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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문화원형질 찾기
향가鄕歌 편.2
-. 왕인 등 백제인들이 5백년 걸려서 글자 모르는 일인들에게 만들어 준 일본의 ‘가나’ 문자
《한강문학》(2014.창간∽)은 《문학탐구》(편집,발행인 권녕하, 1993.창간∽1994.종간) 당시부터 추진하여오던 〈검은 머리칼의 종족을 찾아서〉(문화인류학, 고고학, 지질학)에 이어 명제를 〈한국인의 문화원형질 찾기〉로 달리하여 큰 주제로 삼고, 기왕의 천착과정에 ‘역사전통문화예술’을 얹어 새삼 추진하여오던 차, 홍윤기 박사님의 대작 《일본문화사신론》(2011, 한누리미디어)를 접하게 된다. |
본고는 홍윤기 박사의 저서 《일본문화사신론》(홍윤기, 2011, 한누리미디어) 내용 중 ‘향가’ 관련부분이 실린 〈왕인 등 백제인들이 5백년 걸려서 글자 모르는 일인들에게 만들어 준 일본의 ‘가나’ 문자〉편을(집중 발췌, 일부 윤문) 분재한다.〈편집실〉 |
가나 글자는 일본어를 표기하기 위해서 한자(漢字)를 가지고 만든 글자
일본의 문자는 ‘가나’** 라고 부른다. 글자의 자체(字體)에 의해서 앞에서(한강 27호) 살펴 본 시가의 ‘만요가나’ 를 비롯해서, 일반적인 것은 ‘히라가나’(ひらがな,平假名)와 ‘가다카나’(カタカナ,片假名)이다.
가나 글자는 음절(音節) 문자의 일종이다. ‘교(きょ), 샤(しや)’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한 글자가 한 음절에 해당한다. 현재는 46글자로써 가나 글자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나 글자는 일본어를 표기하기 위해서 한자(漢字)를 가지고 만든 글자이다.*
**일본 문자에는 탁음(獨音)이 있어서, 한글 표기에서는 ゕな(가나), カタカナ(가타카나), ひらがな(히라가나), まんょらがな(만요가나)로 구분해서, ‘카나’ 또는 ‘가나’ 로 기술했음. *梅棹忠夫外 [日本語大辭典] 講談社, 1992. |
한자(漢字)를 가지고 일본의 가나 글자를 만든 것은 백제에서 응신왕 때 왜나라로 건너온 아직기(倭漢直,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히) 선생과 왕인(西文首, 가와치노 후미노 오비토)박사 등과 그들의 직계 후손들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일본어 학자 오노 스즈무 교수가 밝히고 있다.
야마토국(大和國, 나라의 왕도)에 살던 아직기(倭漢直)와 가와치국(河內國, 오사카의 왕도)에 살던 왕인(西文首)의 유산으로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위진(魏晋)시대의 중국어 발음을 일본에 전했고, 또한 한자로서 일본어를 쓰는 방법을 실행했다는 일이다.**
또한 오노 스즈무(大野 晋) 교수는 한국 고대의 “향가(鄕歌)의 문자 사용법은 일본의 만요시가(萬葉詩歌)의 문자 사용법과 똑같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大野 晋, [日本語の世界] ① 中央公論社, 1980. |
이와 같이 일본의 ‘가나’ 글자는 고대 한국인들에 의해서 왜나라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의 선주민들은 문맹이었기 때문에 왜국으로 건너온 선진국 한국의 문화인들에 의해서 문자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하겠다.
다케다 유키치(武田祐吉) 교수는, “한자를 음부(音符) 문자로서 취급한 것으로서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스이코조(推古朝, 593∼628)에 세운 이요온천비(伊豫溫泉碑)로서 한국인 혜총(惠聰)이 만든 것으로 본다… 지명(地名)을 표현하는 이요(夷與, いよ)라는 두 가지 표현의 한자는 ‘한자로써 일본어를 묘사한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혜총은 백제 스님으로서 나라땅 아스카에서 호코지(法興寺)가 서던 시절인 서기 595년에 한국에서 건너온 학승으로 유명하다.
와카모리 다로(和歌森太郞) 교수는 후나야마 고분(船山古墳, 熊本縣玉名郡菊水町) 출토의 대도(大刀, 東京國立博物館 소재)의 명문과 스다하치만궁(隅田八幡宮)의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명문이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가지고 일본어의 고유명사를 나타내고 있는 일본에서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후나야마 고분 출토의 칼은 명문에 탈자(脫字) 등 판독하기 힘든 부분도 있으나, 백제 개로왕(蓋鹵王, 455∼475 재위)때 이태가(伊太加)가 만들고 장안(張安)이 글씨를 써서 음각한 것이다. 이 칼은 북규슈의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인물화상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고찰한바와 같다.
