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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석굴암(제2석굴암)을 아쉬운 듯 뒤로 하고 오전 9시 20분쯤 은해사로 행했습니다. 은해사까지는 30km 정도로 약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은해사에 대한 이야기는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이 미팅을 하러 갔다왔다는 장소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말은 많이 들었어도 실제로 가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번 순례부터는 불교방송의 DVD를 구입해서 버스를 타고 오가면서 예습도 하고 복습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올 때도 한국의 명찰과 암자라는 제목으로 이미 제2석굴암과 은해사, 다음에 들릴 거조암과 갓바위까지 어느 정도 예습을 한 상태였습니다. DVD로 본대로 은해사 입구의 거대한 일주문을 들어서자 길 양쪽으로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약 300년생 높이 10여m의 소나무들이 2km 가량 우거져 있으면서, 이곳에서는 일체의 살생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금포정(禁捕町)이라는 곳인데, 2007년에 금강송 1080주가 다시 심어졌다고 합니다. 날씨가 풀려서 그런지 봇도랑을 타고 얼음이 남은 그대로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들어가니까 하마비가 서 있고, 자그만 다리를 건너는데, 왼편에 거대한 얼음 폭포가 냇가를 향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겨울을 노래하며 우리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 폭포 아래 냇가의 빙판에는 들어갈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나올 때 보니 애들과 어른들이 엉켜서 썰매를 지치고 있는 모습에 어릴 때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은해사와 암자들>
<은해사의 거대한 일주문>
<소나무 숲길에 들어서면서 얼음 사이로 흘러내리는 봇도랑물>
<금포정 소나무 숲에서 바라본 은해사>
<은해사 들어가면서 본 하마비와 얼음 폭포>
(보화루에 이르는 작은 다리)
<은해사 입구의 얼음 폭포>
<은해사를 나올 때 본 얼음 폭포와 빙판 위의 참배객들>
은해사(http://www.eunhae-sa.org/)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31 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 지방의 대표적 사찰입니다. 그리고 교구 본사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며, 신라 제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 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며,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하고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합니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은해사라는 이름은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 정토와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또한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 치는 듯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 있다고 합니다.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 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 배치가 되어 있는데, 대웅전 앞에 있던 5층 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 배치 구조입니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 부분에 계단으로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웅전을 보수 공사 중이라서 그 모습을 완전하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400여년 되었다는 향나무만 겨울을 피해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수리하고 있는 대웅전은 극락보전으로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추사체라는 대웅전 현판은 보이지 않고 극락보전 현판이 비닐로 감싸져 있어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었고, 극락보전 안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 삼존불에만 참배를 하고 나왔습니다. 대웅전을 나서면 바로 지장전이 보이고, 여기도 들러서 참배를 드리고는 산령각으로 올라가서 절을 한 뒤, 뒷산으로 올라가서 은해사의 전경을 사진기에 담으려고 했지만, 한 장에 모두 들어가지 않아서 단편적인 모습만 몇 장 찍고 내려왔습니다. 이곳에서 사시 예불을 드린다고 하여 10시 30분까지 설법전에 모이라고 했는데, 다소 늦어버려 부랴부랴 설법전으로 향했는데, 혼자 뒤쳐져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맨 뒷줄에 앉으려고 하는데, 제일 앞줄에 마님이 벌써 자리를 맡아놓고 있어 그 쪽으로 가서 앉아 예불에 동참을 했습니다.
