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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과거객 과거 보러 떠나다.
조선시대 양반은 전체 인구 500만 명(추정)중 약 5% 그 외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가난한 백성들이다
하층 계급인 노비의 가격을 살펴보면 노비 3명과 말 1마리
임진왜란 때 노비 40명과 조총 1자루 가격이었던 적도 있고
이쁜 여자 노비의 가격은 남자 노비 5명과 힘 좋은 소(牛) 한 마리를 더 줘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노비 3명과 말 한 마리 가격이라니, 그리고 이쁜 여종과 남자 노비 5명도 부족해서 소 한 마리를 더 줘야 살 수 있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다면 노비란 말(語)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고조선 8조법에 "남의 물건에 손대는자 노비로 삼는다"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전쟁포로는 대부분 노비로 삼았고...
요즘 태어난걸 감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현실도 그렇게 녹록한 삶은 아닌듯하다.
회덕역 앞을 지나며
걷다 보면 생각이 드는 건 기계문명의 발달로 이동성은 날로 바뀌는데
뚜벅이는 태초 인류인 오스트랄로 어르신부터 직립보행을 하면서 걸었던 그대로다
다만, 시대의 변천으로 인한 맨발에서 고무신을 신었느냐! 말았느냐! 그 차이 외 변한 건 별로없다.
신탄진역 앞을 지나며
이곳 조치원에 계시는 동강 누님께
나!~ 여기왔노라 선전포고 하니
조치원 시장에서 잠시 보자고 하신다.
조치원 시장에서
동강 누님을 만나서 칼국수 집에 들어가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 먹고 밖으로 나와
시장에서 뭐라도 좀 사가지고 갈까 하다가 어깨 빠질 것 같아 발길을 돌린다.
비단 금강을 건너며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뜬봉샘에서 발원해
장수군, 진안군, 무주군. 충북 영동군, 옥천군을 지나 이곳 신탄진의 대청호에서 잠시 숨 고르기 하다가
신탄진을 지나 세종시,공주시,논산시,군산 앞바다로 흘러간다.
금강은 진안에서 영동,옥천 구간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곳이라 5월 초순 신록이 올라올 때 가보시면 아주 좋을듯한
경치를 볼 수 있다
장수군 발원지에서 아래로 흐르며 금산의 봉황천,영동의 초강,보은의 보청천, 청주의 미호천. 논산의 논산천 같은 이름있는 하천을 거느린다
금강을 건너오니 청주 전통주로 유명한 청주시땅이다
만약에 내가 조선 초기에 태어났다면 ...금강을 건너 어디로 갔을까? 스스로 질문을 한다.
금강을 건널때 나룻배가 없었다면 양반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개? 헤엄쳐 건넜을 것이고
그다음에 논길 밭길 숲 속 가릴 것 없이 가장 빠른 길로 올랐을 것이고
하루 한 끼만 배불리? 먹고 걸었을 것이고...
청주시 현도면으로 곧장 올라가는 좋은 길을 버리고
현도면 중척리 마을로 곧장 가는 좁은 고갯마루를 지나는데
이 길은 옛 선조들께서도 넘었을 것 같은 나지막한 산길이다
어찌보면 양반을 피해 좁은길로 다녀야했던 평민들의 길일것 같다
산길을 지나니 바람 부는 평야지대가 나오고
지척에 지난날 걸었던 금강이 흐른다
금강 따라 걸으며
그동안 역사도 많이 배웠지만 물에 대한 것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세종시 부강면 등곡리
마을 전체가 돼지 축사인데 도로 따라 약 700m
차타고 쌩~~~ 지나가면 그만이겠지만 걸어가는 분들은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하는 구간인데
이런 동네에 사는 분들과 옆동네 분들은 어떻게 견디는지...
동곡삼거리 고갯마루에서
만약에 이런 고갯마루에서 산적을 만났다면?
양반으로써 보기 좋게 괴나리봇짐 내 던지고 도망을 쳤거나
길가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 들고 호기롭게 한판 붙어 눈탱이 밤탱이 되게 맞았을 수도 있었겠지
부강역
한때는 충북 청주땅이었다가 또, 충남 연기읍으로 되었다가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된 곳
조선시대 역이란 공무를 위해 역마다 숙식제공을 했으나 일반인들은 출입이 제한된 곳이라 볼 수 있고
역과 비슷한 기능을 했던 원(院)이란 고려시대 때 절에서 관리하던 편의 시설이었지만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민간인에 사업권이 넘어가면서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그리고 주막은 조선 중기까지 거의 없어 뚜벅이들이 낮에는 걷고 밤에는 위험해서 거의 돌아다니지 못했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 전국에 12만 개 정도 생겨나 뚜벅이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고
지금은 전국에 편의점이 6만개에서 7만개 수준이니 밥 굶을 일은 거의 없다
미호천 옆에 자리 잡은 연동면에 들어와
앙징맞은 수박 형제가 기다리는데 연동면은 수박으로 유명한 땅인듯하다
연동면
연동면 자치센터
연동 송용리 마애여래 입상
고려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널찍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부처님 몸 전체에 광배(光背)가 뚜렷하다.