*武田祐吉, [上代日本文學史] 博文館, 1936, **和歌森太郞, [日本史の虚像と實像] 毎日新聞社, 1972. |
오노 스즈무(大野 晋) 교수는 아직기 선생과 왕인박사를 비롯한 두 가문의 고등 관리(文首)들을 거치며 일본 가나문자가 만들어진 경위를 밝힌 바 있다.
그는 후나야마 고분 출토 대도의 도신명(刀身銘)이며 인물화상경 명문은 모름지기 귀화인(저자주:한국 도래인)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리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한국인이 쓴 것이되, 일본에 건너와 쓴 것은 전혀 아니다. 오노 교수는 일본어 학자의 입장에서 명문들이 고대 한국인의 것임을 밝힌 것이라고 하겠다.
선진국 한국인들이 한자어를 가지고 왜나라로 건너가서 이것을 본국에서처럼, 이두(吏讀)며 향찰(鄕札)처럼 일본음에 맞춰서 사용하게 된 것이 만요가나(萬葉假名, 眞假名)
학자에 따라서는 가나 문자가 구카이(空海, 774∼835, 眞言宗, 開祖)를 비롯해서 학자며 관료였던 기비노 마비키(吉備眞備, 694∼774)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구카이는 신라인 고승이며, 그는 속성(俗姓)이 사에키(佐伯) 씨이다. 아버지는 신라인인 사에키 아타히타키미(佐伯直田公)이고, 어머니는 백제인 아도(阿刀) 씨이다. 기비노 마비키는 백제인 세이네이(淸寧, 청녕, 5C 말경) 천황의 후손이다.
일본에 건너갔던 고대 한국인들에 의해서 일본의 가나 문자가 만들어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이를 애써 부인하려는 학자는 없다. 왜냐하면 선진국 한국인들이 한자어를 가지고 왜나라로 건너가서 이것을 본국에서 처럼, 이두(吏讀)며 향찰(鄕札)처럼 일본음에 맞춰서 사용하게 된 것이 만요가나(萬葉假名, 眞假名)이기 때문이다.
*大野 晋, [日本語の歷史] 土井忠生編, 至文堂, 1969. |
왕인박사의 일본 최초의 와카 [난파진가]
일본인들치고 백제인 왕인박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고대 백제]에 관해서 묻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마다 백제에 관한 깊은 역사 인식과 동시에 백제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점에 따사로움을 누린다.
어째서 일본인들은 백제에 호의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일본에서 건너와서 “꼭 찾고 싶어 고대 백제지역 답사 여행을 했다”면서, “충남 공주에 [무령왕릉]이 있어서 찾아가서 참배했다”는 분이 있는가 하면, “부여 백마강가에서 열린 ‘백제문화제’ 를 참관하며 감회가 컸다”는 얘기도 한다. 또한 대체로 내게 말하기를, “왕인은 오진천황시대에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와서 왕실에서 왕자들에게 문자를 가르쳤다”는 것, “왕인의 묘지가 히라카타시에 있어 참배했다”고 밝히기도 한다. 좀 더 깊은 것을 내게 말해 주는 것은 “왕인은 일본문화의 은인입니다. 일본 최초의 한시집인 [회풍조](서기 751년경 성립)에 보면 이 책의 서문에서 왕인박사가 일본에 문자 문화를 심어주었다는 찬사가 실려 있다”, “승게이카이(景戒)가 쓴 일본 최초의 불교 설화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서기 822년경 성립)에도 그 서문에서 왕인을 찬양하고 있어 감동적이다”는 등 왕인에 대해 많이들 알고 있었다.
일본 국문학자며 현대시인인 오오카 신(大岡 信)은 1998년 11월 5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발표한 그의 칼럼(折々の歌)에서 왕인박사의 와카 [매화송]을 인용, 해설까지 하면서, 작자미상(讀人しらず)이라고 써놓았다
필자가 왕인에 관한 문헌을 처음 대한 것은 1970년대 초의 일이다. 그 당시 와세다대학 인근의 한 고서점에서 내 손에 잡힌 것은 에무라 홋카이의 [일본시사](日本詩史, 18세기 한문학자 江村北海(1713∼1788) 지음)라는 목판 인쇄본이었다.
이 책 제1권 서두에는 “왕인이 [매화송](梅花頌, 흔히 難波津歌로 부름)을 지어 닌토쿠 천황에게 헌시했다. 소위 31 문자로 된 와카(和歌)이다”라 쓰여 있었다. 물론 기노 쓰라유키(紀貫之, 882∼945)의 [고금집](古今集, 사기 905년 성립) 서문(仮名序)에 보면 “왕인의 [매화송]은 천황 어대에 읊은 최초의 노래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왕인이 일본 천황대에 최초로 31문자의 와카를 읊었다는 사실이 10세기 벽두의 고대 문헌으로도 일찍부터 잘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좀 안타까운 점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근년에 인쇄되어 서점가에 나오는 [고금집](古今集)을 들춰보면 서문(夜名序)을 처음부터 빼버린 책을 발매하고 있는 일이다. 어째서일까. 예전에는 모두들 왕인박사를 찬양했는데 요즘은 세태가 변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왕인을 찬양하는 일본의 학자들도 많이 있는데 말이다. 더욱이 필자를 놀라게 만든 것은 일본 국문학자며 현대시인인 오오카 신(大岡信) 씨다. 그는 1998년 11월 5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서 왕인박사의 와카 [매화송]을 그의 칼럼(折々の歌)에다 인용, 해설까지 하면서, 이 와카를 작자 미상(讀人しらず)이라고 써놓았다. 한일친선관계를
생각하면 할수록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인식 상황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아 마음이 아프다.
