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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 스크랩 서양 지성사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64 08.12.01 22: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역사와 인간 >

역사학의 목적은 인간의 이해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인간은 세 가지 측면 a. 본능적인 장치를 갖춘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생물학적 존재) b. 인간을 형성하고 인간이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사회구조 속의 존재로서의 인간(사회학적 존재) c. 자기가 왜 태어났으며 왜 살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부단히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윤리적 도덕적 존재) 등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역사학은 인간을 두 번째 존재, 즉 사회구조 속의 인간을 다룬다. 따라서 역사학은 한 인간이나 사회의 여러 국면의 상호관계를 이해함으로써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는 학문 활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인간 본성, 즉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도덕적 잣대는 무시한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어느 정도 상대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 현실을 추상한 선악이란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각 시대가 갖는 특이성과 관련하여 규정당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중세 이후 인간은 오랫동안 비이성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으며, 근대적 인간관의 특징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데 있다. 20세기에 이르면 인간은 비이성적 존재로 환경과 집단의 노예로 보는 인간관이 자리잡게 된다. 이렇듯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각 시대의 중심적인 경향이 무엇이냐 혹은 당대의 관심이 무엇이냐에 의해 각기 다르게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공통의 사실은 인간, 특히 개인은 사회 혹은 전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하나의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사회보다는 개인에 두는 영웅론적 역사해석으로 귀결될 소지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당대의 역사적 제현실과 상호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개인을 통해 하나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파악해본다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이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강의는 각 역사적 시대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서양의 지적 전통 혹은 흐름이 르네상스 시대이후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

14-15세기 이후 프랑스혁명에까지 이르는 약 5세기 동안의 시기는 이른바 '지리상의 팽창'으로 불리는 유럽세계의 팽창,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절대왕정의 설립과 붕괴라는 급격한 변화로 점철되어 있다. 중세봉건사회로부터 근대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구조 전환이 이루어진 이 시기의 본질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수립에 입각한 절대주의체제의 수립, 자본주의적인 요소의 증대, 그리고 자본가집단의 성장에 따른 시민사회의 전개로 파악해볼 수 있겠다.

이 시기 동안의 사유의 변화 역시 이상의 현실 및 구조의 변화에 입각하여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검토될 주제는 르네상스로 시작된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발전, 종교개혁 이후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된 종교적 사유, 과학혁명으로 인한 중세적 우주관의 붕괴, 국민국가의 통합에 입각한 정치, 사회적 사유의 발전이다.

1. 르네상스

먼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운동은 정치, 신, 윤리, 미에 대한 서양인의 감각과 사고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으며 비판적인 시각을 육성해 주었다.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걸쳐 고전문화의 부흥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운동으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라는 시대적 의미도 지닌다. 르네상스에는 세속주의정신의 대두, 개인 및 경험에 대한 강조, 민족국가 및 세속군주에의 충성심 등 근본적인 변혁이 내포되어 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탈리아에서는 일찍이 13세기 이전에 봉건제가 소멸하고 지중해무역에 입각한 도시가 발달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르네상스는 도시 신흥 부르주아지의 부 및 국력신장과 인기확보를 추구한 전제군주의 후원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르네상스의 세속적 특징은 고전연구를 강조하는 인문주의운동에서 두드러져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의 문학적 업적과 플라톤 철학에 대한 활발한 연구 등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관과 자연관이 나타났다. 인문주의적 열정과 세속주의적 관점은 미술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개인적 성취를 추구하는 미술가들은 세속군주 및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후원자들 속에서 세속취향을 더욱 발전시켜, 지오토,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은 많은 걸작품을 산출했다.


뿌리깊은 봉건제로 부르주아의 발전이 다소 부진하고 교회 및 스콜라철학이 강했던 북유럽에서의 르네상스는 사회 비판적이며 종교 지향적이었다. 북방인문주의자들은 고전문헌보다는 성경원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원시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려는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를 추구했다. 대표적 지식인인 에라스무스는 당시 사회와 교회를 풍자해 점진적 개혁을 제시한 󰡔�우신예찬󰡕�으로 유명하다. 이외에 민족국가의 통일에 입각해 국민문학이 발전했으며, 자연과학의 발전을 가져온 귀납적이고 실천적인 탐구방법 및 관점이 나타났다. 미술 역시 이탈리아만큼 찬란하지는 못했지만 종교적이고 서민적인 분위기 및 사실묘사가 돋보였다.

한편 고전문헌 및 제반 과학적 문헌의 발견은 교회의 인가에 입각해 왔던 전통적 가치관과 우주관에 회의를 초래했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와해시켰다.


