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39]《시한부 말기암 환자와 풍천장어.》
한 일주일 전, 마을방송에서 이런 내용이 흘러나오더라고요.
동네 입구에 있는 전신주 하나에서 무슨 이상이 발견되어
한전에서 그 기계를 교체하는 작업을 곧 시작하기 때문에
전기가 잠시 끊어질 거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조금 있자니까 컴퓨터가 꺼졌습니다.
잘됐다 하고 목욕이나 다녀오려고 차를 몰고 나가다 보니
한전에서 트럭을 석 대나 동원해서 교체 작업을 하고 있었고
파란 조끼를 입고 신호봉을 든 노가다꾼 하나가 신호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신호수 앞에 차를 세우면서 내가 물었어요. 작업이 몇 시간 걸리냐고.
그랬더니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요.』 하는데, 그 목소리와 억양!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던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헬멧에 마스크를 쓰기는 했지만
저 눈매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눈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아는 정도면 저 사람도 나를 알 텐데, 아는 척을 안 해요.
내 머리가 아줌마처럼 길어서 10년 전에 한 번 본 사람도 나를 기억하는데
지금 저 사람의 표정으로 봐서는, 나를 알면서 일부러 모른척하는 표정은 아니었어요.
어디서 봤나.
목욕을 하면서, 집에 오면서, 청소기를 돌리면서, 밥을 먹으면서, 침대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다가,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 다섯 시.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번쩍! 하고 떠오르더라구요!
『아! 그 시한부 말기암 환자에, 풍천장어!』
내가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졌을 때였으니 10년이 넘은 일입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차에 받혀서 팔이 부러졌고
건국대 충주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후 링거를 맞으면서
입원실을 배정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조금 있자니까 한 40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하나 응급실로 들어오는데
한눈에 봐도 노가다 타입이었지만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술에 취해 비틀대다가 어디에 머리를 부딪혀서 피가 좀 나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의사가 왔고, 머리를 조금 깎은 뒤 몇 바늘 꿰매고 간호사가 링거 바늘을 꽂아주더라구요.
그날 응급실은 한산했어요. 환자가 그 사람하고 나, 이렇게 둘밖에 없었고
그래서 간호사 두 사람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어요, 그 사람이 전화를 한 것은.
『... 뭐하냐?... 음 그래?... 아니... 여기? 건대병원... 긴 말 필요 없고, △△아! 부디 행복 해라!
나는 이렇게 살다 이렇게 가지만, 너는 꼭 행복해야 한다!... 뭐?... 농담이 아니야, 자식아!...
몇 달 전부터 속이 좀 아프더라구. 그래서 오늘 건대병원에서 엠알아이를 찍어 봤는데,
에이, 관두자. 말하면 뭐 하냐... 그게 아냔 마!... 의사가 그러는데, 늦었다더라. 수술도 못한대.
응?... 병명?... 폐암 말기란다... 안 된대. 수술하면 더 나빠지고, 진통제나 맞으면서 걍 사는 게 낫대.
짧으면 삼 개월, 길면 육 개월이라더라.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맘껏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다가,
그렇게 가라 그러더라, 의사가... 응... 그래 임마... 그래서, 그 진단받고, 하도 서글퍼서 나 혼자
술 한 잔 했다... △△아!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술 한 잔 사라... 응, 지금... 그러면, 어디로 오냐면,
주공 5단지 옆에 충주풍천장어집 있지? 글루 와... 뭐, 삼겹살?... 야 씨벌늠아! 폐암 말기 환자가
무슨 삼겹살이냐, 개새끼야. 돼지기름이 안 좋은 거 몰르냐 자식아?... 아, 그, 개새끼, 얀마!
그래 봐야 돈 20만 원이다! 너 친구가 마지막 가는 길에 풍천장어가 먹고 싶다는데, 20만 원이
그렇게 아깝냐?... 그게 아니야, 자식아. 입장을 바꿔서, 니가 만일 폐암에다가 6개월 남았다면
나는 널 일본으로 델꾸가서 온천에 초밥에 사시미에, 천만 원이라도 쓰겠다, 개새끼야. 근데, 뭐
친구가 죽는다는데도 20만 원이... 뭐?... 풍천장어 얻어먹으려고 내가 뻥 친다고? 에라이 개 씹새끼야,
자, 봐라 개새끼야, 여기 링거병 보이지? 저기 간호사 보이지? 이래도 뻥이냐 이 니미 씨벌늠아!...
그래, 임마!... 야, △△아! 내가 아까 의사한테 6개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래도 니 얼굴이
젤 먼저 떠오르더라. 내가 부모가 있냐, 처자식이 있냐. 형제들이라고 있는 게 남 만도 못해서
얼굴 본 지도 수십 년이고, 그래서 이 지구 상에서 나한텐 너밖에 없어 자식아. 그리고, 며칠 있다가
내가 유서 쓸라 그래. 내 월세방 보증금 8백만 원 있지? 그리고 내 차하고 가전제품들 있잖아,
또 저것도 있어. 우리 하루 일하면 노동부에 4천 원씩 쌓이는 거 있지? 그게 또 한 5백 된단 말야.
그러면 총 2천 정도 되거든? 그걸 내가 다 너 주고 갈라 그런단 말야, 자식아... 그럼... 너도 알잖아. 나한테
너 말고 누가 있냔 마!... 응, 그래... 그러면, 주공 5단지에 충주 풍천장어, 알지?... 응. 그럼 30분 후에 만나자.』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에요.
일주일 전에 한전 전신주 작업 현장에서 신호 보던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은 전화를 끊자마자 간호사한테 바늘 빼 달라고 하고선 그냥 나갔는데
그 사람 가고 나서 간호사들이 배를 잡고 웃더라니까요.
그 사람 친구는 풍천장어 20만 원어치 사주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을 텐데!
6개월이 지나고 10년이 넘도록 안 죽으니...!!!
2022년. 2월. 7일.
제1차 세계 민중혁명. 강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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