여기서 1500년 전 왕인이 일본 최초로 지었다는 와카[매화송(난파진가)를 함께 음미해 보기로 한다.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
고대 일본 왕족이며 귀족들은 누구나 이 왕인의 노래를 [아버지의 노래]로 외우며 붓글씨를 썼다고 한다.
일본 각지에서는 지금도 그 당시의 목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근년 발굴된 것(1998. 11)은 도쿠시마(徳島)의 간논지(觀音寺) 유적에서 발굴된 7세기 왕인의 목간이다.
[만요슈](萬葉集)와 [가이후소](懷風藻)
만요슈(萬葉集, まんよらしゅら, 만엽집)는 ‘와카’(和歌, わか, やまとらた)의 시가(詩歌)들을 모은 일본최초의 고대 시집이다(이하 [만엽집]으로 지칭함).
[만엽집]은 모두 20권으로 엮어져 있으나 편자(編者)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 684∼757)를 편자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 출생 미상∼785)가 권 17부터 권 20까지의 마지막 부분을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엽집]의 성립 시기는 시가의 내용에 따라서 흔히 나라(奈良,710∼784)시대로부터 헤이안(平安, 794∼1192)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만엽집]이 성립된 시기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왕인박사의 [난파진가]이후, 서기 759년까지 기간의 와카(和歌)들이다. 즉 백제인 닌토쿠(仁德,5∼6세기)천황 이래로, 준닌(淳仁, 758∼764 재위)천황 때까지가 시대적인 배경이 된다.
*久松潛一, [和歌史] 東京堂, 1948. |
세분해서 고찰하면, 제1기인 덴무(天武, 672∼686 재위)천황을 즉위 시킨 진신란(壬申の亂, 서기 672년)까지는 전문적인 가인(歌人)은 없었으며, 다만 소박한 가요가 대부분이었다. 제2기는 나라경(平城京)으로 겐메이(元明, 707∼715재위)천황이 천도(서기 710년)한 시기까지로서, 와카가 완성된 최성기(最盛期)였다. 이때 가성(歌聖)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 7C 후반)가 활동했으며 와카의 5.7조 운률이 자리 잡혔다. 제3기는 쇼무(聖武, 724∼749)천황 당시인 덴표(天平) 5년(서기733)까지로서, 이 당시 저명한 가인들이 등장했다. 즉 야마베노 아카히토(山部赤人)를 비롯해서 오토모노 다비토(大友旅人, 665∼731), 야마노에노 오쿠라(山上憶良,660∼733) 등 쟁쟁한 가인시대였다. 제4기는 준닌 천황시대인 서기 759년(天平寶字 3년)까지이며, 이 시기에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 718∼785)가 등장했다. 그는 오토모노 다비토의 아들로서 [만엽집]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야카모치의 처였던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大伴坂上大郎女)도 재기 넘치는 일류의 여가인(女歌人)이었다.*
*高木市之助外 解說, [萬葉集](一), 岩波書店, 1970. |
[만엽집]의 구조와 뜻
[만엽집]에 수록된 단가(短歌, たんか)는 장가(長歌, ちょらか)의 반가(反歌, はんか)까지 포함해서 4200여 수이다. 장가는 260여 수이며 선두가(旋頭歌, せどらか) 60여수 등, 모두 4530여 수에 이르고 있다.*
단가는 와카의 기본체인 5.7.5.7.7의 31음(31문자)으로 되어 있는 와카를 일컫는 것이다.
장가는 단가(5구), 선두가(6구, 5.7.7.5.7, 7) 따위보다 긴 형식, 즉 7개 이상의 구수(句數)를 가지고 있는 노래이다. 장가는 5음구와 7음구를 5.7.5.7식으로 되풀이하면서 마지막에 7.7음구로 끝을 맺는다. 이 장가는 맨 뒤에다 반가(反歌)를 1수(5.7.5.7.7) 또는 2수 이상 곁들이도록 정해져 있다.***
[만엽집]의 만엽에 대해서는 몇 가지 풀이들을 하고 있다. 만엽이라는 글자 그대로 수많은 잎처럼 많은 시가 담긴 시집이라는 풀이와, 만세(萬世)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시집이라는 등으로 풀이도 한다.