2. 종교개혁

16세기 유럽에서는 개신 교회를 성립시켜 그리스도세계를 분열시킨 종교개혁이라는 또 하나의 대변혁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종교적 운동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운동으로서의 면모도 지녔다. 종교개혁은 한편으로는 인문주의의 비판적 시각으로부터 중요한 동인을 제공받았지만, 동시에 인문주의운동을 크게 위축시켜 중세적 세계관으로 다소 복귀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중세적인 그리스도교 세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분열시켰고, 종교 및 신에 대하여 분분한 논의를 촉진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 및 대분열 이후 극심했던 교회의 부패 중 '면죄부'는 가장 큰 문제였다. 원래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면죄의 의미를 띠고 있던 '면죄부'는 탐욕스런 르네상스교회의 수입증대방편이 되면서 무식한 민중들에게 천당에 이르는 허가장으로 허위 선전, 판매됐다. 이는 특히 중앙집권적 왕권이 부재했던 독일에서 극심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합에 의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따라 성사 및 선행, 성직자의 권위를 강조했다. 반면 중세 말 독일과 네덜란드지방에서 일어난 신비주의 운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원시적인 기독교로의 복귀를 주장한 종교개혁가들은 원죄 및 예정의 이론에 입각해, 구원이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이 아닌 신의 예정된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여 성사 및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운동은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과 교회의 엄청난 재산 및 경제적 특권의 탈취를 노린 세속군주의 후원 없이는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개혁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됐다. 신을 향한 내면적 신앙에만 입각한 구원관에 따라 '면죄부'판매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면서(1517),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당한 루터는 친교황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에 대항하던 독일의 세속제후, 농민과 도시서민층, 하급 기사층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농민들이 농노제 등 기존체제의 변혁을 추구하는 반란을 일으키자(1524-1525) 보수적인 루터는 세속제후 편에 서서 진압을 촉구했고, 이후 루터파는 독일에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독일의 종교분쟁을 궁극적으로 종결지은 아우구스부르크화의(1555)는 각 지역의 종교적 선택권을 세속군주에게 부여하되, 그 범위를 카톨릭 교회 및 루터파 교회로 한정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계승한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의 칼뱅은 명석하고 조직적인 사람으로서 제네바에서 엄격한 신정정치를 실시했다. 칼뱅은 근면하고 금욕적인 현실생활을 통해 신의 선택받은 자임이 증명된다는 예정설로 중산계층의 호응을 받았으며, 근대적인 직업관과 생활윤리의 형성에 기여했다.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 스코틀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돼 근대장로교회롤 발전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영국교회를 로마교회로부터 독립시켜 자신이 그 수장임을 선포하고 교회토지를 몰수함으로써 왕권강화 뿐 아니라 중산층의 지지까지 확보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 확립된 종교개혁은 종교적 요인보다 정치, 경제적 요인이 훨씬 더 강해, 교리 면에서는 루터와 칼뱅의 영향을 받았으나, 의식면에서는 카톨릭 교회와 별 차이 없는 중도적인 영국 국교회를 수립했다.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전 유럽에 파급되자 카톨릭교회에서도 자체개혁에 나섰다. 이단사상으로부터 카톨릭교리를 지킨 종교재판소, 군사조직으로써 카톨릭 교세의 방어와 확장에 힘쓴 예수회, 성경과 전승에 기반 한 그리스도적 진리 및 신앙과 선행에 의거한 구원관을 정비한 트렌트 공의회(1545-1563), 또한 성직임명 및 교회재판의 공정성을 기한 교황청 등의 구체적 시도로써 로마교회의 세력이 회복되자 신구교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여기에 정치적 갈등 및 경제적 대립이 뒤얽혀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위그노전쟁,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거쳐, 17세기초에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대규모국제전쟁이 벌어졌다. 오랜 분쟁에지치고 소모된 이후에야 유럽은 관용의 정신을 지닐 수 있었다.

 

3. 과학혁명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한 인문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동반했다. 르네상스로 발굴된 고대 그리스의 과학문헌들은 제반 분야에서 막대한 양의 지식을 증대시켰고, 동시에 자연현상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과학혁명을 통해 이룩된 근대과학은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지역과 아랍문화권의 교류를 통해, 아랍권에 묻혀있던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르키메데스 등의 과학 관련 저작들이 유럽지역으로 침투하면서 생성되었다. 대부분 그리스 원전이 아니라 아랍어로 된 서적들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기 시작하면서 13세기경이 되면 유럽 전역의 학문 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17세기 과학혁명기까지 유럽의 중세학문을 지배했고,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근대과학의 태동을 저해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과학의 토대가 된 그리스-아랍 과학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들어왔고, 근대과학과 관련시켜 볼 때 12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아랍 학문의 대대적인 번역을 통한 학문의 팽창은 근대과학이 이때에 유입된 학문에 바탕을 두었음과 동시에 그것의 부정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과학혁명기의 과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상의 혁명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의 완성에 이르는 시기의 과학을 이른다. 유럽 사회 전체에 엄청난 사회적 사상적 충격을 몰고 왔던 과학혁명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헌이 발굴, 번역되는 르네상스를 그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천문학상의 혁명은 바로 이 고대 문헌이 번역되고 유럽인들에게 소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천문학상의 혁명이 제기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역학의 혁명이 나타났고, 결국 고전역학의 완성은 천문학을 역학의 한 부분으로 만들면서 근대과학의 출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과학혁명기에는 천문학 및 역학의 혁명 이외에도 하비의 혈액순환론으로 대표되는 생리학상의 변혁도 수반되었다.


