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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명인물 스크랩 신숙주의 묘 (2)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403 10.03.25 10: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숙주 (申叔舟)

 

 

 

 

신숙주(申叔舟. 1417~1475)...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生員試, 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찬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侍直長)을 지냈다. 1441년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入直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御衣)를 받기도 했다.

 

 

 

 

 

 

 

 

 

 

 

 

 

 

 

 

 

 

 

 

 

 

                                                           신숙주 초상화  ... 보물 제613호

 

 

 

 

 

 

크기는 가로 109.5cm, 세로 167cm이다. 이 초상화는 초록색 관복을 입고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가슴에는 구름과 가러기 문양의 흉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처음으로 나타나는 흉배형식으로 文官 2품 때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의 음영처리나 표현기법으로 보아 1475년(성종 6)에 새롭게 고쳐진 이후에도 여러번 수정,보완된 것으로 보이나 얼굴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세심하게 채색되었으며, 의복의 윤곽선과 색의 표현도 뛰어나다. 이 영정은 신숙주의 성격, 인품 등을잘 표현하였으며 채색이나 線의 묘사도 뛰어난 예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숙주와 수양대군(世祖)의 만남

 

 

 

 

『실록』에 따르면 단종 즉위년인 1452년 8월 10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수양대군의 집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수양대군 : 신수찬(신修撰)!

                                   신숙주 : (말에서 내려 인사한다)

                                   수양대군 : 어찌 문 앞을 지나가면서 한번 들어오지 않는가?

                                                  (신숙주를 이끌고 들어가서 술을 마신다)

 

 

평범해 보이는 이 만남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당시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 .. 조선시대의 하급관리가 상급관리의 집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이라 하여 왕실 인사들이 함부로 대신들을 만날 수 없는 법이 존재하던 시대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수양대군이 우연을 가장하여 신숙주를 집안으로 불러 들인 것은 아닐까? 하여튼 이 만남에서 수양대군은 신숙주에게 중국에 함께 가기를 권하였다.

 

 

 

 

                                      신숙주, 수양대군과 함께 중국을 가다

 

 

 

世宗의 뒤를 이은 文宗이 즉위한지 2년만에 일찍 죽자, 단종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당시 조선에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명나라 황제의 공인을 받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사은사(謝恩使)라고 하였다.

 

1452년 10월. 수양대군은 사은사를 자청하였다. 그리고 신숙주에게 같이 가기를 권유하였고, 신숙주는 서장관(書壯官 .. 비서관)의 신분으로 수양대군과 동행한다. 이들이 중국에 함께 머물렀던 기간은 대략 5개월이었다.

 

수양대군 일행은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자 연경(燕京 ..현재의 북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장능(長陵)을 찾아간다. 장릉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묻혀있는 곳이었다.

 

 

 

 

                                       永樂帝는 수양대군의 모델이었다.

 

 

 

영락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로, 父王이 죽고 그의 조카인 헤제(惠帝)가 왕위에 오르자 그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영락제는 평소 "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 "이라고 말하였으며, 과연 그는 명나라 300년의 기틀을 훌륭히 마련하였다.

 

 

 

                                          永樂帝 .. 그는 자금성을 지었다.

 

 

 

그런 영락제의 능에 나란히 절을 하면서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짐작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으로 귀국하여 개성의 궁궐지기인 한명회를 만난다.  수양대권은 이렇게 영락제를 모델로 삼고, 정권 탈취를 위하여 한명회의 꾀를 이용하였고, 그 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신숙주를 선택한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오고 얼마 후, 1453년 10월에 수양대군은 이른바 계유정난(계유정난)을 일으켜서 단종의 보필을 유훈으로 받은 황보인, 김종서 등 원로대신과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을 모두 죽이고,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신숙주는 계유정난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숙주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지병조사(知兵曹事)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지위는 높지 않았으나, 수양대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지병조사라는 직책은 실권을 잡고있던 수양대군의 눈과 귀가 되어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중간에서 지휘,감독하는 자리이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 받는다. 1455년 8월13일이었고, 수양대군은 世祖가 되었다. 1452년 10월 신숙주와 함께 영락제의 長陵을 방문하고, 1453년 3월에 귀국 그리고 그 해 10월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원로대신과 安平大君을 죽인 후 채 1년이 안된 시점이었다.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후 신숙주와 함께 중국에 다녀온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옛날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외람되게 사명(使命)을 받아

                  당시 나라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다시 산을 넘고

                  강(강)을 건너는 괴로움을 무릎쓰게 되었는데,  경(卿 ..신숙주)이

                  이 때에 참여하여 나를 보좌하고 폐부(肺腑)를 내어보여 정신

                  (精神)과 지기(志氣)를 같이 하여 믿으니, 복심(腹心)으로 의탁

                  하여 실로 충성하고 분개(憤慨)하고 강개(慷慨)하는 마음을

                  아울러 일으켰다.