만엽집의 시가는 모두 한자어의 詩이다. 즉 향찰식의 이른바 만요가나(萬葉假名, まんよらがな)로 썼다. 두 말할 나위없이 만요가나를 구사해서 최초로 와카를 지은 것은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王仁)박사였고, 그의 [난파진가](難波津歌)가 그 효시이다. 왜나라 왕실의 왕족과 귀족들이 왕인의 지도를 받으며 만요가나에 의해서 와카를 즐겨 짓게 됨으로써 [만엽집] 20권이 이루어진 것이다.
*身崎 壽, 〈長歌) [國文學] 1985, 11月號, 學燈社 |
[만엽집]의 시가들 중에서 빼어난 와카를 많이 지은 가인(歌人)은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로 평가되어 온다. [만엽집]에는 그의 시 457수가 전해오고 있다.
가인(歌人)이란 와카를 짓는 시인(詩人)의 호칭이다. 가인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를 존칭하기를 가성(歌聖)으로 부르고 있다. 가성으로 추앙 받는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는 백제인 왕인박사의 후손이다.*
[가이후소](懷風藻, 회풍조)의 구조와 뜻
일본 최초의 시가집인 [만엽집]이 만요가나의 한자를 써서 엮은 데 반해서, 한시(漢詩)만을 모은 시집은 [가이후소](懷風藻, 회풍조)이다(이하 [회풍조로 지칭함).
[회풍조]는 [만엽집]과 함께 일본 고대 시가문학의 쌍벽이다. [회풍조]는 서기 751년경에 편찬되었으며, 편자는 알 길이 없다. 나라(奈良, 710∼784)시대에 편찬된 이 한시집에는 모두 116편의 한시를 64명의 시인이 지었다.
시를 쓴 시인들은 천황을 비롯하여 왕자, 조정의 고관, 승려, 학자 등 그 당시 일본의 상류계층이었던 한국인들이다.
이 한시집 [회풍조]에는 ‘오언율시’(五言律詩)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한시는, 신라 사신이 일본에 왔을 때 일본 고관들이 지은 한시들이 실려 있는 점이다. 이를테면 일본 최고 대신이 신라인 사신들에게 향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조정의 고관들이 신라 사신들을 위해 우정 넘치는 한시를 지은 것도 여러 편이나 들어 있어 눈길을 모은다.
*山本健吉, [大和山河抄] 人文書院, 1972. |
백제인들이 신라인들 위해 엮은 최초의 한시집
한시를 지은 고관들 중에는 백제 왕족인 구다라노키미노 가즈마로(百濟公和麻呂) 조신이 지은 [승지산원택](勝地山園宅]과 요시다노 요로시(吉田宜) 조신의 한시 [서사언귀일](西使言歸日) 같은 작품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우선 그 두 한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회풍조]의 31번과 32번 작품이다.
(31) 百百濟和麻呂 宴 新羅客
勝地山園宅 秋天風月時
置酒開桂實 倒履逐蘭期
人是鷄林客 曲卽鳳樓詞
靑海千里外 白雲一相思
명승지의 두메 집에 가을이라 풍월이 좋아
술을 놓고 계수 향기 맡으며
신을 거꾸로 신고 좋은 친구 마중하네
당신은 신라사람 곡은 봉루사
청해 천리 밖에 구름 보며 그리워
(32) 吉田宜 宴 新羅客
西使言歸日 南登餞送秋
人隨蜀星遠 驛帶斷雲浮
一去殊鄉國 万里絕風牛
未盡新知趣 還作飛乘愁
서쪽나라(신라) 사절이 돌아간다기에 남쪽 뫼에 올라 가을을 전송하네
그대는 서역 나라로 떠나고 역마는 조각구름을 뚫네
한 번 다른 나라로 가버리면 만리에 견우도 끊기네
이제사 알게 된 정을 다하지 못한 채 우리는 또 멀리 떠나는 시름을 짓네*
위와 같이 [회풍조]에는 정감 넘치는 선린 외교의 한시들이 담겨있다. 백제인 덴치(天智, (662∼671 재위)천황이 남달리 한시를 좋아하고 장려 하였기에 왕족, 귀족, 고관들이 다투어 한사를 읊었다. 그리하여 궁정을 중심으로 많은 한시가 탄생한다.
위에서 살펴본 31번과 32번 한시는, 그 당시 백제인 왕족인 좌대신(左大臣) 나가야오(長屋王)의 저택에서 읊은 5언율시 이다.
나가야오는 덴무(天武, 672∼686 재위)천황의 친손자이다. 나가야오가 지은 5언율시는 [고민개원조](高旻開遠照)였다. 이 날의 향연에서 신라 사신을 위해 지은 한시는 7명의 고관이 지은 일곱 편이었다. 이어서 다른 날 지은 3명의 3편이 따로 있다.
그 당시 백제인 왕족 나가야오는 왜나라 왕실의 최고의 조신이었다. 24세의 젊은 나이로 등극한 쇼무(聖武)천황(서기 724) 원년에 좌대신이 되었으며 5년간 천황을 보필했다.