과학혁명은 이러한 과학내용의 변혁 이외에도 과학의 방법, 목적 및 사회 속에서의 위치 변화, 종교와의 관계, 근대적인 과학단체의 출현, 실험과학과 기계적 철학의 대두로 이어져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에 기반하고 있던 중세적 우주관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요컨대 과학혁명은 그리스도교가 일어난 이래 모든 것의 빛을 잃게 했으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 그리스도교 체계 안에서의 한 에피소드, 내적 변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즉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과거지향적인 데 비해 과학혁명은 과감히 전통과 결별하고 전진적인 자세를 취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근대는 과학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

르네상스라는 개념은 매우 복잡해서, 역사가들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끝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다. 12세기 내지 13세기에 르네상스가 시작한다는 입장, 늦게는 17세기까지 중세가 계속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한 1453년이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보는 입장, 혹은 활판인쇄술이 도입된 시점이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보는 입장 등등 각기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견은 르네상스의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를 테면, 르네상스는 근대인의 탄생 및 개인주의의 출현과 관계가 있는가? 경험과학의 대두 및 자연에 대한 치밀한 관심은 르네상스운동의 부분이라 간주되어야 하는가? 등등 르네상스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한 결정은 르네상스가 언제 일어났는가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르네상스를 고전연구의 시작에서 인쇄술에 힘입은 서적의 대중적 보급이 이루어지던 1450-1500년경의 시기로 한정하여 다룬다. 이 시기는 두 단계를 나눌 수 있는데, 첫째, 귀족적 르네상스 단계로 그리스․로마의 필사본을 읽는다든지, 플라톤적인 이상주의에 몰두했고, 둘째, 대중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르네상스 단계로 비전통적이고 좀 더 비계층적이고 좀 더 과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르네상스 단계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르네상스인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다.


그는 1452년 북이탈리아의 피사와 피렌체 사이에 있는 빈치라는 작은 마을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에 사생아라는 존재는 흔한 일이었으므로, 이것이 후일의 레오나르도에게 심리적 영향을 미쳤는지는 미지수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후일에 보였던 내향적인 점, 조금은 냉정하고 비밀스러운 인상, 남성적 관능의 결여 등은 유년시절의 사생아로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 사람들은 자수성가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는데, 당시 대다수의 유명 인물들은 자신이 사생아임을 공공연히 떠들어대기도 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가 개인의 가치나 능력이 그 어떠한 기존의 관례나 법률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인간 중심적 사유)


레오나르도는 14세쯤(1465년경) 대은행가였던 메디치家가 지배하고 있던 피렌체로 가서, 당시 유명한 미술가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io)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베로키오와 같은 사람들은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된 메디치家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림, 조각, 식기류, 장식품 등의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금은 세공인으로도 유명했다. 1472년 레오나르도는 견습생활을 마치고 베로키오 가게의 수석화가가 되었다. 베로키오는 이 무렵 그림을 집어치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레오나르도의 천재성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적 인간형 - 천재성)


당시 공문서를 보면 20대의 레오나르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하나는 수업연한을 마쳤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남자 모델에게 음란한 제안을 했다는 죄로 다른 젊은 미술가들과 고발당한 것이 그것이다.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레오나르도가 동성애를 했다는 데 대한 많은 의구심은 여전했다. 만년에 동성에 대한 개인적 정열을 나타낸 유일한 기록과 데생이 있는데, 그것은 문하생 살라이(Giacomo Andrea Salai)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살라이를 데생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꿈을 근거로 그가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빈약한 듯 싶다. 한편 레오나르도는 왼손잡이였다. 그의 그림에서 빗금이 오른 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그어지고 있다. 필적 역시 거울을 통해 봐야만 알 수 있고, 이것이 아마도 사후 2세기 이상 그의 수기가 해독되지 않은 한 이유였다. (르네상스적 인간형 - 괴팍성 혹은 자발성 혹은 독창성)


