들 술에 취한 채 택시를 잡기 위해 난장판으로 서 있다. 누구는 비틀거리고 누구는 부축하고 누구는 갑자기 쏜살같이 튀어나간다. 각자의 흔들리는 시선과 잠깐씩의 멈춤과 방황하는 몸짓과 불만이 엿보이는 자태들이 담긴, 이 눈 내리는 새벽의 사물의 정조들 혹은 물질적 기표들의 무한한 파토스를 당신에게 미리 일러둔다. 그들은 꼭 술 취한 세잔의 사과들 같다. 뭇매를 맞을 말이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당신이 영화의 일상적 인간인가 아닌가를 내기 걸고 싶어진다. 그런데 집요한 홍상수는 이 아름다운 정조의 순간조차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시간의 차원에서 한번 더 뒤튼다. 그 결과물이 이 장면을 뒤로 돌리고 그러나 음악과 소리는 제자리에 두면서 완성된 <북촌방향>의 예고편이다. 이 예고편까지 더해야 <북촌방향>은 진정한 한편의 영화가 된다고까지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홍상수의 범속한 각성은 다름 아니라 다르게 쳐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르게 본 걸 또 다르게 보며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게 홍상수의 범속한 각성의 각성이다.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는 것이 초현실주의자의 과제라면 생활의 발견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는 것이 ‘홍상수라는 영화’의 필생의 과제다. 홍상수는 외국의 어느 강연에서 삶의 실체와 그 지각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사회자에게 물통 하나를 건네주며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물통을 주고받으며 그 물맛에 관해 말할 순 있지만 몇년을 설명한다고 해서 그 물맛을 알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영화로 하고자 하는 건 실로 그 물맛의 실체를 비로소 맛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물이 시간이고 물통은 단단한 상투라고 해보자. <북촌방향>은 그 상투라는 물통에 작은 구멍들을 뚫어서 시간이라는 물맛을 보려는 꼬챙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시간이라는 물맛을 본다. 한꺼번에 많이 다르게 보는 것은 홍상수에게 결단코 중요치 않다. 그런 건 혁명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다르게 보는 건 또다시 상투와 통념을 끌어들여 기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에서 다르게 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조금 다르게 보기 혹은 조금씩 다르게 보기이다. 홍상수 영화는 많이가 아니라 반드시 조금이어야 하고 그 조금이 매번 전부이고 총력이다. 그가 그러고 나면 우리는 영화 속 성준의 말처럼 “그 조화를 느끼면 된다”. 가깝지만 아득하고 멀지만 통하는 것들이 곡선으로 돌고 또 휘면서 거리를 망실한 채 우주를 만드는 <북촌방향>으로 우린 그 시간의 조화를 느낀다. <북촌방향>이라는 이 진귀한 체험을 나의 언어로는 도무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북촌방향>에서 김보경은 1인2역을 한다. 아니, 말과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성준의 여정에서 보면, 1인3역 혹은 1인4역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성준(유준상)이 ‘2년 전에’ 헤어진 연인 경진이고, 성준이 북촌의 어느 술집에서 만난 여사장 예전이고, 그 다음날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날 처음 만난 예전이고, 성준이 북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매일 밤 문자를 보내는 경진이다. 같은 듯, 다른 듯 보이지만 극중 영호(김상중)의 대사는 그 여자들을 통칭하는 설명인 듯 보인다. “사연이 많아. 예쁜데,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거 같아. 남자 운이 없는 것 같더라고.” 촬영 당일, 홍상수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은 김보경은 슬펐다. “너무 불쌍한 애 같아서 감독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연기를 하는 내 상태는 너무 좋은데, 얘는 너무 어두워 보이는 거다. 할 수만 있다면 경진이랑 예전이 둘 다 불러서 삶의 지침을 이야기해주고 싶더라. (웃음)”
영화에서 다양하게 출몰하는 김보경은 주인공 성준의 북촌여행에 두터운 결을 보태고 있다. 김보경 역시 경진과 예전을 여행하듯 오갔을 것이다. “비슷한 게 있다면 두 여자 모두 의지할 만한 남자를 찾지 못했다는 건데, 다만 경진은 어리니까 대놓고 달라붙는 거고, 좀더 어른인 예전은 조금은 쿨한 척하는 거다. 경진이 <여름이 가기 전에>의 소연 같다면, 예전은 <하얀거탑>의 희재 같았다.” 하지만 경진과 예전은 다시 또 다른 여자들로 분화한다. 경진은 2년 만에 찾아온 옛 연인을 “정말 미치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라며 안아준다. 그러고는 다시는 보지 말자며 떠나는 그에게 ‘담배 두 개비’를 달라고 한다. 혹시 그에게 남은 미련일까? “난 아니라고 봤다. 경진도 잠깐 기대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그런데 그렇게 잠시의 만족을 느끼고 나니 이제는 시원하게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촬영은 그렇게 했는데, 영화를 보니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그 담배 2개비가 자신을 판 값은 아닐까. 왜 그렇게 자기를 싼값에 내던질까 생각하니까 안타깝더라.”
