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7시께 금남로는 차량시위대의 등장과 함께 시민들의 가두투재에서 민중봉기의 장으로 불붙는다. 수많은 차량들이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 군경 바리케이드 앞으로 돌진한다. 불꽃처럼 산화한 그뒤를 따라 또달ㄴ 차량이 꼬리를 문다. 이날 밤 9시께 금남로는 한국은행 가톨릭센터 구관광호텔 ymca앞 등에 깨지고 불타고 뒤집힌채 나뒹구는 차량들의 시커먼 잔해와 돌멩이, 자욱한 최루가스로 뒤덮여 전장터를 방불케 한다. 당시 5월22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금남로 전투가 혈전 바로 그것이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자욱한 최루탄가스속에 버스를 앞세운 시위대는 군인들과 육박전을 벌여 전일방송부근의 금남로에는 비명과 함성이 끊이지 않는다. 20여분간 계속된 이 충돌이 끝나자 시동이 걸린 수십대의 버스트럭 택시 사이에는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내려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실신한 부상자가 곳곳에 즐비하다. 계엄군들도 시민들의 불붙는 투쟁에 밀려 전일방송앞까지 저지선을 후퇴시키고 오히려 시민들에 포위된 꼴이다. [안내양 차림의 20대 처녀 2명은 운전사 차림의 머리가 깨진 30대 청년을 부둥켜 안고 통곡을 하고 쓰러진 환자들을 이송하며 앰블런스를 찾는 멕메인 소리가 유혈극의 참상을 말해준다] (동아일보 22일자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
금남로일대 아수라장
20일 오후 7시20분께, 금남로의 1차 차량시위대는 구관광호텔 (현 무등빌딩) 근처에서 흩어진다. 당시 전남대 학생들로 금남로 차량시위를 목격했던 이철규씨 (34·풀무원생수 순천지점운영)의 증언. 7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유동쪽에서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올리면서 돌진해온다. 맨 앞에서 택시 몇대가 오더니 짐을 가득 실은 대한 통운 소속 12t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따르고 그 뒤로는 여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뒤따른다. 트럭위에서는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여러개 흔들면서 밀고 들어온다. 이를 보고 있던 시위대 중 누군가가 [민주기사들이 드디어 봉기했다]면서 공수들을 밀어버리자고 소리친다. 나는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민중의 힘이 이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신이 나 앞장서 가자고 소리치기도 했다. 갑자기 소리치기도 했다. 갑자기 돌변한 사태에 놀란 계엄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아댄다. 5·18 광주 민중항쟁 민주기사동지회 회장인 이행기씨는 당시 무등극장 앞에서 차량을 몰고 돌진한다. 무등극장 앞에는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으나 돌과 화염병만으로는 중과부적이다. 이씨와 몇몇 시민들은 특공대를 조직하기로 한다. 무등극장앞에는 누가 버리고 갔는지 자가용차량 한대가 서있다. 차를 방패삼아 밀고 가는데 좋을것 같아 차 뒤에 횃불을 꽃고 시동을 건채 초크를 잔뜩, 당겨놓고 앞으로 밀고 간다. 계엄사 상황일지는 차량시위를 시간대별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저녁7시=2천여명의 시민, 차량의 뒤를 따라 현재지하상가 공사장앞을 통과도청으로 가고 있음.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청 앞에서 대치. 저녁7시05분=가톨릭센터앞에서 가스탄 발사, 대부분 차량 시민들 분산했으나 버스 3대, 택시 30대, 군중 2천여명 시위중. 노동청앞 2쳔여명 시위중. 노동청앞 2천여명 시민도청으로 진격할 태세. 저남매일신문사 앞에서 1천여명 시위대 군경과 대치 (계엄사 상호아일지) 이날 차량시위는 오후 5시께부터 무등경기장 앞에 집결한 기사들이 시내진입을 시도, 이루어진다. 광주시내 택시기사들은 동료 기사들의 죽음과 공수대들의 만행에 분노해 누가 먼저랄 것없이 삼삼오오 무등경기장앞으로 모여들었던 것. 당시 택시 집결지가 무등경기장으로 선택된 것은 공용터미널이 공수대들에 의해 장악, 시외버스의 대부분이 무등경기장앞에서 승객을 하차했기때문. 기사들은 이날 오후1시께부터 무등경기장앞에 진을 치고 모여 시내상황을 이야기하거나 서넛씩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시국 상황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을 나눈다. 그러다 몇몇 울분에 찬 기사들이 차를 가지고 시내로 가 공수대를 쓸어버리자는 의견을 낸다. 순신간에 40∼50명의 기사들이 이에 동조, 일부 택시들이 앞장서 대열을 짓기 시작한다. 이들은 일단 차를 몰고 광주역 앞 북구 전신전화국 근처까지 왔으나 광주역에 배치된 계엄군에 저지당한다. 이때 계엄군들은 2열로 앞줄은 앉아쏴, 뒷줄은 서서쏴 자세를 취하고 차량들을 향해 총구를 겨냥한다. 기사들은 일단 후퇴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다시 무등경기장앞으로 돌아간다. 당시 택시기사로 시위해 참여한 이창준씨 (현 광주시택시운송사업자 조합 이사장)의 증언. 80년 당시 그는 광명택시기사로 일한다. 회사가 구광주고속로터리쪽에 있어 일이 끝나고 기사들이 모이면 입에서 입으로 그날 시내에서 목격한 사실이 전해지고 정보가 모아진다. 당시 기사들은 시내 공수대들의 만행에 서서히 분노해간다…. 19일 저녁쯤으로 기억한다. 광주고속앞 유동쪽에서 신역으로가던 경남지역 트럭이 시민들에 의해 뒤집힌다. 군중속에서 [저차 경남차다, 잡아라]소리가 나자 우 달려들어 차를 순식간에 뒤집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광주시민들은 마치 끓는 기름독 같아 불만붙이면 타오를 준비가 돼 있었다. 20일 오후1시께 무등경기장앞. 기사들 사이에서는 무등경기장이 당시 자연스런 손님대기소이자 모임터이기도 했으며 19일 저녁부터 기사들도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자연히 무등경기장앞으로 모이자는 소식이 돈다. 무등경기장에 도착하자 택시들이 한 70∼80여대 모여있다. 저마다 분노하고 격양돼있다.
