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군
별기군(別技軍)의 창설과 임오군란 발발
조선정부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서구문물을 수입하기로 하고, 1880년 12월에는 이에 걸 맞는 행정기구와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종래의 의정부와 6조(六曹) 제도를 폐지하고, 의정부 밑에 통리기무아문을 두고, 그 밑에 사대 ․ 교린 등 12 사(司)를 두었다.
군사조직으로는 5군영(軍營)제도를 폐지하고,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부국강병책으로 교관을 외국에서 초빙하여 신식 군사훈련을 실시하도록 계획하였다. 일본은 조선정부의 이와 같은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각종 소총을 기증하였다.
이 당시 고종의 특명으로 교련병대 80 명을 선발하여 무위영에 소속시켰다. 이를 별기대(別技隊) 또는 별기군(別技軍)이라 하였다. 또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된다 하여 왜별기(倭別技)라고도 하였다.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이 당시 호리모도(掘本禮造) 소위를 추천하여 신식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호리모도는 강화도조약에 따라 조선에 입국하여 일본공사관을 수비하던 장교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식 군대이다. 교련병대의 훈련은 1881년 5월 9일부터 서대문 밖 모화관을 가교장(假敎場)으로 사용하다가 창의문 밖 총융청 자리(세검정초등학교) 뒤에 남소영(장충단공원 부근), 하도감(下都監 :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교련병대는 조선군 최초로 사관생도를 모집하여 초급장교를 양성했던 일종의 사관학교였다. 1882년 2월경에는 140명으로 확충했고, 일반병사들은 약 300명이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포병·공병·보병·기병 등 병과별 장교 양성 교육일정에 따라 훈련함으로써 근대화된 미래 조선군의 주역을 지향하였다.
교련병대는 급료와 피복 등 모든 대우에서 구식 군대보다 아주 좋은 편이었다. 구식 군대의 시기 대상이 되었을 만큼 교련병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상당하였다. 호리모도 소위는 훈련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인 7월에 성과가 대단하다고 자랑하면서 병학교(兵學校) 설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이 해 8월에는 고종이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교련병대 교련을 감열하기까지 하였다.
교련병대가 특별히 우대된 것에 비해 구식군인들에 대한 정부의 차별대우가 극심하자 이에 분격한 구식군인들이 1882년 6월 5일에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 날 무위영 소속의 군졸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고, 인의동의 동별영으로 달려가 무기고를 탈취하여 각자 무기를 소지한 뒤 좌포도청(종로 3가 단성사 자리)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동료를 석방하고,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던 우포도청과 전옥서(서린동 24번지) 감옥을 습격하여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서대문 밖에 있던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그 근방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공사관을 습격하고, 다른 일대는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하여 척신(戚臣)들의 저택을 파괴하였다.
또한 하도감의 교련병대를 습격하여 교관으로 있던 호리모토 소위를 비롯한 일본인들을 살해하였다. 6월 10일에는 수천 명의 난군들이 창덕궁에 침입하여 피신해 있던 민겸호․김보현을 참살하고, 명성황후 민씨를 찾았으나 궁녀로 가장한 명성황후는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1873년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던 흥선대원군이 다시 등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관제를 복귀하는 등 수라장이 되었던 서울은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한편 청국은 조선의 내란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오장경(吳長慶)이 육·해군 5,000 명을 거느리고 1 차로 서울에 들어와 하도감에 진을 쳤고, 이어 두 달 후 원세개(袁世凱)가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오장경과 합세하였다.(*)
구식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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