여래 입상 위에는 언양김 씨 정려비가 서있다.
열녀 언양김씨 정려비
병자호란 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킨 장용헌의 처 언양김씨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남편에게 팔순의 시아버지만은 구해야 한다며 집 앞까지 몰려든 적 앞으로 나가
청나라 병사가 김씨 부인을 쫓아오자 부인은 미호천의 진목나루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이를 본 청나라 병사들이 김씨 부인의 절개와 용기에 감동하여 시신을 건져 강변에 안장을 해주었고 나무에 비문을 세워
그 후에 다시 쳐들어오는 자들도 비문을 보면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국가하천 미호천
미호천 발원지로는 백두대간 속리산 국립공원 정상에서 이어지는 한남, 금북정맥길의 원 수계 발원지인 마이산(망이산)
남쪽 계곡(음성군 삼성면)과, 같은 한남, 금북정맥 산줄기의 충북 음성군 감우리 보현산에서 흘러오는 승주골-동음천-
초평천이 최장 발원지로 두 물줄기는 초평댐 아래 초평면 화산리까지 35킬로와 40km를 각각 흘러와 만난다
화산리에서 미호천과 초평천이 만나면서 물의 세력은 커지며, 청주시-조치원을 지나 금강 하구까지 50km를 흘러와 금강품
에 안기는데 모래강인 듯하다.
먼 길 흘러온 미호천과 세종시 조치원읍 방향
미호천의 미호교를 건너오면 충북 청주시 오송읍땅이다.
삼거리에서 천안이나 조치원방향으로
조치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조천
세종시 조치원으로 흘러 미호천에 합류하는 조천(鳥川 새내천)은 예전에는 생줄천이라 불렀으며
억새와 갈대가 많아 새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여 붙여진 조천(鳥川)은 세종 특별 자치시에서는 조천 최장 발원지를
전의면 다방리 산 17번지(덜 골 계곡)로 표기를 해 놓았다.
최장 발원지 찾아 지도를 여러 번 보며 이리저리 재어보니 비암사 뒤편 비암산 남쪽 능선의 350봉에서 이어지는 돌박터골이
100m가량 더 길다.
물은 엄청 더러웠던 기억을 간직한 조천이다.
조치원에 들어와 오늘 하루동안 60km를 걸어서 도착한 조치원
예전 고려시대 때부터 절에서 관리하던 편의시설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근 현대사에 들어와 1905년 서울-천안-조치원-대전-김천--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선이 놓이면서 많이 발전된 곳이다.
해는 서산으로 너머 갔지만 이른 초저녁 좀 더 진행할까 생각하다가 일찍 자고 새벽에 걷기로 한다.
마지막날 오늘은 30km 정도 걸으면 천안 삼거리에 도착하니
새벽 1시 무렵에 일어나 말끔하게 씻고 2시 조금 지나 밖으로 나온다.
저녁에 비가 조금 내린 듯한데 일기예보에 아침까지 비 온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옛1번 국도길을 따른다.
1번 국도란 목포-무안-나주 -광주-장성-정읍-전주-익산-논산-계룡-세종-조치원-천안-평택-서울-신의주까지 이어지는 도로로써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라는 개념의 도로인데 조선시대 때 대로(大路)로써 기능을 그대로 이어 만든 도로다
다만, 조선시대 때 해남땅끝에서 올라오는 삼남길인 논산-공주-차령을 피해 논산-계룡-연기군(세종시) 조치원으로 돌려 만들므로 해서 1905년에 만든 경부선이 지나는 대전과 가까이 두어 호남에서 징발한 쌀을 만주로 이동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던 도로로 볼 수 있겠다.
서쪽에 1번 국도가 있다면 남해에서 진주-거창-김천-문경-충주-이천-광주-성남 서울로 이어지는 3번 국도
마산-함안-창녕-대구-의성-안동-영주-단양-제천-횡성-홍성-춘천-화천으로 이어지는 5번 국도
부산-울산-포항-평해-울진-삼척 -강릉-속초-고성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가 있는데
모두가 종단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며 홀수로 만들어져 있다.