극중에서 예전과 성준이 나누는 2번의 키스도 연속적으로 보이지 않을 법한 장면이다. 장면 A의 키스에서 예전은 키스를 되갚아주지만, 장면 A-1의 키스에서 예전은 갑자기 성준을 ‘오빠’라고 부른다. “예전의 입장에서 처음 키스는 여행지에서 얻은 짜릿한 추억처럼 느낀 것 같다. 남자가 귀여워 보여서 ‘나도 한번?’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두 번째 키스는 상당히 강렬하지 않나. 성준에게 남자다움을 느끼면서 그가 커 보였을 거다. 오케이, 내가 인정. 그래서 ‘오빠’가 나온 게 아닐까? (웃음) 한편으로는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기반이 약한 여자이기도 할 거다.” 영화 속 성준의 대사처럼 정말 “조화(造化)로운 움직임”이다.
홍상수의 눈으로 바라본 김보경을 <북촌방향>보다 좀더 일찍 만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홍상수의 전작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잘알지도 못하면서>에서도 제의를 받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북촌방향>의 두 여자처럼 아무것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던 때였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하얀거탑> 이후의 침체기와도 맞물리는 시간이다. “연기라는 게 인생이랑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발성과 발음이 안되고, 그러니 연기도 안되더라.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절망하던 때였다.”
<북촌방향>은 그녀가 여행과 신앙으로 다시 용기를 찾은 뒤에 만난 작품이다.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냥 해보면 되겠지”라는 마음에 북촌으로 향했던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편안하게 하는 연기의 즐거움을 느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예전 작품들을 보면서 다양한 모습이 많은데, 다소 어두운 면으로만 보이는 게 아쉽다고 했다. 이제는 좀더 다양한 기운들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북촌방향>에 대한 여러 말들 가운데, ‘김보경의 출연작 중에서 그녀가 제일 예쁘게 나온 영화’라는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래도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활동을 말하지 않고 건너뛰긴 어려울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다양한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의 압축과 확장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건 이미 밝혀진 것인데, <북촌방향>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의외로 단출하다. 그게 이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특별한 점이다. <북촌방향>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갖는 건 성준과 경진 두 인물뿐이다. 그런데 쓰임이 상반된다. 성준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철저하게 그의 내면 상황만을 기술한다.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철저하게 그녀의 존재를 성준에게 상기시키는 데에만 쓰인다. 말하자면 성준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홀림을 당하는 존재의 심리적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고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언제든 그를 홀리러 나타날 경진이라는 존재의 시간적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경진이 성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김보경이 그걸 읽는다. 결정적으로 성준이 술집의 문 앞에 서 있을 때 경진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술집 주인 예전(그러니까 육체의 김보경)이 음식을 사러가겠다며 프레임을 막 벗어날 때 그 뒷모습을 보던 성준을 자극하는 경진의 문자(그러니까 목소리의 김보경)가 날아든다. 두 번 날아든다. 경진의 목소리는 한번은 부드럽게 추억을 거론하며 홀리고 또 한번은 자기를 버린 성준을 책망하며 무섭게 홀린다. 어쨌거나 홀리는 건 마찬가지다. 그때 눈앞에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저 여인 예전과 목소리로 막 도착한 여인 경진이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그때에 홀려서 이도저도 못하는 성준은 엉겁결에 두 번 다 눈에 보이는 예전을 뒤따라간다. <옥희의 영화>의 화장실 앞에서 옥희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나이든 남자(문성근)와 젊은 남자(이선균)의 시간계를 합쳐냈던 매개였음을 기억해내자. 여기서의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성준의 시간계를 아예 덮쳐버린다.