1481년 그의 스승 베로키오가 베네치아로 떠나자 레오나르도 역시 스포르차(Lodovico Sforza)가 지배하고 있던 밀라노로 떠났다. 그는 스포르차 앞으로 자신이 구상한 토목공사 계획이나 전쟁무기 제작법 등을 서면으로 보냈고, 이에 대한 스포르차는 레오나르도를 궁정에 거주케했다.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를 떠난 이유는 베로키오가 떠났다는 것, 스포르차가 자신의 아버지의 기마상을 조각할 미술가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 등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르네상스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당시 피렌체는 전통의 도시였기 때문에 변화하는 시대의 경향성과는 상충되는 측면이 많았다. 즉 피렌체는 고전적 르네상스의 도시였던 셈이다. 초기 형태의 르네상스는 이제 두 번째의 르네상스 형태로 변하고 있었고, 레오나르도가 이런 이행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고전적 르네상스로부터 대중적 르네상스, 이상주의적 르네상스로부터 경험주의적 르네상스로 가는 이행이었다. 그것은 또한 과거지향적 휴머니즘의 숭배로부터 현재적 인간성에 대한 강렬한 신념으로 옮겨가는 이행이었다. 메디치家는 중세적인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우두머리라는 이념을 이미 버린 바 있었으나,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과 자연은 여전히 현실감이 없는 주로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르네상스가 낳은 자수성가형 사람은 인간과 자연을 육체적인 오관을 통해 꽉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피렌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레오나르도는 사실상 학교교육을 받지 않은 일자 무식한 존재에 불과했다. 학교제도를 자랑으로 알던 귀족적인 피렌체의 은행가들에게는 레오나르도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러나 밀라노는 용병대장 출신인 스포르차가 지배하고 있던 도시였기에, 재간이나 인기가 마치 생명과도 같았던 도시다. 또한 밀라노는 당시 새 인쇄술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던 터라, 레오나르도는 이러한 밀라노의 분위기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도시국가 지배자들이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한 이유 - 고독함, 자수성가 등)


한편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정확하고(수학) 사실적으로(실험) 관찰했다. 이러한 두 요소, 즉 논리적인 것과 실험적인 것은 그 아래로 내내 과학적 방법의 두 기본요소가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해부학을 경험했고, 데생도 세부적으로 그렸다.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자신 마음 내키는 대로 과학에의 취미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0세에서 근50세가 되기까지의 생애 중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였다. 그의 연구범위는 천재적이었다. 그는 우선 해부학적 데생을 통해 매우 세밀한 신체의 구조를 표현했다. 그는 세밀한 관찰을 통해 자연의 진정한 의미가 구조 속에 있으며, 자연은 구조 속에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는 생물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탐구하여,(기계공학 내지 역학연구) 다양한 기계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수기에는 바늘이나 거울을 연마하는 기계, 나사나 줄을 자르는 기계, 회전식 제분기, 수위조절수문, 굴착기, 전투용 무기 등에 관한 기록이 있다.


밀라노 궁정에서의 레오나르도의 생활은 건물이나 운하를 설계하거나 궁정의 공식행사를 준비하는 일로 바빴다. 그러다가 그는 1499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정복하자, 당시 대수와 도박의 수학적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파치올리(Luca Paccioli)와 함께 도망쳤다. 밀라노 생활에서 그가 남긴 작품은 실상 ‘최후의 만찬’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그림에서 유다는 예수와 같은 쪽의 상에 앉아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보다 고도의 극적이고 예술적인 효과를 의도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배반하는 자와 배반당한 자가 함께 상을 받고 있는 매우 오묘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밀라노 궁정이 몰락하자, 레오나르도는 잠시 동안 체자레 보르지아(Cesare Borgia)의 공병가가 되어 도시국가들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에게 메디치家가 추방당한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와 조우하기도 했다. 피렌체에서의 4년 동안의 시간동안 그는 이름 없는 한 장사꾼의 셋째 마누라를 그리며 한가하게 지냈는데, 그것이 바로 ‘모나리자’이다. 이후 그는 1513년 메디치家의 대로렌초의 아들이 교황 레오 10세로 등극하자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과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16년 프랑스왕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에서 생활하다가 1519년 어느 한 시골에서 죽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르네상스적 인간


첫째, 그는 신동이었다. 천부적인 천재로서 르네상스적 감각을 몸에 지니고 그것을 실천했다. 르네상스적 감각이란 모든 개인이 자기 자신 속에 한없는 가능성을 갖고 있어서 어떠한 종류의 일에 대한 정성들인 수업이라든가 수도성직자적인 평생의 헌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한 송이 꽃처럼 스스로 만발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인간적 성취가 개인에게 간직되어 있다는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르네상스적 신념의 핵심이다.


둘째, 레오나르도는 민중의 사람이었다. 그가 얻은 지식은 고대의 선인들의 학문을 고려함이 없이 스스로 그 자신의 눈에 비추어진 것이었다. 즉 그의 관심은 고대인의 권위에 있지 않고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에 있었다.