그 외
2번 국도는 남해 바다로 이어지는 도로인데 부산-김해-창원-진주-하동-광양-순천-보성-장흥-강진-목포로 이어지며
4번 국도는 경주시 감포-경주-영천-대구-김천-영동-옥천-대전 -계룡-논산-부여-서천
6번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진고개-평창-횡성-양평-남양주-광화문-인천으로 이어지는데
짝수로 되어 있으며 한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도로들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면 홀수는 종단도로 짝수는 횡단도로로 기억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기억하면 될 것 같다.
대한민국을 가르는 1번 -7번 국도까지...
길은 예전에 걸었던 조천길과 비슷하게 이어져 걸음 하며
관문마을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들어오는 마을을 뜻하는듯하다.
전동면
달이 구름을 벗어나려 애는 쓰는데
어째 하늘이 수상하고
전동역
2005년 7월 말 더 이상 서지 않는 폐역이 되었고
밤하늘이 수상하다 했더니
눈이 내리네
소리 없이 내리던 눈은 차곡차곡 쌓일 사이도 없이 녹더니
이내 눈은 비로 바뀌어 내린다.
우산도 없는데 어쩌라고
그렇게 비는 30분간 내리며 옷만 축축하게 만들다 그친다.
청람 1리 마을
아직 해뜨기 몇시간전 개미고개로 올라가는 길에
비는 그치고 달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걸으며 생각해보면 조선시대때 길을 떠난다는건 요즘말로 하자면 생존게임이라 볼수 있었는데
야생동물의 지존격인 호랭이,표범,늑대가 언제 나타날지 몰랐을테고
곳곳에 숨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협하던 산도적들
한 겨울에 맨발로 강건너기
식량 조달,
식수 구하기
어느 하나 쉬운게 없었는데 목숨을 걸어야 원하는곳까지 갔을것 같다.
개미고개 6,25 전쟁 격전지
전쟁은 늙은이가 일으키고
젊은이가 피 흘린다고 했던가
전쟁 초기인 7월 8일 날 일이다.
개미고개 전투에 참가한 667명의 미군 24사단과 북한군 3,4사단과의 전투로
전차 38대, 차량 124대를 파괴함으로써 북한군의 진격을 5일간 저지시켜
국군이 반격할 시간을 벌어준 전투다
자유를 수호하고자 이국땅에서 숨진 미군의 형상인데
고마운 분들이다.
전투명 개미고개 전투(전의- 조치원 전투)
개미고개는 일제강점기 때 만든 1번 국도로서 천안에서 대전으로 가기 위해 꼭 넘어야 했던 개미허리 같은 짧은 고갯길이다.
잠시 묵념하고 지나가며
개미허리처럼 짧은 오르막길을 지나면 전의면에 도착한다.
이른 새벽이지만 인근 공사장, 농장으로 일하러 가시는 분들이 제법 보이고
편의점에 들러 우유하나 사들고 나온다.
전의역
1번 국도와 경부선이 지나는 곳
백제시대 때부터 전 씨(全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전의면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전의면 관정리에는 왕의 물로 알려진 물이 있는 곳
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를 위해 책을 읽다가 실명위기까지 갔을 때 전의초수라 불리는 관정리 약수로 눈병을 깨끗이 치료
했을 정도로 물이 좋은 곳이다.
세종대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 한토막하고
세종대왕께서 아버지인 태종(헌릉) 곁에 묻히고자 했는데
지관(地官)이 꺼낸 말이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가 끊기는 자리라 절대 불가하옵니다" 하니
세종은 "그렇더라도 아버지 곁에 그냥 묻히겠다" 하고 훗날 아버지 곁인 헌릉옆에 묻힌다.
그 자리는 세종대왕이 누울 자리가 아니었을까! 지관의 말대로 19년 동안 왕이 4번이나 바뀌었는데
세종의 큰아들 문종 그의 아들인 적장자 단종,
이후에 세조의 적장자인 의경세자,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의 적장자인 인성대군이 차례로 죽었다
왕실에서 여러 명의 왕들이 비명횡사하자 세종의 묘를 파묘하니 수의도 썩지 않았고
물이 가득 차서 지금의 남한강이 보이는 여주로 옮겨 이장했다는 전설이 있다
전의향교를 지키는 외삼문
태종 14년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명륜당이 보이고 그 뒤로 내삼문을 지나면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인데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 4현(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과 우리나라 18현(설총, 최치원, 안양,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조헌, 송시열 외...)의 위패를 모셨다.
