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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제류
출연: 장동건(이진태), 원빈(이진석), 이은주(영신)
1950년, 두 형제 이야기 - ”우린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해” 1950년... 전쟁조차 삼킬 수 없었던 두 형제 이야기
|2004 한국영화의 위대한 도전|
1950년 6월.. 서울 종로거리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진태’(장동건)는 힘든 생활
속에도 약혼녀 ‘영신’(이은주)과의 결혼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 ‘진석’(원빈)의 대학진학을
위해 언제나 활기차고 밝은 생활을 해 나간다.
6월의 어느 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호회가 배포되면서 평화롭기만 하던 서울은 순식간에 싸이렌
소리와 폭발음,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해진다. 이에 , 남쪽으로 피난을 결정한 ‘진태’는 ‘영신’과
가족들을 데리고 수많은 피난행렬에 동참하지만,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대구역사에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만 18세로 징집 대상이었던 ‘진석’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군용열차로 오르게
되고 ‘진석’을 되 찾아오기 위해 열차에 뛰어오른 ‘진태’ 또한 징집이 되어 군용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평온한 일상에서 피 튀기는 전쟁터로 내 몰린 ‘진태’와 ‘진석’은 훈련받을 시간조차 없이 국군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실전 투입이 되고 동생과 같은 소대에 배치된 ‘진태’는 동생의 징집해제를 위해 대대장을
만나게 된다. 대대장과의 면담을 통해 동생의 제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
‘진태’는 그 무엇보다 동생의 생존을 위해 총을 들며 영웅이 되기를 자처하는데.. ‘진태’의 혁혁한 전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성공한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북진을 시작한다.
애국 이념도 민주 사상도 없이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전쟁영웅이 되어가고 있는 ‘진태’와
전쟁을 통해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석’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 평양으로 향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운명의 덫이 그들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기획
* 사전 기획 기간 1년3개월
* 시나리오 준비 및 검증기간 2년5개월
* 시뮬레이션 촬영기간 3개월
* 주, 조연 오디션 기간 6개월
세밀한 준비
* 군복 1만 9천벌, 군화 1천여 켤레 제작
* 50년대 의상 4천 여벌 제작, 물품 6천여 점 제작
* 2백 여 구의 시체 제작
* 1천 여 정의 총기, 대포, 기관총, 수류탄, 대검 제작
* 50년대 시대 상황 및 한국전쟁에 관한 1,000여권의 문헌 자료,
화보 집, 전쟁 다큐멘터리 자료 철저 조사
* 20여명의 국내 최고 자문위원 영입을 통한 철저한 고증작업
한국 영화사상 초유의 거대 물량 투입
* 순수 제작비 130억 원
* 엑스트라 총 동원 수 2천5백 명
* 실제 크기의 증기기관차, 탱크, 장갑차 제작
* 20억 원 규모의 평양시가지 등 20 여 개의 대규모 세트 제작
* 2km에 걸친 낙동강 방어선 진지 구축
* 장동건, 원빈, 이은주, 최민식, 공형진, 김수로등 초호화 캐스팅
* 2톤의 화약, 탄약, 폭발물 투입
누수를 방지한 철저한 촬영진행
* 촬영기간 9개월 , 촬영회수 140여 회
* 전국 올 로케이션 (합천, 곡성, 경주, 인제, 양구, 순천, 아산, 전주등)
* 150여명의 국내 최대 스탭 투입
* 국내 최초 시각감독 시스템 도입
* 시간과 비용의 절감을 위한 각각 두 팀으로 구성된 촬영팀, 동시녹음팀, C.G팀
합천, 대관령, 김제, 부산, 부천, 경주, 양구, 곡성, 전주, 태백 등 전국 18지방 이상의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된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 광활한 로케이션!
대관령, 혹한..
강한 바람과 서린 눈발 속에 들려오는 커다란 폭발음..
흰눈 속에 더욱 검게 그을어 보이는 검은 폭약연기..
혹한의 서늘함을 한껏 더하는 처절한 비명과 차가운 쇳소리들...