셋째, 그는 발견자였다. 오래도록 간과되어 온 자연의 의미를 세부적으로 묘사한 인물이다. 물론 그가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 이론이라 칭할만한 발견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거의 모든 사고가 여전히 자연의 보편적이며 선험적인 계획에 의해 주도되고 있을 당시에 그는 자연을 세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우리가 자연의 대설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원자구조로부터 유전학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는 발견이다. 자연을 세부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 구별된 세부 하나 하나가 독자적인 의미를 갖는 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발견은 이제 실험실로 들어가 근대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코페르니쿠스보다 앞서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는 빛의 파동성까지도 고려했었다

<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1469-1527)

 󰡔�군주론󰡕� 저술

* 군주론 저술당시의 이탈리아 : 베네치아 귀족정, 나폴리 군주정, 피렌체 공호정, 밀라노 공국, 교황령으로 5분할

* 1512년 메디치가의 피렌체 공화정이 몰락하자, 당시 외교업무를 관장하던 마키아벨리 좌천 -> 1513년 󰡔�군주론」 저술 -> 메디치가의 로렌초에 헌정 -> 무시됨, 1532년 그의 사후 발간 

 마키아벨리의 휴머니즘

* 저술 작품 : 󰡔�군주론󰡕�, 󰡔�로마사논고󰡕�, 󰡔�치렌체사󰡕�, 󰡔�전쟁술󰡕�, 󰡔�만드라골라󰡕�(희곡) 등

-> 휴머니즘적 요소 내포 & 레오나르도와 달리 라틴 학자

-> 휴머니즘의 요소 : 고전 작가들의 사고 흡수 + 정치에 대한 세속적 경향 = 귀족적 르네상스 + 대중적 르네상스의 융합

: 정치론 = 경험주의+합리주의

* 레오나르도가 근대에 있어서의 최초의 자연과학자의 한 사람이라면 같은 의미에서 마키아벨리는 최초의 사회과학자

-> 생활의 전체 사실로부터 하나의 선택을 했다는 것, 자기가 묘사하는 그림에서 무엇을 배제하는가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없다는 것(르네상스 예술이나 과학에 있어서의 문제는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였다.)

-> 마키아벨리의 경우, 정치학적 고찰에서 배제해야할 것은 도덕 혹은 ‘그래야만 하는 것’(당위성)이었다. 그 대신 ‘있는 것’(실재성)에 주의를 집중했다. 󰡔�군주론󰡕�은 소위 군주의 귀감식의 문헌, 즉 지배자에 대한 달콤하고 충성스러운 조언이라는 전통을 전적으로 깨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기가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 선량하고 점잖은 처신이란 무엇인가, 사회는 어떻게 지배되어야만 한다든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다만 사회가 현재 어떻게 지배되고 있는가,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 지배자는 연명하려면 어떻게 처신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여기서 마키아벨리의 경험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측면을 살필 수 있다.


* 마키아벨리의 선험적이고 합리적인 면 : 일반공리

-> 인간본성의 문제 : 마키아벨리는 인간 본성이 어디서든지 동일하다는 일반법칙을 정해놓았다. 고대와 자기 시대의 인간 본성이 동일하다는 그의 가정은 결국 인간에 대한 문화의 영향을 무시하게 되고, 인간을 비역사적 존재로 취급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 인간본성의 특징은 무엇인가 : 인간본성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지만, 정치적 목적으로서는 악하다고 규정 (󰡔�군주론󰡕� : 인간들은 사악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 인간이 순수하지만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 (루소와 비교)

->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한 규정은 피렌체에서의 자신의 외교관으로서의 경험에서 비롯

-> 본질적인 것은 그가 새로운 과학의 기초가 되는 일반법칙(인간은 악하다)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치에서의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실제생활의 외면적이고 장식적인 면을 전부 배제했던 것이다.

=>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결합시켜 구사 (근대과학의 방법 : 경험주의+합리주의)


 세속주의 (반교권적이지만 반종교적은 아니다)

*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어떻게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치를 종교의 인도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다. 이것은 생활과 사상의 세속화라는 근대사의 주요 테마를 보여주는 뚜렷한 것이다.


-> 마키아벨리의 새속주의는 반교권적이긴 했지만, 반종교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종교를 영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으로 보았다. 종교에 대한 그의 현실주의적 태도는 종교가 온순함을 설교함으로써 국가가 강력해지는 것을 방해한다는 객관적인 견해를 낳게 되었다. 동시에 마키아벨리는 종교가 국가를 공고히 하는 일종의 사회적 시멘트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종교를 영적 힘이 아니라 강제력으로 간주하려는 근대 정치이론의 최초의 경우로 볼 수 있다.