전의면 사무소 앞의 현감이나 그 외 분들의 송덕비가 줄지어 서있다.
비는 내리고
우산하나 사러 편의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인생은 노빠구라 잠시 비 맞으며 진행한다.
만약에 비가 계속 내린다면 우산을 사러 반대길로 갔을까 말았을까?
비 오는 것도 멋이라며 그냥 지났을까?
천성이 게을러 손에 뭘 들고 가는 걸 싫어해서 비 맞으며 그냥 갔을 것 같다.
천안시 남동구 광덕면 행정리에 들어와
지난날 걸었던 삼남길과 만나는데 이곳까지 150km 지점에서
전남 해남군 땅끝에서 올라오는 -강진-영암-나주-장성-노령고개-정읍-전주-익산-논산-공주-차령고개 -천안시 행정리 구정사거리 349km를 올라온 삼남길이다
이곳에서 영, 호남 과거객이나 보부상들이 서로 만나 한양으로 길을 이어갔는데
조선시대 때 과거 보러 가서 가장 많이 합격한 지역은 인구가 가장 많이 살았던 한양 사람들이 가장 많았으며
그다음은 전남 장흥 사람들 그다음 안동 양반들인데 멀리 제주도에서도 과거 보러 왔다고 한다
차령고개로 올라가는 도로 삼거리
천안으로 가야 대구로 갈 수 있는 기차를 탈 수 있으니 삼거리까지 13km 더 진행해 보기로 한다.
이곳부터 자동차 전용 도로이기에 갓길은 위험하고
도로옆 곡교천길을 잠시 따른다.
소정면을 지나고
천안 삼거리길에서
서울과 경상도 전라도로 이어지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중심지다
삼거리 주막에서 끝 마치고
이번 과거 문제는 조선 중종 때 있었던 "술의 폐해(弊害)를 논하라" 였는데
선비들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 마시고 꼬장을 심하게 부린듯한 질문으로
답은 쉽지만 유교 경전에 근거하여 써야 해서 그리 쉽지는 않았다고...
그냥 술 마시고 꼬장 부린 놈들과는 인연을 끊으라 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고
주상 전하께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음에도 뭔가 부족하셨나
의금부에 잡혀 하옥되셨다는 방(傍)이 붙었다
유교 경전인 논어에 보면 "하늘에 죄를 지으면 더 이상 빌곳도 없다"고 쓰여있다
누구는 안 해도 될 일을 하셨고
또 누구는 해야 할 일을 안 해서 그렇고
괘방령으로 넘어오면 누구나 과거에 합격할 줄 알았건만 나라가 어수선하니
그렇지만 "군자의 복수는 세월이 지나도 계속 된다"했으니
다음에 갈 곳은 충청 수영에서 한양로 올라가는 길을 가볼 생각인데
숙종 때 과거시험에 출제되었던 "왜국에서 울릉도를 죽도라고 부르며 우리 백성들의 어업활동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우리 조선의 입장에서 설명을 해줘도 듣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가?라는 문제가 나온다고 한다
끝으로 이번 길에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마지막으로 집으로 가기 전에
만약에 이곳 주막에 양귀비처럼 이쁜 주모가 "나 없이는 못 살겠으니 같이 살자면 집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질문도 해본다.
첫댓글 글이 갈수록 위트있고 유머러스해서 쉽게 읽혀서 좋습니다.
연동연, 전의면, 전동면 등 가보지 않은 곳이라 모르는 지명이 많이 나와 더욱 꼼꼼하게 읽었어요.
삼거리 주막에 다소곳이 앉은 방장님의 눈빛이 벌써 양귀비의 꾐에 넘어간 듯 보입니다.
손주들 세뱃돈 주고 오는길 눈빠지도록 보고갑니다
(보면 뭐하노 돌아서면 까먹음)
걷고 쓰고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걷는 것 보다 글쓰는게 더 힘들 것 같습니다.
눈도 침침하실거고 ㅋㅋ
암튼 고생하셨구요.
잘 읽고갑니다.
설떡국 드시고 행복한 연휴되세요^^
방장님 후기를 읽어내려오다보니
사연 하나 없는 길이 과연 있을까 싶어집니다.
양귀비처럼 이쁜 주모는
이런 곳에서 홀로 주모 안하겠지요.ㅎㅎㅎ
향교를 거쳐갔던 선비들의 이야기며
전쟁의 상흔,
수박 주렁주렁~ 서리하는 모습도 그려지고,
그 길들 위마다 방장님의 사연도 차곡차곡
눈 내려 쌓이듯 쌓였을 듯 싶습니다.
먼 걸음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