국군의 북진 중 압록강 겨울 전투 씬을 찍기 위해 눈발이 살아있는 로케이션 장소로 택한 대관령.. 그러나,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해발 1,100m 이상의 고지대라 기상예측이 전혀 불가능했고 바람의 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게다가 촬영장비 공수와 이동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제작진은 보다 리얼한 겨울 씬을 찍기 위해 무리수를 뒀고
두 달이 넘는 이동통로 공사 작업을 통해 드디어 촬영장비가 공수되기 시작되었다. 대관령 중 가장 험하다는 횡계 내의
삼양목장에서 이루어진 로케이션은 눈, 바람, 추위 등 자연과의 전쟁으로 일축된다. 운반 로의 제설작업만으로도 하루가
다 가기 일쑤였고 다음날 되면 또 수북히 쌓인 눈 때문에 허탈감은 극에 달했다. 결국 촬영용 6륜 트럭과 탱크를
운반용으로 대체하여 기어이 촬영에 돌입한 제작진은 그야말로 최악의 여건에서 스스로와의 싸움을 해야만했다.
결국, 1달이 넘는 힘든 촬영이 무사히 끝났고 스탭 들은 필름에 담아낸 자신들의 작품을 보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자신들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최고의 씬들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곡성, 불안..
이별과 슬픔, 분노와 아픔이 공존하는 아수라장..
거대한 증기기관차 굉음과 헤아릴 수 없는 인파에 묻혀버린 눈물, 탄성, 비명소리..
지금은 폐로가 된 구 곡성역에서 진행된 이번 로케이션은 대구역사와 장단역, 피난민씬, 국군의 퇴주 장면 씬 등을
촬영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구 곡성역은 넓은 대지에 늘어선 각종 폐 건물과 수려한 자연풍광, 주변의 현대시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명당자리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훌륭한 장소가 쉽게 나타날 리는 없었다. 처음엔, 일단
원활한 장기간의 촬영을 위해 제작진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을 찾아다녔다. 6개월간 태백선등 전국의 역사를 돌아다닌
제작진은 여러 조건들이 맞지 않아 결국, 중국까지 헌팅을 다녀왔지만 그곳 또한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거의 포기상태로
고민을 하던 제작진은 정말 우연한 기회에 곡성역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도착한 순간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점이 생겼다. 10년 이상 선로정비가 되지 않아 증기기관차의 공수가 어렵다는 문제였다.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실제 증기기관차를 분해해서 갖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촬영에 반드시 필요한 증기기관차를 배제할 수도
C.G로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제작진은 실제 동력으로 이동까지 가능한 3량 짜리 증기기관차 제작에 들어갔고
너무나 훌륭한 실제 증기기관차가 탄생하게 되었다.
경주, 분노..
자연이 준 천연의 대지 위.
생과 사를 넘나들며 벌이는 대규모 혈투.
주변의 풍경은 희뿌연 흙먼지와 검붉은 폭발 속에 묻혀만 가고..
국군 후퇴 집결지 장소로 선택된 구 한청공장 부지와 국군의 기습 침투 전을 촬영한 도투락목장은 이번 로케이션 장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로 통한다. 한청공장부지는 도투락 목장에서 1km떨어진 산 능선에 있었는데 도투락 목장으로 헌팅을
갔던 제작진에 의해 우연히 눈에 띈 장소이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배경처리의 필요성이 없었고 곳곳에
폐 건물들의 잔해가 남아있어 느낌이 살아있었다. 게다가 해발 600m의 산 능선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대지를 갖춰
놓아 대규모 촬영에 적격이었던 것.. 도투락 목장 또한 원만한 능선을 갖고 있어 기습 침투전을 찍기엔 적격이었다.
제작진은 경주시의 배려와 협조로 도투락 목장 부지에 1달 동안 포크레인과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인민군 교통호
세트를 제작하였다. 또한 한청 공장 부지에는 10여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을 제작하였다. 얼마 전 일본에서 방한한
태극기 촬영장 방문단이 견학한 곳도 이 두 장소였다.
합천, 격전..
