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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중 위
헌정회 홍보편찬위원장, 영토문제 특별위원회 위원장, 12∼ 15대 국회의원, 전 환경부 장관, UN 환경계획 한국부총재, 한강문학회 상임고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단상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기후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벌써 19세기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필자가 환경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0년대 초에 읽은 〈로마클럽보고서〉를 통해서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보고서는 ‘세계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이로 인한 식량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으로 인해 결국 인류는 모든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한대의 성장욕구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이제 막 보릿고개를 면하기 시작한 시점이고 아직도 높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힘차게 하늘로 뻗어 나가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환경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웬만한 사람들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이 터져 나오기가 일쑤였던 시절이다. 대학에서는 〈빈곤의 악순환〉이나 〈후진국성장론〉으로 강의실을 채우고 있었던 때였다.
이 보고서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 우리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산아제한운동을 벌리고 분식을 장려하면서 경제고도성장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환경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정부가 〈자연보호헌장〉을 만들어 공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들로 산으로 공무원이나 학생들로 하여금 쓰레기를 줍도록 한 시기는 대략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단계도 여전히 자연보호 차원일 뿐 환경정책으로까지 안목을 넓혀가지는 못하였다. 정부에서 환경청을 발족시킨 때가 겨우 1980년인 것을 보면 대략 환경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한 일이다.
〈로마클럽보고서〉를 읽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시점에서 필자는 우연히도 학승學僧으로 유명한 탄허呑虛 스님을 만나 지구의 변화에 대한 얘기를 듣는 기회가 생겼다. 월남전이 막 끝날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들은 풍월일 뿐인 주역에 대해서 그는 일장 연설을 한 후 앞으로는 주역周易의 시대를 넘어 무슨 정역正易의 시대가 온다고 역설하면서 그 시대는 북빙양이 녹아내리는 때를 보면 알수 있다고 하였다. 북빙양이 녹을 때에는 처음에는 서서히 녹다가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얼음 전체가 푸석푸석 해져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데 이렇게 되면 지구의 기울기가 90도 각도로 똑바로 서는 천지개벽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그는 이산화탄소에 대해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대기오염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지구가 지구적 활동에 의해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그로 인해 북빙양이 녹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지구 축의 변화는 당연히 천지개벽을 가져올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그러나 그 얘기는 너무나 황당하게만 느껴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은 간방艮方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그 피해를 가장 적게 입을 것이라는 얘기만이 솔깃하게 들렸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는 날 까지도 예언한 분이니 무슨 예언인들 못할 것이 없는 분이었다는 생각이었지만 워낙 황당한 얘기이어서 그저 귓가에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여간 신기하지가 않다. 지구의 온난화로 북빙양이 녹아내린다는 말이나 지구의 기울기가 현재 21.8도에서 24.4도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연구 보고가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예언은 너무나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그의 얘기를 필자는 크게 알아들을 형편은 되지 못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막연하게나마 필자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도 어쩌면 지구적 존재이기 때문에 지구를 떠나 살수가 없는 한계적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지구와 결부시켜 인간을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말하자면 지구의 토양에서 생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살아야하고 지구에서 죽어야 한다. 그러자면 지구에 순응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지구에 순응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지구가 허여하는 만큼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지구의 허여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수명에서 알 수 있다. 지구상에 있는 어떤 생명체도 영원불멸의 존재는 없다. 어떤 개체도 사멸한다. 다만 그 수명은 생명체마다 다르다. 왜 다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거북이는 몇 백 년을 살 수 있는데 왜 하루살이는 하루밖에는 못 사는가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지구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지구의 뜻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지구에게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러나 지구에게도 뜻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여겨진다.
모든 생명체가 지구적 존재인 것처럼 지구는 우주적 존재다. 그러하기 때문에 지구는 우주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저항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은 우주적 활동이다. 우주에의 순응활동이라는 얘기다. 지구가 우주의 뜻에 거슬려 어느 한 행동이라도 중지한다면 지구는 사멸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에 무슨 뜻이 있겠느냐와 관계없이 지구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존재는 사멸할 수밖에 없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는 얘기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존재도 모든 지구상의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수명을 갖게 된 것도 지구질서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지구가 허여하는 만큼 밖에는 살수 없는 것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존재양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제아무리 발전된 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수명을 늘리려 한다고 하더라도 지구가 허용하는 범의를 넘을 수는 없다는 인식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지구의 보복으로 인간은 재앙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지구의 법칙이라 여겨진다.