국가론

* 마키아벨리는 도덕, 종교, 교황권으로부터 눈을 돌려 물자체로서의 국가에 관심을 두었다. 우리는 󰡔�군주론󰡕�이 한 개인을 다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마키아벨리는 정치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의 책은 군주에 조언함으로써 국가에 조언하고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했다. 즉 군주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것을 가정했다.


->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가선의 화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군주론󰡕�이 단순히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에 관해 군주에 조언하는 서적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 마키아벨리 시대는 분명 군주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예술가든 정치가든 개인의 능력과 권력은 큰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신의 개입은 불신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신 대신 인간의 자연적 요인, 즉 군주의 인품이나 권력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국가는 개인의 창조라고 간주되고 국가와 개인은 일치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군주와 국가의 일치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국가’(state)라는 말의 어원을 따져 보면 잘 알 수 있다. 라틴어에서 온 이 말의 원래의 의미는 지위 또는 신분이란 것이었는데, 점차 우월한 혹은 최고의 정치적 신분을 각별히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중세의 이탈리아에서는 공무원들이 자신의 신분(status)을 가능한 한 유지하려고 했다. 점차 이러한 신분의 보유자들은 이탈리아의 전제군주제적 발전과 더불어 자기들의 지위와 공동체의 행정적.관료적 조직의 전체를 동일시함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것이 실현되었을 때, 군주와 국가는 하나가 되었고, 군주와 국가 간의 이익의 일치를 하나의 주어진 공리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국가이성

* 마키아벨리가 실제로 쓰고 있던 것은 권력투쟁을 하는 다른 국가들 가운데서 한 국가가 어떻게 그 지위를 지킬 수 있는가를 군주에게 조언하는 것이었다. 그는 군주와 국가를 동일시했으며, 보통의 도덕적 교리가 군주에게 적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군주의 도덕적 의무는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군인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 국가의 우선적인 목적은 생존하고 강력해지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속성 옹호)

-> 국가의 생존과 국가권력의 획득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모든 다른 고려는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견해는 국가이성이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국가이성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 국가이성은 최고의 선이며, 결국 그에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일반적 가정을 심어주었다.

-> 이후 권력정치의 표본으로 발전했다.

-> 마키아벨리즘


 군주=국가=양심 배제

* 마키아벨리는 정치활동을 행함(doing)이라는 중세적 범주에서 끄집어내어 만듦(making)이라는 범주로 발전시켰다. 이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직인이나 미술가의 도덕적 의도는 만들어진 사물들과의 관계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다만 그의 예술적 능력만이 문제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말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 르네상스 국가와 연관시켜 본다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를 국가를 만드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도덕심이 없는 존재로 상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도덕적 요인에 대한 배제 :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무시

기회주의 = 상황론


* 마키아벨리의 이상은 혼합정체였다. 그는 ‘우리가 선이라 규정한 세 정체(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은 너무 단명하기 때문에 그리고 세 나쁜 정체(참주정, 과두정, 중우정)은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악덕 때문에 어느 것이나 결함이 있다. 사실상, 군주, 귀족, 평민의 힘이 동일한 국제하에 결합되어 있는 경우 그 때에 비로소 이러한 세 힘은 상호간에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파악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정치적 운명을 지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파악했다. 그에게 인간의 정치적 운명을 지배하는 두 요소는 운(fortune)과 힘(virtue)이었다. 힘, 즉 올바른 지식이란 수단에 의해서 사람은 그 상황을 만드는 어떠한 요소들을 조정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국가의 융성을 촉진할 수 있었거나 쇠퇴에 이르는 혁명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에 변화를 주는 행위를 낳게할 수 있는 제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운이었다. 그리하여 힘은 생활을 끊임없이 운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 즉 일종의 기회주의에 있었다. ‘운은 바뀌고 인간은 고정된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이 세태에 알맞은 한 성공하지만 거기에 거슬릴 적에는 성공하지 않는다.’


중우정치


* 첫째, 군주는 민중을 우롱하고 기만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군주는 이른바 유능한 선전가라는 것이다. 그는 민중이란 쉽사리 속아 넘어간다고 믿었고 민중 속에 허위주장을 퍼뜨리는 것이 군주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주의 행동은 국가이성의 경우와 같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허위주장이 궁극적으로 민중 자신들에게 유익하게 된다고 시사하였다. 군주의 거짓말은 동란을 방지하여 국가를 안보하고 평온과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 둘째, 군주는 쓸데없는 잔학성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요하다면 탄압을 할 수도 잇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군주의 권력을 위협하는 소수의 경쟁상대로 제한해야하는 것이었다.


결론

*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군주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 루터와 종교개혁 >

☞ 종교개혁은 유럽을 종교적으로 분열시켰다. 거기서 유래한 종교전쟁의 결과는 새로운 정치형태를 유럽에 형성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사상을 유럽 정신에 제공하였다.