2만평 대지 위에 살아난 평양시가..
영험한 황매산 정상에서 펼쳐진 46일간의 혈투..
50여 년 전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 속으로..
영화의 하이라이트 씬인 평양시가지 전투와 두밀령 고지전, 낙동강 벙어 선 전투 등 굵직굵직한 대규모 전투 촬영이
이루어진 합천군은 대규모의 촬영이 이루어진 만큼 합천군의 대단한 지원도 한몫을 했다. 먼저, 축축한 습지의 땅과 거친
황무지느낌의 배경이 필요했던 두밀령 고지전과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황매산 정상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은 영화
<단적비연수> 야외 세트와 고개하나를 두고 떨어져있었는데 강제규 필름 측에서 <단적비연수>촬영 때부터 미리
점찍어둔 명당 자리였다. 밑에서 카메라를 잡으면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산 정상인데다 거칠지만 비옥하고 광활한 초지였기에
대규모 전투 촬영을 찍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제작진은 한 달에 걸쳐 산 정상에 각종 교통호와 진지를 구축했고 역사상 길이
남을 스펙터클한 전투액션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합천군 용주 마을 수자원공사부지 2만2천평에 평양시가지전을
위한 평양시가지세트 제작이 진행되었다. 20억 원에 가까운 세트 제작비를 투입하여 한국전쟁당시 평양시가지를 영화적으로
복원하는데 주력했다. 한국 영화계에 기념이 될만한 이 평양시가지 세트는 촬영 후 합천군에 기증되어 합천군의
테마관광단지로 재구성될 예정이다.
아산, 향수..
폭풍 전야의 고요함.. 폭풍 속의 쓸쓸함..
다가올 거대한 폭풍 앞에 한없이 슬퍼 보이기만 한 행복하고 평온한 일상...
1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아산의 공세리 성당에서 이루어진 국군병원 씬 촬영의 가장 어려웠던 점은 모든 건물과
물건들이 귀중한 문화재였기에 항상 조심해야 했던 점이다. 장소 섭외부터 까다로웠던 터라 제작진은 충분한 사전
조율을 통해 세심하게 움직였다. 워낙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건물들이라 크게 손댈 필요는 없었기에 뒤뜰에 자그마한
취조실 건물만을 지었을 뿐 별다르게 손 댄 부분은 없었다. 다만, 보도블록과 아스팔트로 깔아진 성당주변 길 위에 1톤
가량의 석분을 까는 작업은 예상보다 힘들었고 촬영 후 그 석분을 치워 원상 복귀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아산시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촬영된 진태 집과 영신 집은 전쟁 전 평온하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에 주위 경관과 집의
이미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두밀령 고지 전투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가상의 전투 장면을 영화적 상상에 맞게 재구성한 이번 전투장면에는 15,000발의 실제 공포탄과
3,000여명의 엑스트라, 500여명의 전문 스턴트맨 등이 투입된 대규모 육박전이었다. 대규모의 사격 전 대신 육박전(
전투 중 탄약이 떨어졌거나 은밀한 기습 전을 수행하기 위해 총검이나 총 머리 판, 대검, 돌덩이 등의 1차원적 무기로
적을 제압하는)으로 진행된 이번 전투를 위해 주 조연배우부터 엑스트라까지 오랜 기간의 총검술 훈련을 받았다.
3주 동안의 긴 촬영과 하루 평균 50여건의 작은 부상사고가 생기기는 했지만 모두들 큰 부상 없이 촬영을 마쳤다.
폭격 속의 육박전 형태로 진행된 이번 촬영에서는 50년대 무기들의 폭발 효과를 내기 위해 다이나마이트와 함께
흑연가루, 시멘트, 나무껍질, 톳밥 등이 함께 쓰여 보다 리얼한 폭격 씬을 선보일 예정이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탱크와
장갑차, 쌍발기까지 등장하여 스펙터클의 극치를 선보일 예정이다.
