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로구 북촌의 역사인물 찾기
◇ 박규수(朴珪壽 : 1807 ~ 1876) : 종로구 재동 83
- 조선 후기의 문신, 개화에 앞장 선 인물
1848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1866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배 제너럴 셔먼호(號)사건을 매듭짓고, 할아버지 박지원의 영향을 받아 실학(實學)과 개화사상에 밝았다. 그는 고종 때 프랑스와 미국군대의 침입을 겪으면서 천주교 관계 책을 읽고, 사회를 고쳐야 한다는 시대에 앞선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조정에 외국과의 교류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우의정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 박영효 등을 모아놓고, 실학사상과 서양의 사상을 알리는 한편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맺도록 강력히 주장하였다.
◇ 손병희(孫秉熙 : 1861~1922) : 종로구 가회동 173-3
-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노백린(盧伯麟 : 1875~1926) : 종로구 계동 1번지
- 한말의 독립운동가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육군 정령(正領)에 임명되어 한국무관학교의 교육국장·교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에서 활약하다가 군대가 해산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朴容萬) 등과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군사훈련에 힘썼고,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軍務總長)을 맡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운동에 종사한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여운형(呂運亨 : 1886~1947) : 종로구 계동 140-44
-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고, 언론 활동,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남겼다.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다.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건준이 박헌영 등의 활동으로 좌경화되고, 미군정이 활동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에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여운형 선생은 조선 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세력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한 연대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가장 포용적인 입장이었던 동시에 일반 대중과 국론 통합을 우선시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1947년 7월 19일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韓智根 : 본명 이필형)에게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 김옥균(金玉均 : 1851년~1894년) : 종로구 화동 260
-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운동(洋務運動)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의 지원응 얻어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일으킨 정변은 청나라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직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조선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다.
청일 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
◇ 맹사성(孟思誠 : 1360년~1438년) : 종로구 삼청동 35-119
- 조선 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청백리
조선전기 예조참판,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로 관직을 시작한 이래 조선 건국 후 예조의랑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07년(태종 7)에는 진표사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으로서 수행했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이후에도 조정에 중요한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고 전해진다.
◇ 성삼문(成三問 : 1418~1456) : 종로구 화동 1
- 조선 전기의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홍성에서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났느냐?”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서울에서 그가 살던 곳은 현재 종로구 화동 23번지 정독도서관 부근이었다. 세종 29년에 과거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이에 참여하여 공로가 많았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고 계획하다가 잡혀서 처형되었다.
◇ 송진우(宋鎭禹 : 1890~1945) : 종로구 원서동 74-1
- 정치가, 독립유공자, 언론인.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동아일보』를 이끌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해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 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하였다.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12월 30일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 이준(李儁 : 1859~1907) : 종로구 안국동 148
- 독립운동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
조선 고종 때의 대신이다. 독립 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으며, 일본의 황무지 개척을 저지하기 위한 대한 보안회, 공지회 등을 조직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사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 행위를 세계에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 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 이상재(李商在 : 1850~1927) : 종로구 재동 83
- 한말의 정치가·사회운동가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복역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을 준비했다.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기독교도가 되었다.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 조선일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여,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백인제(白麟濟 : 1898 ~ ?) : 종로구 가회동 93-1
- 외과의사, 백병원 설립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경성의전에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죄로 10개월 옥살이를 하고 퇴학을 당하였다. 출옥 후에 조선총독부와 경성의전의 유화 조치에 따라 복학하여 결국 전학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의사 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8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의 주임 교수가 되었다. 1941년에 경성의전 교수직을 사직하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정식 개업하였다.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1946년까지 5년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1946년 12월 17일에 한국 최초의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설했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출발할 때 제2부속병원장 겸 제3외과 교실의 주임 교수를 맡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 고희동(高羲東 : 1886~1965) : 종로구 원서동 16
- 일제강점기 「금강산진주담폭포」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그리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 후 10년 만에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 서양화적 수법을 가미한 풍(風)을 개척하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냈다.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한국민주당에 가입,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을 지냈다.(*)
첫댓글 77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더욱더 귀중한 자료입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교수님, 감사합니다.