그 다음으로 느껴야 할 건 밤과 낮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흑백 화면이다. 홍상수의 두 번째 흑백영화라고만 <북촌방향>을 말하는 건 무용하다. 이때 흑백은 기억이나 과거와도 관계가 없다. 그보다는 밤과 낮의 확실성이 우선 중요하다. <북촌방향>의 시간감은 시계로 잴 수 있는 물리적 시간감이 아니라 어둠(밤)과 밝음(낮)이라는 명암의 시간감이다. 인물들은 몇시부터 몇시까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밤과 낮 그 어디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간은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밤낮만 바뀌어가는 것이다. 바뀌고는 있지만 진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관건이다. 그건 컬러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흑백은 그 다음에야 중요하다. 흑백화면이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둘을 어렴풋하게 묶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밤과 낮만 있는 시간이라는 걸 더 강조하기 위해 감싸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상은 온통 흑백인데 게다가 그 안에는 의미상의 밤과 낮만 있는 것이다. 홍상수라면 이것을 시간을 눌러서 다림질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 수정>의 흑백이 ‘기억의 흐릿함’을 위한 것이었다면 <북촌방향>의 흑백은 ‘시간의 불투명함’을 위한 것이다. <북촌방향>은 어제나 오늘의 밤과 낮이 되풀이되는 것이지 어제의 밤 다음에 오늘의 낮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보와 인상이 회귀하고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인지적 착각과 교란도 중요하다. 이 점이 아주 요상하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1인2역이다. 홍상수 영화의 전통적인 것이 아니겠나 싶지만 작용이 좀 다르다. 홍상수 영화의 1인2역은 대체로 어떤 존재의 ‘형상’의 유사함이나 동일함이나 차이로 충격을 가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이 그렇고 그걸 확장하면 <옥희의 영화>가 된다. 그런데 <북촌방향>은 정확히 시간을 겨냥한다. 인물의 존재에는 혼선이 없는데 그가 하는 말 때문에, 우리의 뇌가 스스로 알아서 혼동하고 고민하면서 이 시간 저 시간을 맞춰보려고 움직이게 된다. 섬뜩하기까지 한 장면들이 있다. 성준이 일행을 두고 술집 밖으로 음식을 사러 나간 예전을 두 번째 따라가서 그녀와 키스를 할 때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예전은 돌연 “오빠! 헤어지고 오는 거지요? 나한테?”라고 말한다. 그 둘은 만난 지 얼마 안됐거나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가. 그 순간에 우리의 눈은 예전을 보고 있는데 그녀의 대사가 예전의 육체 위에 경진을 씌운다. 의미상으로 그 대사는 무리와 지금 술집에서 헤어지고 난 다음 나(예전)에게 오라는 말이지만 이미 성준과 경진의 관계를 알고 있는 우리의 뇌는 알아서 그걸 ‘내게 돌아오라’는 경진의 청으로 듣는다. 여기까지라면 존재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시간도 흔들리게 된다. 예컨대 성준은 예전과의 섹스를 끝내고 “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말하는데 그때 예전은 “누군지 모를 텐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전은 “오빠처럼 이렇게 나 쳐다보던 사람 없었던 것 같아”라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건 “없었던 것 같아”라는 대사의 시제가 주는 뉘앙스다. 그때 우리의 뇌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경진을 찾아갔던 날 무릎 꿇고 우는 성준에게 내 눈을 보라고 종용하던 경진을 떠올린다. 보여지는 순서로는 성준과 예전의 신이 뒤에 있고 성준과 경진의 신이 앞에 있다. 하지만 눈을 보고 안 보고를 사이에 두고 정작 그 시간 순서의 인지가 뒤바뀐다. 성준과 예전의 지금 상황이 성준과 경진의 과거처럼 보이게 된다. 과거에 그들은 눈을 보며 서로 예쁘다고 말하는 사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에 관하여 잘 말해지지 않은 것 한 가지에 관하여 <북촌방향>을 계기로 말할 때가 됐다. 차이와 반복이 홍상수 영화의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것 때문에 대구도 대칭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접속과 연결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 같다. <북촌방향>이 그 점을 분명히 확장한다. <옥희의 영화>와 비교해보면 이 점이 두드러진다. <옥희의 영화>에서 우리가 확언할 수 없었던 건 인물들의 존재감이자 정체성이었다. 누가 누구인가 알 수 없는 것. 그게 <옥희의 영화>의 신비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옥희의 영화>의 그 신비를 지탱해낸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소제목과 크레딧, 즉 그 장과 막의 구분이었던 것 같다. <옥희의 영화>는 잘 붙이는 게 아니라 잘 떼어내는 게 중요한 영화였다.