☞ 루터 이전에도 클뤼니 수도원(11세기), 시토수도원운동(12세기), 프란체스코수도회 운동(13세기) 등 교회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인정받은 개혁과 이단 간에 그러진 선은 때로는 분명치 않았으며 흔히는 교리상의 결정사항의 결과라기보다는 기존의 정치적 사정의 결과일 때가 많았다. 이후 전개된 종교개혁의 3대 특징으로 순전히 종교적인 측면, 부와 영예에 대한 항의, 정치적 쟁점 등을 꼽을 수 있다.


< Martin Luther : 1483-1546 >

루터가 농민으로서 빈곤한 생계를 잇는 매우 가난한 부모의 아들이라는 것은 종래의 통설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루터의 아버지는 작센(Saxony)의 만스펠트 지방의 광부로서 좀차 자기 자신의 용광로와 광산을 갖기에 이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의 아버지는 농민이라기보다는 성공한 숙련노동자였으며, 자신의 아들도 변호사가 되어 역시 출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 17세때 에어푸르크 대학 입학 : 스콜라철학과 휴머니스트 간의 논쟁 중심지


21세때 은둔 수도성직자들의 모임인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회에 입단(천둥소나기) -> 세속속에 머무는 한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자신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는 단식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가차없는 고행을 하였다. 이러한 무서운 정신적 투쟁으로 인해 그는 성격이 강해지고 내면의 힘을 의식하게 되었다. 루터는 정신적 불안정을 극복하고 자신과 자유를 각성하게 되었다.


1508년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전임 -> 경건주의 신앙 설교 -> 1510년 로마 여행 -> 순례자로서의 루터 : 회개의 사면을 주는 성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그는 무릎으로 걸어 올라갔다. 신부들과 추기경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비판 -> 151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옴 : 대체로 1517년까지 루터가 로마교회의 불만분자였다고 생각할 각별한 이유는 없다.


1517년 만성절 전야인 10월 31일, 면죄부에 관한 95개항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 위에 못박고 모든 사람에게 공개토론을 제의했다.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루턴의 반박문은 전 독일로 퍼져나갔다.


루터가 실제로 공격한 것은 무엇이며, 왜, 그리고 누가 그를 지지하였는가? 면죄부는 테첼(Tetzel)이란 대리인이 독일 지방에서 팔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는 교황 자신이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신임 마인츠 주교를 위해서였는데, 그는 자신의 인준을 위해 교황청에 지불할 돈을 은행가인 푸거가로부터 대부받았었고 이제는 그 대부의 반환을 푸거가로부터 독촉받고 있었다.


루터는 또한 면죄부 전체를 공격했다. 교회에 의하여 오랜 전통을 배경으로 한 면죄부는 크리스트와 성자들의 생명으로 교회에 축적되어 온 공적의 잉여 부분을 증표로 한 것이었다. 면죄부의 구입은 구입자에게 이 공적의 잉여부분에 접촉케하여 특정한 죄에 해당하는 지상에 있어서의 회개를 면하게 하는 것인데, 그러나 죄자체를 면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테첼은 면죄부를 판매할 때, 구입자는 회개뿐 아니라 죄 그 자체를 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연옥에 떨어진 친척을 위해 면죄부를 구입하면 그 친척의 영혼이 곧장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청중들이 맏도록 맛들었다. 테첼은 “잔돈을 돈궤속에 짤랑 넣자마자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루터는 “돈이 돈궤속에서 짤랑거리면 탐욕과 이득이 불어나는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의 기도 결과는 전적으로 신의 뜻에 달려 있다”고 반박했다.


루터의 주장에 의하면 면죄부의 잘못된 교리를 퍼뜨린 것은 테첼뿐아니라 교황청 자체라는 것이었다. 그는 교황이 사면을 하더라도, 참다운 내면적인 회개없이는 교황의 사면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면죄부를 공격함으로써 면죄부의 배후에 있는 신학 전체와 교회조직을 공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통회없는 면죄부가 무효라고 말하는 것은 교황이란 장식품 없이 통회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루터는 구원이 개개인 자신의 신앙과 통회에 달려있다고 함으로써 성사의 필요 및 그것을 관장하는 성직제도의 필요를 폐지하였다. --> 오직 신앙만이 구원을 가져온다. --> 실제로 교회에 대한 루터의 절연이 명백해지고 인정받게 된 것은 95개항 논제를 게시한 3년후인 1520년경 이었다.