계엄군, 장갑차동원 저지
[내 기억으로 사복을 입은 경찰관들도 있었던 것 같다. 거기 모여 있던 택시기사들은 1시40분께 대열을 지어 신역쪽으로 행진해갔으나 신역앞에서 계엄군과 맞부딪쳤다. 그들은 마치 총을 발사할 자세여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흩어졌다 다시 무등경기장에 모인 시간이 오후 5시께인 것 같다. 재차대열을 정비해 같은 코스로 신역에 도착했는데 계엄군이 이번에는 철수를 하고 없었다. 우리들은 유동로터리에서 광남로 사거리를 타고 금남로쪽으로 올라갔다.] 이씨는 개인적으로 5·18을 계기로 생각이 크게 바뀌다. 해병대를 나와 어찌 보면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씨는 당시 5·18에 참여하고 공수대들의 잔학상을 목격하면서 생각이 바뀌어 이후 택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등 투철한 노동운동가로 변모한다. 차량시위에 힘을 얻은 시위대는 이날 7시40분께 금남로에서 후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점거, 정박중이던 버스를 동원해온 또다른 시위대와 합류, 대형버스 5대를 2열로 앞세우고 [연행학생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군경 저지선에 밀어닥친다. 공수대는 시위대의 기세에 밀려 저지선을 금남로1가 구 전일방송 앞에까지 후퇴시키고 교통신호대, 가드레일, 대형화분 등을 도로 한가운데로 끌어내 바리케이드를 친다. 같은 시간 시위대는 노동청 앞에서도 고 전남매일건물쪽에서도 도청을 향해 밀어닥친다. 전체적인 형세로 보아 계엄군이 오히려 운집한 민중의 바다에 빠져 포위된 것이다.
시민, 시내 주요지역 장악
같은 시간 택시 시위 소식은 시 외곽지역으로 입에서 입을 타고 번진다. 소식을 들은 시 외곽지역 학동 방림동 산수동 지산동 유덕동 광천동 화정동 등지에서 시민들은 손과 손에 곡괭이 삽 낫 몽둥이 연탄집게 빨래방망이 등을 들고 시내로 속속 모인다. 유동 부근에서는 시민들이 드럼통을 굴리고 다니며 사람들을 불러낸다. 유덕동 근처에서는 농민 50여명이 한복을 입고 손에 쇠스랑 괭이 등을 들고 시내로 몰려와 시민들의 박수를 받는다. [시민 여러분, 금남로로 가서 계엄군을 쳐부숩시다.] 시외곽에서 이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지은 시민들은 거대한 부대가 되어 실개천이 모여 바다가 돼 금남로에서 [민중의 바다]를 이룬다.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무등경기장 앞에서 출발한 본대와 함께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서도 많은 택시들이 합세, 금남로로 진입해 온거리를 차량으로 가득 메우게 된다. 당시 택시기사로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시위에 합류한 우억구씨 (47). 시외버스터미널앞으로 들어오면서 시위대와 합세한다. 차가 금남로로 들어갔을때 이미 거리는 차량과 시위대로 가득찼고 그의 차에도 시민이 한명타있다. 조금씩 차를 몰고 전진, 가톨릭센터 앞까지 간다. 갑자기 앞쪽에서 최루탄 발사소리가 나더니 차량과 계엄군과 시민들이 한데 뒤엉켜 든다. 밀어 붙이는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서 수많은 차량이 엎어지고 부서지며 치열한 싸움이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이날 금남로의 차량시위는 고 공용터미널과 노동청앞으로 시위대의 주력들이 옮겨지면서 계엄군과 결사항전을 벌여 결국 자정 무렵 도청과 광주역만을 제외하곤 시내전지역을 시민들이 장악하게 되면서 시민항쟁의 승리를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