우리는 <북촌방향>에서 결코 성준이라는 존재가 헷갈리지는 않는다. 성준은 성준이고, 보람은 보람이다. 경진/예전이라는 인물 사이의 교란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 둘의 인상이 교란되는 것이지, <옥희의 영화>처럼 그들의 존재를 규정할 수 없는 것까지는 아니다. <북촌방향>에서 헷갈리는 건 성준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성준의 시간이다. <북촌방향>이 차이와 반복을 다소 희미하게 만든 대신 접속과 연결을 강력하게 드러낸 덕분이다. 지금까지 홍상수는 대체로 많은 영화에서 하나의 큰 전체를 상정한 다음 그걸 나누어서 재배열하면서 가능해지는 무수한 미시성을 중시해왔다. 그 미시적 가능성이 어느 종착지에 도착하는 영화였다. 그 때문에 폐쇄적 순환의 영화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차이, 반복, 장과 막, 대구, 대칭이 중요했다. 그런데 <북촌방향>에는 5장의 작은 전체가 있다. 정해진 테두리의 큰 전체는 없다. 그 작은 전체들, 즉 시간들이 덩어리째로 분기하고 교차하면서, 접속하고 연결되면서 재배열되어 정해지지 않은 그 바깥쪽 어딘가로 터져 흘러나간다. 홍상수는 그게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이제 이 영화로 우린 홍상수 영화의 폐쇄적 순환을 넘어 무한까지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걸 <옥희의 영화>에서 ‘존재’로 경험했다면, <북촌방향>에서는 ‘시간’으로 경험한다. 그러니 보르헤스의 문장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엉터리 도형의 그림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접속과 연결이 중요하다는 말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성준은 영호를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보람과 중원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경진/예전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혼자 떠돌다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시간은 무한대가 된다. 그 결과 북촌에는 우리가 말도 안된다고 말했던 우주적 계열의 시간들이 마침내 공존하게 된다. <북촌방향>에서의 ‘아무것도 아닌 것인 중요한 것’으로서의 시간은 마침내 그렇게 성립된다.
글:정한석
예컨대 그들의 대구란 이런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김훈의 말처럼 “리얼리스트”일 때 홍상수의 <하하하>의 이순신은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는 거냐는 한 남자의 질문에 “아니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지. 그런 게 어디 있냐? 생각을 해봐”라고 말한다.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꽃은’과 ‘꽃이’ 사이에서 무엇이 더 옳은가 고뇌할 때 홍상수는 <하하하>에서 ‘꽃은’ 이건 ‘꽃이’이건 심지어는 꽃이라 불리건 그 무엇이라 불리건 “내가 사랑하는 거지요. 꽃을”이라고 한 여인이 자신의 느낌에 당당하도록 만든다. 김훈이 “시간은 인간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 소외는 대책이 없는 소외다”라고 시간 속 인간사의 ‘속수무책’을 감별하여 말할 때 홍상수는 “<북촌방향>은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하루들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서로 상관없는 ‘첫날’ 같은 그런 하루들”이라며 시간 속 인간사의 ‘각양각색’에 유연하다. 김훈이라는 ‘사실에 바탕한 주관’과 홍상수라는 ‘주관이 껴안고 있는 사실’. 인간의 무수한 무능함을 인정해야 삶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김훈에게는 삶의 많은 것이 엄중하고, 인간의 익숙해 보이는 모양새를 호기심으로 다시 쳐다보아야만 삶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홍상수에게는 삶의 많은 것이 귀엽다. 그래서 김훈은 가장 확실한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데 필사적이고 홍상수는 확실하다고 말해지는 그 사실들의 틈을 벌리는 데 필사적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김훈의 윤리는 언어로서의 인정이고 홍상수의 윤리는 이미지로서의 차이다.