이 시기가 한반도는 통일 신라의 성덕왕(聖德王, 702∼736 재위)시대였다.
*文學博士.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敎授 許世旭 譯(長屋王, 장옥왕 684∼729) |
나가야오(長屋王)가 융숭하게 대접한 신라 사신은 살찬(薩贊, 8위) 벼슬의 김주훈(金奏勳, 金造近으로도 기록)이다. 김주훈 사신 일행은 서기 726년 5월 24일에 왜왕실에 왔다. 그 후 50일이 지나서야 신라로 돌아갔다. 7월 13일 김주훈(金奏勳) 등이 귀국했다. 그 때 새서(璽書, 천황의 도장을 찍은 문서)도 전했다.*
왜나라가 신라 사신 김주훈을 맞이하여 나가야오 저택에서 베푼 향연에서 지은 한시 10편이 [가이후소]에 실린 116편의 한시 중 10편이나 들어 있다는 것은 자못 주목할 만하다. |
그 당시 나가야오는 실권을 쥔 최고의 권좌에 있던 정치가일 뿐 아니라, 지식인이며 문화인으로서도 빼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통일신라와의 정치적 친선을 꾀하는 동시에 선진 신라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했던 것이다.
이미 겐쇼(元正, 715~724 재위) 여왕시대부터 적극적으로 신라와 사신을 교류하며 외교 친선을 도모하는 데 앞장선 것이 황친(皇親) 세력의 중심인물이던 나가야오였다.
신라가 당(唐)과 손잡고 660년에 백제를 치고, 잇달아 668년에 고구려까지 정복하며 강력한 통일국가를 한반도에 구축한 것이 당시의 백제인 세력의 왜왕실로서는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왜왕실로서는 당나라가 신라와 손잡고, 왜의 종실 국가인 백제를 무찌르도록 신라에게 동맹의 손을 뻗어준데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지정학적으로도 인접한 강력한 통일신라는 왜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신라는 성덕왕(서기702~736 재위)시대였고, 불교문화 융성기였다.
*[續日本紀] |
쇼무천황이 등극한 뒤에, 나가야오는 도요마로(豊麻呂)를 견신라사(遺新羅使)로 보냈다. 도요마로 대사(大使)는 신라인 하지(土師) 씨였다. 그는 서기 724년 8월 21일에 대사에 임명된 뒤 신라에 입국했다가 이듬해인 서기 725년 5월 23일에 귀국했다.*
그 다음 해인 서기 726년에 신라 사신 김주훈 등이 일본에 건너간 것이었다. 이때 나가야오가 신라 사신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며, 고관 10명이 각기 1편씩의 한시 10편을 읊은 것이 뒷날 [회풍조]를 장식했다.
*[續日本紀] |
이것은 주목할 만한 한시문학의 상호 교류였다고 하겠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당시 신라 사신들이 지은 한시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나, 그들의 한시 작품의 자취를 오늘날까지 찾을 수 없는 일이다. [회풍조]는 일본 최초의 한시집 이기에, 신라 사신의 작품이 수록되지 못했던 것 같다.
[회풍조]의 서문(序文)은 일본 국문학계에서 높이 평가되어 왔고, 일본 학자들은 그 서문을 논저를 통해 많이 인용해 왔다.
그 서문에는 왕인박사가 한국에서 건너와 왜나라 왕실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펼쳐 문맹을 퇴치시킨 것이며, 왕인의 후손인 왕신이(王辰爾)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559∼590 재위)이 왜나라 비타쓰(敏達, 572∼585 재위)천황에게 보낸 친서(까마귀 날개)의 내용을 슬기롭게 풀어낸데 대한 칭송 등, 고대 한국인들의 선진 학문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서문에는 왕인에 의해 유교의 학풍이 일게 된 것도 찬양하고 있다. 서문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의 군자의 말을 듣고, 또한 옛날의 고서를 살펴보면 신화시대며 초대왕이 나라를 세웠던 당시는 아직도 하늘이 이 세상을 창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여서, 인간 세상에 아직 문명은 일어나지 못했다. 진구황후가 정벌에 나서고 오진천황(5C말∼6C초)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백제의 아직기 선생이 말을 가지고 와서 오진천황이 말을 타게 되었다. 고구려에서 보내온 친서는 까마귀 날개에 붓글씨를 쓴 것이었는데 왕신이(왕인의 후손)의 뛰어난 능력으로 친서의 내용을 풀어 읽을 수 있었다. 백제인 왕인박사는 오진천황의 왕실에서 왕자들을 가르치는 등 어리석은 자들의 문명을 깨우쳐 주었으며, 유교의 경전도 모르는 자들을 잘 가르치며 앞장서서 이끌어 주었기에, 뒷날 왕신이는 끝내 그 가르침을 이어 받들어 비타쓰 천황의 왕도에서 펼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풍속에도 공자의 학풍을 진작시켜서 사람들로 하여 공자의 학문에 임하게 되었다. 성덕태자(574∼622)의 시대에 이르자 관위 12계를 정하고[17조 헌법]도 제정했다. 더구나 오로지 불교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시문(詩文)을 쓰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덴치 천황이 즉위하기에 이르러서 제왕의 왕업을 크게 벌여서, 유교의 가르침을 펴니 그 길은 천지간에 이르
고 그 업적은 천하에 빛나다. 이윽고, 풍속을 정비하여 잘하기 위해서는 학문보다 귀중한 것은 없으며, 덕을 훌륭하게 닦고 몸을 깨끗이 하는 데는 학문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느냐, 학문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이에 이르러 학교를 세우고 수재들을 소집했고 길흉군빈가(吉凶軍賓嘉)의 오례(五禮)를 정하고 각종 법도를 왕성하게 이끌었다. 법도, 전장, 법칙(法度, 典章, 法則) 등의 교과서는 넓고 커서 태고 이래로 아직 없었던 것을 이제 널리 펼치게 되었다.”*