 

 

 

 

 

 

 

 

 

 

 

                                                         언어 天才  그리고 한글의 창제

 

 

 

 

 

 

 

 

                                                  功臣  申叔舟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정치적 격동기에 벼슬생활을 하면서 많은 功臣에 추대되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일으켰을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수양대군이 즉위한 후 좌익공신(佐翼功臣),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린한 후 익대공신(翊戴功臣), 성종이 즉위한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는 등 정치적 사건의 핵심에 늘 함께 하였다.

 

 

 

                                                     功臣이란 ?

 

 

공신이란 국가와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말한다. 이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이미 신라때에도 녹공(錄功)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의 개국공신에 대한 것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왕건(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홍유(洪儒) 등 약 2,000명을 3等으로 구분하여 각각 공을 세운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다. 그리고 940년 왕건은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공신당(功臣堂 ..功臣閣)을 두어 1등 및 2등공신의 화상(畵像)을 벽에다 그려서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러 일컫고, 해마다 재회(齋會)를 열어 복을 빌었으며, 뒤에 다시 훈전(勳田)을 내려 대대로 그 자손을 등용하였다고 한다.

 

 

 

 

 

이 뒤로도 고려시대를 통털어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는 공신호(功臣號)를 내리고 토지, 노비, 급 등을 상으로 주어 그 명예를 기렸다. 고려 초에는 녹권(錄券)을 주어 공신증명(功臣證明)을 삼았으나, 말기의 中興功臣에게는 녹권 이외에 따로 敎書를 주었다.

 

 

 

                                                     조선의 공신

 

공신제도가 성행한 것은조선 태조 이래 역대 공신들을 시상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된다. 개국공신,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 정난공신, 좌익공신, 敵慨功臣, 익대공신, 좌리공신, 奮武功臣 등 모두 28종이나 되었다.

 

 

 

                                                           조선시대 錄券 ..국보 제278호

 

 

 

                                                  功臣의 처우

 

 

왕은 功臣 일동과 회맹(會盟)하였는데, 여기서 공신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과 자손 대대로 서로 친목할 것을 맹세하였다. 또한 왕은 교서를 내리고 입각화상(立閣畵像)으로 그 명예를 세습적으로인정하여고,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영작(榮爵)과 토지, 노비 등을 주고 그 자손에게도 음직(蔭職 ..과거를 통하지 않고 벼슬을 줌)을 주었다. 또한 等外功臣인 원종공신(原從功臣)에게는 녹권(錄券)만을 주었다.

 

 

공신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본 관청은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부(忠勳府), 녹훈도감(錄勳都監) 등이 있었다. 공신에게 수여한 상훈문서를 공신녹권(功臣錄券) 및 공신상훈교서(功臣賞勳敎書)라 칭하며, 녹권은 공신축(功臣軸) 또는 철권(鐵券)이라 별칭하여 공신도감이 발급하며, 동공자(同功者) 전체의 공적과 상전(賞典)을 기록한 것이며, 교서는 수사자(受賜者) 개인의  공적과 상훈을 기록한 개별적인 문서이다. 

 

 

 

 

 

 

 

                                    신숙주의 선택  ..  家門의 내력 ?

 

 

 

신숙주의 행동을 이야기할 때. 그의 할아버지 신포시(申包翅)의 행적도 아울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포시는 고려末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그에 항거하여 고려의 다른 신하들과 개성 인근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 간다.

 

 

두문동(杜門洞)은 고려 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바치고자 李成桂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끼리 모여 살던 고려충신들의 집단 주거촌(住居村)이었다. 신포시는 두문동으로 들어 갔으나 끝까지 잔류하여 죽지 않고, 몰래 빠져 나와 이성계에 투항한다. 그리고 조선의 관직에 오른다. 

 

 

이성계는 이들을 회유하여 하였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으니 (杜門不出의 유래), 모두 불살라 죽였다. 이를 두문 72현 (杜門 72賢)이라 부른다, 원래 73賢이었으나, 가장 나이가 어렸던 황희는 그들의 합의에 의하여 미리 나왔고, 그래서 72賢이 된다.