루터가 교회의 권리남용(성빅매매와 공금유용, 부도덕과 돈의 탐욕 등)뿐 아니라 교회 자체를 공격하고 있음이 분명해지자 대부분의 비독일계 휴머니스트들(에라스무스 등)은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렇지만 독일의 군주제후, 기사들, 상인들 및 농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로마 교회에 대한 그들의 불평불만은 종교적인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것이었다. 당시 독일은 이른바 ‘교황청의 젓소’로 평가받고 있었고, 신성로마 황제 칼5세마저 독일에 대한 배려를 하지않자, 루터의 사상은 전 독일의 국민적 감정의 물결을 타고 로마교회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해갔다.


루터는 저항하는 성직자들의 땅을 몰수하도록 독일에 권고하여, 기사들과 군주제후들은 교회토지를 점거하는 데 가담했다. 그 결과는 군사력의 보유자들 대다수가 설사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경제적 이유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꺼이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이라고 시작한 것이 정치적, 경제적 우위를 위한 투쟁과 합류하여 사회적, 국민적 여망과 일치되고 말았다.

 

종교개혁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순전히 종교적인 것이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는 어떠한 권위-설사 그것이 공의회이든 그 밖의 다른 권력체이든 또는 대학이든 교황이든 간에 권위-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설사 그것이 카톨릭교도 혹은 이교도에 의해서 제창되든 아니든 또는 권위에 의해 공인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나는 진실이라 믿는 것을 자신 있게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떠한 권위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러한 루터의 선언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중요한 기조이며, 16세기 지적활동의 중심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차원은 경제적 차원의 문제로, 교황청의 사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교황들은 방대한 도서와 값비싼 미술품들로 교황청을 채웠고, 이것은 개혁자들의 반발을 샀다.


세 번째 차원은 정치적이고 사상적 차원의 문제였다. 루터는 정치적 지지없이는 종교개혁자로서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는 흔히 자기 본래의 신앙을 희생하고서라도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루터는 기사전쟁, 농민반란, 재세례파 등과 연관하여 정치적 입장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기사전쟁은 1522년에 교회 토지를 점거하라는 루터의 권고에 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지사단을 패배했고, 이것은 루터에 대한 독립적인 지지세력의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루터는 군주 제후에 대한 의존도를 더 깊게 하였다.


이러한 군주에 대한 의존도는 농민반란에 접하여 더욱 커졌다. 1525년 독일 농민들은 귀족들에 의해 가해진 가렴주구의 증대로 절망의 수렁에 빠져서, 또 신의 말씀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언명하고 있다는 루터의 교리라고 생각되는 것으로부터 기운을 얻어서 반란을 일켰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반란의 지휘권은 소위 ‘좌파 개혁자들’ 즉 재세례파의 수중에 넘어갔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교황의 성직계층제를 거부하고 성서 속의 신의 말씀에 중점을 두는 데 있었다. 재세례파는 여기서 더 나가 자신들이 직접 성령에 접해 있으므로 성경까지도 필요 없다고 간주하였다.


만하임은 농민반란에 재세례파의 교리가 침투된 것을 천년왕국설과 억압당한 사회계층의 요구가 결합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은 근대사에 있어서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사회혁명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즉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혁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루터는 사회혁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농민들에게 천국은 피안에 있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하면서, 농민들에게 칼 아닌 말만이 오직 힘있는 것이며 의존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민들이 루터의 이러한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루터는 ‘살인강도와 같은 농민들의 떼거리’라는 적의에 찬 팜플릿을 저술했다. 그리고 군주들에게는 ‘무기를 가진 자는 누구나 그것을 사용하여 농민들을 소탕하고 죽이라’고 권고했다.


결국 루터주의는 농민과 도시대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그들은 불평등한 계급사회에 있어서의 농노의 필요를 주장하는 로터의 교리에서 등을 돌렸다. 봉건적 부과는 유지되어야만 하고 민중은 강력한 권한으로 통제되어야만 한다는 루터의 견해를 그들은 버렸다. 여기에 루터는 자신의 교리, 즉 신의 말씀을 강행하기 위해 세속적 무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루터주의는 군주 제후의 명분과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루터의 교리는 현존의 정치적 권위에 유리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그는 피동적인 교리를 제창하고, 농노들에게 당신들이 소중히 여겨야할 유일한 자유는 정신적 자유이며, 당신들이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는 정신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군주 제후들쪽으로 기울어진 루터는 힘이 정의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 결과는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교회와 국가가 동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루터주의는 개개인의 실제생활을 전적으로 국가통제에 부속시키게 하는 것이었다. 독일에 전파된 루터주의의 결과는 자유로운 내면생활과 권위에 예속된 인격의 외면생활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양산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루터주의는 교회의 권위 붕괴에 기여하였다.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는 그의 교리는 대부분의 성사체계를 불필요한 기구로 바꾸어 놓았으며 개인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파괴하였다. 한편으로는 루터가 인간의 내면생활과 공공의 활동을 분리시킨 결과, 경제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종교적 개인주의가 경제적 개인주의를 촉진시키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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