김훈의 문학을 존경하는 나는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에 어쩔 수 없이 기운다. 홍상수적 인간과 삶이란 결국 “영화의 일상적 인간”(장 루이 셰페르)과 삶에 밀접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종종 사실에 바탕한 언어로 도무지 해명되지 않는 그 무엇들을 위해 존재할 때, 오로지 그렇게 존재할 때만 가장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화주의자 홍상수가 그 강력한 지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영화 <북촌방향>을 보았을 때 문득 한 위대한 언어주의자 김훈이 대구로 떠오른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다. 그렇다면 사실에 입각한 언어로 잡히지 않는 영화적 대상들 중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들을 다는 모르겠고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김훈은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의 흐름, 시간의 작용 이런 것들은 우리가 언어로 포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매우 힘든 것입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언어로 잡히지 않는 그 시간의 흐름이나 작용이 때로 영화에 의해서는 포착될 수 있다고 나는 지금 덧붙이고 싶다.
물론이지만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영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 또한 말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영화는 문학이 인간의 내면에 관해 기술해 놓은 저 섬세함에 끝내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가 <칼의 노래>를 영화로 만든다 해도 원작이 성취한 그 깊은 내면성의 표현에 버금가는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 영화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내적 독백의 지적 몽타주라 부르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담아내기를 염원했던 야심가 에이젠슈테인. 과문한 내 생각에 그는 최종목적의 달성에 실패했다. 영화란 시각과 청각이 이루는 표면이고 그것에의 작동으로 한계와 가능성 그 둘 다를 지닌다. 그 때문인지 영화의 불편함과 부족함에 관하여 오히려 역으로 해석한 뒤 그걸 영화의 특권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유희하며 그렇게 주장했다. 그리고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가 중립적 표면 위에서 작동한다고 늘 말해왔다. 그러니 한계이건 특권이건 간에 영화의 존재의 기반이 그러하다면 그 상태에서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몇 가지가 있고, 다시 말하지만 그 중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다. 물론이다. 영화도 시간의 비밀을 풀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지상의 무엇이 그걸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영화가 종종 시간을 흔들어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북촌방향>이 놀라운 방식으로 그걸 하고 있다.
<북촌방향>이 칸에서 상영됐을 때 홍상수 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지닌 동세대의 명감독 클레어 드니는 파리에서 칸까지 오로지 이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영화제에 왔고 영화를 보고 새벽에 돌아가면서 “더없이 슬픈 영화다. 특히나 라스트신의 정서가 훌륭하다”고 찬탄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정성일은 <북촌방향>을 처음 본 날 사석에서 “홍상수의 영화가 너무 맑아지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는 사악한 파토스가 있어서 좋다”고 평했다. 슬프거나 사악하거나 하는 건 그들 각자의 감상의 결과이자 형용사적 표현에 해당할 것이지만, 나는 그 감상과 표현이 이 영화의 기이한 시간 작용이 일으킨 반응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북촌방향>을 본 다음 한 가지 느낌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던 중이었는데, 심지어 이런 경험을 했다. 영화 속 보람은 언젠가 20분 동안 아는 영화인을 연달아 네 명이나 만난 것이 참 신기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나도 조금은 그렇게 묻고 싶다. 