평양 시가지 전투
인천 상륙 후 북으로 진군을 시작한 국군이 평양시가지에서 대규모 적군과 만나 시가지 전을 벌인다는 설정으로 이루어진
이번 전투는 평양 시가지 세트 제작비만 무려 16억 원에 달한다. 투입되는 탄약과 폭발물의 양도 엄청나고 탱크,
장갑차등을 이용한 전투 장면 또한 등장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시가전을 방불케 할 이번 촬영은 비록 전쟁은
아니었지만 이미 <쉬리>로 잊지 못할 시가지 총격전을 선보인 강제규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다.
현재 세트 제작이 완료되었고 촬영은 10월초에 시작되어 2주간의 촬영에 들어간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국군이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필사의 전투를 벌이는 이 장면은 총 120여 회 이상의
대형 폭발이 이루어지는 상당히 고난위도의 촬영이었다. 각종 대포와 폭격기 등으로 국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적군의 무수한 폭격을 담아내었다. 1,000여명의 훈련된 엑스트라와 전문 스턴트 연기자들이 동원된 이번 차량은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서 응급차와 소방차까지 동원된 실로 위험한 촬영이었다. 한 장면을 위해 실제 폭발현장 속에서 몇 번이고
촬영을 거듭한 스턴트 배우들의 활약이 가장 인상깊었지만 장동건과 원빈 또한 근거리 폭발 속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액션 연기로 스탭들의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큰 사고 없이 2주간의 촬영이 끝났지만 그 후에 스탭들에게
흑연가루만 보면 속이 메스꺼워 지는 흑연가루 알레르기가 생길 정도였다.
압록강진지 퇴각 전투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한 번 전세의 역전을 겪는 국군이 압록강 고지에서 퇴각하면서 벌이는 전투 장면을 담은 이번
촬영은 대관령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전투는 겨울 전투씬으로 하얀 눈과 검은 연기가 배치되어 영상 적으로도 뛰어난
장면이 연출되었다. 겨울이라 흑연가루 대신 대규모의 밀가루와 석분이 투입되었고 20여명의 전문 스턴트 배우들과
2,000여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 촬영 장소와 촬영 여건이 원활치 못해 6주간의 기간이 걸린 이번 촬영은 고생한
만큼 기쁨도 크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준 명 장면으로 기억된다.
한국영화의 세계 정복이라는 고지 점령을 위하여 오늘도 이들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릅니다.
그들의 땀방울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두 형제의 드라마틱한 운명을 그린 전쟁 드라마. 대규모 전투씬을
동반한 본격 전쟁 블록버스터로서, 한국영화의 기념비적 흥행작 <쉬리> 이후 5년여 만에 연출을 맡은 강제규 감독은
순제작비 147억(마케팅 비용 포함 170억)의 초대형 프로젝트로 제작되었다. 이념보다 처절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두 형제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는 재미와 감동은 물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전후 세대들에게 새삼
이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를 느끼게 하며, 이러한 교훈은 분명 이 영화에 보이는 미흡한 점들을 충분히
가려주고 있다. 무엇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견줄 한국영화의 탄생은 영화 팬들에겐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강제규 감독은 정전 50주년을 기념해 한 방송사가 방영했던 한국전쟁 유해발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뒤늦게
발견했고 이에 영감을 얻어 2001년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SF 장르, 칭기즈칸 소재의 영화 등을 기획
중이던 강 감독은 “50년 동안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던 늙은 아내가 뼛조각으로 남은 남편과 마주하는 장면”에서
감동받아 전쟁영화로 마음을 굳혔다며, ‘전투가 아닌 전쟁’을 보여주고자 연출 의도를 밝혔다. 2년 5개월의
프리 프로덕션을 거쳐 2003년 2월 첫 촬영에 들어갔고, 고증과 자문을 통해 남하와 북진 그리고 다시 교착으로
이어지는 한국전쟁의 ‘드라마틱’한 전개 과정를 재현하려 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으로, 평양시가지 전투,
압록강 진지 퇴각 전투, 두밀령고지전투 등 한국영화에선 보기 드문 스케일 큰 장면들이 등장하며, 이를 위해
16억 규모의 평양 시가지 야외 세트가 제작되었고, 2만 5천여명의 엑스트라에, 합천, 대관령, 김제, 부산, 부천,
경주, 양구, 곡성, 전주, 태백 등 전국 18지방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되었다. 그밖에 당시 한국전쟁을 재현하기
위해 2만여벌의 군복 제작, IM4셔먼 탱크, IM8그레이하운드, GM3트럭, 윌리스 짚차, 인민군 짚차, 경장갑차,
105미리 야포, 당시에 사용된 각종 무기들이 등장한다.
