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인 콤플렉스는 없었다.-역사서에 나온 최초의 형제반목은 아담의 아들 카인과 아벨이다. 카인은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이는 하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아벨을 살해한다. 동생에 대한 열등감을 일컬어 '카인 콤플렉스'라 부른다. 그러나 반상 형제대결에서 카인 콤플렉스는 없었다. "형님 먼저, 아우먼저"였으므로 우리나라에도 프로기사의 수가 200명에 육박해 가면서 가족기사들이 많이 나타났다. 부자(父子)기사가 있는가 하면 부녀(父女)기사도 있고 부부(夫婦), 형제(兄弟)기사, 자매(姉妹)기사, 숙질(叔姪)기사도 있다. 한국기원 사무국에서는 각종기전의 대진표를 작성할 때 이들 가족기사들은 미리 조(組)를 분리시켜 추첨하기 때문에 예선대국에서 마주치는 일은 전혀 없다. 혹시 가족기사가 함께 성적이 좋아서 본선대국에서도 승승장구한다면 결국 대결을 피할 수 없겠지만 한국 기전사에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고 따라서 부자기사, 형제기사의 기보가 신문에 연재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제4기 SK가스배 신예프로 10걸전에서 전남 신안군 비금도 출신의 걸출한 두 신예, 이상훈 三단과 이세돌 三단 형제가 결승전에서 격돌했다. 올 봄 비씨카드배 신인왕전에서 우승한 바 있는 형 이상훈은 본선리그 A조에서 5전 전승을 거두었고, 2000년도 최다승 보유자인 동생 이세돌은 B조에서 역시 5연승을 기록하여 기전사상 초유의 형제간 타이틀매치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결승 3번기 1국은 형이 먼저 이겼고 2국에서 동생이 승리하여 서로 한판씩 주고받은 뒤 맞이한 제3국. 선배기사들이 이 대국을 지켜보면서 "누가 이길까?" "마땅히 동생이 양보해야지..." "세돌이가 이 판을 이겼다가는 저녁에 집에 가서 형한테 얻어맞을걸..."하고 농담을 했다. 한국기원 소속 기사 중에 형제기사 1호는 김수영(金秀英) 七단과 김수장(金秀壯) 九단이다. 그 이전에도 조상연(趙祥衍) 五단.조치훈(趙治勳) 九단 형제기사가 있었지만 이들은 일본기원 소속기사이다. 김수영.김수장 형제기사 탄생에는 재미나는 일화가 있다. 1963년경 김수영 七단이 프로 초년병 시절에 동생 수장은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형이 바둑을 두면 동생은 옆에서 구경을 하며 배우려고 했다. 형 수영은 동생 수장이가 기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내가 이미 기사가 되었으니 동생은 마땅히 다른 길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형은 어떻게 하면 동생이 바둑에 취미가 떨어지도록 만들 수 있을까하고 고심하던 끝에 묘수(?) 하나를 생각해냈다. 형 수영은 동생 수장을 불러 바둑을 두자고 청했다. 지는 쪽에서 꿀밤을 맞는 내기바둑이었다. 형은 온갖 사술을 총동원하여 동생을 골탕먹이며 머리통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사정없이 꿀밤을 때렸다. 동생이 바둑에서 정이 떨어지도록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형의 작전은 빗나갔다. 동생 수장은 맞으면 맞을수록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동생의 승부기질을 길러주어 프로기사를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이세돌 三단도 소년시절 아버지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웠고 그 후 권갑용(權甲龍) 六단의 도장에서 공부했으나 실질적인 훈련조교는 형 이상훈 三단이었다고 한다. 옛날 일본에 바둑4대종가(혼인보.이노우에.하야시.야스이)가 경쟁하던 시절에는 각 종가에서 자제들에게 바둑을 전문적으로 교육시켰기 때문에 부자기사. 형제기사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제14대 본인방 가문의 주인인 슈와의 4부자였다. 슈와는 아들 3형제는 기사로 양성했는데 큰 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 슈에이는 하야시 가문으로 양자를 보냈으며 셋째 아들 슈겐이 본인방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 그후 형인 슈에이가 하야시 가문과 던절하고 돌아오자 동생 슈겐은 형에게 본인방 주인의 자리를 양보했으며 형이 죽은 후에 슈겐이 다시 본인방의 주인이 되었다. 이처럼 형제가 바둑의 대권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어찌 갈등이 없었으랴만 형제간에 쟁기(爭棋)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 60년대 말 일본바둑계에는 4형제 기사가 있었다. 