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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 놓고 기역자를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무식한 사람을 가리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신앙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참 모습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 못 박힐 때 배반하고 도망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부활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을 알아도 피상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때면 감탄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그 믿음은 곧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아직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은 정말 이제는 전혀 의심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그 자신인 것을 그래서 그리스도(구원저)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체험한 그 이전의 그들의 삶과 그 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를 믿노라 하지만 정말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무기력하고, 재미없고, 확신이 없고, 삶 속에서 실패하고 ... 그렇지 않은가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을 다시 부활의 주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때 질적으로 성숙해지고 살아 약동하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특별히 도마에게 나타나신 사건의 기록입니다. 도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른바 예수님을 재발견한 셈입니다. 이것이 도마의 신앙을 변화시켰고, 그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1.의심했던 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확신이 없었습니다. 설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려고 ... ?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한 가운데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요20:19을 보면 “안식 후 첫날 ... ”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은 지금의 주일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겁니다.) 모인 곳의 문을 닫아 놓았는데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불현듯 나타나신 겁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예수님이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자 믿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도마가 출타 중이었습니다.
24절.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그가 돌아오자 제자들이 야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녀갔다는 겁니다. 그때 도마는 도저히 자기의 생가과 상식으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25절(하). “ ...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
얼른 보면 도마가 아주 똑똑한 사람 같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성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증주의자, 경험주의자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감각, 인지 기능이 진리에 대한 최종 판단 기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각 기능, 인지 기능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게 과연 얼마나 됩니까? 너무 큰 것도 안 보이고, 너무 작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망원경, 현미경 등의 보조 기구를 사용합니다. 그래도 안 보이는 게 많습니다. 또 인간의 경험이 얼마나 됩니까? 어떤 사람이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다닌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단해 보여도 세계 지도에 표시해 보십시오. 그게 얼마나 될지 ... 별 게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전해 들음으로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겁니다. 이 점에 있어서 도마가 착각을 한 겁니다.
평소 동고동락하던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겸손히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의 경우 도마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알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가능한 겁니다. 그것이 곧 성경 말씀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으로 남긴 그 말씀을 지금 우리가 전해 듣는 것입니다.
세종대왕 보셨나요? 우리가 그분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역사적 실존에 대해 1%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전해 듣고 그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런 겁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보고 체험한 사람들이 남긴 성경 말씀을 통해 얼마든지 믿고 따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9절. “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
벧전1: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여러분, 의심이 생기는 것 자체야 탓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의심을 마냥 그냥 계속 방치하면 불신앙이 되고, 결국은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의심의 문제는 속히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에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신지 아닌지, 구주인지 아닌지 결판을 내야합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아시죠? 본래는 류 월리스(장군, 소설가)가 쓴 소설이죠. 그는 무신론자 친구 잉거솔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기독교의 거짓됨을 증명해내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2년 동안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2장에 접어들면서 펜을 꺾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후에 쓴 소설이 바로 <벤허>입니다.
2. 확신하는 도마
의심하던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요20:26-27. ‘여드레 지나 ...’라는 말은 예수님이 1주일 후에 다시 나타나셨음을 의미합니다. 처음 나타나신 것이 안식 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주일에 나타나신 겁니다. 주일은 부활 기념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마치 자기가 한 말을 옆에서 엿들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대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 앞에 도마는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그는 이내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28절. “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 이것은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도마가 이전에도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만난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그는 그동안 예수님을 단지 좋은 선생, 훌륭한 분,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에게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 준 것이요, 더 나아가 가치 있는 인생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박사는 인간의 육신의 고통을 줄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그는 진통제를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이 진통제는 수술환자를 비롯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심프슨" 박사가 강의를 할 때입니다.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박사님께서 이 세상을 사시면서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습니다. "심프슨" 박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계셨습니다. 그 표정이 나무나도 진지하고 엄숙하여서 사람들은 조용해졌고 "심프슨" 박사를 주목했습니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심프슨" 박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 일생을 놓고 볼 때 가장 위대한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위대한 과학자는 진통제의 발견보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 되심을 발견한 것이 더 위대한 발견이었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3. 변화된 도마
예수님이 하나님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신앙과 인생이 변화됩니다. 도마는 예수님 앞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이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과연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을까요? 도마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지 않아 유감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을 통해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1)기쁨이 있는 사람 :