<은해사 보화루>
<수리 중인 극락보전 앞의 향나무>
<극락보전 안의 삼존불>
<극락보전 오른쪽에 위치한 지장전>
<지장전의 지장보살>
<밖에서 참배해야 하는 산령각>
<뒷산에서 바라본 은해사의 단면 (1)>
<뒷산에서 바라본 은해사의 단면 (2)>
<성보박물관 앞에서 바라본 공사 중인 극락보전>
<사시 예불을 드린 설법전 전경>
<가지런히 신발을 정리하신 분의 배려가 돋보이는 설법전 입구>
사시 예불은 한 시간 이상 엄숙하게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108배도 했습니다. 예불이 끝나자 은해사의 주지이신 돈관(頓觀) 큰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은해사는 기도, 선문, 교육 도량이라고 하셨고, 삼국사기 제32권에 보면 신라에 다섯 호랑이가 있는데,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태백산, 중앙의 (팔)공산이라고 하시며, 경인년 호랑이 해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절에 가보면 일본의 호랑이는 후지산을 일컫고, 한국의 호랑이는 공산이라고 하는데, 그 공산이 바로 팔공산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호랑이 해인 경인년의 정월에 팔공산 은해사를 108 고찰 성지 순례의 장소로 찾은 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법문이 시작되기 전에 유인물을 한 장 받았는데, 거기에는 법문(法門)과 일주문(一柱門), 사천왕문(四天王門)과 불이문(不二門) 그리고 법당(法堂)이 차례로 그려진 그림과 함께 각각에 대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사찰(절)의 법당까지 들어갈 때, 거쳐가는 3개의 문, 각각에 대해 어떤 자세로 그 문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나눠준 자료였습니다. 그 자료와 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들 법문(수미산문[須彌山門], 일본에서는 삼문[三門], 중국에서는 총문[總門])은 진리의 세계, 즉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법당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으로서 글(文)이나 귀(聞)로 통하지 않는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찰에 들어갈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시는 돈관 큰스님>
법문에 들어설 때는 항상 먼저 어떤 도량인지를 살펴야 한다고 하시면서, 대웅전이면 석가모니부처님, 극락보전이면 아미타부처님, 원통보전이면 관세음보살님, 시왕전이면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도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찰로 들어서기 위한 첫번 째 문인 일주문에서는 "인과응보(因果法)을 믿고, 십선(十善)을 닦으며, 기필고 성불을 하겠다(菩提心)"는 다짐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십선[불상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婬), 불망어(不妄語), 불기어(不綺語), 불악구(不惡口), 불양설(不兩舌), 불탐욕(不貪慾), 불진에(不瞋恚), 불사견(不邪見)을 지킴을 이름]이란 십악의 반대되는 말로, 십악은 입으로 하는 4악[거짓말(妄語), 지어내는 말(綺語), 욕설과 험담(惡口), 이간질하는말(兩舌)], 몸으로 하는 3악[살생(殺生), 도둑질(偸盜), 음행(邪婬)], 생각으로 하는 3악[탐욕(貪慾), 노여워함(瞋恚), 요사스런 생각(邪見)]을 이르는 것인데, 그 중에서 입으로 하는 정구업이 나오는 천수경의 첫머리인 "정구업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예로 드시면서 말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번 째 문은 사천왕문으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문이라면서, 법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문은 돌아가는 길이 있어도 이 문만은 통과하지 않고서는 법당으로 이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천왕이란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만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毘沙門天王)을 일컫습니다. 사천왕문에서는 "의심을 하지 않고(疑), 고집을 피우지 않고(見), 교만하지 않고(慢), 탐내지 않고(貪), 화내지 않고(瞋), 어리석게 살지 않겠다(癡)"고 다짐을 하는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덧붙여서 팔공산에 있는 사찰에는 사천왕문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 연유는 팔공산이 수미산의 중턱 위치와 같아서 신장이 사천왕의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법당에 이르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은 해탈문 또는 육환문(六環門)이라고 하며, 불이문에 이르기 위해서는 33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그 33계단의 의미도 33천과 연계 지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이문에서는 "모든 것을 다 베풀고(布施), 자기 역할을 다하며(持戒),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견디고(忍辱), 나날이 좋은 날이니 항상 노력하며(精進), 모든 번뇌를 잠재우고(禪定), 지혜롭게 살겠다(般若)"고 다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바라밀이라고 하시면서 지(知)식과 지혜(智)는 전혀 별개라고 하시면서 지혜롭게 살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불이(不二)라는 의미는 열 손가락을 펴시면서, 왼쪽 새끼 손가락부터 차례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세계이며, 이어서 오른쪽 엄지 손가락부터는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세계를 지칭하고,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면 이들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법당이라는 곳은 진리가 가득한 곳으로 법당에서는 "부처님(佛)께 참회하고(懺悔), 가르침(法)에 감사하며(感謝), 스님들(僧)께 발원(發願)"하도록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감사에 대한 일례를 드시면서 멀쩡한 이목구비와 사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내와 일찍 사별한 봉사 아버지의 자식 셋을 훌륭하게 키운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는 숙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 봉사 아버지의 소원이 30초만 눈을 뜨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그 중 10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보는 시간이고, 다음 10초는 사랑하는 아내의 사진이라도 보는 시간이며, 나머지 10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사는 우리들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시비분별을 하고 스스로 얽매인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고 또 반성을 했습니다. 그러시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에게부터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나 보다 못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염)와 더불어, 승(僧)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스님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주위의 수많은 모든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30분 정도의 법문을 듣는 것으로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거의 한 시간 가까운 말씀을 들으면서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무심코 일주문과 사천왕문 그리고 불이문을 지나 법당까지 거침없이 들어가서는 고작 법당에서 참배를 드리고 나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다음부터는 오늘 큰스님의 말씀대로 진리가 가득한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반듯한 마음을 가지고 사찰을 찾아야 한다는 큰 가르침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처음 설법전에 들어서시는 모습에서는 풀이 너무 들어간 빳빳한 가사장삼에서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엿보였지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오전 11시 30분부터 점심 공양이 시작된다는데, 단체 기념 촬영까지 하고 나니 12시 40분이 다되었습니다. 