*[懷風藻]의 序文 앞부분 |
백제 무령왕 가문의 왕성(王姓)은 ‘和화’씨였다
왕인과 같은 훌륭한 오경박사에 의해서, 미개했던 왜나라에 장차 시가 문학이 일어났고, 더 나아가 유교문화도 꽃피게 되었음을 칭송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왕인박사에 의해서 시가(詩歌)인 와카며 한시가 보급되었고 유교적인 정치, 문화, 사회 도덕률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국가의 명칭은 이른바 ‘야마토’ 이다. 야마토를 이두식의 한자어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한자어 글자들을 함께 써왔다. 즉 ‘야마토’(和, 倭, 大和, 大倭) 등인데, 가장 대표적인 표기는 ‘화’(和) 또는 ‘대화’(大和)이다.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교수는 ‘대왜’(大倭, 야마토)의 경우는 서기 720년에 관찬 역사책인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야마토’(倭)에다 큰대(大)자가 첨가되어 ‘야마토’(大倭)로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 일본을 ‘야마토’로 부르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서기 712년에 왕명으로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고사기]의 서문에 보면 ‘신왜천황’(神倭天皇, 가무야마토노 스메라미코토)이라는 말이 나온다. 왜국 최초의 천황으로 진무(神武)천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진무천황은 ‘가공적인 왕’이라는 것이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한편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초대 진무천황과 제10대 스진(崇神)천황, 이 두 사람을 동일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역사학자들이 제10대 스진천황부터가 실제 인물이라고 여기면서, “사실상(史實上)의 제1대 초대 천황은 스진천황이다. 진무천황은 과거에다 비쳐서 이상화시킨 존재”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는 “에가미 나미오 씨는 침략자인 스진의 침략 과정을 진무의 전설에다 뜯어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이에나가 교수가 신왜천황의 ‘왜’를 ‘야마토’ 로 읽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야마토’는 본래 백제 왕가의 성씨 화(和, やまと 또는 わ)에서 생긴 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왜(倭, やまと)도 ‘야마토’ 로 함께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고사기]는 서기 680년대에 처음 편찬되었다고 가와소에 다케타네(川副武胤) 교수가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서기 7세기 말엽에 이미 ‘왜’(倭, 야마토)라는 호칭이 등장했다는 설이 성립되기도 한다.
그 후인 서기 720년에 편찬된 두 번째의 역사책은 [일본서기]라는 관찬 역사서이다. 이 책의 신(神)의 시대의 앞부분에는 이두식의 한자어로 ‘야마토’(耶麻騰)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최초의 야마토는 ‘왜’(倭)였던 것이다.
*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 岩波書店, 1967. |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인 화(和)씨는 일본 왕실의 상징이며 그것을 보여주는 ‘야마토’(和) 비석, 쇼토쿠태자 사당(오사카). |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백제 왕족인 화씨 가문의 줌인 ‘화무’에서 ‘왜무’(와마이) 등의 표현이 생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궁정(宮廷)의 어신악(御神樂, 한국신들에 대한 궁중제사)에 있어서 한국식(韓風, 가라부리)은 존중되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어신악 제사를 거행할 때 연주되는 화무(和舞, 야마토마이)도 야마토(大和) 지방의 춤이라고 하지만, 본래는 한국인 씨족(氏族)인 화씨(和氏) 가문에 의해서 생겨난 춤이었다. 그런데 뒷날에 ‘화씨의 춤’(和氏の舞) 즉 ‘화무’(和舞)를 ‘왜무’(倭舞) 또는 ‘대화무’(大和舞)라고 쓰게 되었다.*
역시 일본의 국문학자 쓰치하시 유다카(土橋寬) 교수도 일찍이 “화무가 백제인 화씨 가문의 춤이며, 화무는 화씨 문중의 사당에 모신 조상신(祖上神) 제사(平野祭, 히라노마쓰리) 때와 궁중에서 천황이 한국신들에게 제사 드리는 어신악(御神樂) 등에서 공연된 춤”이라고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화무는 어신악에서 행하는 춤이며 그밖에도 궁중의 진혼제(鎭魂祭) 히라노마쓰리, 대상제(大嘗祭, 천황이 즉위한 해의 11월 첫 범날 등) 등에서도 화무를 춤추었다. 히라노신사(平野神社,京都市 北區 宮本町 소재)는 백제에서 온 화씨 문중의 씨신(氏神) 4좌를 모시고 있는 당이다. 4좌의 씨신 중의 제1신은 이마키신(今木神, 한국에서 오신 神)인 화씨신이다.
