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라기도를 하는 이유는?
아비라기도는 왜 하는 걸까?
아비라기도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아비라기도를 처음 도전한 어느 젊은 보살이 툴툴거렸다.
"스님, 아비라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힘들기만 하지 법신진언(法身眞言)을 하는
내내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겠고... 그래서 재미없어요."
순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내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비라기도를 해보라고 반 명령(?)하듯 말한 건 나였기 때문에 재미없어 하는 이 보살에게
조금이라도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 줄 일말의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느 보살은 '도대체 왜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보살은 아비라기도 기간 중 하루를 동참했었다.
평소 다니는 절에서 기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닐 터인데도 이 아비라기도는 참 생소하고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던 모양이다.
다양한 기도법들 가운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왜 이런 방법으로 기도를 해야 할까?'라고
의문을 크게 갖지는 않는 것 같다.
업장소멸이라던가, 원하는 바가 성취될 수 있다는 등의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비라기도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을 강하게 갖는 것 같다.
아비라기도가 정말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아비라기도는 왜 힘든 것일까?
그것은 단연코 장궤합장(長跪合掌) 자세 때문일 것이다.
왜 장궤합장이라는 힘든 자세를 취하고서 법신진언을 불러야 하는지...?
편히 앉아서 해도 될터인데...
아비라기도가 일반적인 기도와 다른 것은 108배와 법신진언과 능엄주로 되어 있다는 구성의
독특함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신진언을 할 때 평범한 자세가 아닌 고통이 수반(隨伴)되는 장궤
합장 자세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해 본 사람은 그 누구도 이의(異議)를 달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어느 젊은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은 왜 아비라기도를 하려고 했는가?"
그 보살 대답하기를,
"치열(熾烈)함에 빠져보고 싶어서요. 이번에는 저와 타협하지 않고 해야겠다고 스스로 약속을
했답니다."
난 속으로 '어쭈, 평소에 기도를 꾸준히 해오더니 제법이네'라고 생각했다.
이 보살은 아비라기도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 보살 말대로 아비라기도를 하면 치열해 지지 않을 수가 없다.
치열(熾烈)이란 불이 타오르는 모양을 말한다.
불이 그냥 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성난 사람마냥 거세게 맹렬하게 집어 삼킬 듯이 타오르는
것을 두고 '치열(熾烈)'이라고 한다.
내 속의 공부에 대한 불길이 평상시에는 좀처럼 활활 타오르질 않는다.
늘 되풀이 되는 일상의 것들 속에서는 더 이상 어떤 자극도 없다.
익숙해진 것들을 통해서는 풀어져 가는 나를 조일 수 있는 긴장(緊張)도 없게 된다.
그래서 공부(기도)를 할 때 나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 어떤 '조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 조임이 바로 장궤합장이라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그 장궤합장이라는 조임을 통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난 현재의 내 정신상태가 어떠한지 그 현주소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이 정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쩔쩔 매는구나'라고 하는 자신의 의지나
인내력을 파악할 수가 있게 된다.
2. '이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나의 정신은 사방팔방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다니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내 정신을 온전히 수습(收拾)하기란 참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내 정신의 현재 상태라는 것이다.
내 정신이 고통이라는 긴장 속에서도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평상시의 정신상태에서는 얼마나 제멋대로이겠는가?
이렇게 극심한 상태에서도 내 정신은 제멋대로 노닐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궤합장을 하면서 법신진언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딴 곳으로 뛰어가려는 내 정신을 법신진언의 소리에 묶어 두려는 것이다.
장궤합장을 하고 호흡을 일정하게 하면서 내가 내는 법신진언의 소리 이 모든 것에
나의 정신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계속하여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는 주체인 '나'를 강하게 인지하고 움켜쥐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의 주체의식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다.
주체의식이 강해진다는 것은 내 삶이라는 장(場)에서 내가 주인(主人)으로서 중심(中心)을
잡고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하필 법신(法身) 진언(眞言)일까?
법신진언을 하면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된다기에 그런 것일까?
어느 진언치고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는 진언은 하나도 없다.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
난 일단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되건 말건 그건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소멸될 일이 있고 성취될 일이 있으면 관여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다.
문제는 소멸이 될 수 있게, 성취가 될 수 있게 만들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내 속에 깃들어져 있으면서도 제 역할을 100% 다하지 못하는 보물이 있다고 한다.
그 보물을 일컬어 법신(法身)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참 나'라고 하기도 하고,
'주인공'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법신이 본래의 나라고 한다. 그런데 왜 참 나인 법신이 100%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누적되어 온 좋지 않은 습기(習氣), 즉 욕심을 비롯한 갖가지
번뇌망상이 법신을 덮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좋지 않은 습기(習氣)들을 제거해 나갈 수 있다면 법신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主人)으로서 당당하게 모든 것과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장궤합장이라는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내 속의 법신을 깨우기 위해 법신진언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 그것도 치열(熾烈)하게.
이것이 아비라기도의 주된 이유라고 본다.
법신진언의 파장(波長)을, 진동(振動)을 내 안에 가득 채워 내 속의 못된 습기(習氣)들을
떨쳐내고 본래의 나인 법신이 온전하게 회복(回復)되도록 하기 위해 그 힘든 장궤합장 자세를
하고 치열하게 집중해서 불러대는 것이다.
몇 파트 해보고서는 도대체 왜 아비라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너무 쉽게 포기한다 라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다.
성철큰스님께서 하라고 하셨을 때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우리 수준에서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지라도.
불자(佛子)들 애 먹이시려고 일부러 힘든 방법을 제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힘들고 고생스럽더라고 참고 견디며 끝까지 해보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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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천배도 해보고 아비라기도도 접해보고서 이제 시작이지만 성철스님께서는 분명 이유가 있으시다는것을~~~부처님의 가피는 분명 있으십니다..도반님들 믿고 행해 보십시요^*^참 나를 찿아 자기하고의싸움을~~작게는 산을 오를때는 힘들어도 정상에 오르면 그 기쁨과 자신감과 행복을 느껴보신분들 많으시겠죠??건강하시고 많이 웃는 행복한 나날 되십시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그동안 궁금했던 아비라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흡법에 따라 꼭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