어떤 생명체도 지구가 허여하는 만큼만 살수밖에 없다는 사실 속에는 그 개체수도 포함되고 행동양식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 지구상에서 멸종되어가는 생명체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인간재해에 의해 멸종되었건 자연재해에 의해 멸종되었건 더 이상 지구가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공통성이 있다고 하겠다.
멸종대상인 생명체가 보호해 주고 싶은 대상이었다면, 아마도 지구는 진화라는 방식을 통해 멸종을 미연에 방지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는 어쩌면 지구가 한 생명체를 보호해 주는 가장 자비로운 양식이 아닐까 싶다. 멸종이란 결국 진화를 멈춘 경우가 태반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모든 생명체가 죽을 때에는 질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굶어서 죽는다고 한다. 맹금류는 사냥을 할 기운이 떨어지거나 음식을 씹을 수조차 없기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 인간의 경우에도 질병이 아닌 자연사의 경우에는 ‘곡기를 끊는다’는 말처럼 음식 섭취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이 지구의 뜻에 순응하는 자세다.
그렇다면 질병은 무엇인가? 지구의 뜻에 대한 거역이 낳은 결과물이라 해석해 본다.
과거 인류가 앓았던 질병의 역사를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염성 질병이건 아니건 지구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지구가 모든 생명체를 존재하게도 하고 그 수명을 주어 사멸하게도 하는 것처럼 질병을 주어 모든 생명체의 개체수를 조절한다고 보아지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지구가 생명체에게 끊임없이 자신에게 가한 고통에 대해 보복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풍토병은 지구가 앓고 있는 질병이 인간이나 여타 생명체에 옮겨 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현대인이 앓고 있는 암이나 에이즈 같은 질병 또한 인간이 지구에 가한 가혹행위로 인해 생긴 보복성 질병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언제인가 남미 순방 중에 코스타리카인가 하는 나라에서 시간마다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폭발하는 화산의 주변을 타원형을 형성하며 리조트가 자리하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내는 순간순간의 굉음소리가 마치 지구가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지구는 우주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간헐적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딸꾹질도 하고 피곤하면 기지개도 켜고 트림도 하고 뒤척이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기후의 이상 변화와 태풍과 산불 같은 것들이 모두 그런 현상의 일환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발상은 사뭇 넌센스인 것처럼도 보인다. 어떻게 인간이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허리케인이나 태풍 하나 일으킬 수도 없고 화산 폭발 하나도 제어할 수 없는 하찮은 존재다. 봄, 여름을 거꾸로 배치할 수도 없고 비나 눈을 자유자재로 오게 하거나 못 오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류가 일제히 기후변화에 대해 대처하자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대기 중에 인간이 배출한 탄산가스의 함유량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깨달았다는 얘기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대기 중에 탄산가스의 함유량이 지구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기후까지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지구 자체가 호흡곤란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은 크나큰 재앙으로 인간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다.
바다는 어떤 오염물질도 정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바다의 정화능력을 능가할 정도로 많은 오염물질이 바다로 유입된다면 바다는 가만있지 않는다. 당장 몸살을 앓거나 화를 내면서 인간에게 어떤 보복으로 다가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적조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대기나 바다나 모두 하나같이 지구 그 자체라는 사실임을 깨닫는다.
필자는 가끔 계란을 보면서 이거야 말로 지구와 똑같이 생겼다고 느낄 때가 있다. 계란의 맨 바깥쪽인 껍질부분이 곧 대기권이라 여겨진다. 대기권은 그만큼 두껍고 깨기가 쉽지 않다. 그 안에 있는 흰자위가 지구표면이고 노른자위는 지구의 핵이라고 상상해 본다.
결국 모든 병아리는 계란 속의 흰자위를 영양으로 하여 태어나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는 지구의 지표상의 존재로서 지표에 있는 것을 양식으로 삼아 생존을 유지한다.
그런데 인간만은 지표뿐만 아니라 지구의 내장까지를 파먹으면서 또 이를 소화시키는 과정에서는 탄산가스를 배출하여 공기까지 오염시키고 있으니 지구인들 가만히 있겠는가? 눈이 따갑고 상처 난 곳에서는 병균이 득실거린다. 지구가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구가 허용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공기로 숨을 쉴 수도 없고 물을 마실 수도 없다.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기에 지구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미리부터 지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하는 인간의 노력은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가끔 생각해 본다. 성경이나 불경처럼 지구경전을 만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지구가 곧 하늘이라는 생각,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과 한 가족이라는 생각, 지구는 언제나 감사의 대상이라는 생각,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지구를 경배 하면서 잘 가꾸어 가자는 생각을 집약시켜 지구경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