화씨 문중에 태어난 화씨부인(니이카사노히메, 新笠姬)이 고닌천황의 부인이 되었고, 간무천황의 생모가 된 데서부터 그녀의 가문(백제 왕가)의 조상씨 신인 이마키신을 헤이안** 으로 옮겨서 제사 지내게 된 사당이 히라노신사(平野神社)이다.”
*上田正昭, [日本神話] 岩波書店, 1970. **간무천황이 서기 794년에 왕도를 나라땅에서 교토땅으로 천도한 왕도로서, 지금의 교토의 헤이안궁(平安宮)은 그 옛 터전으로 유명하다. |
화무를 추기 전의 ‘아지메작법’(阿知女作法)은 신물(神物,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잡는 신내리가 시작되기 전에 거행되는데,
-. 왼쪽 신관(神官):“아지메 오, 오, 오.”(阿知女 於於於)
-. 오른쪽 신관:“오게”(於介)
라고 두 신관이 차례로 외치는 것이 이미 형식화되어 있다.
그것의 본뜻은 알지 못한 채, 진혼가(일종의 노래 형식의 긴 축문)에서 노래 한 수 한 수마다 처음에 “아지메, 오, 오, 오.” 하고 창하도록 되어 있다.*
*土橋 寬, [古代歌謠] 1959. |
한국어 특히 경상도 방언을 모른다면 일인학자로서는 해명하기 힘들어
쓰치하시 유타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아지메’, ‘오, 오, 오’, ‘오게’(於介) 등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엉뚱한 풀이들을 예로 들면서도 끝내 ‘오게’ 만은 무슨 뜻인지 알 길 없다고 답답해하고 있다.
한국어 특히 경상도 방언을 모른다면 일인학자로서는 해명하기 힘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축문은 완전히 한국어 발음의 한자어 표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이두이며 향찰과 같은 일본에서의 만요가나(萬葉假名) 등의 음(音)과 훈(訓)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금을 ‘야마토 고토’ 라고 부르는 데 있어서 ‘야마토’가 백제왕가의 화씨에서 왔다는 것을 차치하고, ‘고토’ 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 ‘금’(琴)을 가리키는 일본어 ‘고토’(琴, こと)는 한국 ‘거문고’(玄琴)의 고구려 때의 옛말 ‘곳’(kot, 琴)에서 일본말 ‘고토’(koto)가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저명한 음악학자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화금(和琴)은 왜금(倭琴)으로도 글자를 쓰며 이것을 ‘와곤’ 또는 ‘야마토 고토’라고 부르면서 신악(神樂)이며 제사에 써왔다. 화금(和琴)은 종래부터 일본 고대의 특유한 악기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 구조며 연주법으로 살필 때 ‘한국으로부터 전래한 게 아닌가’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하여 일본의 ‘금’인 화금(和琴, 倭琴)으로 호칭되어 왔는지, 또한 그것을 어찌하여 신사(神社)에서 사용해 왔는지에 관해서 그 설명에 괴로워해 왔었다.
오른손에 방울을 들고 신제사춤(韓神人長舞)을 추는 이세신궁의 무녀(巫女). |
우선 화금에 대한 요점을 밝히자면 몸체의 길이가 1미터 반쯤 되는 것도 있고, 현은 6줄이 평행으로 매어 있으며, 기러기발(琴柱)이 엇갈리게 놓여 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가늘고 긴 술대(琴軋, 금알)를 가지고 퉁겨서 연주한다. 특히 유별난 특징은 현을 금의 끝쪽에다 거는 방법은 한국의 거문고와 똑같다. ‘화금은 일본 고대의 금이 아니고 외국에서 건너 온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고 본다.