 

 

신포시와 그의 손자 신숙주의 행로 .. 너무 닮았다. 신숙주는 어린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유훈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 .. 왕의 유언을 듣는 신하 중의 신하)이었다. 이 것도 집안의 내력인가 ? 살아서 나라에 충실하고, 백성을 위해 일하고 싶다... 신씨가문의 가훈아닐까 ??

 

 

 

 

 

 

 

                                         신숙주의 부인 尹氏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고문 끝에 성삼문 등이 죽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자, 그의 부인 尹氏는 신숙주에게 동지들을 배반하고 혼자 살아 돌아왔다고 힐책하며 부끄러워 하여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메어 자살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端宗哀史" 그리고 TV드라마에서 그렇게 묘사하였지만, 전연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신숙주가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으며, 그 죽음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 世祖는 그 소식을 듣고 쌀과 콩 50섬과 종이 70권, 석회 50섬 등을 하사하였으며, 신숙주의 매부인 조효문에게 신숙주가 없으니 대신 호상을 맡도록 명령하면서 일이 진행될 때마다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신숙주를 따라 중국에 갔던 그의 아들 "신주"도 어머니 사망 소식과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하여 병사(病死)하고 만다. 당시 아들 신주는 한명회의 딸고 결혼하였었으며, 이러? ㅓㅇ략결혼으로 세조시대레 한명회와 신숙주의 전성시대가 벌어지게 된 것.. 아렇게 역사를 왜곡해도 되는 것인지..그저 忠義만을 강조하는 가치관, 역사관, 교육관...

 

 

 

 

 

 

 

 

                                                         숙주에 대한 나의 단상

 

 

 

신숙주는 살아서 世宗의 위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수양대군을 선택하였다고 하지만, 그 것은 당시의 논리일뿐이고,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수양대군이나 신숙주의 여러 업적들이 개별적으로는 장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더라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행위와 그 후의 여러 정치행위 등은 오히려 세종의 크나큰 업적을 훼손시키고 있고,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 병폐를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큰 업적에는 물론 한글의 창제가 포함되어야 하지만, 그 못지 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국정운영 시스템을 구축하고 확립한 것이 더욱 의미 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통하여 국가를 운영하였고, 그것을 제도적을 시스템화하였다.

 

 

왕도 신하도 누구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고, 집현전 등을 통하여 항상 새로운 피를 수혈하였다. 왕 스스로 신하들에게 구속된다. 왕의 권위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나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소위 기득권세력이 발생하며, 그들의 기득권은 세습되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세종이 확립한 민주적인 국정 운영시스템은 여기서 단절되고, 조선 500년을 짓누르는 당쟁정치의 시발이 되고 만다. 끝없는 王權과 臣權의 싸움 .. 신하들간의 권력투쟁, 기득권 유지와 그를 반대하는 세력간의 충돌 .. 그러면서 조선은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신숙주는 과연 세종의 위업을 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죽음으로 유훈을 지킨 성삼문은 ?그는 죽음으로써 충신이 되었지만, 조선 역사의 물길을 바꾸지는 못하였고, 세종의 업적을 지키지 못한다. 그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숙주의 자기 모순

 

 

신숙주는 약화된 왕권보다는 굳건한 왕권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世宗의 위업을 잇겠다고 변명하면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한다. 그러나 당시 신숙주,성삼문 등 젊은 유학자들이 꿈꾸는 정치는 신하 중심의 臣權政治의 지향이었다.

 

그러나 文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김종서, 황보인 등 일부 소수의 고명대신들이 권력을 독범한다. 소위 황표정사(黃票政事)를 통한 권력의 전횡이었다. 황표정사란 나이 어린 왕을 보필하기 위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을 일이 있으면 의정부에서 먼저 의결한 후, 원로대신들이 노란 점(黃票)을 표시하였는데, 임금은 그에 따라 정사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부 원로들에 의한 군력의 독점은 신숙주, 성삼문 등이 지향하였던 신권정치는 아니었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 원로대신을 제거하는 일에는 성삼문, 신숙주 등 젊은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후 공신으로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 계유정란은 분명히 그 후에 벌어지는 왕위찬탈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오히려 약화된 왕권 아래에서 그들의 정치이념인 신권정치를 지향할 수도 있었지만, 신숙주는 오히려 강화된 왕권 아래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종이 위업을 잇겠다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 그저 현실적인 정치인일 뿐이다.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신숙주의 행장일대기(行壯一代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 온다. 수양대군이 신숙주에게 자기에게 돌아 설 것을 요구하였고, 신숙주는 여덟아들의 목숨을 위해 수양대군을 따르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해동제국기   海東諸國紀