막달라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슬픔이 가득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만났을 때 큰 기쁨(마28:8)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눅24:49-53,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기 전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쁨으로 감격하며 외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해방되기 전 함경북도 나남이라는 도시에 한 여자 거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젊은 여자인데 살이 보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이집 저집 다니며 구걸 행각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젊은 것이 무엇을 못해 거지가 됐느냐”하며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으나 그녀는 한번도 화를 내는 일이 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어만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자로 돌려놓고 제대로 상대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8.15 해방이 되고 나남에 소련군이 진주 하였을 때 그 여자 거지가 소련군의 장교 옷을 입고 중위의 견장을 달고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다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실은 그녀는 거지가 아니라 소련군의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이 거지 여인이 그를 조롱하고 업신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도 태연하고 여유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군 장교로서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아무도 자기를 멸시할 자격이 없다고 믿었음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거지로 알고 함부로 대해도 조금도 괴롭지 않고 오히려 그 천대와 경멸 속에서도 남이 모르는 즐거움과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2)용기가 있는 사람 :
도마는 예수님을 다시 만난 이후 겁이 없어집니다. 제자들과 함께 담대히 복음을 증거합니다. 세상에는 두려운 게 많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권세를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유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더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지갑에 빨간 딱지(부적)를 넣고 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무식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들도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학박사가 ... 권세자가 ... 재산가가 ... 그러고 다닙니다. 세상 것들은 두려움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 담대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이래저래 북한을 자주 내왕을 합니다(2003년 1월).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해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재단 이사장의 임명장을 받고,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이렇게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 "대가 없습니다. 내가 평양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느냐?" 그러니까 "그래도 한 말씀 해주세요."
"딱 한마디만 할께요. 예수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정을 하더라고요.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그는 말합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왜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하고 산 사람들 만나보니까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고요. 기독교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지상의 영광입니다.
3)능력이 있는 사람 :
도마가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행적을 통해 도마의 활동상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도마의 이름이 따로 거명되지 않았어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기록들을 자주 봅니다. 거기에 도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할 때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마 도마도 이와 비슷한 능력을 많이 행했을 겁니다. 사도들 자신이 능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리 과거에 대단했더라도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대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 보면 바울이 능력을 행한 것을 봅니다. 심지어 그의 손수건만 지나가도 병이 낫고 악한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그때 마술하는 자들이 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흉내 냅니다. 그랬더니 “귀신이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덮쳐버렸고, 그들은 혼비백산 도망가 버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부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를 때라야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여러분,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그 이름을 의지하며 그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있는 질병도, 문제도, 고통도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4)목적이 있는 사람 :
도마는 예수님을 재발견한 후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관심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먹고 사는 문제나 해결하고, 예수님이 혹시 왕이라도 되면 출세할 수 있으려나 그런 궁리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살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인도남쪽 첸나이 지역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선교한 선교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은 2천 년 전 기원 52년에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최초로 인도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도마의 순교성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옛날 도마가 인도남쪽 첸나이 지역에 까지 건너가서 무슨 내용으로 전도를 했겠습니까.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철두철미하게 부인하다가 창피를 당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왔을 때 그때 도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 돌아와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녀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도마가 나는 내 손가락으로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부활을 믿을 수가 없다고 아주 철저하게 부활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찾아온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이제야 네가 믿겠느냐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도마가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겠습니까. 그 부끄러움을 갚기 위해서 도마는 가장 멀리 인도에 까지 가서 전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레바논을 거쳐서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거쳐야 갈수 있습니다. 도마는 주님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먼 인도까지 멀리 걸어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마가 인도에 가서 전도할 때 무엇을 특별히 강조했겠습니까. 도마는 20년 동안 그 땅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의 부활을 목이 터져라 외쳤을 것입니다. 도마는 그렇게라도 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자신의 불신했던 모습을 씻어내려 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그렇게 외치다가 그 땅에서 힌두교도들에게 발각되어 끌려가 창에 찔려 순교를 했습니다.
김태식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본래 의사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아들이 병에 걸려 일찍 죽게 되었습니다. 보통 부모들도 다 그렇지만 특히 의사인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고 보내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아빠, 천국에서 만나요! 이제 바쁘게 돈만 벌지 마시고, 선교하세요!” 그 전에도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후 그분은 의사 일을 보는 것보다 복음 전하는 일에 더 바빠졌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이 세상 것에 매달려 살면 곤란합니다. 세상 것은 다 수단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게 영원히 후회 없는 인생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하셨습니까? 중요한 것은 연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셨습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처음 교회 나오신 분들은 물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오래 된 분들도 다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났는가? 만약 이 질문에 불분명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면 도마처럼 예수님을 재발견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부디 그런 생생한 신앙생활을 하심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