화금(和琴)을 신사(神社)에서 쓰는 곳은 진씨(秦氏, 신라인 호족), 아씨(阿氏, 백제인 호족) 등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제사 지내던 곳
화무(和舞, 야마토마이)는 일본 고래의 것이 아니며 한국에서 전래된 화씨의 춤(和氏の舞)이라고 하는 점에서, 그렇다면 화금(和琴)도 일본 고대의 금이 아닌 화씨의 금(和氏の琴)에서 생긴 명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화금을 신사에서 쓰는 곳은 야마시로(山城, 京都府의 동남부 지역)며 야마토(奈良縣)에 있는 수많은 신사인데, 그곳은 진씨(秦氏, 신라인 호족)며 아씨(阿氏, 백제인 호족) 등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제사 지내던 곳이므로 그것을 연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금’ 이라는 호칭은 나라(奈良, 710∼784)시대 이후의 것으로서, 옛날에는 단순히 ‘고토’(琴, こと)라고 불러 왔다. 내가 쇼와(昭和, 소화, 1926∼1989 재위) 천황 초기 무렵, 도요음악학교에서 음악사를 강의하던 무렵에, 청강생 중에 한국인 유학생이 있었는데, 나에게 ‘금은 고구려의 옛말로서, kot(곳)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다나베 교수는 [일본음악사](日本音樂史, 1937)를 비롯해서 [동양음악사](東洋音樂史, 1940), [일본의 음악](日本の音樂, 1947) 등 역저를 남겼으며, 1937년부터 ‘동양음악학회’(東洋音樂學會)를 창설해서 그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권위 있는 음악학자이다.
*田邊尙雄, [音樂から見た古代朝鮮と日本] 1973. |
‘화금’이 ‘화씨의 금’ 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부연할 것조차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詩歌)로서 왕인이 최초로 지은 [난파진가] 등의 시가도 화가(和歌) 즉 ‘와카’ 로 일컫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화가’ 라는 것도 ‘화무’나 ‘화금’ 등과 같이 곧 그 뿌리가 한국임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세신궁에서는 한신(韓神) 등 조선 신들을 모시는 천신제사 올려
고구려 가면무인 기악의 과정은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와 사이다이지(西大寺) 등의 자재유기장(資材流記帳)이며, 가마쿠라시대(1192∼1333) 초기의 고후쿠지(興福寺)의 고구려인 음악가였던 박근진(고마지카사네, [狛近眞] 1177∼1242)이 쓴 음악서 [교훈초](敎訓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2명의 행도(行道, 스님)가 절의 뜰에 나타나서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 다음에 미소년이 밧줄로 끌고 나온 사자가 춤을 춘 뒤에, 오공(저자주:高句麗公으로 볼 것), 가루라(迦樓羅, 상상의 큰 새)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서히 행진 한다.
-. 다음 연기자, 바라문은 속옷을 빠는 시늉을 해서 승려를 풍자한다.
-. 다시금 곤륜이 나타나서 대불전 앞의 등롱 부근에 나타난 어여쁜
오녀(저자주:高句麗女)에게 부채 따위를 흔들면서 말을 걸며 다가오지만, 금강역사가 곤륜을 때려눕히고 나서 춤을 춘다.
-. 그 후에 취호왕(醉胡王)과 취호종(醉胡從)이 추태를 보이면서 공연이 끝나면 전원이 행진하면서 물러 나간다.
고구려 기악(伎樂)은 바라문(불교가 생기기 전 인도 바라문족의 종교)의 수호신인 가루라가 출현하는 등, 불교의 교리와 언어며 동작을 음악으로 엮는 불교연극으로서 연출했던 것 같다.
새삼 밝혀 둘 것이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는 [동문통고](同文通考)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고사기전](古事記傳) 등에서 왕인을 다음과 같이 비아냥대고 있다
“왕인은 4세기 말엽에 백제로부터 왜나라에 건너왔다. 그런데 6세기에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 502∼549)가 처음으로 [천자문]을 지었는데, 그가 어떻게 그 책을 가지고 왔다는 것인가. [급취장](急就章)과 같은 [소학](小學) 책일 것이다.” |
딱할 정도로 기가 막힌 것은, 이들 학자(?)들은 최초의 [천자문]이 이미 2세기경, 위(魏)나라의 학자 종요(鍾繇, 151∼230)에 의해서 지어진 사실을 과연 알지 못했던 것인가.
그나마 다니가와 고도스가(谷川士淸, 1709∼1776)는 [일본서기통증](日本書紀通證)에서 지적하기를, ‘왕인이 종요의 [천자문]을 베껴 쓴 필사본을 일본에 가장 먼저 가져왔다’고 고증한 기록이 있다.
그 후 지지자들이 나왔다.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보다 앞서는 시대에 이미 [천자문]이 있었다는 사실이 [도다이지헌물장](東大寺獻物帳)*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756년에 光明皇后가 東大寺에 獻納한 聖武天皇의 遺品을 기록한 목록. |
왕희지가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203행이라고 기재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오진천황 때 왕인이 가져온 [천자문]은 위나라 종요의 것을 누가 붓으로 썼는지 알 수 없으나, 모름지기 ‘백제인들이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었다고 본다.*
고대에는 원전(原典)을 필사했었기에, 단 한 권인 원전은 구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왕인 역시 백제에서 종요의 [천자문]을 붓으로 베껴 써서 읽던 것을 왜나라로 가지고 건너갔을 것이다.
*黑川眞賴, [眞草千字文] 黑川眞賴全集⑥, 1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