 

 

 

 

                                                                가깝고도 먼 나라 .. 일본

 

 

우리에게 일본은 언제나 가깝고도 먼나라이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었다. 조선과 평화를 갈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불시에 도발을 할지도 모르는 나라..일본은 조선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 조선 건국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조선은 무엇보다도 일본을 잘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세종이 검증된 학자인 신숙주를 통신사의 서장관(書壯官)으로 파견하고, 成宗이 신숙주로 하여금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를 편찬할 것을 명령한 것도 이러한 판단의 결과이었다.

 

 

 

 

 

                                           왕명으로 쓴 해동제국기

 

 

 

1443년(세종25) 신숙주는 世宗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병마에 시달리다가 회복된지 알마 지나지 않았고, 가족들도 긴 여행을 우려하였으나 신숙주는 흔쾌히 일본으로 간다. 그의 나이 27세이었다. 당시 그의 직책은 오늘날의 기록관, 서장관(書壯官)이었다.

 

 

서장관운 외교적 능력뿐만 아니라 문장에 특히 뛰어난 인물이 임명되었다. 신숙주 일행은 당시로서는 짧은 7개월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對馬島에 들러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한다. 대마도주와 체결한 계해조약은 당시 외교 현안이었던 세견선(歲遣船 ..일본이 해마다 조선에 보내는 배)과 세사미두(歲賜米豆 .. 해마다 바치는 쌀)의 문제를 각각 50척, 200석으로 해결한 것이다.

 

 

"海東諸國紀"는 신숙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지 28년이 지난 1471년(성종 2) 겨울에 완성되었다. 이처럼 긴 세월을 두고 완성한 것은 이 책이 단순히 개인의 紀行文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책은 신숙주의 일본 使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외교 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완성된 것으로, 조선 전기 대일외교의 축적된 경험들이 모아져서 편찬되었다. 1471년에 1차로 완성된 이후 중요한 조약 체결과 같은 외교적 내용이 추가되거나 잘못된 부분은 계속 보충하는 과정을 거친 것은 개인 기행문의 성격을 넘어 외교관례의 지침서 역할을 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주요 내용 그리고 대일외교의 지침서

 

 

여기서 "海東諸國"이란 일본 本國, 규슈(九州), 이키 섬(壹岐島), 쓰시마섬(對馬島)과 함께 유구국(琉球國)을 말한다. 그들의 지세를 지도로 그리고, 국정과 교빙왕래(交聘往來)한 연혁 및 사신을 접대하는 예절을 수록했다.

 

 

권두에 序文과 凡例가 있고, 이어 海東諸國總圖, 日本本國圖, 日本國西海島九州圖, 日本國壹岐島圖, 日本國對馬島圖, 琉球國島 등 7장의 지도와 일본국기, 유규국기, 조빙응접기로 이루어졌다.여기에 3번의 추가 기록이 있다.

 

 

 

 

 

 

일본국기는 천황의 계통, 幕府의 장군인 국왕의 계통, 일본의 풍속, 도로의 길이 등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 8도63주 및 대마도와 이키섬에 대해 설명했다. 州의 설명은 그 위치, 소속 郡의 수, 전답의 크기, 산출물, 우리나라와의 관계 등을 주로 서술하고 있다. "朝聘應接記"는 사신의 선박 정수, 使船의 대소와 船夫의 정원, 약정서의 지급절차, 사신의 영송, 三浦의 음식접대, 삼포에 정박하는 배의 수, 서울에 올라오는 사신의 인원수, 삼포의 연회, 올라오는 도중의 연회, 서울에서의 영전연, 궁중 연회, 예조의 연회와 선물 급료 등 사신을 맞고 보내는 절차와 예절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숙주가 말하는 일본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의 곳곳에 일본인의 習性과 風俗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15세기 일본의 풍속은 오늘날과도 거의 유사한 점이 많다. 이러한 일본관을 바탕으로 신숙주는 죽기 직전에도 成宗에게 "일본과의 화호(和好 .. 평화)를 잊지 마십시요"라는 말을 남긴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년전에 이미 일본인의 好戰性을 간파하고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그들의 習性은 강하고, 사나우며, 잘 무술에 정련하고 배타기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들을 만약 道理대로 어루만져 주면 예절을 차려 조빙(朝聘)할 것이고, 그렇치 않으면 문득 함부로 노략질합니다. 이들 오랑케(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조정(朝廷)에 있으며, 전쟁에 있지 않고 기강을 진작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신숙주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내고, 交隣外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미구에 발생할지도 모를 전란을 막기 위하여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해동제국기의 "일본국기" 중 국속(國俗) 항목은 일본에서도 자료가 거의 없는 당시의 일본 풍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있다.