감독의 변. 시나리오 쓰면서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을 볼 때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코 넘겨버렸을 스틸 한 컷,
한 컷과 동영상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기억들이 난다. 내가 그때 가슴 저며 했던 그 느낌,
그 아픔들을 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영화를 찍고 있는 매 순간마다 내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한국전쟁. 우리는 그 전쟁의 아픔과 고통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전쟁을
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선운 일이다. 예상치 않게 너무 쉽게 다가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우리 민족사에 한국전쟁이 마지막 전쟁이길 간절히 소망하며 나는 지금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고 있다.
개봉 5일째를 기해 전국 440개 스크린(전체의 34%)이라는 국내 개봉 영화 사상 최다 스크린 기록(종전 기록은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415개)을 세웠던 이 영화는 상영 6일만인 470개로 늘었으며, 한 달여 먼저 개봉하여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흥행 기록을 장식했던 <실미도>의 기록을 다시 한번 경신했다. 개봉 당일 하루동안 전국
400개 스크린에서 상영되어 전국 32만4천명을 동원해 <실미도>의 종전 최다기록 30만1천명을 넘어섰으며,
개봉 5일째 200만을 돌파했고(기존 기록은 <실미도>의 7일), 8일째 300만(<실미도>는 11일), 11일째 400만
(<실미도>는 15일), 13일만에 500만(<실미도>는 19일), 18일만에 600만, 21일만에 700만, 25일만에 800만,
31일만에 900만, 39일만에 천만 관객 기록은 모두 한국영화사의 최단 기간 흥행 기록이다. 이 영화는 약 1173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영화사 자체 집계)
노동절 연휴를 맞은 2004년 9월 3일, ‘Taegukgi: The Brotherhood Of War’라는 제목으로 미국 8개 도시
29개 스크린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연휴 4일 동안 36만 4386달러로 박스오피스 29위에 올랐다. 극장당
수입으로 계산하면 한 극장당 1만 2,532불을 벌어들인 셈인데, 같은 주말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영웅>이
2,092개 극장에서 1,151만불을 벌어들여 극장당 수입 5,502불을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이는 성공적인
개봉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롱런 여부를 가늠하게 하는 개봉 2주차 흥행성적에서도 31개 극장으로부터
16만 8,589불의 양호한 수입을 벌어들이며 32위에 랭크, 꾸준한 흥행력을 나타내었는데, 이러한 흥행 수치는
미국에 개봉된 역대 한국영화로는 최고 기록이다.
북미 평론가들 역시 이 영화에 대해 깊은 호감을 나타내었는데, LA 타임즈의 케네스 튜란은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친숙한 센티멘탈리티를, 극단적으로 진지한 전투씬 및 뜻밖의 반전정신과 함께 성공적으로 결합하였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워싱턴 포스트의 스티븐 헌터는 “터프하지만 정직한 영화.”라고 칭했으며,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G. 알렌 존슨은 “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의 다른 전쟁영화들처럼 <라이언…>식의 서사 방식과 폭력씬을
따르고 있지만, <태극기>는 사람들 이야기에 대한 시선을 결코 잃지 않는 대작이다.”라고 치켜세웠다.