서둘러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비빔밥과 철 없이 나온 수박 한 조각 그리고 시루떡으로 시장기를 때우고 추사체 현판이 다섯 군데라고 들었기에 이리저리 찾아다녔지만 결국 한 군데 밖에 찾지 못하고, 나머지는 일타스님의 현판만 보고 박물관에 들리니 이미 일행들은 마지막 일타스님의 유물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은해사 현판과 불광이라는 추사체는 눈으로만 감상하고 나왔습니다. 이렇듯 은해사는 사찰(절)을 찾는 온전한 방도를 일깨워준 의미있는 도량이었고, 말로만 듣고 찾아올 기약도 없었는데, 108 고찰 순례에 참가하다보니 이런 행운도 있구나 하고 맑은 하늘을 향해 혼자 웃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유서가 깊고 거대한 사찰이었던 은해사 출신의 스님들을 살펴보면 또 다른 감회가 들 것 같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스님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 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 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 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습니다. 최근에도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고, 현재에는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 분의 스님들이 수행 중이라고 합니다. 또한 한국 불교 최고의 경율론 삼장법사과정인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10여 분의 석학들이 정진 수학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렀던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은해사를 중심으로 암자와 말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성보문화재를 수집하여 도난과 훼손을 방지하고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 전시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1996년 12월23일 착공하여 2003년 4월 19일에 준공하였고, 2005년 5월에 개관하였다고 합니다. 성보박물관은 건평 140여평의 전면 9칸, 측면 5칸의 전통 목조 건축 형식에 실내 전시 공간을 비롯하여 학예실, 수장고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보박물관 앞에서 돈관 큰스임과 기념 사진 촬영한 일행들>
앞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은해사에는 다섯 점의 추사체(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가 있는데,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조선의 영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 성규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업 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의 생부 김노경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되며, 헌종 13년의 대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불사 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누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뒤 고종 16년(1879년)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추사는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되던 헌종 6년(1840년)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년) 방면되어 다음 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옵니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는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고 합니다. 이렇듯 거듭 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화엄루각의 장엄함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되고,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 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추사의 보화루 편액>
<추사의 대웅전 편액(인터넷에서 가져옴)>
<추사의 불광 편액(인터넷에서 가져옴)>
은해사와 팔공산, 은해사와 추사, 은해사와 돈관 큰스님, 은해사와 금포정의 소나무숲, 은해사와 암자들이 겹쳐 보이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음 행선지도 아직 남아 있고,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찾아와서 조금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니면서 옛 선조들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닮아보려고 노력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다시 소나무 숲길을 따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일주문앞 주차장으로 나왔습니다. 차에 오르니까 마님이 주지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동을 받아 돈관 스님의 책을 한 권 샀다고 하면서 보여줬습니다. 책 제목은 '불교를 알고 싶어요'인데, 주요 내용은 경전이야기, 불/보살 이야기, 교리 이야기, 상징 이야기, 기도/수행 이야기, 신행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이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또한 월간 은해사(2009년 12월 호)라는 잡지도 한 권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 보니 은해사 합창단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은해사는 자연과 하나 되는 장묘 문화를 위한 수림장도 있고, 템플스테이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겨울 하늘 만큼이나 푸른 빛과 아름다운 향기가 느껴졌던 뜻깊은 은해사 순례였습니다.
<은해사 안내도에 있는 은해사 전경>
<은해사의 암자들>
은해사의 겨울
팔공산 자락에 몸을 감추고
운무의 춤사위속에 한반도의 중심을 잡으며
예나 지금이나 은빛 바닷 물결처럼 구도가를 부르고 있는
천년 고찰 은해사가 겨울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금강송들이 늘 푸르고
극락보전에 들기 전에 모든 짐을 내려놓으라는 보화루를 지나면
400여년의 세월을 맑은 향기로 맞아주고 있는 향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설하면서 자리를 비켜주고 있습니다.
원효와 의상, 지눌과 일연을 거치면서
선교의 총본산으로 우뚝 자리를 잡으며
지금도 대한 불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자임하면서
사방으로 백호를 거느린 위엄과 기상을 옅볼 수 있습니다.
한 곳도 아닌 다섯 곳에 추사의 영혼이 깃든 편액들이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아가려는 몸부림이 눈에 선하고
불도를 닦으려는 신심도 덩달아 시간 속으로 빨려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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