 

 

 

 

 

 

 

나라의 풍속은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을 먹을 대에는 칠기(漆器)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土器)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으며, 사람마다 단검(短劍)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써 이어 그 길이가 땅까지 닿았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그 이빨을 검게 물들였다...

 

 

 

 

 

 

 

 

 

 

 

 

 

 

                                             군사전략가  신숙주

 

 

 

                                                                  야전부시도  夜戰賦詩圖

 

 

 

 

 

신숙주는 군사분야에서도 특출한 인물이었다. 1460년인 세조 6년에 여진족을 정벌하는 장면을 그린 "야전부시도(야전부시도)"를 보면, 전투가 한창인데 지휘관은 독특한 자세로 누워있다. 여진 정벌에 나선 함길,강원의 양도 도체찰사, 즉 총사령관 신숙주이다. 

 

 

 

 

 

 

 

                                 오랑케 땅에 서리가 치니 변방이 차가운데

                                 기마병이 백리에 뻗쳐 있구나

                                 밤 싸움은 쉬지 않고, 동은 이미 트려 하는데

                                 누워서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밤중에 여진족의 야습이 있던 순간이다. 그러나 총사령관 신숙주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군이 진마다 떠들썩하게 적군을 맞아 싸우는데, 신숙주는 막사에 드러 누운채 막료를 불러 시를 ?었던 것이다. 적의 야습에도 태연하게 시를 읊은 신숙주의 대담함에 조선군의 사기는 올라가고, 여진족은 야습을 포기하고 퇴각했다고 야사는 전한다.

 

 

신숙주는 조선의 군사적 위엄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던 마지막 인물이라고 한다. 조선이 마지막으로 여진에 대해 일종의 군사행동을 한 것은 신숙주가 총괄 지휘해서 함경도 북부지역의 여진족을 공격했던 전투이었다. 스 후 두만강 너머에 있는 여진족세력에 대한 실질적인 조선의 영향력은 무척 약화되었다.

 

 

 

 

 

 

 

 

 

 

 

 

 

 

 

 

 

 

 

 

                                       신숙주의 길  ... 성삼문의 길

 

 

 

 

조선 중기 이후 성삼문 등 사육신의 완전한 복권은 신숙주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6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들이 자신들의 철학과 사상을 정착시키는 성삼문의 의리나 명분을 강조하다보니 집현전 출신의 대표적 학자인 신숙주를 폄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신숙주 평가에 대한 변화는 위로는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 지식인 그리고 민중들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헌종실록(1845.11.9)에는 " 신숙주는 어찌하여 사육신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장하다. 사육신의 절개여 .. "하며 신숙주를 폄하하고, 사육신의 절개를 칭송하였다.

 

 

이 시기부터 신숙주에 대한 백성들의 폄하도 시작된다. 바로 "숙주나물"의 등장인 것이다. 민간에서 신숙주의 변절을 미워하여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불렀다는 것이다. 쉽게 상한다는 것이다.

 

 

 

 

 

 

 

                                                       신숙주의 폄하

 

 

단종 복위운동 가담자에 대한 세조의 응징은 가혹하였다. 성삼문을 비롯한 주모자는

 

   

 

                                    충신 성삼문  그리고 공신 신숙주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라 실천력을 겸비한 전문 관료로서 조선 초기 많은 업적을 남긴 신숙주. 그런데 이런 인물을 왜 민중들은 싫어했을까? 비록 세조를 도왔고 그로 인해 세조의 공신이 되었지만, 신숙주는 한명회, 권람 등 다른 공신에 비해 훨씬 청렴하고 탁월한 관료이었다.

 

그러함에도 신숙주의 업적은 잊혀지고, 부정적인 평가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바로 성삼문 등 사육신의 옥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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