그러니까 2~3일 사이의 일이다. 인터뷰를 하던 중 유준상은 <북촌방향>의 라스트신을 말하며 흘러가는 말처럼 “(고)현정이에게 홀리는 장면”이라고 표현했다. 그 다음에 나는 홍상수의 영화현장에 가는 고현정의 마음가짐이 적혀 있는 기사를 우연히 보았는데, 거기에서 그녀는 “이미 홀리고 싶은 상태로, 한번 홀려봐야지 하는 자세로 홍상수 감독 현장에 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준상을 홀린 고현정은 홍상수가 자기를 홀린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거의 동시에 정성일이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의 개막작 <북촌방향>에 관하여 “꼬리 아홉인 여우들의 홀린 집”이라고 소개글을 쓴 걸 읽었다. 나는 <북촌방향>이 홀리는 영화이고 홀림의 영화라고 생각하여 그 낱말을 혼자 붙들고 있다고 상상했는데 한꺼번에 그들의 말을 그렇게 만난 건 좀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홀림은 단지 비유가 아닌 것 같다. 특히나 <북촌방향>의 경우 그게 영화적 활동인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는 원래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했지만, <북촌방향>은 그 홀림이라는 활동의 효과를 시간의 차원에 증가시키고 있고 그 때문에 홍상수의 영화 중에서 가장 신화적이고 설화적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북촌방향>에서 그 홀림이란 결국 어떤 시간성의 작용일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북촌방향>은 우리를 어떻게 홀리는가. 그 시간성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우선은 이런 도형들을 전제해볼 수 있다(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랙탈, 아니다). 재미삼아 그려본 엉터리이고 감독의 의중과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다만 내게는 그 느낌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도 그런 촉이 닿았으면 싶어서 남긴다. 처음에는 성준이라는 수평선이 직진하고 그에 교차하는 귀신과 헛것과 신기루와 이미지들로서의 인물들이 출몰하여 수직선상으로 성준을 교차하고 있어서(그림1) 그걸 여러 번 경험하면서 포개어지는 그물망의 영화라고 생각했다(그림2). 하지만 그려놓고 보니 어딘가 느 낌이 맞지 않다. 성준이 직선이라는 게 문제다. 성준이 직선인 건 <북촌방향>의 인상과 맞지 않다. 다시 그린 첫 번째 그림. 성준이라는 곡선이 원형으로 자기의 꼬리를 문다(그림3). 성준이라는 원형의 곡선을 어떤 인물의 직선이 교차해서 지나간다(그림4).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성준의 곡선은 같은 모양으로 더 생기고 그 궤적을 그 누군가, 인물이라 할 직선이 여전히 교차하고 지나간다(그림5). 그건 영호라는, 보람이라는, 경진/예전이라는, 여배우와 학생들이라는 여러 인물일 수 있으므로 교차점은 많아진다(그림6). 그런데 생각해보니 출몰하는 인물들도 곡선인 것 같다. 마침내 성준이라는 원형의 곡선을 나머지 인물들의 곡선들이 지나간다(그림7). 순전히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이 그림이 <북촌방향>의 시간적 모형이라고 제멋대로 가정하려는 나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 모형으로 비추어보자면 <북촌방향>의 시간에는 모서리가 없고 전후가 없고 분기와 교차가 있을 뿐이며 그 분기나 교차란 곧 접속이나 연결일 수도 있으며, 그 분기와 교차와 접속과 연결이 좀 덜한 지점이 있고 더한 지점이 있어서 더한 지점은 덜한 지점보다 점점 더 큰 구멍이 되어가고 마침내 커지고 커져서 그 활동력이 왕성해지는 가운데 시간의 블랙홀을 만들어 삶의 실체에 가깝게 다가갈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 엉터리 도형만을 끌어안고서라도 나는 <북촌방향>에 행복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언어의 안쪽으로 들어와 <북촌방향>의 홀리는 시간의 작용을 다시 말해야만 할 것이다. 실패를 각오하고라도 그 작용 몇 가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첫댓글 읽 기 시작 했습니다 ㅋ 영화 공부 되네요 ㅋㅋ
북촌 풍경은 참 좋디요 ㅎ
지난 초여름 창덕궁 탐방을 갔다가, 궐담길 뒤편으로 북촌을 찾았으나 길을 잃었습니다. 주말드라마 반짝반짝에 나오는 황금알 식당이 북촌 입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북촌길을 찾아 갈 것입니다. 그날은 너무 더워서...
미사님 추석 명절 잘 보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