또, 할리우드 리포터의 앤드류 선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시청했던 황당한 <매쉬>보다 훨씬 리얼하고 통찰력을
가진, 압도적인 비전.”을 높이 평가했고, 시카고 트리뷴의 로버트 K. 엘더는 “각본가 겸 감독인 강제규는 이 영화를,
역사에 의해 뿌리째 뽑혀버린 사람들에게 바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재일 분석)
한국전쟁(Korea War)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6.25 사변(Korean Conflict)’이라는 다소
축소된 의미로도 불리나, 대리전의 양상을 띠고 전세계 20여 국이 참전한 세계전이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과
UN 16개국(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캐나다, 남아공, 터키, 태국,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과 북한군과 소련, 중공군 등 3개국이 참전하였고, 3년 1개월간
유엔군과 한국군 포함 18만 명,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숨졌으며, 남한측 민간인 99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는 등 총 400만명의 사상자을 낸 것으로 추정한다. (월남전 8년간 170만 정도 사망)
일찌기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49년 초부터 전역에 걸쳐 전시체제에 들어갔던 북한은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 야크(YAK) 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여러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에,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 투입, 북한군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개성에서 일제히 남진하였고,
주공격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하여,
전쟁 개시 3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UN은 즉각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었고, 16개국이 육-해-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였으며, 그 밖에 많은 나라들도 경제적-인도적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낙동강 방어선’(일명 워커 라인)을 구축, 이를 사수하기 위해 낙동강 일대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여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둔 북한군은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 2차례에 걸쳐 치열한 공격(8월/9월 공세)을 감행, 대구방어전투, 영천
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을
단행, 마침내 전세를 반전시키고 한국군과 함께 드디어 서울을 수복(9월 28일), 10월 평양 수복,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11월, 공산 우방국 북한을 돕기 위해 30만명 이상의 중공군이 투입되면서,
12월에 북한 지역에서 철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1월 정부는 다시 서울에서 철수(1.4 후퇴)하게 되면서,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었다. 이후 길고 지리한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고, 백마고지 전투(52년 10월),
금성 전투(53년 7월) 등 한 치라도 더 유리한 형세를 확보하기 위한 고지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 영상물은 KBS에서 90년에 10부작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이
좋은 작품이다.)
옥의 티. 시장 장면을 자세히 보면 ‘LPG 가스통’을 발견할 수 있다. / 우물가에서 트랩에 당한 국군이 북한군을
몰아낼 때 원빈이 한 북한군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있다. M1개런드 총은 8발의 총알이 들어가고 8발을 다쏘면
탄띠가 배출되는데, 영화에선 9발이 발사된다.
옥의 티. 영화 첫머리에 서울시내의 모습에 나오는 우체통은 당시의 것과 다르다. (당시의 우체통은 원통형임)
/ 서울 거리에 인파가 너무 많다. 당시 종로 거리는 그렇게 많은 인파가 북적거리지 않았고, 전쟁통의 서울은
더욱 한산했다. / 당시 중학생(5년제)들은 머리를 기르지 못했다. 중학교 5학년으로 나오는 원빈의 머리가
당시 기준보다 길다. / 북한군도 당시에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그래서 야간전투의 백병전에서는 머리를
만져보고 아군과 적군을 구분했다고. / 국방군의 머리도 장발이 많은데 당시에 군인이 그런 장발은 거의 볼 수 없었다. /
당시에는 `딲새`나 `찍새`라는 속어가 없었다. 이 말은 70년대 말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knn42@naver.com)
옥의 티. 영화에 나오는 Hershey Bar의 영양성분표는 1990년대까지 없었으며, 또한 킹 사이즈 Hershey Bar는
1980년 이후에 소개되었다. / 진태가 북한 장교와 싸우는 장면에서 그들 뒤에 자동차가 불에 타다가 꺼지고 한다. /
영화에 나오는 캐나다 깃발은 1965년부터 쓰인 것이며, 밴드가 연주하는 루드위그 배스 드럼의 로고는
1970년대부터 사용된 것이다. / 한국전쟁 당시 성조기의 별은 48개였는데, 영화에는 1959년부터 쓰인
50개 별이 그려진 성조기가 등장한다. (koreawillbe1@naver.com)
이 영화는 프랑스에선 2005년 5월 11일 ‘Freres De Sang: TaeGukGi - 혈육 형제’라는 제목으로 개봉에
들어갔는데, 역대 한국영화로는 <무사> 이후 최대 규모로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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