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알렌의 워크북 친구 282과
나는 오늘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I will not be afraid of love today.
실습 설명
워크북 파트 II 실습 설명을 읽으세요.
이것을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읽기: 레슨의 해설 문단을 천천히,
나의 이야기처럼.
◉ 기도: 레슨의 기도문대로 기도하기.
여러 번 할 것을 권합니다.
◉ 아침과 저녁: 그 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열린 마음 명상(Open Mind Meditation )을 하세요.
◉ 매시간 기억하기: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열린 마음 명상을 하세요.
◉ 자주 상기하기: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잠시 명상을 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세요.
◉ 유혹에 대응하기: 마음이 상할 때마다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여 평화를 회복하세요.
◉ “워크북 특별 주제”읽기: 하루에 한 번, 그날에 해당되는 워크북 특별 주제를 천천히 읽으세요.
실습 제안:
오늘 레슨의 요지는,
신의 진정한 이름이
사랑이듯이
우리의 진정한 이름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 우리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입니다.
먼저, 아래의 칸에
당신 이름을 써 넣고
오늘 날짜를 적으세요:
이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날짜: _____________)
당신 이름을 바라보고
당신이 그것을 누구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지 느껴보려고 하세요.
이름을 적어 넣을 때,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었나요?
어떤 별개의 사람이었나요?
개인만의 특정한 역사를 가진?
이 세상에서 특정한 장소에 있는?
특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 자아는 위험한 세상을
혼자 헤쳐 나가고 있나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물건들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이유가 아닌가요?
당신 자신을
무언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혹은 그렇게 위험에 처해 있는
자아를 위해 뭔가를 얻기 위해?
예를 들어
[부동산 계약서 등] 어떤 법적인
문서에 당신 이름을 적어 넣을 때,
비록
그것이 당신을 어떤 식으로든
보호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당신의 삶에 초래할 것 때문에
종종 두려워하지 않나요?
즉, 당신의 이름이 나타내
보여주는 당신의 정체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지 않나요?
혼자서 위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애쓰는
분리된 자아가
다른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아래에 당신 이름을
“두려움” 이라고 써 넣어 보세요.
이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날짜: _____________)
그런 후,
지금 적어 넣은 이름과
아까 적어 넣은 이름을
앞뒤로 오가며 살펴보고,
결국 두 이름이 같은
이름임을 느껴보세요.
일상생활에서
당신 이름을 적어 넣을 때
당신은 “두려움”이라고 적어
넣고 있음을 알아차리세요.
그럴 때 당신은,
“분리되고, 공격에 취약하고
위험한 세상에 시달리는
이 자아” 라고 적어 넣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을 구체적으로 뭐라고
써넣든, 그 내용은 두려움입니다.
이제 당신 이름을
한 번 더 써 넣겠습니다.
이번에는 당신 이름을
“사랑”이라고 써 넣으세요.
이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날짜: ______________)
사랑이라고 써넣을 때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하세요.
당신이 진짜 “사랑”임을
나타내듯이 하세요.
사랑은
당신의 본성입니다.
당신은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존재,
때로는 사랑할 수 있고
때로는 증오할 수 있는 그런 존재,
그 사랑이 편파적이고 선택적이며
간헐적인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당신의 본성입니다.
당신의 참된 본성 안에서 당신에게는
분노, 증오, 심지어 중립적인 상태도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사랑이므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사랑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되고자
열망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지금,
모든 겉모습 너머의
당신의 정체입니다.
당신은 사랑이며,
신의 사랑의 일부이지만,
단지 두려움으로 채워진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는
꿈을 꾸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단지 다른 무언가로
변장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적어 넣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보면서, 그것과 동일시하려고 해 보세요.
속으로
“이게 나야. 이게 나의 정체야.”
라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지 않았나요?
당신 안에
어떤 느낌이 일어나나요?
해설
기적수업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면
당장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오늘
이것만 깨달을 수 있다면,
구원이 온 세상으로
뻗어나갈 것이다.”(1:1),
“나는 신이 나를 창조하신
그대로 있다.”(W,194:제목),
“아이디어들은 자신의 근원을
떠나지 않는다.” (W,167:3),
“세상은 없다”(W,132:7),
“실재인 것은
아무 것도 위협받을 수 없다.
실재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T,서언:4)
그리고 “세상을 용서하라,
그러면 너는 신이 창조하신
어느 것도 끝이 있을 수 없으며,
신이 창조하시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실재가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M, 20:5)
우리는 자신이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과연 얼마나 자주 깨달을까요?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케네스 왑닉은
에고가 시끄럽게 굴 때마다
우리가 “나는 다시
사랑을 두려워해야만 해!” 라는
정신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에고는 사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에고는
우리의 원천으로서,
우리의
참나로서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이며,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 안에서
사랑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에고를 이런 식으로 보면,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은 정신이상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유명한 19세기의 기독교
전도사인 Charles Grandison Finney 는,
“사랑은 모든 선에의 영원한 뜻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선만 뜻하는
영원한 뜻을 두려워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미치지 않겠다는 결정”(1:2)입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참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즉 나의 아버지이자
나의 근원이신 신이
직접 창조하신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1:2)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사랑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인식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에고에게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처럼 보입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은
<잠>에 들어 <죽음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밀어내면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고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두려워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즉
악하고 죄 많은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잊고
다른 무엇이 되었다고 믿기 위해서는
마음은 잠에 들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아이디어를 깨닫는 것은
<죽음의 꿈>속에 <잠>들어있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1:3)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뜻하는 것은
나의 참나를 인식하겠다는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참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광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무슨 이름으로 불러왔든,
이름은 나의 진짜 정체를
바꿀 수 없습니다.(2:1-3)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이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불러온 것은 죄가 아닙니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은
단지 하나의 실수에 불과합니다.
오늘 저로 하여금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2:4-5)
원문 출처:
http://www.circleofa.org/library/acim-commentary/workbook-companion/lesson-282/
ㅡ 기적수업ㆍ공부모임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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