사카이 미치하루 九단과 사카이 도시오 八단, 사카이 야스오 六단, 사카이 요시미쓰 五단은 모두 친형제간이었다. 그러다가 장형인 미치하루의 아들 사카이 이사오가 역시 프로에 입문하여 한 집안에 5명의 기사가 나오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에는 또 3자매 기사도 있다. 한때 일본기원 기사회장을 지냈고 여류 선수권전에 4번이나 우승한 바 있는 혼다 사사코 八단과 혼다 사치코 六단 혼다 데루코 七단은 친자매간이다. 지난 80년도 여류학성전 준결승에서 자매끼리 승부를 겨루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바둑에는 양면성이 있다. 승부적인 면과 풍류(風流)적인 면이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바둑을 '군자의 도락(道樂)이다','선비들의 고상한 취미다','승부예술이다'라고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둑에 풍류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바둑시에 '바둑이란 이기면 진실로 즐겁고 져도 또한 기쁘다(勝固欣然.敗亦可喜)'고 읊은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현대의 기사들 중에 "소동파의 이 시구는 엉터리다. 이기면 기쁘다는 말은 당연하지만 져도 기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세상에 바둑을 지고 기뻐할 사람 누가 있겠는가"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반드시 승부만을 생각하면 그렇겠지만 승부를 초월한 상태에서 바둑을 멋을 느끼는 시인의 풍류를 몰라서 한 말이 아닐까. 옛날 중국 동진시대 풍류재상 사안(謝安)은 진왕 부견의 백만대군이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자기의 친조카인 사현을 대장군으로 삼아 전쟁터로 보낼 때 조카와 함께 별장을 걸고 숙질간에 내기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바둑계의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 명종시대에 박계현(朴啓賢)이라는 문관이 있었다. 그는 당대의 권력자인 윤원형의 청혼을 거절할 정도로 강직하고 근엄했으며 그가 대사헌 벼슬에 있을 때는 동인, 서인간의 당쟁을 억제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박계현의 아버지인 박충원도 고관을 지냈는데 어느 날 집에서 박충원이 아들을 불러 바둑을 한판 두자고 청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방에 갔을 때 마침 어머니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가 내일 아침 입고 나갈 조복을 바느질하고 있었다. 아들 박계현은 "아버님 기왕바둑을 두실 바엔 지금 어머님께서 만들고 계시는 비단조복을 내기로 걸고 두시죠"하고 졸랐다. 그리하여 부자간에 내기 바둑이 벌어졌는데 아버지가 패하자 아들은 아버지의 조복을 입고 아버지의 수레를 타고 밖으로 나가 자랑했으며 그 광경을 보고 아버지는 기뻐했고 사람들이 그 화목한 가정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전쟁터로 조카를 보내면서도 별장을 걸고 내기바둑을 둔 사안. 조정에서는 그토록 근엄하면서도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내기바둑을 두면서 어리광을 피우는 박계현. 아들에게 내기바둑을 지고서도 좋아하는 박충원. 이런 것이 바로 승부를 초월한 바둑의 멋이요 매력일 것이다. 이상훈. 이세돌 형제대국을 승부의 사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세돌이 요즘 성적이 좋으니까 능히 형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상훈이 펀치력이 강하니까 동생을 이길지도 모른다'고 운운하는 것은 천박하다. 승부란 원래 적개심이 불타야만 명승부가 연출되는 법. 이상훈.이세돌은 한집에서 자고 한솥밥을 먹는 우애 깊은 형제간이다. 무슨 투지가 일어 처절한 싸움을 벌일 것인가. 바둑이 끝난 뒤 승자인 형도, 패자인 아우도 다함께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상훈 三단은 내년에는 연령초과로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다고 하니 더욱 뜻깊은 우승이다. 관전기- 권경언 六단(월간바둑 2000년 12월호) 제4기 SK가스배 신예프로10걸전 결승3국 ● 이세돌 3단 : ○이상훈 3단 2000년 11월 1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 제한시간 각 3시간 (덤 6집반), 202수 끝 백불계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